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유학의 총본산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
퇴계 이황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에 돌아 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종되었다.
▲ 도산서원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었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사액(賜額)하였다. 1970년에 정부에서는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아곡, 주자서절요, 심셩후론,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제향공간 상덕사에서는 매년 춘.추 음력 2.8월에 향사를 한다. 향사를 하는 날이면 일반인의 참례를 할 수 있다. 선조 3년(1570) 퇴계 나이 70세로 12월 8일에 계상서당에서 눈을 감았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선조 7년(1574) 해동주자라 일컫는 이황(1501∼1570)의 학덕을 추모하고 유생을 교육하기 위해 유림이 앞장서서 창건한 무사석계층 서원으로 홍선 대원군 서원 철폐령 당시 철폐령으로부터 피해를 입지않은 47개소 서원 중 한 곳이며, 400종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 이황의 유품이 보존하고 선조8년(1675) 사액을 받은 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았다
▲ 2012년 11월 사진. 현재 도산서원 공사중으로 일부 건물이 가려져 2012년 사진으로 전경을 올립니다.
도선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퇴계 이황을 모신 사액서원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것으로 퇴계 이황(1501-1570)의 위폐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여 후학을 양성해 온 곳이다. 영지산을 뒤로하고 동취병, 서취병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선조가 이름을 내렸고, 편액은 동왕 8년(1575)에 석봉 한호가 썼다. 이 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의 대상으로 지정되어 건물을 보수하고,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을 신축하여 퇴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도산서원 소유의 고서 1300여종 5000여 책과 퇴계문집을 비롯한 목판 총37종 2790판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서원입구에서 공간
도산서원에는 누각이 없다. 대신 넓은 공간을 두고 나무를 심고 운치를 즐기는 낙동강변 공간을 두고 있다. 도산서당 앞으로 자연발생 암벽지역으로 동쪽 산기슭을 천연대, 중간을 곡구암, 서쪽을 운영대라 불렀다. 서원하면 안동시 병산서원 만대루를 떠 올릴만큼 서원에서 빼 놓을 수 없지만 이곳은 도산서당이 먼저 들어선 이유에서인지 누각이 없다.
▲ 2014년 11월 서원입구 전경. 단풍이 말라가고 있다.
서원 초입에 들어서면 천광운영대라는 절경을 감상하는 곳이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퇴계 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 서쪽을 운영대라 불렀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연비려천 어약우연)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는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돌고 돈다. (천광운영공배회)라는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도산서당 일대를 엄숙한 수도의 장으로 꾸며 천리의 묘용을 깊이 사색하고 자연의 심오한 참뜻을 깨우치기 위해 조성한 자연체험장이다.’
▲ 천연대로 가는 오솔길 |
▲ 천연대 앞 천광운영대 비석 |
▲ 운영대에서 바라본 시사단 |
천연대는 정면 시사단을 바라보는 정면 벼랑 위 언덕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퇴계 선생께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하시던 곳이다. [시경] 중의 하늘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 (연비려천 어약우연)에서 인용하여 천연대라 이름하였다.’ 오늘날 천연대에서 조망되는 시사단은 당시 없던 것으로 사후에 생겨진 것이다.
▲ 도산서당 앞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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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
안동호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역으로 변한 곳을 높게 단을 쌓고 그 위에 상징적 비석을 세워 놓았다. 시사단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천연대에서 바라 본 시사단 |
▲ 천연대로 향하는 벼랑길
얼마전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였다. 다들 왜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 재현을 하는지 의아하였을 것이지만 그만한 사연이 있다. 시사단은 지방유형문화재 제33호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강 건너편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 관원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御題)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228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壇)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의 자리를 표 해두고 있다.’ |
당시에 생각도 못할 특별과거시험장이였던 것이다. 평소 정조는 퇴계 이황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던 중 지방 사람을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시험을 치루는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로 당시 정조가 직접 채점하여 11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한다.
▲ 운영대에서 바라 본 시사단
도산서당 & 농운정사
도산서원 건물이 독특한 것은 바로 도산서당과 서원이 하나의 공간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은 57세가 되던 명종 12년(1557) 터를 장만하고 명종 13년(1558) 집을 짓기 시작하여 명종 16년(1561) 만들었다, 퇴계 이황은 명종 12년(1557) 대제학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 거처 할 공간으로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숙소인 농운정사를 짓는다. 훗날 사후 자신을 기리는 서원이 바로 도산서당으로부터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도산서당으로 방을 완락재, 마루를 암서헌이라 불렀다.
도산서원 내 자리한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직접 설계하고 명종 16년(1561) 만든 건물로 서당에 머물며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담장 사이로 난 유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도산학당이있으며, 거처하던 방을 완락재(玩樂齋), 마루를 암서헌(巖栖軒)이라 부르며, 마당에는 연못을 파고 정우당이라 불렀다.
▲ 연꽃을 심기위해 만든 '정우당' |
▲ 대청에 내걸린 간판 '암서헌' |
▲ 서당 앞에 자리한 우물 '몽천' |
정우당은 도산서당 완락재(玩樂齋) 앞에 있는 사각형 연못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름과 같다. ‘퇴계 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서당 앞에는 오늘날 초미니 연못과 식수터, 정원을 두었는데 연못은 정우당(淨友塘)이며, 샘터는 몽천이다. 그리고 담장을 터고 몽천 위쪽 산기슭에 평소 좋아하던 매화를 비롯 소나무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국화를 심고 그곳을 절우사라 부르며, 편 편한 바위를 반타석(盤陀石)이라 하였다. 몽천은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다.
▲ 농운정사 뒷편 하고직사.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생전에 조성한 도산서당 일원과 농운정사 뒤편으로 사후에 서원 건물이 들어섰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공(工)”자 문양의 건물을 짓고 동편 마루를 시습제,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불렀다. 방문당일 농운정사는 공사중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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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당 뒷편 매화원 전경.
퇴계 선생이 임종을 준비하며 매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겨라하며 마지막 말이 ‘매화분에 물을 주라’ 이었다 한다. 그 매화분이 뭐 길래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었을까? 바로 그 매화는 관기 두향이 풍기군수로 발령받아 떠나는 날 준 사랑의 증표로 평소 끔찍이도 사랑하여 매화를 노래한 시가 백여 편에 달한다.
관기 두향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다. 퇴계 나이 48세에 관기출신 18살 두향을 곁에 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문과 거문고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두향은 평소 매화를 좋아하였고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첫부인을 사별하고 아들을 잃은 시기라 두향에게 정을 느끼면서 10개월간 사랑하게 되지만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자 관기 두향을 데려가지 않고 풍기로 떠났는데 그 후 21년간 두 사람은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한다. 두향은 퇴계선생이 떠나자 관기에 빠져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찾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을 살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4일간 걸어와 죽은 후 만남을 가졌고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전하며, 당시 매화분이 도산서원 입구에 대를 잇고 있다 한다.
▲ 역락서재 |
▲ 역락서재 현판 |
연락서재는 퇴계선생 이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당시 제자 사성 정지헌의 부친이 아들을 취학 시키면서 특별히 지어준 건물로 퇴계 선생의 친필 현판을 내걸었다.
강학공간에 들어서다.
강당으로 들어서는 진도문을 중앙으로 오른편에 책을 보관하는 동광명실을, 왼편에 서광명실을 두었는데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도산서당과 서원이 하나로 되면서 도산서당의 책을 보관할 서고 공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통풍과 함께 습기를 피하기 위해 공간을 들여 올린 누각형식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서광명실 |
▲ 동광명실 |
▲ 퇴계선생이 쓴 현판
광명실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이다.’
▲ 도산서원 강당건물인 전교당
진도문으로 들어서면 좌우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중앙으로 도산서원 강당 건물인 전교당과 동재로는 오른쪽 박약재, 서재로는 왼쪽 홍의재를 두었으며, 전교당은 도산서원 강당으로 명필가 한석봉이 쓴 편액이 내걸려 있다.
▲ 전교당
▲ 한석봉 친필 도산서원
도산서원에 전교당에 걸려있는 도산서원 현판은 진품이 아니라 가품이다. 진품은 2009년 보관을 위해 유교박물관에 보관전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진품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선조는 한석봉을 불러 맨 끝 글자부터 반대로 쓰게 하였는데 원(院), 서(書), 산(山)을 적을 때까지 어디 내걸 현판인지 몰랐는데 ‘도(陶)’를 쓰면서 도산서원 현판을 적는다는 사실을 알고 손이 떨려 현판 좌우방이 기울었고, 도(陶)자의 갈고리(阝)가 떨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도산서원 선비문화체험 |
▲ 전교당 측면 전경 |
▲ 불 밝히는 '정료대' |
도산서원 강당 건물인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을 추모하는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된다.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한존재)으로 구성되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쪽마루는 건물 뒷면의 대청 뒷부분과 온돌방의 오른편에만 설치하였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선조가 이름을 내린 현환의 글씨는 명필인 석봉 한호가 쓴 글씨라고 한다. 전면 좌우에는 부속건물로 동재인 박약제와 서재인 홍의제가 있다.’
▲ 서재 홍의재 |
동재 박약재 |
▲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던 동.서재
▲ 책을 찍어내던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장판각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면서 현재 장판각은 텅 비어 있다.
닫혀 있는 제향공간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제향공간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를 둘러싼 담장도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에는 흙담장이었으나, 도산서원 정비사업 때 변재의 돌담장으로 바꾸었다.
▲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상덕사는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도산서원의 제일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문을 두었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만든 돌로 4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의 맞배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전교당과 비슷하여 네모기둥에 공포를 두지 않은 간략한 굴도리집이며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꾸며 매우 검소하게 지은 건물이다.’
▲ 삼문 태극모양
▲ 참배를 하는 선비문화 체험 |
▲ 상덕사 참배 |
▲ 전사청에서 상덕사로 들어서는 협문 |
▲ 전사청 안쪽 제물을 보관하는 공간 |
전사청은 상덕사에 제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해 놓는 공간으로 재수청과 주고를 두고 있으며, 제향 공간 내 담을 두고 협문을 만들어 음식을 쉽게 옮기도록 해 놓았다.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일종의 사당인 상덕사는 퇴계선생의 위패와 제자 월천 조목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음력 2월 8일 향사를 올린다.
그 외 공간
▲ 살림집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에 고직사가 있다.
▲ 고직사에 본 기와
도산서원 마당에서서
도산서원을 나와 넓은 마당에 서면 오랜세월 자리를 지켜온 세월만큼 가지가 휘어 있는 노거수를 만나게 된다. 노거수 옆으로 가만 보면 우물 하나가 보이는데 우물 옆 표기된 이름이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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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공간 우물 '열정'
열정은 도산서원 도산서당 앞에 있는 우물이다. 우물은 보편적인 둥근 원형형태로 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각으로 좁게 파 놓은 것이 독특하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역경의 정괘 [정렬한천식]에서 의미를 취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 도산서원 마당에 서 있는 노거수 |
▲ 도산서원 출입문 |
범례: 1. 상덕사, 2. 전사청, 3. 삼문, 4. 장판각, 5. 전교당, 6. 상고직사, 7. 홍의재, 8. 박약재, 9. 서광명실, 10. 진도문
11. 동광명실, 12. 옥진각, 13. 하고직사, 14, 농운정사, 15. 도산서당, 15. 유정문, 17. 정우당, 18. 절우사, 19. 몽천
20. 정문, 21. 역락서재, 22. 열정, 23. 운영대, 24, 곡구암, 25. 천연대, 26. 시사단, 27. 탁영담, 28. 추로지향비, 29 석간대
퇴계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퇴계종택은 도산서원으로 2km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종택으로 본래 건물은 사라지고 1929년 선생의 13대 사손 하정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짐작하여 지금의 터에 세운 것이다.
▲ 태계종택 전경
퇴계가 마지막 거처했던 계상서당은 조선 명종 6년(1551) 만든 건물로 도산서당을 짓지 전까지 이곳 계상서당에서 10년간 제자를 가르친 곳으로 퇴계종택 입구에서 계곡 건너 산자락에 복원 해 놓은 곳으로 천원 지폐 배경 그림이기도 한 곳이다.
▲ 퇴계종택 내부
임종 사흘전인 선조 3년(1570) 12월 4일 조카 이영(李甯)을 불러 아들 이준(李雋)에게 말했던 유언과 같은 말과 함께 특별히 당부하였다. 사후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예장(禮葬: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는 것으로 국장 다음가는 국가장)을 하려하면 사양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조그마한 빗돌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뒷면은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으려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못하였는데 자신의 난고(亂稿) 가운데 숨어 있으니 찾아서 묘비명문을 간략하게 쓰도록 부탁하였다.
▲ 퇴계종택 오른편 출입문
평소 검소한 생활과 유언으로 남겨진 검소함으로 인하여 사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덤을 감히 손을 데지 못하고 있다. 혹시라도 퇴계의 유지를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스스로를 낮추고 검소함을 일상화 하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관료들은 어떠한가를 묻고 싶다. 과연 지금 국민의 세금으로 다들 검소함을 실천하고 계십니까?
도산서원 화장실 청소 좀 합시다. 주차료에 입장료까지 받는 도산서원 주차장 화장실에 휴지도 없거니와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화장실 휴지를 아끼고, 물을 아껴 청소를 안하는 것은 검소함을 유지로 받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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