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서원 |
| 서원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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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서북쪽에 돼지를 닮은 큰바위를 돈암이라 불렀다 한다. 돈암서원 앞에 서면 최근에 짓은 듯 보이는 2층 누각 산앙루(山仰樓)가 자리잡고 있지만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굳게 잠겨 있어 오를 수 없다.
서원 담장과는 다소 어긋난 위치에 있는 홍살문과 하마비 앞으로 주차장이 있다. 일단 하마비 앞에서 주차를 하고 걸어서 들어서 본다.
◀ 홍살문 옆으로 하마석이 비스듬하게 서 있다. |
▲ 하마비. 신성한 공간 또는 사찰과 서원 앞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하마석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
▲ 산앙루 전경
산앙루(山仰樓)는 2006년 복원 준공된 건물로 2층 누각형식을 하고 있다. 누각에 올라서서 돈암서원을 조망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지만 잠겨져 있는 누각을 어찌할까. 누각 현판이 정면과 뒷면이 각기 다른 모습이다. 두 개의 이름으로 현판을 더러 달아 놓는 옛 선인들의 지혜로움이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스쳐가려는데 현판이 똑같은 산앙루로 서체를 각기 달리하여 혼란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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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앙루 정면 현판, 산앙루 뒷편 전경 및 현판 글자체를 달리하였다. ▲ 연산돈암서원지비 |
▲ 외삼문에 내걸린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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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외삼문(外三門)인 입덕문(入德門)이다. 입덕은 중용에서 나온 말로 성인의 덕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배움을 향해 들어서는 첫 문으로 검정바탕에 흰 글씨로 크게 돈암서원이라 적은 간판을 내걸어 놓고 있다.
간판에는 둔암서원(遯巖書院)으로 적혀 있는데 돼지 돈(豚)자가 들어가니 아마도 달아날 둔(遯)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
들어서서 되돌아 보는 입구 3쌍의 주춧돌이 제각각이다. 사각형, 팔각형, 원형으로 서원에서 학문을 닦아 모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염원하는 흔적으로 보여진다. 정문에서 보면 돈암서원(遯巖書院), 들어가서 되돌아 보면 입덕문(入德門)이란 각기 다른 현판이 내걸려 있으며, 외삼문 옆으로 비석하나가 자리잡고 있는데 연산돈암서원지비(連山遯巖書院之碑)이다. |
▲ 입덕문 열고 바라 본 전경
입덕문을 열고 들어서면 직선으로 양성당과 양성당 뒤편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숭례사가 위치하며, 입덕문에서 왼편으로 응도당이 있으며 오른편으로 경회당이 있다. 응도당 옆으로 정회당이 자리잡고 정회당과 내삼문 사이에 장판각이 있으며, 양성당 뒤편으로 전사청이 있다. |
▲ 양성당 앞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에서 왼편이 정의재이며, 오른편이 거경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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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 홍살문, 정희당과 향나무, 원정비 |
돈암서원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서원은 선현을 봉사하는 사우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재가 결합된 사학을 말한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년)에 이곳에서 서북방 1.5km 떨어진 숲말에 건립되었으며,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다. 1880년(고종 17년)에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있자 현재의 이곳으로 옮겻자. 1866년(고종 3년) 서원 철폐령 이후에도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 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기호사림의 종장인 김장생을 주향하고, 그의 제자로 문묘에 제향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따라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은 물론 기호지방 전체에서 존숭 받았던 서원이다. 돈암서원의 주요 건물배치를 살펴보면, 입구에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고 최근에 건립된 서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외삼문, 유생들이 공부하던 응도당, 2기의 서원비, 거경재라 불리기도 하는 양성당, 내삼문, 사우가 배치되어 있다. 이 외에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인 정회당, 유생들의 기숙처였던 정의재, 황강실기, 사계유고, 신독재유고 등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는 장판각 그리고 전사청 등이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 한다. ” |
응도당 ▲ 정면에서 바라 본 보물 제 1569호 응도당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 였던 돈암서원 응도당이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고대 예서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廈屋制度)를 따라 인조 11년(1633) 지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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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569호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던 곳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1880년(고종 17)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서 지었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강학공간으로 사용하는 강당이 사당 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는 예는 드문 편인데, 응도당은 강학 공간에서 전면에 직각방향으로 틀어서 배치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장수강학의 성격을 가진 강당으로, 원래의 건물은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랐다 한다. |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누마루식 건물로 겹치마에 맞배지붕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며,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퇴칸처럼 달았다. 응도당은 기와에 씌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정희당 ▲ 정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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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당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정희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터에서 1954년에 옮겨왔다. 정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우물마루를 깔았다. ” |
장판각 ▲ 장판각
장판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장판이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한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레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 |
내삼문 꽃담 ▲ 숭례사로 들어서는 내삼문 꽃담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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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인 숭례사 내삼문 담장이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꽃담으로 꾸며져 있다. 지부해함(地負海涵) 즉,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이 모든 것을 포용하라는 의미이며,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하라는 공자의 말에서 널리 학문을 닦고 사리를 깨달아 예절을 잘 지킴이란 뜻이며,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성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때를 잘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단비와 같이 웃음으로 대하고 남을 편하게 해 주라는 뜻 등 기화로 형상화 한 글자가 네모박스에 위치하고 다음칸은 기와로 멋을 부렸다. 멋을 부린 곳은 담장 뿐만 아니다. 숭례사 기와 막새에도 한 포기의 꽃을 새겨 놓았다. |
숭례사 ▲ 숭례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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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숭례사로 오르는 계단이 매우 높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 숭례사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서원 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숭례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숭례사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우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양식에 주심포 양식이 가미된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4단의 가단을 쌓고, 그 위에 원형의 주초석과 둥근 기둥을 세웠다. 한편 측면의 3칸 가운데 전면의 1칸은 통칸의 퇴칸으로 시설하였으며, 문은 4분합의 띠살문을 달았다. 창방 위에는 화반형의 초각반을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측면의 박공널 밑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사당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공포의 짜임새가 큰 건물 못지않으며, 세부적인 조각에도 장식성이 강한 요소들을 응용한 것은 사당의 위계를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기호사림의 종장인 김장생을 주향하고, 그의 제자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 |
양성당 ▲ 양성당은 김장생이 낙향하여 만든 정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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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사당인 숭례사 앞에 자리한 독특한 배치가 눈길을 끄는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치마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 김장생 선생이 생전에 건축하여 강학을 하던 강당으로 고종 18년(1881) 이곳으로 이건 할 당시 대강당인 응도당을 옮겨오지 않고 대신 양성당을 옮겨와 동재와 서재 앞에 세우고 강당 역할을 하였으며, 후일 응도당이 옮겨오면서 위치를 달리하고 있다. |
▲ 원정비 |
▲ 원정비 앞으로 좌,우 동재와 서재가 위치하고 있다. |
돈암서원 원정비는 문화재자료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조선시대 중기 문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사계와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이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방형의 비 받침대에 대리석 비석과 비 머리가 서 있다. 이들은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 고향에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는데, 비문에는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와 치밀한 신독재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년(1669)에 세웠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옆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이 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년(1880)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때 비석도 옮겨왔다. 현재의 건물들은 비문에 적혀 잇는 건물 배치와 다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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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재와 거경재 |
정의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정의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으로 정의재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의재는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 거경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거경은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며, 유생들이 학습하던 공간이다. 거경재는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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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회당 옆 향나무, 전사청, 경회당 |
▲ 세월을 말해주고는 향나무
▲ 돈암서원 담장너머 본 전경 |
논산시에 위치한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은 대한제국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당시 보존된 서원으로 김장생(1548~1631)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돌아가신지 3년 후인 조선 인조 12년(1634) 만든 곳이 서원의 시초가 되었으며, 효종 10년(1659)과 현종 1년(1660) 두 번의 사액을 받은 곳이다. 오늘날 서원은 초기 임리에 위치하였으나 지대가 낮은 탓에 홍수 피해가 심하여 고종 18년(1881) 이건하였다. 서원에는 김장생 외에 효종 9년(1658) 김집(1574~1656) 추배, 조선 숙종 14년(1688) 송준길(1606~1672) 추배, 숙종 21년(1695) 송시열(1607~1689) 추배하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제사는 매년 2월과 8월 지낸다. 홍수의 피해를 피하여 배산임수 형국의 지형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지만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강당이 중심에서 벗어난 서쪽으로 기울어 있다. 돈암서원에는 보물 제1569호 응도당,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유경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원정비가 있으며, 사우. 양성당, 웅도당, 장판각, 정회당, 신앙루, 내삼문, 외삼문,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있다. |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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