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도 사
통도사를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 아예 주차를 하고 걸어서 통도사로 진행하기로 한다. 차량으로 진입하다보면 통도사 진입로 솔숲을 눈으로 스쳐 갈 뿐이기 때문이다. 솔숲을 따라 매표소에서 약 1.3km 들어서면 부도군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양산천을 따라 오르는 솔숲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통도사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스쳐 오르면 석당간과 부도군이 기다리고 있다. 절집 방문은 해탈문을 지나 일주문을 열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주문에는 대원군이 새긴 "영취산 통도사"란 현판과 두 기둥 주련에는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 는 뜻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종찰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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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전경
통도사는 해탈문을 필두로 직선선상에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을 구성하고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통해 크게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영역을 이루고 있는데 상로전은 통도사의 핵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 중로전은 불이문에서 세존비각까지의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있으며, 하로전은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영역으로 세 개의 불전과 만세루가 삼층석탑을 애워싼 형식을 하고 있다.
영축산(1050m)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최초 봉안하면서 불지종가 국지대찰 영축총림 통도사로 신라 성덕여왕 15년(646년) 지장율사가 창건하고 당나라 구법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경책을 금강계단을 조성하고 봉안하였고 오늘날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로 한국 불교 최고의 종합수행도량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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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석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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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부도군
폐사지에 가면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석조물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석당간이다. 통도사 절집입구 부도군 앞에 위치한 석당간은 찾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만큼 법당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석당간과 중심법당이 멀리 있는 경우는 부석사 역시 그러 할 만큼 그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통도사 석당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 당은 사찰을 나타내거나 행사를 알리는 깃발로 이것을 거는 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지탱하기 위해 옆에 세우는 지주(기둥)를 당간지주 또는 철간지주라 하는데 대게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당간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석재나 철재로 만든 지주만 남아 있다. 당간을 받치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고려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
당간의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통도사의 석당간은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석당간 중에서 쇠로 만든 철당간으는 공주 계룡산 갑사에 있다.
석당간 앞에 있는 부도원은 통도사를 거쳐 간 역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가 모여 있는 곳으로 통도사 내 신성한 공간임은 틀림없다. 본래 통도사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월하 방장스님의 교시로 1993년 오늘날 위치로 모았는데 큰스님의 부도가 60여기, 비석 50여기이다. 통도사 부도원은 역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를 세워놓은 곳으로 부도밭이라고도 부르는데, 주로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안치한다. 통도사 부도원에 모셔진 부도와 부도탑비는 원래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3년 월하 방장스님의 교시로 이전하여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봉안한 것이다. 부도원은 상단에는 부도, 하단에는 부도탑비와 통도사 관련된 공적이 있는 분들을 기리는 각종 공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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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보박물관
성보 박물관에는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불교관련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불교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성보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회화적 불교회화전문 박물관으로도 불릴 정도로 다양한 자료를 많이 전시하여 불법의 우수성과 홍보에 그 목적을 다하고 있다.
▲ 통도사 일주문 밖 오층석탑
통도사에는 경내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오층석탑 2기가 있다. 1기는 대웅전과 관음전 중간 구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근대작품이며, 일주문에서 통도사를 통과하는 양산천을 건너는 공양간 못미처 아치형 다리를 건너 산속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언덕 위 자리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흩어져 있는 조각을 1991년 하종성스님의 교시로 복원하였는데 사라져 버린 4.5층은 새로운 석재로 보강하였다. 오층석탑 내 1층 탑신석은 옛 모습을 통해 감실을 두고 그 속에 경주 황룡사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수습한 불사리 2과를 봉안하였다.
통도사로 들어서다
통도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상로전 구역과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중로전 그리고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이 있으며, 대부분의 전각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각자의 공간에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통도사를 찾는 이들은 경내에 있는 12개의 큰 법당을 스쳐 갈 뿐이다. 통도사에서 만나는 공간을 살펴보자.
절집 방문은 해탈문을 지나 일주문을 열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주문에는 대원군이 새긴 "영취산 통도사"란 현판과 두 기둥 주련에는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 는 뜻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볼보종찰임을 알려주고 있다.
통도사는 해탈문을 필두로 직선선상에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을 구성하고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통해 크게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영역을 이루고 있는데 상로전은 통도사의 핵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 중로전은 불이문에서 세존비각까지의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있으며, 하로전은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영역으로 세 개의 불전과 만세루가 삼층석탑을 애워싼 형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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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
통도사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바라 보이는 범종각은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범종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 범종각은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건물의 초창은 1686(숙종 12) 수오대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현재의 범종각은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을 비치하였다. 불전사물은 조석의식에 사용되는 불구로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위하여,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목어는 2층은 2개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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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경남유형문화재 제194호)
통도사로 들어서는 천왕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극락보전은 통도사 건물 중에서 외벽에 풍랑을 헤치고 불법을 전하는 벽화가 잘 표현되어 있으며, 봄이면 앙증맞은 매화가 피는 곳이다. 경남유형문화재 제194호 극락보전 안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에 머물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1369년(공민왕 18)에 성곡대사가 창건하였고, 1801(순조1) 지홍스님이 고쳐 지은 후. 20세기 초에 다시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측면의 어칸에 출입문을 두는 점이 특징적이다. 건물의 뒤쪽 외벽에는 함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모습의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어 극락전의 건축세계를 잘 보여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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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불전, 극락보전 뒷편 토벽에 그려진 극락전의 상징인 반야용선도
야미타여래를 봉안하는 극락전은 아미타전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극락보전의 외벽 토담에는 극락을 찾아 떠나는 반야용선도를 비롯하여 사천왕상 등 그림을 그려놓았다.
▲ 영산전
하노전의 중심건물이다. 극락전과 약사전을 좌우에 둔 영산전은 통도사로 진입하는 첫 절집이기도 하며. 봄이면 통도사 매화로 유명한 공간이기도 하다. 하노전 중심에는 지금의 위치에서 1.5m 지점 언덕에 있던 신라 말기 3층석탑을 옮겨 놓았으며, 영산전 내부 벽면에는 보물 제1041호 영산전 팔상탱과 영산전 벽화 보물 제1711호 외에도 52점의 벽화가 남아 있다.
영산전 건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년)에 숭곡선사가 중건한 것이라 한다. 고려 초 이전에 처음 지은 후 숙종 30년(1704)에 송곡대사가 중창, 1713년 화재로 소실 후 다시 재건 후 1715년 단청을 올려 1716년 완성했다. |
▲ 보물 제1711호 영산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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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경남유형문화재 제18호 였던 영산전 옆 통도사 삼층석탑이 보물 제1471호로 승격되었다. 석탑 기단에서 불탑이 발견된 석탑은 총높이 3.5m 로 4장의 장대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잔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조성한 탑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이 석탑은 큰 받침돌 위에 2층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 신라 후기의 삼층석탑이다.
1987년 해체 수리 당시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약 1.5m 정도 옮겨져 극락전과 약사전의 중심축에 맞추어 복원하였다. 당시 상층기단 안쪽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고., 하층기단의 다진 흙 속에서는 소형의 금동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탑에 있던 배례석(1085년)과 함께 통일 신라 후기의 석조문화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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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전, 약사전 중심불 약사여래
극락전과 무주하고 있는 약사전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약사전은 중생의 질병을 고치는 목숨을 연장시키는 역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1369년(공민왕 18)에 성곡대사가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18세기 초 영산전을 중청할 때 함께 고쳐 지은 후 20세기 초에 다시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독존으로 석조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진 '약사여래도'는 1775년(영조 51)에 그려진 것으로 약사여래불과 함께 일광.월광 보살을 비롯한 약사십이신장상 등을 함께 그렸다.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가 주변 건물과 함께 처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건물은 18세기 초 중창과정에 고쳐 지은 후 20세기 초 다시 수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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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 관음전 내 중심불 관세음보살
통도사의 전각은 제각기 필요하게 배치된 독특한 모습으로 출입구가 각자의 전각에 따라 다른데 관음전은 다른 전각에 비해 공간이 뻥 뚫린 모습과 함께 앞에 석등 1기와 화촉대로 보이는 석조물을 두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관음전은 통도사의 전체 가람배치에서 중심축에 있으며, 대광명전, 용화전 등과 함께 중로전 구역의 중심전각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고 1780년(정조 4) 용파당 도주대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하였다 . 건물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벽화로는 보타락가산에 있는 관음보살과 남순동자, 32용신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이 표현되어 있다. 관음전은 낙가전, 원통전이라고도 하는데, 통도사 관음전도 1701년 이전에는 낙가보전으로 불렀다" 통도사 관음전은 2014년 대대적인 보수하여 현재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관음전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 후 정조 4년(1780) 도주대사가 중창을 하였으며, 법당 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벽화는 보타락가산에 있는 관음보살과 남순동자, 32응신을 상장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이 그려져 있다. 관음전은 낙가전, 원통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통도사 관음전도 1701년 이전에는 낙가보전으로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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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 관음전 앞 석등
관음전 앞에 위치한 석등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 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석등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올렸다. 그 위에 팔각의 기둥을 두었는데, 중앙에는 3줄의 띠 매듭으로 장식하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의 각 면에는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에는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고 꼭데기에는 보주를 놓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부동형의 팔각인 점, 화사석이 세로로 긴 사각형인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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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471호 봉발탑, 용화전 미륵불
봉발탑의 용도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는 독특한 석조물로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앞에 우뚝 서 있는 독특한 형상의 하고 있는 의문의 석조물이다.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며, 전체 높이 230cm로 봉발탑으로 불리고 있지만 탑이 아닌 발우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국내에서 확인된 불교 석조물 중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유일한 석조물이다.
고려시대 제작된 석탑으로 석가모니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하대 위에 간주와 상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육중한 뜨껑을 지닌 발우를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조형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봉발탑 앞에 위치한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1725년(영조 1) 중창하였다. 법당 내에는 통도사 전각 중 가장 큰 높이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 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외벽에는 화려한 탱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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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290호 통도사 중심법당 대웅전
통도사 중심법당 대웅전은 바라만 보아도 위엄을 느낄 수 잇을 만큼 장엄하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대웅전은 상로전 영역의 중심건물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이다.
건물 뒤쪽에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던이 있어 내부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646년(신라 선덕여왕)에 처음 지은 후 수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4(인조 22)에 우운대사가 고쳐 지은 것이다. |
대웅전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태로 내부의 기둥 매열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붕은 정자형을 이루고 있어 앞면과 뒷면, 옆면이 모두 정면처럼 보인다. 대웅전에는 건물의 다양한 성격을 반영하듯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특히 금강계단의 글씨는 홍선대원군의 친필로 유명하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계단 가운데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종 모양의 석조물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통도사를 세우고 절집이 자리잡은 산이 흡사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하여 통도사라 부르며,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통도사라 부르며, 금강계단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니 오늘날의 대웅전으로 정자형 법당 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 금강계단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은 대웅전에서 유리창 너머 바라본다하여 부처없는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금강계단으로 들어서면 신발을 바꾸어 신고 사리탑을 중심으로 사방 한바퀴 돌아 나올 수 있도록 이동순서를 정해 놓은 신성한 공간이다. 사리탑을 중심으로 기둥 하나 하나까지 불교적 색체의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불교의 진수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지장율사가 당나라 수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는 절을 만들고 진신사리를 받들어 모신 것으로 창건 후 단 한 번도 법등이 꺼진 적이 없는 사찰로 석가여래의 사리가 있는 이유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 것이며, 사리를 봉안한곳이 금강계단이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와 함께 지장법사가 당에서 모셔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 등을 가져와 일부를 통도사에 보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계단에도 많은 전설이 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있더니 두 번째는 두꺼비가 돌 위에 있어 함부로 열지를 못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계단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려 왔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 고종 22년 상장군(上將軍) 김공리생(金公利生)과 시랑 (侍郞) 유석(庾碩)이 군사를 시켜 돌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석함에 유리통이 있고 그 속에 사리가 네 알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며 불자의 불심에 따라 그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고 하며. 석종 위에 있는 부도의 여의주석 반석아래 움푹 팬 곳은 항상 물이 차 있고 금강계단 위로 날짐승이 날거나 주변에서 지저귀는 일이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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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진전 석가여래좌상, 명부전 지장보살상
통도사 응전진은 중심법당으로 부터 약간 비켜난 곳에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응진전은 1677(숙종 3)에 지섬대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내부에 봉안된 1775년의 석가야래도, 1926년에 나한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 이후 근대까지 수차례 불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매우 우수한 기법으로 섬세하게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였다. 건물의 외벽 측면에는 달마도와 나한도가, 내벽에는 아미타삼존도와 나한도, 백호도, 운용도 등이 각각 그려져 있다
통도사 명부전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짓고 1756년에 불에 탄 것을 1760년(영조 36) 춘파대사가 다시 지었다. 1887년(고종 24)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 해인 1888년 호성대사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명부전중수기에 의하면 1891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명부전이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통도사의 여러 건물 중 조선 시대 말기인 고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건축양식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법당 내부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사왕도를 모셔놓았다. 건물의 내.외부에는 수궁도와 삼고초려의 내용 등 조선 후기 유명한 소설류의 내용을 표현한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통도사 내 특별한 공간 '개산조당'
▲ 개산조당 삼문, 개산조당과 그 옆으로 세존비각 그리고 앞에 37조도품탑
통도사에서 특별한 공간은 대웅전과 관음전 대광명전 그 중심에 자리한 통도사의 창건주 지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절간 안에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중간 문을 높이 올린 솟을문 한 개산조당과 문 뒤에는 영정과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장보각으로 이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개산조당 앞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하는 37가지를 새겨 놓은 삼십칠 조도품탑이 있는데 때론 지장율사가 기대서서 깨달음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개산조당 앞에는 세존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1706년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석가여래의 열골사리비를 조성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새겨놓은 비석으로 나라가 곤경에 처하면 비석 뒤편에서 땀을 흘리곤 한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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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율사 영정을 보관하는 해장보각, 깨달음을 구한 삼십칠 조도품탑
중노전에 자리잡고 있는 개산조당은 이곳 통도사의 창건주 지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통도사 내 개별적인 공간으로 솟을문을 통해 진입하도록 해 놓은 통도사 내 톡특한 구역이다. 솟을문은 지금 열 수 없고 측면으로 돌아 들어서면 해장보각을 만날 수 있다. 조선 1706년 만든 세존비각은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를 세우면서 만든 비석으로 불사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높이 2.5m, 폭 1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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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오층석탑, 용이 살았다는 구룡지
통도사 오층석탑으로 개산조당 앞에 위치하고 있는 최근 1920년 작품으로 비지정 문화재이다. 통도사에는 용이 흘린 피가 묻어 있다는 용혈암(용피바위)와 함께 구룡지의 전설이 전해진다. 자장율사가 절터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인도 영축산과 흡사한 축서산을 찾게 되었다. 축서산 아래 큰 연못이 있어 못을 메우고 절을 짓는데 그 속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어 자장율사는 용에게 절을 지을 것이니 떠나 달라 요청하지만 용이 꿈쩍하지 않자 법력으로 연못을 펄펄 끊게 하여 내치려하였고 아홉 마리 용 중에서 다섯 마리는 남서쪽으로 도망가다 떨어져 죽고,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나다 솔밭길 근처 바위에 부딪혀 죽었다 한다. 남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갈 수 없으니 연못에 살게 해 주면 절을 수호하겠다 간절하게 요청하여 연못을 만들어 살게 하였다 전하는데 이를 구룡신지라 한다. 또한 연못을 메워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땅이 질척하여 보행이 힘들다 한다.
▲ 보물 제74호 통도사국장생 |
통도사는 나라에서 4만 7,000 보 땅을 하사받고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선종 2년(1085) 12곳에 국장생 표석을 세웠는데 현재 확인된 것으로는 통도사에서 동북쪽 4km 지점에 상천리국장생이 있다. 상천리국장생은 밋밋한 바위에 5~9cm 크기의 이두문을 음각하였지만 전체적 내용은 알아보기 어렵지만 일부 내용을 통해 통도사와 관련된 내용 및 날짜를 알 수 있다.
통도사 소유의 토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석주로 선종 2년(1085)에 왕명에 의해 세워졌다하여 국장생으로 부른다.
보물 제74호. 높이 166cm, 너비 60cm 둘레 220cm에 해독 가능한 문자로는 국장생의 앞면에 해서체로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명문을 새겨 놓았다. 국장생은 통도사 주변에 12곳에 장생표를 세웠다고 통도사사리가사적약록은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면적이 47000보 였다고 전한다. |
통도사 석주는 통도사에서 양산시로 진입하는 35번 국도변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큰 사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고 글을 새겼으며, 머리부분에 3개의 홈이 있다. 석주에서 중요한 것은 5-9cm 크기의 이두문이 4줄로 새겨져 있다는 것과 바닥 받침대에도 한문이 새겨져 있어 국내에서 확인된 국장생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통도사의 사계
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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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기운이 불심 가득한 절간에 은근하게 퍼져 온다. 통도사 지장매는 어김없이 꽃을 피웠고 향기에 매료된 벌은 힘차게 날아든다. 꽃은 벌은 유혹하고 직박구리는 벌을 찾아 날아드는 봄의 기운이 통도사의 완연한 봄으로 안내하고 있는 계절이다.
▲ 통도사의 봄은 매화향으로 시작된다.
통도사의 봄은 세 번에 걸쳐 찾아온다. 첫 번째 봄은 삼월 첫 주말 통도사 영산전 앞 붉은 홍매 한 그루와 샛노란 산수유 한 그루 꽃 피우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10여일이 지나면 통도사 극락보전 담벼락 앞 은당과 명월료 사이에서 두 번째 봄이 피어난다. 위세가 남다른 두 그루의 매화는 색이 짙고 연하여 대조를 이루며 탐스러움을 자아낸다. 세 번째 봄은 삼월 중턱을 넘어 설 때 통도사 암자인 서운암에서 청매가 장독 위에 눈이 시리도록 피어난다.
▲ 통도사 극락전 뒤 홍매, 삼층석탑으로 본 매화, 대웅전 옆 구룡신지 백일홍 연초록
봄의 시작은 소소한 것조차 놓칠 수 없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부터 의미를 부여하는 부지런함에서 시작된다. 영축총림 통도사 천왕문으로 발 딛는 게 두려워 은당 담벼락 경계로 난 쪽문으로 들어서면 극락전이 가로막고 그 옆 명월료 앞 자투리 공간에 두 그루의 "홍매화"가 눈에 들어오는데 극락전 그늘을 절묘하게 피한 홍매가 먼저 큰 꽃망울을 터뜨리면 그늘에서 자란 홍매가 뒤 따라 꽃을 피우는데 진분홍 매화, 연분홍 매화로 자장매로 불린다. 통도사 매화는 영각앞에 서 있는 붉은 홍매로 신라 자장율사가 통도사 영각 앞에 심어 지장매로 불린다
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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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경내 주차장 아래 계곡
통도사 계곡에 피라미 떼가 몰려다니면서 계곡에 생동감을 더해주는 계절이 찾아오면 절집 계곡은 어느덧 피서지로 변한다. 어린아이들 손잡고 찾아온 가족단위 피서객과 연인들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무더위를 날려 보낸다.
▲ 베롱나무 붉게 핀 여름
통도사 내에서도 여름은 뜨겁다. 구룡진지 옆 백일홍이 붉게 수놓는가 하면 절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온통 백일홍이 앞 다투어 피어난다. 통도사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고목나무 아래는 시원한 숲 그늘을 이루고 한낮 햇살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다.
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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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계곡 주변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모습
통도사 가을은 암자로부터 시작된다하여도 좋을 만큼 조용하게 찾아왔다 떠나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 가슴에 담아두고픈 마음이 들 만큼 향토적인 가을이라 하겠다. 통도사 가을은 서운암 꽃밭정원 둘레길을 걷거나 극락암 입구 솔숲을 거쳐 극락암 연지에 머물러 있는 가을 풍경도 좋다.
▲ 통도사 서운암 장독뒤 걸려 있는 가을, 통도사 극락암 입구에서 바라 본 가을
통도사 가을 여행 중에서 통도사 일주문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찾아가는 안양암을 빼 놓을 수 없다. 산비탈을 용이 기어가는 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위에 살포시 자리 잡은 안양암에 올라 통도사를 내려 보는 풍경은 가을이 최고로 아름답다.
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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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날 금강계단을 찾은 신도
눈 내리는 날 통도사는 고요함을 먹고 산다. 사박사박 눈길을 걷다보면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겨울 통도사 눈 내리는 날이면 일주문부터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일주문부터 시작되는 우거진 송림 가지 위 걸린 하얀 눈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통해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아픔을 함께 흘러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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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암자여행
삼보사찰리란 불교성립의 삼대요소인 불(교주), 법(교법), 승(승단)으로 나누는데 대표적인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보조국사 이래 18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 부처님의진신사리, 금란가사를 봉안한 불보사찰 통도사가 대표적이다. 사찰 내 존재하는 암자는 이보다 더 많지만 출입을 제한하는 사찰부터 산 위에 위차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암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찾아가기 쉬운 암자를 열거해 보았다.
가을 숲길이 아름다운 안양암
통도사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망지점 안양동대 그리고 안양암으로 가는 길은 오층석탑 뒤편으로 완만한 등산길이 열려져 있다. 이곳은 거의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산길로 걷는 중간 중간 통도사 전경이 숲에 가려져 얼핏 얼핏 시선에 들어왔다 숲이 가려놓기를 반복한다. 산길을 따라 300m 정도 따르면 숲이 잠시 멈칫하고 탁 트인 공간으로 통도사 전각이 한눈에 조망되는 조망지점을 안양동대라 하며, 아래 안양암이 위치하고 있다.
▲ 안양동대에서 바라 본 통도사 전경
통도사 팔경 중 하나로 손꼽는 안양동대는 먼 산정상이 아니라도 통도사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일반인은 거의 잘 모르는 곳이다. 통도사 오층석탑을 가로질러 산길을 따라 이동하거나 통도사 계곡을 건너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는데 바로 통도사 암자중에서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려지지 않은 안양암이 바로 그 곳이다.
안양암으로 오르는 또 다른 길이 있다. 호젓한 산길 홀로 걷는 게 불안하다면 계곡을 따라 설법전까지 가면 설법전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함께 노송과 활엽수가 열어둔 구렁이 담 너머 가듯 구불구불 돌고 돌아가는 산길을 만나게 되고 산길 끝자락에 안양암이 있으며, 안양암 뒤편으로 조금만 오르면 통도사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안양암에서 올라왔던 길 반대편으로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자장암과 극락암 가는 길이며, 왼편으로 서운암이다. 서운암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즐기는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특히 서운암에서 옥련암으로 넘어 백련암으로 향했다 되돌아 나오는 숲길은 가을이면 더 없이 좋은 사색의 길이다.
▲ 안양암 중심건물
안양암은 고려 충렬왕 21년(1295) 찬인대사가 창건 후 고종 2년(1865) 우담대사가 중창을 하면서 오늘날 안양암에서 가장 오래된 북극전을 만들었으며, 1963년 우송화상이 중수를 하였다 전하지만 안양암에 관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북극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각으로 보상암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건물에는 단청과 벽화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는 북극전이 있는 이곳은 안양동대라는 바위 위 자리 잡은 암자로 예불을 목적으로 하는 사찰과는 달리 수도를 위해 조성한 암자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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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암 입구 전경, 옛 입구로 보이는 문, 북극전
붂극전은 장수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토착신앙인 칠성신앙과 관련성이 있어 보이며, 기둥 간격이 다른 건물과는 달리 2m가 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오늘날 안양암에는 법당, 청송당, 고금당, 정토문, 독성각이 있으며, 안양암 아미타후불탱과 북극전 칠성탱은 성보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들꽃이 펼쳐져 있는 '서운암'
척박한 땅에 순응하며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피워낸 금낭화의 닮은꼴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생각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지난날 허무함을 복주머니마다 채워넣어 본다. 서운암에서 만나는 금낭화는 불교적이다.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처럼 불가의 마음을 담고 있다. 매화가 사라지고 금낭화가 필적이면 황매화가 언덕을 따라 피어난다. 봄꽃 중에서 잎과 꽃이 동시에 색을 드러내는 황매화는 짙노랑색과 연초록 잎사귀로 인하여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선 꽃처럼 전투적으로 피고진다.
▲ 서운암의 봄
해마다 들꽃축제를 개최하는 서운암 장독 안에 된장이 익어가는 구수한 곳이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버려졌던 산자락을 가꾸며 그 공간에 화사한 꽃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수목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들꽃을 심어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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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꽃이 피고진다.
따뜻한 봄날 장독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길로 오르면 붉은 금낭화가 피어나고 언덕 중간에는 할미꽃이 고개를 내민다. 약 6만 7000여㎡ 영축산 산자락에 피어나는 들꽃을 시작으로 겨울까지 다양한 꽃이 피고 지는 암자로 매화, 할미꽃. 금낭화. 벌개미취. 참나리. 하늘매발톱, 수련, 황매화 외 다양한 들꽃 100여종이 봄소식을 전한다. 이 일대 들꽃은 스님과 신도에 의하여 식재한 것으로 해마다 들꽃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 도자기로 직접 만든 삼천불
우리나라 불교역사상 최대 규모인 백자로 만든 삼천불이다. 1985년 암자에 가마터를 만들고 성파스님이 조성하기 시작한 도자불은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로 삼천불로 당시 가마터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고려 충목왕 2년(1346) 충현대사가 창건 한 후 철종 10년(1859) 남봉대사가 중건, 최근 성파스님이 중건하면서 5년에 걸쳐 도자기 불상 3,000점을 구워내 도자삼천불과 오만여평 규모 들판에 들꽃을 심어 매년 들꽃축제로 알려진 곳이다.
▲ 봄, 여름, 가을 전경
삼천불을 모신 2층 법당에서 내려다보면 장독이 도열하고 있다. 평소 성파스님은 장독이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사용한 것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수집하였고 오래된 장독 속에서는 생약제가 첨가된 1,300년 비법의 전통사찰 된장이 익어가고 있다. 영축산에 자리한 통도사 19개 암자는 대부분 웬만한 절집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서운암은 절간에 있는 문턱이 아예 없다. 누구라도 쉽게 찾아와 산자락을 따라 거닐며 다양한 들꽃에 취하거나 큰 나무가 만든 숲 아래 사색에 잠겨있다 돌아온 길로 다시 홀연히 사라지면 그만이다.
금와보살의 전설 '자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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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암자이지만 통도사를 창건 한 자장율사가 통도사 창건 할 때 이곳 자장암에서 임시거처를 두고 머물던 곳으로 자장방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자장암은 법당 뒤편 바위속 금와보살이라는 금개구리의 전설이 함께하고 있다. 통도사 창건 당시 자장율사가 수도했던 곳으로 통도사보다 창건역사는 더 올라간다. 정확한 창건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회봉대사가 중창, 1963년 용복화상이 중수, 1898년 법당옆 암벽에 4m 마애불을 조성하였으며, 법당 뒤편 석간수가 나왔다는 바위굴속에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하였는 금와공과 그 속에 금와보살(금개구리)을 보려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 자장암 전경
법당을 조성하면서 자연 위 절집을 올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형상 튀어나온 바위를 옮기거나 깎아내지 않고 자연 상태로 두고 절집을 짓다보니 바위가 법당 앞과 법당 뒤 그리고 법당 안에서 뾰족하게 돌출되어져 있어 궁금증을 유발한다.
▲ 범당 입구와 안쪽 자연석 바위, 법당 옆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법당 뒷편 금와보살이 산다는 바위
통도사를 짓던 초겨울 자장율사는 우물에서 살던 금개구리가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되어 관음전 법당 뒤편 물이 나오는 석간수 절벽에 손으로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넣어 두었는데 그날 이후 길일이 되면 금개구리가 나타나는 날이 알려지면서 금개구리를 금화보살이라하고, 바위를 금와석굴이라 하며 지금도 그 구멍을 통해 불력이 강한 사람은 안에 있는 금개구리를 볼 수 있다하지만 개인적으로 단 한번적도 볼 수 없었다.
현대 고승 경봉스님이 주석하였던 '극락암'
극락암에 도착하니 새로운 건물이 주차장 뒤편에 있다. 길게 늘어선 건물이 위에서 바라보면 흡사 아치형으로 오목해 보이는 산뜻해 보이는 건물이 궁금하여 가만 살펴보니 "해우소"라는 간판이 시선을 끈다. 많은 절집을 찾아갔지만 극락암에 최근 만든 자연과 인간의 동선을 배려한 작품성이 우수한 화장실을 둘러보고 감탄을 하며, 극락암 수국을 만나로 절집으로 들어섰다.
▲ 극락암 연지
현대 고승인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고려 충혜왕 5년(1344)창건, 영조 34년(1758) 지흥대사가 중건, 1968년 경봉스님이 중건, 중수를 하였다. 암자로는 큰 규모로 입구에 아담한 연못은 극락영지로 영취산의 봉우리가 비친다하는데 지금은 연꽃을 심어 여름이면 연꽃이 연못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홍교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 독상각, 독성각 내 모셔진 경봉스님, 극락전
법당 뒤편 산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낯선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 암자를 창건한 경봉스님을 모신 곳으로 독성각이라 부른다. 독성각 위로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진입하는 길에는 사계절 작은 들꽃이 피어난다.
통도사 불교유적
불교문화재는 국보 제290호 통도사대웅전및금강계단, 보물 제11-6호 양산통도사동종, 보물 제74호 통도사국장생석표, 보물 제334호 통도사은입사동제향로, 보물 제471호 통도사봉발탑, 보물 제1041호 통도사영산전팔상도, 보물 제1042호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 보물 제1350호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 보물 제1351호 통도사괘불탱, 보물 제1352호 통도사화엄탱, 보물 제1353호 통도사영산회상탱, 보물 제1354호 통도사청동은입사봉황문향완, 보물 제1373호 통도사금동천문도, 보물 제1471호 통도사삼층석탑, 보물 제1472호 통도사아미타여래설법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0호 (경남) 통도사석등, 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경남) 통도사대광명전, 시도유형문화재 제100호 (경남) 통도사경판, 시도유형문화재 제247호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제250호 (경남) 통도사천왕문, 시도유형문화재 제251호 (경남) 통도사관음전, 시도유형문화재 제252호 (경남) 통도사불이문, 시도유형문화재 제277호 (경남) 통도사삼화상진영, 시도유형문화재 제278호 (경남) 통도사팔금강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9호 (경남) 통도사대광명전신중탱화, 시도유형문화재 제281호 (경남) 통도사오계수호신장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65호 (경남) 통도사건륭57년명신중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68호 (경남) 통도사지장시왕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69호 (경남) 통도사가경17년명지장시왕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71호 (경남) 통도사아미타극락회상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72호 (경남) 통도사건륭17년아미타후불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74호 (경남) 통도사창녕포교당목조석가여래좌상, 시도유형문화재 제376호 (경남) 통도사광무4년감로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77호 (경남) 통도사건륭40년현왕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81호 (경남) 통도사동치5년칠성탱, 시도유형문화재 제382호 (경남) 통도사함풍11년칠성탱, 시도유형문화재 제403호 (경남) 통도사석당간, 시도유형문화재 제419호 (경남) 통도사건륭사십년약사여래후불탱, 시도유형문화재 제420호 (경남) 통도사가경삼년미륵후불탱, 시도유형문화재 제421호 (경남) 통도사건륭오십칠년삼장보살탱, 시도유형문화재 제436호 (경남) 양산통도사극락암칠성탱, 시도유형문화재 제450호 (경남) 양산통도사역대고승영정, 시도유형문화재 제451호 (경남) 양산통도사소장신석우영정, 시도유형문화재 제452호 (경남) 양산통도사소장김경호영정 그 외 많은 문화재자료가 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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