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으로 여행. 필암서원
인종의 스승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
주차를 하고보니 눈앞에 삼연정과 부용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적 제242호 필암서원에 도착하였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오늘 찾아간 곳은 송강 정철의 스승이자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던 하서 김인후(1510~1570)를 추모하고 있는 필암서원이다.
▲ 심연정
▲ 홍살문을 중심으로 왼편 하마석, 오른편 은행나무 뒷편으로 확연루가 확인된다.
홍살문을 시작으로 확연루(廓然樓)를 만나게 된다. 서원의 외부 공간이지만 이 또한 예의를 갖추고 행동하는 공간으로 홍살문으로부터 왼편에는 말을 타고 들어 올 수 없는 하마석이 놓여 있는데 보통 비석에 하마석(下馬石)이라 표기한 것과는 달리 디딤돌을 놓아 가마에서 타고 내리는 것을 돕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200년 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Y자 형태로 서 있으며, 홍살문 정면에 정문 역할을 하는 확연루가 탐방객을 기다리고 있다.
▲ 태극문양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확연루
확연루 편액은 파란바탕에 흰 글씨로 우암 송시열(1607~1689) 글씨라 한다. 인종은 즉위 8개월이 되던 1545년 30세 나이로 병사하였고 명종이 보위를 물려받아 하서를 곁에 두려하였으나 하서는 정치를 떠나 고향 장성에서 칩거생활을 통해 후학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확연루의 의미는 확연대공(廓然大公) 즉, 거리낌 없이 넓게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라 한다.
▲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거나 탈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디딤돌을 하마석이라 표기하고 있다.
▲ 확연루에 들어서면 중심전각인 청절당이자 강당인 건물이 뒤로 보인다? 독특하게 북향을 하고 있다.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서원은 대부분 경사지역 높낮이를 이용하여 갈수록 높게 건물을 올린 것과 달리 평지에 터 잡은 곳으로 서원의 시작은 1590년 호남지역 유림이 모여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부터이다. 1597년 정유재란은 사당을 피해가지 않았고 사당이 소실되자 1624년 복원 그리고 현종 3년(1662) 하서의 고향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름을 ‘필암’으로 사액 승격되었으며, 물난리 피해를 피해 1672년 오늘날 위치로 이건 및 1786년 제자이자 사위였던 고암 양자징(1523~1594)을 함께 배향하여 오늘에 이른다.
▲ 임금이 하사한 묵적도를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과 오른편 계생비 그리고 뒷편이 위폐를 모신 우동사로 들어서는 문이다.
확연루를 시작으로 일직선상으로 선비들이 공부하고 모여 회의하던 강당인 청절당과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물던 오른쪽으로 동쪽 건물 진덕재, 왼편 서쪽 건물 숭의재가 좌우 배치되어 있으며, 이들 편액은 송준길의 글씨라 한다. 넓은 공간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있으며, 숭의재 앞으로 인조 임금이 하서 선생에게 하사하였다는 목죽도의 목판을 보관한 장경각이 있다. 장경각 현판은 정조 임금의 글씨라 하며, 진덕재 옆으로는 서원에서 제를 지낼 때 가축을 묶어 두고 검사하는 계생비가 있다. 삼문 왼편으로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을 두고 있다.
▲ 다른 서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경장각
경작각은 인종과 하서의 각별한 사연으로 인종이 손수 묵죽도를 하사하였고 그림 보관을 위해 경장각을 만들었는데 정조가 현판을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인종 세자 시절이던 1543년 하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게 된다. 세자는 ‘주자대전’ 한 질과 그림 ‘인종대왕묵죽도’를 건네게 되었고 후일 정조는 선왕 인종이 하사한 그림 보관을 위해 내탕금을 내려 만든 경작각을 통해 그림을 보관토록 하면서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을 내려 보내게 되었다 한다. 그 외도 이곳 서원 문서 일괄 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 계샹비. 묘정비
계생비.묘정비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계생비는 필암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은 비석이며, 제관들은 매어 놓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비석 옆면에는 “필암서원계생비”라 새겨져 있는데 송일중 선생이 썼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는 비석이며, 서원비라고도 불린다. 비석 뒷면 묘정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글을 짓고, 운용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 진덕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물던 동쪽 건물
▲ 숭의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물던 서쪽 건물
▲ 장판각. 하서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초천자문, 무이구곡, 백련초혜 등 목판 700여 매를 보관한 건물
▲ 필암서원 강당인 청절당
강당이자 중앙건물인 청절당은 옛 진원현 객사 건물로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에서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각자 한 것으로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쓴 현판이다. 서원 내 진덕재와 숭의재 역시 송준길 글씨로 알려져 있다. 강당 건물 필암서원 현판은 병계 윤봉구(1681~1767)의 글씨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액편액이라는 의미이다.
▲ 필암서원 사액현판
▲ 위패를 봉안한 우동사로 들어서는 삼문이 굳게 잠겨 있다.
▲ 경장각과 계생비 옆 담장 안쪽으로 장판각과 고직사가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맨 안쪽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과 고암 양자정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우동사로 편액은 주희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하며, 진덕재 옆으로 돌아 나가면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과 서원에서 일하던 노비 중 최고 책임자가 생활하던 한 장사가 제일 바깥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사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고직사라 하며, 고직사는 서원과 담장을 두고 직사, 창고, 행랑을 둔 독립 가옥으로 숭의재에서 돌아 나가면 된다.
▲ 내부에서 바라 본 확연루
▲ 확연루에는 현판이 안쪽과 바깥쪽 똑같이 내걸어 놓았다.
▲ 필암서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
▲ 필암서원 앞 광장
▲ 심연정에서 바라 본 필암서원 확연루 주변
▲ 재건한 심연정과 부용지
▲ 심연정과 부용지 측면 전경
태극문양이 선명한 확연루를 나오면서 옛 선비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누군가를 배향하고 그들의 행적을 배우며 따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개인주의로 무장하고 이기심과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웃과 상호간 소통마저 단절되어 있다. 살아가는데 정신적 지주로 삼을 그 누군가가 없다는 안타까움은 결국 인생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듯 하여 몹시도 씁쓸한데 가을바람은 애꿎은 은행잎사귀만 바람에 흩날리게 한다.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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