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시에 위치한 금강에서 비상하는 가창오리떼의 장관을 보기 위해 길을 열었다. 곧장 군산까지 이어 달려도 되지만 개인적인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대구를 경유하여 대전에서 논산을 경유하기로 하였다. 여행의 코스에서 논산을 경유하는 이유는 금강 가창오리떼 못지않게 논산에서 돈암서원 꽃담과 쌍계사 꽃살문을 여행 후 관촉사까지 내친김에 들러 보기로 하였다. |
관촉사 은진미륵 |
| 사찰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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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관촉사는 반야산에서 산나물을 캐던 한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소리를 따라 가보니 아이는 간곳없고 땅에서 큰 바위가 솟아나고 있었는데 소문은 왕에게 까지 들어가 왕이 혜명에게 사찰을 세우도록 명하니 광종 19년(968) 혜명에 의하여 반야산 기슭에 창건한 후 우왕 12년(1386), 선조 14년(1581), 현종 15년(1674) 각각 중수를 하였다. |
▲ 석탑과 석등 그리고 은진미륵
석등 앞으로 은진미륵이 자비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불리는 은진미륵은 보물 제218호이다. 불상의 높이가 18.12m, 귀 길이 2.7m, 눈썹사이 1.8m 로 화강암 암반위에 각각 분리하여 만든 후 올렸는데 허리 아랫부분은 자연석 바위에서 만들고, 상체, 머리 부분을 연결하였다. 은진미륵은 눈이 가무스레한 눈을 겨우 뜨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상당부분 마모가 심해 시멘트로 수리한 흔적이 여럿 나타나 있다. 은진미륵을 살펴보면 조립한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정교한 솜씨로 처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작품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바위 표면에 법의를 새기고 그 주름을 통해 바위의 차가움을 포근하게 감싸고, 머리에는 원통형 관을 올려두었다. 갓에는 네모난 보개가 네 귀에 이색적으로 풍령이 달려 있는 2층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은진미륵은 관음보살이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짐작케 한다. |
고려 때 북쪽 오랑캐들이 자주 침략하였는데 한번은 압록강에 집결한 오랑캐들이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이 때 선님 한사람이 삿갓을 끈 채 마치 얕은 냇물을 건너듯 다리만 걷어 올리고 건너 오더라는거야. 그러자 오랑캐 두목이 "보아라 저기 중이 건너오는 곳은 얕은 모양이니 그곳으로 강을 건너자며" 며 진군 명령을 내린 거야.. 멋모르고 강으로 뛰어든 오랑캐는 수심이 깊어 모두 물속에 빠져 죽게 되자 화가 난 적장이 중을 찾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중을 잡아 대령하자 적장이 칼을 뽑아 내리치니 중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중이 사용한 삿갓 한쪽만 떨어져있더란 거야. 그때 은진미륵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미륵이 쓰고 있던 갓 한쪽이 떨어 졌다고 하며. 은진미륵이 중으로 화산하여 압록강에 나타나 국난을 막았다 하여 은진미륵이 호국불로도 유명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자세하게 올려다보면 귀 부분이나 팔뚝 부분에 이어 붙인 자국이 있다. 불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설이 전해진다. 애초 불상은 바위에서 솟아오른 허리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을 이웃한 지역에서 옮겨왔지만 올릴 방법을 못 찾아 근심하고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냇가에서 아이들이 부처를 모신다며 밑 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고 그 위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 부처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일제 때 일본인 세 사람이 불공을 드리려 찾아와 부처의 큰 갓에 있는 금동불화를 훔쳐가면서 이마에 있는 광명주를 깨뜨려 버린 후 은진미륵은 빛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
▲ 관촉사 석문, 석등, 배례석과 오층석탑 |
석문은 높이 175cm 높이로 약간 고개를 숙여 들어서야 한다. 석문을 통과하면 사찰로 들어서기 때문에 ‘해탈문’으로 불리며 석문이 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관촉사에 너무 많은 신도가 찾아오자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절 주변에 성을 쌓고 네 곳에 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동문만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동문은 육중한 돌기둥이 장방형의 돌로 기둥을 세우고 뒷면에 장대석 5개를 가로로 올려 두었다.
배례석은 관촉사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조각품으로 충남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장방형의 화강암을 사용하여 구성된 일종의 탁자로 부처님에게 합장 배례하는 곳이다. 돌 윗면에는 3개의 연꽃과 2개의 연줄기가 양각되어 있고 전 후면에는 3개, 좌우면 에 2개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다. 문양을 잘 살펴보면 고사리무늬처럼 생긴 버섯구름 모양을 양각해 두었다. 한때 이곳을 통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은진미륵 앞에 예불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배례석 앞으로 관촉사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탑은 상층 기단의 상대갑석만 지면에 노출되고, 지대석과 하대석은 묻혀 있는 상태로 오층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대부분 사층석탑으로 부르며 훼손이 심하여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탑과 은진미륵 사이에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관촉사 미륵보살상 앞에 있다. 광종18년(967) 경으로 추정되는 전형적인 고려석탑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네모꼴의 상하 대석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져 있으며, 고려석등 중에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촉사 여행 더 보기 http://blog.daum.net/okgolf/5465483 |
쌍계사 꽃살문 |
| 사찰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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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대웅전 꽃살문
대둔산 북쪽 불명산 동쪽기슭 조용한 사찰이 숨은 듯 감추어져 있다. 옥황상제는 절을 하나 만들기로 하고 아들을 내려 보냈는데 계곡을 끼고 흐르는 언덕자락을 찾아내고 사람들에게 진귀한 나무를 모아 오도록 하여 그 나무를 이용하여 절을 지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웅전 기둥을 가만 보면 상상하기도 힘든 기둥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절집을 지탱하고 있다. |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햇살에 색채의 향연은 방문객의 모든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조각 하나 하나마다 조각가의 불심을 엿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 소담한 절집 풍경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꽃살문양은 가히 최고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흠잡을 수 없는 꽃문살을 가만 바라보면 너른 자연의 품에 안겨 있듯 고요하여 마음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쌍계사의 꽃은 국화, 작약, 목단, 무궁화, 연꽃 등 입체감 있도록 정교하게 조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곱게 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문살에서 피어나는 꽃새김을 한 꽃살문이 아름다운 것은 2짝씩 제각기 다른 색상의 꽃창살이 세월에 퇴색되면서 고풍스런 분위기까지 더해주면서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일부 여행객이 찾아가는 곳이다.
▲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408호)
대웅전(보물 제 408호) 치고는 큰 규모이다. 자연에서 태어나 인간의 손을 거쳐 가공된 목재를 사용하여 덤벙주초 위 다듬지 않은 듯 한 느티나무 대들보 기둥을 민흘림으로 세우고 절집을 올렸다. 그리고 창문에는 사치스러울 만큼 꽃으로 치장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팔작지붕을 올린 법당을 만나기 위해 몇 번 짐을 꾸렸다가 찾은 절집 쌍계사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꽃이 유혹하고 있다. 쌍계사 오른쪽 옆문 상단에는 사시사철 모란꽃이 피어 있다. 채 꽃을 펼치지 못한 봉오리부터 활짝 핀 모란무늬 꽃판이 있다.
쌍계사 여행 더보기 http://blog.daum.net/okgolf/5465488 |
개태사 석불입상 |
| 사찰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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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
태조는 신검을 쫒아 황산 숫고개를 지나 마성에 진을 치자 신검은 마침내 항복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자 태조는 후백제 신검을 제압 정벌의 가장 큰 공을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며 최후의 전승지였던 일리천전투 장소에 태조 19년(936)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칭한 후 사찰을 세우고 태조 영전을 설치하여 제를 올리는 등 고려시대 호국 사찰로 번성하지만 조선 초기 퇴락하기 시작하면서 세종 10년 개태사 인근마을의 풍년을 방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옛 개태사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 후 1432년 개태사 승려가 큰 수정석 2과를 세종에게 헌상하고 다시금 불교진흥책으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후 폐찰이 되고 1930년 김광영이 중창불사를 시작으로 도광사로 개칭되었다가 태광사로 다시 개태사로 개칭되었다. |
▲ 개태사지 석탑, 철확, 석조 |
불교유적으로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 개태사지(충남시도기념물 제44호), 개태사철확(충남시도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오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74호), 개태사지석조(충남문화재자료 제275호)등이 있다. 개태사지 여행 더보기 http://blog.daum.net/okgolf/5465484 |
돈암서원 |
| 서원여행 | 충청남도 논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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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서원 내 향나무
논산시에 위치한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은 대한제국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당시 보존된 서원으로 김장생(1548~1631)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돌아가신지 3년 후인 조선 인조 12년(1634) 만든 곳이 서원의 시초가 되었으며, 효종 10년(1659)과 현종 1년(1660) 두 번의 사액을 받은 곳이다. 오늘날 서원은 초기 임리에 위치하였으나 지대가 낮은 탓에 홍수 피해가 심하여 고종 18년(1881) 이건하였다. 서원에는 김장생 외에 효종 9년(1658) 김집(1574~1656) 추배, 조선 숙종 14년(1688) 송준길(1606~1672) 추배, 숙종 21년(1695) 송시열(1607~1689) 추배하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제사는 매년 2월과 8월 지낸다. |
홍수의 피해를 피하여 배산임수 형국의 지형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지만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강당이 중심에서 벗어난 서쪽으로 기울어 있다. 돈암서원에는 보물 제1569호 응도당,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유경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원정비가 있으며, 사우. 양성당, 웅도당, 장판각, 정회당, 신앙루, 내삼문, 외삼문,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있다. |
▲ 내삼문 꽃담
사우인 숭례사 내삼문 담장이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꽃담으로 꾸며져 있다. 지부해함(地負海涵) 즉,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이 모든 것을 포용하라는 의미이며,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하라는 공자의 말에서 널리 학문을 닦고 사리를 깨달아 예절을 잘 지킴이란 뜻이며,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성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때를 잘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단비와 같이 웃음으로 대하고 남을 편하게 해 주라는 뜻 등 기화로 형상화 한 글자가 네모박스에 위치하고 다음칸은 기와로 멋을 부렸다. 멋을 부린 곳은 담장 뿐만 아니다. 숭례사 기와 막새에도 한 포기의 꽃을 새겨 놓았다.
돈암서원 여행 더보기 http://blog.daum.net/okgolf/5465482 |
십자들녘 |
| 철새여행 | 전라북도 군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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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와는 달리 가청오리떼가 반대편으로 날아 올랐다.
여행 마지막 십자들녘으로 이동을 하였다. 춥고 배고픈 여행길인 만큼 어둡기 전에 도착하여 한적한 들판에서 라면이라도 끊여먹고 철새라도 미리 볼까하였는데 막상 도착하니 전망대 주변에 주차공간이 없어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있더라는 것. |
가창오리떼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뒤에 있던 오리떼가 무리를 형성한 앞으로 이동하여 착지하면 연이어 계속 꼬리에 남게 되는 철새는 앞으로 이동한다. 뒤에 남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지만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금강을 이어 달리더니 조금씩 날아오르며 무리를 만든다 싶더니 이게 웬 일인가. 카메라 반대 방향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순간 허탈감이란...
겨울이 되면 금강변에 철새가 찾아들 듯 철새의 군무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군산 십자들녘을 찾아온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철새는 오렌지 석양빛을 바탕으로 날아오르면서 다양한 비행을 연출하는데 실로 감탄사가 이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아쉽게 이번 가창오리군무는 계속 흐린 날씨로 인하여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한 시간 넘게 떨면서 가장오리가 무리지어 날아오르기를 기다렸고, 결국 어둠속에서 카메라 렌즈 초점을 잡기도 전에 허무하게 끝나 버려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군산 가창오리 군무는 2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서 다시 찾아와야 할 듯 ...
혼자 떠나는 여행은 사실 불편하다. 기사식당이 아니면 여행지에서 홀로 끼니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데 기본이 2인분부터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늘어가는 것은 요령이 아니던가. 컵라면이나 간단한 취사도구를 이용하여 직접 해결하기도 한다. 미식가 여행이 아닌 만큼 먹는데 목숨 걸지 않는다. 도로에서 시간은 곧 여행지 한 곳을 더 방문하는 만큼 이동하면서 간단하게 해결한다. 대부분 찐빵, 햄버그로 해결하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혼자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숙박이다. 남들처럼 메이커로 중무장하지도 않았고, 카메라에 노트북에 옷가지에 가방 양손에 들고 숙박업체 문의하면 방이 없다고 문전박대가 심하다. 가출하여 연탄하나 사들고 귀곡산장 찾는 사람인줄 아는지 깨끗한 숙박업체는 아예 혼자라면 문전박대가 당연하듯 받아들여진다.
여행을 같이하다보면 취향이 달라 여행지에서 대충 둘러보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여 중요한 여행은 가급적 단독으로 찾아간다. 내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거나 떠나면 된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이번 여행은 사전에 단독여행을 2주전부터 준비했다. 쌍계사 꽃살문에서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면서 질리도록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강 자락에서 비상하는 철새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하고도 싶었고, 돈암서원 응도당 마루바닥에서 낮잠도 자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몇 곳을 찾아가지 못하였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분위기와 심한 멀미증세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여행을 하다보니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해 버린 탓이다. 약간의 미련을 남겨두어야 다시 떠나는 법이라 되새김질 하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한다. |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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