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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탐방기 - 안동 병산서원 배롱나무꽃 피다.

허영꺼멍 2015. 8. 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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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 670-4      

안동 병산서원 배롱나무 꽃필적

 

병산 병산서원 전망대-파산정-병산서원-체화정

 

 

병산으로 오르다

 

▲ 병산에서 내려다 본 병산서원 전경

아쉽게도 배롱나무 붉은꽃이 만개하지 않았다.

 

무조건 지도를 검색하여 주소 한곳을 입력하였다. 그리고 가자는 방향데로 줄곳 따랐다. 네비입력 경북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 670-4’ 이곳이 어디냐면 병산서원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언젠가 맞은편에서 병산서원 배롱나무가 만개하였을 때 핀 모습의 사진 한 장을 본 후 베롱나무 꽃이 피면 꼭 한번 찾아 볼 생각이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 병산 중턱에서 바라본 낙동강 전경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에 보이는 병산은 차로 돌아가려면 병산서원에서 약 26km를 돌아가는 먼 곳이지만 그것이 여행하는 사람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는가. 그리하여 무작정 찾은 길목에서 병산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찾았고 그길로 산자락을 따라 올랐다.

 

 

 

 

 

푹푹찌는 무더위속에 병산서원을 거쳐 하회마을을 돌아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병산으로 오른다. 시작부터 경사길이 이어지며 주변에는 바위손이 군락을 이루며 언덕을 차지하고 있다. 혼자 이 낯선곳에 왔을까 싶어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앞서가던 팀들이 쉬어가는 모습에 안도를 하며 앞 사람의 흔적을 따른다.

 

병산서원 조망 제1 지점

 

▲ 제1 전망지점이 중앙에서 약간 측면으로 치우쳐 있다.

 

병산서원을 조망하는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으로 짐작되는 등산로가 제법 빤질빤질하다. 그렇게 뒷동산 정도의 병산 초입언덕을 하나 올라서니 능선길이 나오고 능선길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중간지점에서 병산서원이 조망된다. 처음 전망대는 약간 측면에서 조망되며, 첫 관측지점으로부터 조금 더 오르니 정면에서 관측 가능한 넓은 지점이 나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삼각대를 설치하였는지 주변에는 아예 풀 한포기 없다.

 

 

병산서원 조망 제2 지점

 

벼랑길 옆으로 길이 있어 따라 이동해 보니 막다른 산길이 이어지면서 병산서원을 정면에서 조망 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병산서원을 오가는 사람들이 한 눈에 들어서면서 서원 마루에 걸터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 듯 가깝다.

 

병산을 내려서는 길에 하회마을 방향으로 바라본다.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낙동강변 모래에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게 즐기며, 몇몇 사람들이 무거운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산 입구를 서성이며 물어온다. 병산서원 보이는 관측지점으로 가는 산길이 맞냐며...

 

▲ 병산에서 만난 들꽃

▲ 하회마을을 지나 병산서원으로 들어서는 길까지 조망한 모습

▲ 병산서원 앞 낙동강 모래변

▲ 하회마을 방향 낙동강 전경

▲ 낙동강 요트체험

▲ 병산서원에서 내려서는 낙동강 전경 

▲ 지방도에서 낙동강 너머 바라 본 하회마을

 

병산을 내려선 후 마주했던 병산서원을 향하기 위해 산을 돌고 돌아서 향한다. 인금리 낙동강변에서 금계리를 돌아 풍천면 그리고 하회마을을 낙동강 너머 바라보며 달려가는 길이 병산서원까지 약 25km 구간으로 40여분 소요된다.

 

 

파산정

 

914번 광덕교를 지나 왼편으로 접어들어 광덕교 아래로 내려선다. 강변가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서면 박동강변 배롱나무 활짝 피어있는 언저리에 정자 하나 사뿐 내려앉아 있다. (네비 입력: 경북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 5)

 

▲ 파산정 전경

 

파산정 담장을 따라 피어나는 베롱나무 만개하여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 낙동강변 광억교 지나 위치한 파산정은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온 정자이다. 파산정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조선 중기 류중엄이 건립한 정자이다. 처음에는 하회마을 입구 화천서원 맞은편 둔덕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자 이름은 하회마을 앞에서 낙동강이 파(. 땅이름 파)자처럼 흐르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전한다.”

 

 

 

배롱나무 화사한 담장너머 정자가 보이지만 문이 굳게 닫혀져 있을 뿐이었다. 정자에 관한 건축구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정자는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을 세워 중앙에 우물마루를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앞쪽에는 반 칸의 퇴를 내어 마루를 만들고 계자난간을 한 아담한 정자이다. 류중검*1538~1371)은 류공석의 아들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성품이 단아하고 청순하여 일찍부터 벼슬을 멀리하고 선비의 삶을 살았다.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동문수학 하던 남치리와 함께 퇴계 문도의 안자라 불렀다. 타양서원과 분강서원에 제향되었고 유고 일부가 파산일고에 전한다.

 

병산서원에서 여름을 만나다.

 

▲ 1. 복례문 2. 만대루 3. 동재 4. 서재 5. 정료대 6. 입교당 7. 장판각 8. 내삼문 9. 관세대, 정료대 10. 존덕사 11. 전사청 12. 고직사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서애 류성룡(1542~1575)이 선조 8(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1863)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홍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 병산에서 바라 본 병산서원 전경

▲ 복례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어린 배롱나무가 길을 연다.

서원 규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단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이고, 입고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고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틔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 하회마을을 지나 병산서원 입구 비포장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바라 본 낙동강 전경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2.6km 비포장도로 구간을 달려 간다. 하회마을 주차장에서 병산서원까지 약 6.4km 이며, 하회삼거리에서 병산서원까지 약 4.9km 이다, 병산길로 접어들면 약 2.6km 구간이 비포장도로이다. 옛 서원으로 찾아가는 길 초입부터 옛스러울 만큼 퍽 너털스럽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아천 산길을 따라 앞차다 달리면서 남긴 흙먼지를 따라 들어서면 병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 병산서원 첫 문인 '복례문'

만대루에서 바라보이는 산정상 가까이 기암괴석이 보이며, 뒷산은 화산(330m) 흐르는 물줄기는 화천인데 서원에서 바라보면 화산이 흡사 병풍을 두른 듯하여 병산서원이라 한다.

 

병산서원 주차장 앞으로 열려진 복례문을 지나면 긴 장축을 연상케 하는 만대루가 공간을 협소하게 할 만큼 가로막고 있지만 올라서면 전혀 다른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서원에는 류성룡과 셋째아들 류진의 위패를 봉안한 존덕사와 강의를 하던 입교당, 인쇄를 하던 장판각,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그리고 서원에서 머물던 학생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첫 대문인 복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대루로 오르기 전인 왼편 담장아래 사각형으로 조성된 작은 연못으로 이를 광영지라 부른다.

 

광영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 만대루 전경

복례문에서 계단을 딛고 오르면 서원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듯 늘어선 건물 밑으로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만대루라 한다. 만대루(晩對樓)에서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 라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말을 인용하였다 한다.

 

만대루에 오르면 과연 그러하다 할 만큼 병산 절벽 앞 흘러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정자에 올라 선 느낌을 준다.

 

넉넉함 또한 느낄 수 있을 만큼 서원에서 가장 긴 7칸 건축을 통해 많은 사람이 만대루에 올라 비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배례하였다.

 

 

▲ 만대루 전경(현재 올라갈 수 없다.)

옛 선조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 하였음을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제각기 자란 나무를 가공 없이 사용하여 삐뚤삐뚤하다. 계단도 통나무를 이용하여 전혀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덕분에 후손들은 건축미가 빼어난 병산서원 만대루를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 만대루 그리고 배롱나무

▲ 복례문과 만대루 사이 배롱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있다.

만대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이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대두보의 시 백제성루푸른 절벽은 저녘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 만대루와 병산서원 중간 공간 양쪽에 위치한 동재와 서재

 

19873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안동의 서남쪽 방향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안동하회마을과 인접한 조선시대 교육기관 이였던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본래 풍산유씨의 교육기관이던 풍악서당을 유성룡(1542~1607)이 선조 5(1572) 이곳으로 옮겨왔다.

 

▲ 병산서원

병산서원 현판에서 담대함을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의 모태는 본래 풍악서원으로 서애 류성룡 죽음 사후 제자 우복이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철종 14(1863)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9873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안동의 서남쪽 방향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배롱나무는 사찰과 선비들이 거처하는 공간, 무덤 등에 많이 심는데 스님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자라는 모습을 통해 세속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에, 선비는 청렴을 강조하는 의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꽃이 무려 100일간 피고지고를 거듭한다는 것과 7월 말부터 8월초 꽃이 만개하면서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 존덕사로 들어서는 입구 내삼문

▲ 내삼문 주변 담장에는 배롱나무가 피어있다.

태극 괘가 그려진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존덕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내삼문과 존덕사 사이 오른편에 관세대, 정로대가 자리잡고 있다. 존덕사 옆 담장에는 전사청이 있으며,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공간을 두고 제향영역이라 한다.

 

병산서원 제일 상단에 위치한 제향영역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제향 영역은 향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이자 제자인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판을 모신 존덕사가 있다.

 

류진이 이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좌우로는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서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도 이러한 까락에서이다. 또한, 강학 공간은 선비 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 데 비해, 제향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으로 장식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안내글에는 전사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과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서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의 동쪽에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음력 1~ 10) 사이의 날 중 천간에 정()으로 된 날)에 향사를 지낸다.”

 

▲ 2008년 조사 당시 380년으로 추정되는 배롱나무로

수고 3m. 나무둘레 0.85m 이다.

 

1607년 류성룡이 타개하자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 광해군 6(1614) 존덕사를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였고, 인조 9(1629) 셋째 아들 수암 류진을 같이 봉안,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으로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신문, 존덕사, 전사청을 갖추면서 정식 서원이 된 후 철종 14(1863) ‘병산(屛山)’이란 사액을 하사받았다. 그 후 홍선대원군은 전국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당시 병산서원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껍질을 다 벗는 독특한 나무특성으로 인해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의미로 절간이나 청렴한 선비를 상징하여 서원에도 심었는데 특히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1542-1607)과 셋째 류진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며, 대원군 서원철폐령에도 온전하게 보존된 47개 서원 중 한 곳이다. 6월부터 9월까지 약 100일간 분홍빛 흥건한 꽃 피우는 배롱나무(백일홍)가 서원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수령 380년을 훌쩍 넘긴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6그루의 배롱나무는 1614년 류성룡 셋째아들 유진 선생이 존덕사를 조성하면서 심은 나무로 2008년 경북도에서 희귀목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 병산서원 앞 낙동강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약 3.9km 걷는 산책길이 나온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을 찾아 왔다 잠시 머물다 되돌아 발걸음 했을 산길은 낙동강 물자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을 내 놓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병산서원 배롱나무가 점점 병들어 간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선비의 정신을 대변해 주던 배롱나무가 올해는 더 많은 가지를 통해 연분홍빛 꽃을 피워주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병산서원을 떠난다.

 

병산서원을 나선다. 안동 하회마을 입구를 통과하면서 잠시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굽어 볼까 생각도 하였지만 해질녘 어둠이 찾기전에 마지막으로 한 곳을 더 들러 보고픈 생각에 곧장 풍산으로 향했다.

 

 

 

쓸쓸한 모습으로 “체화정

 

▲ 체화정 주변에 배롱나무가 활짝 피어있다.

보통 정자는 산자락 또는 풍광이 좋은 높은 위치에 터 잡는 경우와는 달리 체화정에서는 독특하게도 평면 구성에 정자구조라기보다 살림집 대청구조이다. 뒤에는 한 칸의 방을 두고 양쪽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면서 턱없이 작은 공간이지만 최대한 활용하고자 세심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은 지혜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1층을 누각처럼 높게 올리고 불을 피워 온돌방을 데울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 체화정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진사 이민적(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해 마련한 정자이다. 순조 때 용눌재 이한오가 노모를 모시고 거처하기도 하였다. 정자 앞에 위치한 삼신선을 상징하는 3개의 인공연못이 정자와 잘 어울린다. 이 정자는 정면 3,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일반적으로 방 앞쪽에 퇴칸을 두는 경우에는 방보다 작게 하는데 여기서는 같은 칸수로 해서 3칸 마루를 배치하였다. 사면에 난간을 둘러서 연못을 바라보기에 적당하도록 배려하였다. 건립 당시의 형태가 잘 남아 있으며 특히 연못과 정자의 구성은 조형미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924 지방도가 체화정과 풍산천을 가로막고 있다. 하회마을로 가기 전 풍산버스정류장 입구에는 이민적이 만든 후 형제의 우애를 나눈 채화정을 도로변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 효종(1649~1659) 당시 진사 만포 이민적(1663~1744)이 세운 정자로 형 이민정과 함께 살며 우애를 나누던 곳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정자를 체화정, 그리고 채화정에서 내려다 보면 공간에 연못을 조성하고 삼신산을 상징하는 방장, 봉래, 영주 인공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후 체화지라 불렀다 전하며, 현판 담락재는 단원 김홍도 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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