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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서원을 찾아서 - 회재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

허영꺼멍 2014. 11. 17. 10:24

 

 

 

옥산서원(사적 제154)

 

지방마다 각기 다른 풍습으로 인하여 건축문화도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지만 서원의 건축양식은 우선 기본적으로 정문에 누각을 세우고 들어서면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중앙 건물인 강당과 제향공향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옥산서원도 여느 서원과는 큰 차별화는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 자계천의 계곡물을 서원 내부로 끌어 들이거나 공간이 밀폐된 폐쇄적인 느낌이 들 만큼 좁게 건물과 건물을 잇고, 담장 밖 공간과 쉽게 통하도록 협문을 열어 둔 것 또한 옥산서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옥산서원

  

역락문-무변루-오른편 동재(민구재), 왼편 서재(암수재)-강당(구인당)-내삼문(체인문)- 사당 체인묘- 전사청-사당 왼편 신도비, 사당 오른편 경각과 문집판각을 두고 있으며, 민구재 뒤편으로 관리사와 고직사, 포사, 마굿간을 갖추고 있다.

▲ 옥산서원 유물전시관            

▲ 옥산서원 사주문 너머 고직사

                  ▲ 옥사서원 담장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옥산서원은 이언적 선생이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난 선조 5(1572)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 등 유림에 의하여 묘우를 세우며 서악의 향현사로부터 위패를 옮겨와 모셨다. 그 후 관찰사 김계휘(金繼輝)가 계정하여 선조 7(1574) 자옥산(570m) 자락에 있다하여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역락문을 열다.

 

▲ 옥산서원 출입문 역락문

 

▲ 한석봉의 글씨 '역락문'

 

 

                         ▲ 역락문 입구에 있는 향나무

◀ 역락문 안쪽 500년 된 향나무

 

亦樂門(역락문)을 열고 들어서면 無邊樓(무변루)가 있으며, 그 사이에 도랑을 파고 물길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다. 곧장 흘러가는 물이 잠시 서원의 어느 한 공간에 머물거나 할 연못도 없다.

 

역락문만 나서면 자계천을 만나는데 굳이 서원 안으로 왜 물길을 끌고 왔을까? 혹 담양 소쇄원 유산곡수처럼 담장 아래 물길을 터고 유생들의 마음을 씻어 내리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역락문 담장 가까이 오백년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노거수 향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청춘을 자랑하며 서 있다.

 

 

무변루에서

 

無邊樓(무변루)에 오르는 계단은 병산서원처럼 통나무를 깎아 내걸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넉넉함이 묻어 있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무변루 제일 안쪽 창문 위 끝이 없는 누각이란 의미를 가진 한석봉 글씨 無邊樓(무변루)’가 걸려 있다. 현판 옆에 부기된 글에는 "靡欠靡餘 罔終罔始 光歟霽歟 遊于太虛 ,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며 기록되어 무변루에 오른 사람에서 깨우침을 주고 있다.

 

▲ 강당에서 바라 본 무변루

 

▲ 역락문에서 바라 본 무변루 뒷편     

▲ 무변루 오르는 통나무 계단

            ▲ 측면에사 바라 본 무변루

 

무변루에서 옥산서원을 한눈에 만날 수 있다. 정면으로 구인당과 동재(민구재)와 서재(암수재)가 좌우 배치되어있다. 다른 서원에 비하여 무변루에서 동재, 서재 그리고 강당인 구인당까지 거리가 매우 좁고 사방을 틀어막은 느낌이 들 만큼 건물을 가까이 두고 있는 특징이 있다.

 

▲ 무변루 현판

 

무변루에 오르면 막혀 있는 느낌이 강하다. 경치를 즐겨야 할 계곡 방향에 판문을 만들어 놓아 폐쇄적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판문을 열어 제친다 하여도 양쪽 방이 가려 놓아 시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본래 무변루는 납청루(納淸樓)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의 남긴 뜻에 맞지 않다하여 주돈이의 무변풍월(無邊風月)을 따와서 무변루로 개명하였다.

 

 

 

동재와 서재

 

옥산서원은 역락문을 거쳐 무변루를 지나 강당건물인 求仁堂(구인당)을 향하며 그 중간 좌우에 동재와 서재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있다.

 

▲ 서재(암수재)                               

                                  ▲ 동재(민구재)

 

민구재는 "을 구함에 민첩해야 한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가 머물던 곳이며, 어둠을 닦는 서재인 암수재는 후배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암수재 뒤 협문을 내고 은행나무를 거쳐 계곡을 쉽게 찾도록 해 두었다.

 

 

구인당

옥산서원 현판을 내건 강당 건물 구인당(求仁堂)은 마루 양쪽에 각각 방을 두었지만 창문이 없다. 창이 없다는 것을 두고 한눈을 팔지 말고 학문에 집중하라는 의미라 한다. 구인당 우측은 양진재(兩進齋), 좌측은 해립재(偕立齋)라 한다. 구인당은 명종 5(1550) 이언적(李彦迪)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와 구인재가 되었으며, 현판은 조선 선조 때 명필가였던 한석봉(1543~1605)이 썼다. 현종 4(1838) 화재로 한차례 소실되지만 이듬해 복원하였다.

 

▲ 옥산서원 강당 '구인당'

 

성종 22(1491) 경주 양동마을 명문 양반가였던 양민공 손소(1433~1484)의 서재였던 서백당에서 출산이 있었다. 손소의 외손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바로 오늘 여행의 주인공이다. 외가에서 출생한 이름은 적() 이였지만 31세가 되던 중종 16(1521) 중종은 명을 내려 ()’자를 추가하여 언적(彦迪)이 된 것이다.

 

어린시절 외삼촌 밑에서 자라며 성리학을 수학하는 외삼촌 손중돈의 영향을 받는다. 중종 3(1508)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박씨가 혼사를 하지만 아들이 없어 사촌이던 이통(李通)의 아들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두며, 서자로 이전인(李全仁)을 두었다. 중종 7(1513) 생원시에 입격 후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하던 중 중종9(151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된다.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 후 기묘사화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관직을 사양하고 경주 삼성암에 머물지만 중종은 거듭 상경을 독촉하였고 적()이였던 이름을 왕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지방 부사로 외직을 자청하다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인종을 가르치면서 사헌부 장령을 겸하였고, 중종 23(1528)에 성균관사성을 거쳐 중종 25(1530)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 구인당 좌측 해립재                          

                             ▲ 구인당 우측 양진재

 

 

중종 26(1531) 김안로(金安老) 정계복귀가 논의되자 반대하면서 결국 좌천을 거쳐 왕세자 사부인 점을 감안하여 유배를 면하는 대신 파직을 당하자 고향 경주로 내려와 혹시 자신 때문에 여강이씨 집안에 화를 미칠 것을 염려하여 독락당을 짓고 첩거하였으며 이때 측실을 얻었는데 서자 이전인이 태어난다.

 

중종 32(1537) 김안로가 사사되면서 다시 조정으로 복귀 그리고 여러 관직을 거쳐 중종 34(1539) 왕세자를 가르쳤고,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을사사화로 당시 사림파 축줄 과정에 추관을 맡으며 소극적이였다하여 문제가 생겼고 명종 1(1545) 병으로 사직 상소하여 낙향을 하게 되지만 을사사화 당시 추관을 맡았던 일에 불만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고 명종 2(1547)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북도 강계로 귀향길에 오른다.

 

 

유배된 지 7년이 되던 명종 8(1553) 1130일 중용구경연의를 집필 하던 중 향연 63세에 병으로 유배지인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사망하자 근처 가매장을 하였고 서자 출신 이전인(李全仁)1212일 시신 운구를 시작하여 다음해 2월 고향에 도착하여 홍해 달전리 도움산 선영에 안장하였다.

 

▲ 구인당 정료대. 구인당과 동재 사이에 어둠을 밝히는 정료대 하나 당당하게 서 있다.

   

옥산서원 강당에 내걸린 편액. 앞에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 글씨이며, , 뒷면 구인당은 한석봉 글씨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유배생활을 통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저서로 구인록(求仁錄)’을 남겼는데 옥산서원 강당 이름을 대표 저서를 따와 구인당(求仁堂)으로, 석봉 한호의 글이며, 옥산서원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한석봉 글씨 '구인당'

 

▲ 구인당 안쪽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으로 아계 이산해 글씨이다.

 

옥산서원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옥산서원의 편액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른다. 옥산서원에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보이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구인당 안에서 바라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 였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쓴 편액이 있다. 큰 편액 뒤로 또 하나의 옥산서원 편액이 있다. 앞서 있는 편액보다 작은 글씨로 아계 이산해(1539~1609)가 쓴 최초 편액으로 옆에 구액모게(舊額摹揭)’ , 옛날 글씨를 베껴 쓴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 된 영문일까? 아마도 화재로 소실 될 당시 간판 일부가 남아 있었거나 원본이 있어 복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 구인당에서 바라 보는 무변루 앞에 최초 현판이 내걸려 있다.  

 

                 ▲ 정면 추사 김정희 간판에 적혔있는 글

             '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賜.

 

옥산서원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옥산서원의 편액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른다. 옥산서원에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보이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구인당 안에서 바라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 였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쓴 편액이 있다.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1786-1856) 글씨이지만 처음부터 내걸렸던 편액이 아니다. 편액 옆 작은 글씨가 있는데 '만력갑술사액 후 260년 기해실화개서 선사(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賜) 즉, 선조 7년(1574) 사액 이후 26

6년이 지난 가해년(1839) , 선조 7(1574) 사액 이후 266년이 지난 기해년(1839) 화재로 소실되고 중건하여 다시 헌종이 하사한 편액이라는 것이다. 국내 서원중에서 두 번 편액을 하사받은 보기 드문 경우이다.

 

▲ 구인당에서 바라보면 정면 무변루와 좌우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하고 있다.

 

참조: 두 개의 현판을 찾는 사람들이 안쪽 현판을 찾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없다며 되돌아서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숨겨진 현판은 어디에 있을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현판이 걸려 있어야 하는 건물 중심에 있는 것이고 바깥에서 보듯 안쪽에서 같은 시선으로 보면 바로 보인다. 바깥현판 바로 뒤에 현판이 있기 때문이다.

 

제향공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들어 설 수 없는 제향공간으로 약간의 경사를 두고 높은 곳에 만들었다. 양쪽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고 중앙을 향하는 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 본래 삼문의 중앙문은 말이 지나가도록 좌우 문보다 높게 만들었다.

 

▲ 제향공간으로 들어서는 삼문인 체인문

 

제향공간으로 들어서는 외삼문을 체인문(體仁門)이라 한다. 안쪽 사당에는 화재 이언적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가 있으며,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며, 평상시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외삼문에서 오른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도비와 신도비각

 

선조 10(1577)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조선시대 문신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짓고 글씨는 조선 중기 문신이던 아계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썼다 전하며, 본래 서원 앞 계곡 주변에 세웠으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서원 안으로 옮겨왔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 이다.

 

 ▲ 신도비각 그리고 비를 짊어지고 있는 거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는 옥산서원 내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명종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람과 관료로 동방오현(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통하여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책을 보관하는 경각

 

옥산서원은 국내 서원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지만 곧 복원한 후 거듭되는 많은 민란과 전쟁을 통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데 전쟁 당시 인민군 지휘부가 옥산서원을 점령하였지만 옥산서원의 많은 유물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유물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의 노력은 "김부식 삼국사지 원본 9(보물 제525), 이언적 집필 회재선생문집(보물 제586), 국내최고 오래된 활자본 정덕계유사마병목(보물 제524), 해동명적 2(보물 제526), 기타 1천여 권의 문집 등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냈다.

 

▲ 통풍을 위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경각

 

옥산서원에서 전해지는 책이 무려 2302,197권으로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유생이 머물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 귀속된 전지가 600두락이 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유생의 수를 얼핏 집계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옥산서원 앞으로 대지 3,500, 전답 2600, 임야 35정보 등 부자가 부럽지 않은 서원이다.

 

 

 

옥산천 용추계곡

 

옥산서원에서 공부하다 지치면 옥산천으로 나와 열기를 식히던 곳이 옥산서원 앞에 있는 옥산계곡이다. 지방하천 2급수로 옥산천은 물이 맑고 암반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목 숲이 그늘을 만들어 작은 무릉도원의 세상을 펼쳐 놓고 있다. 회제 이언적 선생은 이곳을 세심대라 하였다. 정조 때 이곳에서 초시도 치렀다하니 결코 가벼운 공간은 아니다.

 

▲ 용추폭포 위 암반을 따라 꾸불꾸불한 물길이 이어지다 폭포를 만나 떨어진다.

 

 

 

 

 

 

 

 

 

옥산서원 앞 계곡은 펑퍼짐한 암반층이 펼쳐져 있으며, 물길은 너럭바위를 타고 흐르다 짧은 폭포구간에서 떨어진다. 제법 깊고 주변 숲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는데 그 위로 통나무를 올려 반대편으로 가도록 길을 터놓는데 제법 높다. 이언적은 살아 생전 이곳을 찾아 마음의 고요를 느꼈을 것으로, 마음을 씻는다는 洗心臺(세심대)를 바위에 새겨 놓았으며, 폭포수 옆 계곡 암반에는 龍湫(용추)라고 새겨놓아 사람들은 용추폭포, 용추계곡이라 부른다.

 

옥산서원 주변 풍경

 

▲ 옥산서원으로 들어서는 길목

 

▲ 옥산서원 편액

 

▲ 경각 아래서 눈이 딱 마주친 고양이

 

▲ 유물전시관에서 바라 본 모습으로 문집판각과 고직사가 담장 너머 보인다.

 

▲ 서원 뒤에서 바라 본 전경. 사당-강당-무변루 순으로 기와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 서원 옆 산자락에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있다.

 

▲ 세심마을에 2013년 벽화를 그려 놓았다.

 

▲ 옥산서원을 빠져 나온 후 주변 마을 뒷산

▲ 옥산서원 진입로 논 근처에 있는 멋진 소나무 세그루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은 국내 알려진 서원 중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부족하여 아예 계곡을 서원 안으로 끌여 들인 독특한 서원으로 주변 산들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곳이다. 숲과 계곡 그리고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독락당까지 산책하며 걸어가 보는 길에서 앞서가고 있는 이언적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 까 싶을 만큼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되는 서원이다.

 

 

 

1편 옥선사원에 이어 2편 독락당으로 찾아갑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daum.net/okg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