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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경주 유채향따라 역사여행 투어 첨성대 - 계림 - 경주향교 - 최부자댁 - 월성 - 석빙고 - 안압지 - 박물관 - 황룡사지 - 분황사 - 보문단지
우리는 정작 국내에는 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삼국의 다툼에 남아 있을게 없다보니 그런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천년고도 경주의 성곽의 형태는커녕 정확한 위치마저 알 수 없는 이 답답한 역사의 뒤안길에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우리나라 역사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이어오는 자료가 변화를 거부하며 정립되고 있다. 이제 천년고도 신라를 다시 한 번 조명할 필요가 있다. 불국사 그리고 황룡사터, 안압지를 통해 신라의 모습을 떠 올려 보라. 그 웅장하고 화려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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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첨성대 그리고 주변 유채단지
▲ 첨성대 옆 연꽃단지 언덕 위 유채꽃밭이 조성되어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 첨성대 주변으로 활짝 만개한 유채꽃. ▲ 유채꽃 광장 중심에 가득 핀 수선화 |
▲ 첨성대
첨성대는 높이 9.16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한 변이 1m 인 정사각형 문을 달고 사용된 돌은 17단으로 262개로 12단까지 흙과 돌을 채웠다. 19단~20단, 25단, 26단에는 한문 우물정자형의 장대석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돌출시켜 판석을 설치하고, 네모난 창틀에 사다리를 이용하여 오르내린 흔적이 있다. 창은 남쪽으로 북두칠성을 향하고 "첨성"이란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
첨성대로 알려진 이유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첨성대와 선덕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선덕여황 시절 돌을 다듬어 대를 쌓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그 속이 트여 사람이 왕래하며 천문을 관측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아 첨성대를 두고 왕릉을 지키는 망루,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재단, 상직적 예술품, 탑. 등으로 논란에 휩싸여있다. 첨성대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창문이 하나며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점, 위쪽이 열려 있고 낮은 지대에 있다는 점 등이다.
2. 연초록 공간 계림
▲ 동부사적지 고분군 첨성대 앞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동부사적지대라 한다. 사적 제161호로 신라의 여러 사적이 나눈 구역으로 동서는 안압지에서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까지가 동부사적지대이다.
▲ 연초록으로 피어나는 계림숲 오랜세월 고목나무
계림에 도착하니 연초록 세상이 펼쳐진다. 사적 제19호 계림은 닭이 울었다하여 계림으로 불리는데 본래 신라의 신성림이였지만 알지가 태어났다하여 그 후로 계림으로 부르며, 지금은 100년이 넘는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고목과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가 있다. |
▲ 계림 봄 풍경 |
▲ 계림 가을 풍경 |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자리한 숲으로 김씨 시조로 알려진 김알지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적 제19호 경주계림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계림과 관련하여 탈해왕 4년(60) 호공이 서쪽마을을 지나는데 시림이 온통 광명으로 가득 차 숲에 드리워지고 구름 속에서 황금으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밝은 빛을 내며, 나무에는 흰 닭 한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니 왕은 시림으로 달려가 궤를 열어보았다. 궤 속에는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알지라고 부르며, 시림, 구림으로 불리던 숲을 계림으로 불렀다. 그 후 궁으로 데려와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훗날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라 13대 왕으로 오른 미추왕이 알지에서 나온 김씨의 후손으로 최초 김씨가 왕이 되었다.
▲ 경주 계림에서 경주향교로 나가는 계림숲 끝자락에서 만나는 사적 제188호 내물왕릉
사적 제188호 신라 내물왕릉은 계림을 통하거나 경주향교를 거쳐 방문 할 수 있다. 신라 제17대 내물왕(358~402)의 릉으로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 의 봉분으로 밑둘레에 큰 돌이 박혀 있다.
3. 경주향교
▲ 경주향교는 독특하게 우물이 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 경주향교는 본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창설한 국학이 있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향교로 이어져 지방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
▲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경주향교 동문 |
▲ 사용하지 않는 경주향교 정문 |
▲ 경주향교 강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경주향교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향교는 휼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서 지방교육기관의 역할을 이어왔다. 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원래 모습대로 고쳐지었다. 건물은 위쪽 높은 곳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고, 아래쪽 낮은 곳에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두는 전형적인 전모후학의 배치를 취하였다. 대성전(보물 제1727호)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집으로 엄숙함이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향교이다.”
▲ 대성전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재향을 받드는 곳이며,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 서재는 강학을 하는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성균관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4)에 동무/ 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중건하였다. |
경주향교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로 조선시대 선조 33년(1600)에 조성된 공간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갖추었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곳과 지대석 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린 곳이 혼재되어 있으며, 남쪽 중간과 동.서 기단의 남쪽 끝 부분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공포는 주심포계 외 1출목 이익공식이다. 또한 건물의 4모퉁이 가까이에 동자주를 세워 지붕 일부를 받치고 있다. 이 대성전은 중건된 연혁이 분명하며, 간결하고 위엄 있는 목조건물로 옛 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 경주 교통 최씨고택
▲ 최씨고택 전경
중요문화재 제27호 최 씨 고택으로 향하는 교촌마을 골목에 많은 사람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뭔가 싶어 달려가 보면 바로 교촌김밥을 사기위해 줄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최 씨 고택 입구에 있는 김밥 집은 계란후라이를 독특한 방법으로 싼 김밥말이로 출출한 여행길에 더없이 좋은 간식꺼리이다. |
중요민속자료 제27호 경주 교동 최씨 고택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가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 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 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一’ 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랑채와 오른편으로 곳간 그리고 안채로 들어서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사랑채는 2006년 복원한 큰 사랑채로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연임, 최익현,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의천왕 이강공 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곳간은 국내 곳간 중 가장 큰 규모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한옥건물로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크기이다. 본래 99칸의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소실되고 남아 있는 안채는 3채의 건물로 여성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현재 경주 교동에 위치한 최씨고택은 1947년 경주 최부자 12대손 문파 최준 선생이 기증하였으며 현재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다. |
▲ 봄기운에 활짝 꽃피운 라일락
조선시대 개인 건물로 최 씨 종가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있던 자리는 요석궁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며, 전하는 말로는 1700년경에 건물을 조성했다 전하며, 1970년 11월 대형화재로 인하여 사랑채와 별당이 사라졌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하였지만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1천석을 내주는 등 나눔을 실천하는 오늘날 기부문화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였다. |
최씨고택 사랑채에 내걸린 편액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인 최기영의 호를 따 만든 집이란 의미로 용의 정기가 스며드는 집이라하여 ‘용암고택(龍庵古宅), 12대 최부자 중 9대 최세린의 호 대우헌(大愚軒) 즉, 크게 어리석다는 의미이며, 둔차(鈍次)는 재주가 둔하는 의미로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호이다. 이와 함께 최씨 종가에는 여섯가지 행동 지침인 육훈(六訓)과 여섯가지 수신인 육연(六然)이 전해진다. |
▲ 최씨고가와 이웃한 교동법주 건물 사이로 구멍이 하나 뚫어져 있다.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말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으로 검소함과 나눔을 실천하도록 하였으며, 육연으로는 자처초연(自處超然: 혼자 있을 때 초연하게 지내라), 대인애연(對人靄然: 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과감하게 대처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 담담히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 등이다.
▲ 교동법주가 익어가고 있다. |
최씨고택과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경주 교동 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교통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 오는 비주로 조선 숙종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중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 빚기는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가 적기이다. 원료는 밀술로 밀누룩과 찹살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는데 100여일간 숙성시킨다. 숙성된 교동법주는 외관리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이다. 현재 교동법의 기능보유자는 최경이며, 최국선의 10세손이다.”
▲ 새로 만들고 있는 월정교
최씨고택을 나와 냇물이 흐르는 제방에서 바라보면 월정교가 보인다. 신라시대 최고의 교량으로 알려져 있는 월정교가 복원되고 있다. 사적 제457호 월정교는 삼국사기에 경덕왕 19년(760년) 궁의 남쪽 문천(오늘날 남천)에 춘양, 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월정교는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n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520년 이상 존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월정교 하류 약 20m 지점에 목조교량의 기초부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은 유교로 추정하고 있다. 월정교 상류 약 800m 지점에 춘앙교지가 있다.
5. 월성 그리고 경주 석빙고
▲ 월성 전경
황룡사지를 지나 경주 박물관 옆 옛 성벽 월성으로 들어선다. 비록 옛 궁궐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석빙고와 함께 옛 성벽을 따라 여행할 수 있는데 성벽을 따라 자라는 소나무의 모습이 아름다운 길을 틔어 주는 곳이다. 사적 제16호 월성은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
▲ 월성에서 바라 본 첨성대
본래 이곳에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옮긴 후 부터 역대 왕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한다. 월성을 따라 계림으로 향하는 길은 성벽을 쌓은 돌과 굵게 자란 소나무의 조화가 아름다운 숲길을 열고 있어 여름철 햇살을 피해 많은 탐방객이 이용하는 길이다. 성벽이라 하여 전체 돌을 쌓아 올린 형식이 아니라 능선을 활용하여 상부에 석성을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로 오늘날의 냉장고 역할을 하였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승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이라는 글을 볼 때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 만에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적고 있는데 현재 석빙고는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서 옮겨 온 것이다. |
신라시대 냉장고 석빙고로 옛 성터에 자리한 석빙고는 총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로 조선시대에 만든 전천후 냉장고로 궁중의 음식물을 보관한 곳으로 추정된다. 석빙고는 현재위치에서 100m되는 지점에서 옮겨온 것으로 1738년 만든 후 174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는 경사면을 이용하여 진입하도록 한 후 바닥 중앙에 배수구를 만들고 외부로 배출하며 5개의 호예를 틀어 올려 천장을 만들고 3곳에 환기구를 설치해 놓고 있다.
▲ 석빙고 앞 월성 매장문화재 조사를 하고 있다.
6. 안압지
▲ 안압지 전경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왔다는 안압지(임해전지)는 본래 월지로, 압지부평, 임해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궁성 안에 못과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를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인공으로 조성된 3개의 섬과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호수 끝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를 하였다. 세심한 설계를 통해 조성된 정원으로 안압지는 동서 190m, 남북 190m로 정방형 평면으로 약 1만 5,658평만 미터로 4,738평이다. |
1974년 안압지 준설과정에서 1,300년 만에 대대적인 연못 청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뻘 속에 묻혀 있는 목제품인 양물 즉, 17.5cm 남근 모조품과 목간, 배 등이 확인되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3만점이 넘어 경주국립박물관에는 아예 안압지 전시관이 따로 두고 있다. 안압지에서 이처럼 많은 유물이 나온 것은 신라가 망할 무렵 부속품들이 연못 안으로 쓸려 들어갔거나, 전쟁 중에 빠진 것으로 말의 뼈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신라가 패망하던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안압지에서 주목하는 것은 목제품이 잘 출토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지역상 단점을 안압지 내 개흙이 바닥층에 형성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안압지의 가을은 그리 큰 규모로 연출되지는 않지만 건물과 함께 수면에 비치는 반영이 아름다운 곳으로 특히 저녁 야경을 보려는 여행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찾아왔다 하여 기러기"雁", 오리(鴨)" 지로 월래의 이름은 월지(月地)이며, 압지부평, 임해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궁성 안에 못과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키웠다는 기록은 곧 안압지를 두고 하는 말이며, 임해전전에 부속된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
인공으로 조성된 3개의 섬과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호수 끝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를 하는 등 세심한 설계를 통해 완공된 거대한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압지 내 임해전의 위치는 알 수없고 주변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많은 초석이 외롭게 남아있는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는 동서 190m, 남북 190m로 정방형 평면으로 약 1만5.658평방미터로 4,738평에 이르며, 호안을 둘러싼 석축이 무려 1,285m로 안압지 내 물이 요동치면서 머물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많은 굴곡을 두고 그 안에는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 즉 삼신도를 옮겨 놓고 각 섬마다 가축을 풀어 사육하였다 한다.
▲ 안압지 야경 |
대표적인 음주가무의 한 행위로 주사위가 나왔는데 " 술 석 잔 한 번에 마시기", "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등 당시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에 글자를 새긴 목간이 발견되는 등 다양한 부장품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1974년 11월 박정희는 안압지 준설작업을 지시하고 1,300년 만에 대대적인 연못 청소를 하였는데 주목할 만한 물건이 나왔다. 뻘 속에서 나온 것은 목제품인 양물 즉 17.5cm 남근 모조품과 목간 배이다.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져 있는 나무배는 장정 몇몇이 올라타도 끄떡없는 나룻배 형식으로 건너편 섬에 가축의 먹이를 주기위해 띄운 것인지 배를 타고 호수를 다녔는지 알 길은 없다. |
제1편에 이어 제2편은 경주 박물관-황룡사지-분황사-보문단지로 이어집니다.
이어서 계속 보려면 아래를 클릭하셔요.
http://blog.daum.net/okgolf/546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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