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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경주 여행 제2편 경주박물관~안압지~황룡사지~분황사

허영꺼멍 2015. 4. 2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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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경주 유채향따라 역사여행 투어

첨성대 - 계림 - 경주향교 - 최부자댁 - 월성 - 석빙고 - 안압지 - 박물관 - 황룡사지 - 분황사 - 보문단지

 

 

 

7. 경주 국립 박물관

 

 

1913년 경주시 인왕동에 세워진 국립박물관은 총 면적72705에 다양한 문화재를 실내 및 실외 전시하여 당시의 천년고도를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야외전시실을 비롯하여 국보 13점 보물 26점을 보유하고 있다.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결성된 후, 옛 객사 건물에 신라유물을 수집하면서 박물관의 필요성을 느낀 경주시에서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되고, 1975년 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된 후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 박물관은 제1실 선사시대, 2실 고신라 토기실, 3, 4실 고신라 공예실, 5실 와전실, 6실 통일신라 토기실, 7실 통일신라 금속공예실, 8실 조각실과 별관으로 천마총과 제98호 고분 유물실을 두고 야외에 성덕대왕신종 및 다양한 석탑과 석불 등 소중유물은 78680점으로 1998년 현재 전시유물은 2,383점으로 국보 13점과 보물 26점이 전시되고 있다.

 

승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은 국내 비석받침 중 두 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독특한 작품으로 숭복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보통 한 마리의 거북이 비석을 받치지만 두 마리의 거북이 나란히 조각된 귀한 비석받침으로 경주 승복사터에서 나온 통일신라 9- 0세기로 추정된다.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은 최치원이 지은 승복사비로 비편은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고 이와 유사한 두 마리로 된 비석받침은 경주에서 발견되는데 창림사터와 무장사터에서 발견되었다. 비석받침 거북의 머리는 용을 형상화 하였으나 등에 거북문양이 두 겹 새겨져 있다.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은 우리에게 에밀레종으로 더욱더 알려져 있는 국내 최고의 종으로 봉덕사에 있던 종을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771년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75m, 앞지름 2.27m,두께 1125으로 크기면 에서도 압도적이며, 최근 종소리를 녹음하여 매분마다 흘러나오는 타종소리는 가슴을 찡하게 울려준다.

 

 

 

종명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 부왕이신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큰 종을 만들려하였으나 종을 만들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이 뒤를 이어 771(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72t)을 들여 완성하였다고 전하며, 종은 봉덕사에 걸었지만 세조 6(1460) 영묘사로 옮겨지고 영묘사가 홍수로 떠내려가자 봉황대 옆 종각을 짓고 보관하다 1915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종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를 두르고 8개의 연화무늬를 배분하여 넣었으며, 용이 음관을 감고, 몸체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가 있고 그 아래 4개의 유곽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이 있다. 비천상은 종명을 사이에 2구씩 자리 잡고 공양상이 그려져 있으며, 비천상 사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다.

 

▲ 종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

 

에밀레종의 전설로 부왕의 성덕대왕을 기리기 위해 신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도록 봉덕사에 지시하면서 종소리가 멀리까지 여운을 남기고 퍼져가도록 강조하였지만 부탁을 받고 종을 제작하던 일전 이라는 종 기술자는 화려한 종을 만들었지만 종소리가 나지 않자 정성이 부족한 탓으로 다시 제작하는데 봉덕사 주지스님의 꿈속에 현몽하길 며칠 전 시주받으로 갔다 돌아온 집의 아이를 넣어야 된다고 하자 뒷날 아이의 부모를 만나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고 결국 종을 만드는데 아이를 넣고 완성하게 되었는데 종소리가 "에밀레"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다며 자식이 어미를 애타게 찾는 소리로 그 후부터 에밀레종으로 불렀다 한다.

 

 

종의 제작에 아기를 넣었다는 전설은 사람의 몸성분 "" 이 종을 만들 때 강한 합성작용을 하는 것으로 큰 종을 만드는데 물질결합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종이 완성되자 아기를 넣었다는 말이 나돌지 않았나 싶다. 만약 종을 만드는데 아기를 넣었다면 종 성분 속에서 인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조사결과 인 성분은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설은 당시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 그 반면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고통을 통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전설이지 않나 추정하고 싶다.

 

에밀레종은 귀족과 민초들 사이 갈등, 왕과 귀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며, 왕이 선택한 것은 불교 힘을 통해 이들을 해소하기 위해 봉덕사 스님 꿈에 아이를 시주하는 부분을 강조하고 스님도 인간을 쇳물에 넣는 것은 안 되지만 부처님의 뜻이라 거역 하지 못함을 강조하면서 아이를 넣었다고 소문을 내고 왕권에 반발하는 귀족과 민초를 부처의 힘으로 제압하려 시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대적으로 경덕왕, 혜공왕때 귀족이 왕권에 대항한 시기로 불교의 힘을 통해 왕권에 저항하는 귀족을 제압하기 위하여 많은 불교적 문화가 진행된 시기로 대표적인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황룡사, 만물상 등 경주의 상당수가 이 시기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동원되었는지,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야외 전시실 가장 안쪽에 전시되어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박물관 뒤편으로 가면 큼직한 석탑 1기가 우뚝 서 있다. 통일신라 전형적인 기법을 따르고 있는 석탑으로 고선사터 삼층석탑이다. 석탑은 원해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던 고선사에 있었지만 덕동댐이 건설되면서 1975년 석탑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경주 고선사터에서 수습된 통일신라 686년 이전 높이 10.2m 작품으로 현재 국보 제38호이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원래 고선사에 있던 것입니다. 1975년 고선사터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 탑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선사는 원효대사(617~686)가 머물렀던 절입니다. 원효대사는 신문왕(재위 681~692) 6(686)에 입적하였으므로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그 이전에 만들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19145, 이 삼층석탑이 있던 주변에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가리킵니다. 이 비는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므로 고선사와 원효대사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잇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너무나도 닮은 탑이 신문왕 2(682)에 세운 감은사터 삼층석탑입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에는 찰주가 남아 있어 언뜻 달라보입니다만,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몸돌과 지붕돌로 된 모습, 노반까지 높이가 모두 10.1미터라는 점, 82장의 돌로 이루어졋다는 점 등 쌍둥이 탑이라고 할 만큼 닮았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 1층 몸돌에 문(문비)을 표현한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삼층석탑의 양식은 그 이후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석탑은 반듯한 돌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짜 맞추면서 3층 몸돌만 하나의 돌로 올려 두었는데 이는 사리장치를 넣기 위함이라고 한다. 석탑의 흐름을 보여주는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거침없는 표현을 통해 석공의 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감은사지삼층석탑-불국사삼층석탑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압도적으로 10.2m 이다. 고선사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다 한다.

 

경주 불국사, 감은사지, 남산리삼층석탑, 장항리사지, 심지어 남산 탑골의 그림도 두 개의 쌍탑 배치가 되어져 잇는 것으로 보면 분명 여성미를 지닌 또 하나의 탑이 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동편에 자리 잡고 있던 목탑은 초석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선사지에서 옮겨온 삼층석탑과 목탑터만 확인되었다는 것은 석탑과 목탑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보통 목탑과 석탑이 동시에 공존한 사찰을 찾아보기 드문 예이기 때문이다.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경주 백률사에 있던 불상으로 1930년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백률사는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에게는 불교 성지 중 한 곳이다. 불상의 높이는 1,77m이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약사불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 데도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형지) 자국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음을 알 수 잇습니다.”

 

 

보물 제366호 감은사리갖춤

 

▲ 감은사지에서 수습된 사리장치

 

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을 보관한 감은사사리갖춤은 보물 제366호로 195912월 감은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높이 31cm 사리장치로 원뿔 뚜껑을 한 사각 상자이다. 사리함에는 독특하게 사천왕상이 1구씩 새겨져 있으며 주변을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을 발견 서울중앙박물관 실내 불교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1959년 감은사지 서삼층석탑에서 청동제사리기(보물 제366)가 발견된 후 1996년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동탑과 서탑에서 각각 발견된 두 개의 사리탑은 어떤 의미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는 부처의 사리함을 두 개로 나누어 탑에 봉안한 전례가 없다는 점으로 볼 때 부처와 버금가는 인물로 당시 문무왕 밖에 없다는 것으로 감은사지는 문무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신문왕이 만든 사찰로 두 개의 큰 불탑 속에 나란히 안치하여 위엄을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경주 남산 철와골 대불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부처로 1959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부처는 통일신라 8세기 말~9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불로 높이 1.53m, 무게 1.7톤이며, 머리 크기 대비 대략 6m 크기로 짐작할 뿐이다.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부처 머리는 한 차례 큰 태풍이 지나간 후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되었으며, 1959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왓습니다. 이 부처가 온전했다면, 얼마나 컸을까요? 그 높이를 추정하는 데 경주 남산 열암골에서 발견된 마애불이 좋은 비교자료입니다. 이 열암골 불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4.6m, 이 중 머리 크기가 1/4을 차지하는 4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를 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각가는 예배자의 시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느 불상과 같은 비례로 머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3층 건물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부처에게 예배드리면서 불심이 우러날까요? 철와골 부처를 만들 때도 비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6미터 정도의 높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부처 머리가 나온 철와골에서는 그 정도 크기의 몸체는 발견되지 않앗습니다. 철와공 부처의 몸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관음보살상

 

▲ 통일신라시대 관음보살상

 

관음보살상으로 높이가 3.76m로 큰 불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머리 발견 후 몸체는 경주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서 반쯤 묻혀 진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1975년 조사당시 마을 노인이 머리는 경주 박물관에 가져갔다는 진술에 따라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974월 몸체가 있던 인근에서 다시 연꽃대좌를 발견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항리 부처

 

▲ 장항리사지 부처

 

경주 양북면 장항리사지에서 확인된 부처로 통일신라 8세기 제작된 대형부처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상의 하반신이 없지만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구멍이 있기 때문에 입상으로 분류한다. 현재 발견된 불상의 높이는 2.5m 이다.

 

 

불상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장항리 절터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과 불상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을 하반신이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입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크기가 대략 4.8미터, 옛날 척도로는 1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들여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부처의 키가 16척이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한상 모서리기둥

 

 

박물관에서 독특한 돌기둥을 만나게 된다. 경주 읍성에서 출토 된 통일신라 8~9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 의 사각 기둥으로 기둥앞면에 나한상을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나한상이 새겨져 있는 기둥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표정과 조각의 솜씨가 매우 우수하고 인상적이다.

 

 

나한상 모서리기둥으로 불리는 이 작품의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개의 네모난 돌기둥을 조합하여 만든 어떤 구조물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습니다. 직각으로 꺾인 바같쪽의 두 면을 잘 다듬은 후, 인물상의 옆 모습을 얕게 튀어나온 평부조의 방식으로 새겼습니다. 이 상돌은 불교의 성자인 나한으로 추정되며, 연꽃대좌 위에 서서 손잡이가 달린 작은 향로(병향로)를 들고 마치 어딘가를 향해 공양하거나 무언가를 중심으로 도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자세, 의복과 신발 등 전체적인 형태가 석굴암의 십대제자 상과 비슷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물 제1475호 금동판보살좌상

 

▲ 안압지에서 수습된 불교유적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긴목항아리

 

 

 

▲ 5세기 경주 미추왕릉지구 수습

 

실내 전시실에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토우를 만날 수 있다. 흙으로 만든 인형 토우는 일반적 도자기류 처럼 생긴 항아리 상단부에 다양한 동물형상을 진흙으로 빚어 올려놓았는데 경주에서 볼 수 있는 특별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계림로 30호 무덤에서 출토된 목항아리는 높이 34cm, 입구지름 22.4cm이며, 노동동 11호에서 발견된 목항아리는 높이 40.5cm, 입구지름 25.5cm 로 비교적 토우가 장난감으로 비유되지만 큰 편으로 주술적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토우장식은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 토끼, , 배부른 임산부가 가야금 타는 모 습, 개구리, , 거북이, 사람 등 다양한 인형이 등장한다.

 국보 제37호 금관

 

▲ 국보 제37호 금관

 

국보 제88호 허리띠

 

▲ 국보 제88호 허리띠

 

국보 제87호 새날개모양금관식

 

▲ 새날개 모양금관식

 

▲ 보물 제620호 유리잔. 경주 천마총에서 수습된 유물

 

▲ 국보 제188, 190호 금관, 금허리띠
6세기 경주 천마총 수습

▲ 보물 제635호 장식보검

5-6세기 경주 계림로 수습

▲ 보물 제634호 상감유리구슬

5-6세기 경주 미추왕릉지구

 

 

8. 황룡사지

▲ 황룡사지 석축 흔적

 

▲ 황룡사지 분황사 앞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사적 제 5호 황룡사지 유채꽃밭 사이로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어떤 노부부가 저 탑이 무엇이냐며 물어 온다. 탑이 아니라 옛 사찰 본당 앞에 깃대를 세우던 당간지주라고 말하자 매우 놀란다. 무슨 깃대가 얼마나 되어 저렇게 튼튼한 지주가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당간지주는 행사 때 큰 탱화를 내걸기도 한다니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이다. 당간지주는 분황사 정문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특한 거북돌 받침이 남아 있는데 이 당간지주를 분황사 남쪽 당간지주로 말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동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m 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황룡사지 안압지 방향에 위치한 탑 2기 흔적

 

 

경주일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지는 철저하리만큼 파손되어 그 흔적이라곤 겨우 몇몇 석재가 전부인 황량한 곳으로 신라 진흥왕 14(553) 왕명에 의해 창건, 진흥왕 35(574)에 신라 최대의 불상으로 알려진 장육존상을 모신 곳이다. 황룡사지가 특별한 경주의 상징적 의미는 선덕여왕 14(645) 80m 동양 최고의 구층목탑이 백제 기술자 아비지에 의해 세워져 신라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지는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신라 진흥왕 14(553)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버려진 사지는 민가와 밭으로 전략해 버린 황룡사지 일원을 이주 및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어느 정도 윤곽을 확보하였는데 1976년부터 약 8년이 소요되었다. 조사결과 11금당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13금당의 정방형으로 40,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645)에 자장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후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 황룡사탑 건립 이미지 기념비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오늘날 구황동)에 위치했다 전한다. 진흥왕 14(553) 대궐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황룡이 출몰하여 사찰을 만들고 황룡사로 불렀는데 무려 17년이 소요된 국찰공사로 현재는 초석만 확인되고 있다. 경주일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지는 철저하리만큼 파손되어 그 흔적이라곤 겨우 몇몇 석재가 전부인 황량한 곳으로 신라 진흥왕 14(553) 왕명에 의해 창건, 진흥왕 35(574)에 신라 최대의 불상으로 알려진 장육존상을 모신 곳이다.

▲ 금당지

금당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찰의 중심건물이며, 본존불을 모시는 곳이 금당인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금당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대에 서축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 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일불, 이보살상의 모형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관리가 이를 발견하고 왕에게 전하니, 황은 동축사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장육존상(높이 약 4.8m)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뒤 금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황룡사가 초창되엇을 때 금당이 있었으나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을 모시면서 새로 금당을 지었고, 동 서금당에는 삼존불과 탱화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의 기단은 성토층을 되파기한 후 21단으로 판축다짐하였다. 규모는 동서 51.7m, 남북 26.7m이며 총면적은 1.384이다.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면에서 1개소가 확인되었다. 금당지 안에는 총44개의 초석이 외진 9X4, 내진 7X2칸을 구성하며, 중앙후면에는 장육상과 두 구의 협시불 대좌석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들 삼존불 대좌석 동. 서쪽에는 14개의 불대좌석이 남아 있다.“

금당지는 황룡사지 중심법당이다. 이곳에는 본존불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보면 "진흥왕대 서축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 완성을 기원하는 내용과 일불, 이보살상의 모형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관리가 이를 발견 하고 왕에게 전하니, 왕은 동축사를 세워 이들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이후 황금과 철을 옮겨와 장육존상(높이 약 4.8m)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황룡사에 모신 후 10년 뒤 금당을 지었다고 한다".

 

▲ 목탑지

 

목탑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백제장인 아비지와 신라장인 들이 국태민안의 염원을 담아 선덕여왕 12(643)부터 3년간의 조성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 구층탑을 완성하였다. 여러 차례 중수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1238)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규모는 변의 길이가 22m 정방형의 형태로 총면적은 약 490이다.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 동 서에서 각 1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기단에는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정면 7, 측면 7칸을 우성하고 있다. 심초석은 435cmX300cm 크기이며, 두께는 128cm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30톤에 달한다. 심초석안에 마련된 사리공은 외곽에 두 줄의 홈을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으며, 안에서 금동사리외함이 발견되었다.”

 

황룡사지가 특별한 경주의 상징적 의미는 선덕여왕 14(645) 80m 동양 최고의 구층 목탑이 백제 기술자 아비지에 의해 세워져 신라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지는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버려진 사지는 민가와 밭으로 전략해 버린 황룡사지 일원을 이주 및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어느 정도 윤곽을 확보하였는데 1976년부터 약 8년이 소요되었다. 조사결과 11금당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13금당의 정방형으로 40,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황룡사 목탑은 간곳없고 그 자리에 황룡사탑 건립 이미지 기념비가 서 있다. 삼국 통일의 염원을 담은 황룡사탑을 이미지로 만나보고 스쳐 가지만 그 높이를 상상해 보면 당시 엄청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보면 아래로 분황사와 위쪽으로 미탄사지가 있다. 바로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두고 존재했을 것 같은 신라시대 사찰 미탄사지는 사라지고 완전히 파손된 석탑 1기를 수습하여 복원해 놓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황룡사지 그 거대한 공간 끝자락에 탑 1기가 있는 듯 보인다발굴조사 당시 탑 기단부에서 소금동불입상수정제장, 금동제영락 등 29점의 유물이 확인 되고 탑기단부의 적심부를 돌과 찰흙으로 다진 후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하는 공법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은 6m,기단부 3.86m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9. 분황사

▲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 3년 분황사가 낙성되었다는 글귀를 통해 분황사는 서기 634년으로 추정되며, 신라탑 중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동경잡기를 통해 추정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9층으로 일본군대가 파손 후 개축을 시도하다 파손되어 3층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분황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큰 모전석탑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포개어 올린 것으로 정확 한 층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9층으로 짐작하며, 지금은 3층으로 높이 9.3m, 기단 폭 13m, 한 변의 길이는 6.5m3층 규모만 하여도 상당한 크기이다.

 

 

 

모전석탑 분황사 재료로 사용된 석축은 안산암 소석재이며, 화강암이 1층 기단부를 형성하고 감실을 사면에 만들고 인왕상을 각 2기씩 조각하여 두었다. 탑을 수리하던 1915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석함 속에서 나온 유물이 옥류 가위 금 은 바늘 숭넝통도 상평오주 등 귀금속과 고려시대 중국주화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보편적 탑이란 불교적 해석으로 사리함이 발견되고 부처님 관련 부장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건 영 딴판으로 고려 때 수리하지 않았나는 추정을 하고 있지만 그건 분명 아닌 것 같다. 당시 분황사는 선덕여왕에 의한 사찰로 여왕이 주로 사용하던 유물로 볼 수 있는 사찰로 존재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분뢍사 탑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는 동물상

 

 

 

분황사는 사찰용 석탑이라기보다 어떤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이거나 이곳이 사찰이 아닌 다른 용도의 건물터로 추정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 살펴보니 놀랍게도 정원으로 추정하는 부분이 있다. 사찰정원 또는 당시 귀족의 정원으로 보는 견해는 신빙성을 떠나 발굴된 유물과 분황사터에서 불교적 유물이 많이 있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선덕여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분황사는 모전석탑 외 석조불상이 분황사 뒤편 우물 속에서 목이 잘린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일본인이 그랬다는 설, 불교 숭유억불정책 당시 누군가에 의해 자행된 행위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 탑 뒷편에 위치한 석정

 

호국룡변어정이라 불리는 석정은 신라시대 우물이다. 사찰터에서 우물터가 발견된 것은 이례적으로 볼 수 있다. 외부 높이 70cm에 팔각으로 주변을 돌려놓고, 안쪽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불교적 해석을 빌면 팔정도와 사성체를 뜻하고 있다한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원성왕11(795) 당나라 사신이 신라 호국용 세 마리를 물고기로 변신시켜 가져가는데 왕의 꿈속에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나 자신들은 동지, 천지에 사는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만들어 대나무 통에 넣어 가니 구해 달라는 꿈을 꾸자 뒷날 당나라 사신을 쫒아가 물고기를 되찾고 각각의 우물에 넣어 잘살 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물을 두고 왜 이런 전설이 나왔는지 우물을 한동안 바라보아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귀족들의 행패에 가슴 져 미며 살던 어느 아낙들이 왕에게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우물에서 항의라도 하였을까?

 

▲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불

▲ 분황사 보광전 벽화

 

 

화쟁국사는 누구인가? 얼핏 들으면 전혀 새로운 고승으로 들릴지 몰라도 신라시대 주름잡던 화쟁국사는 원효대사이다. 분황모전석탑 옆에 있는 비부는 고려 숙종 6(1101) 8월 조서에 의하여 분황사에 만들어 지는데 당시 동방성인으로 알려진 원효에 대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는 것을 알고 숙종은 "대성화쟁국사" 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를 시켜 비문을 제작하도록 하였지만 지금은 비문은 없고 그 받침만 남아 있을 뿐이며, 추사 김정희가 쓴 친필이 비대석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 이란 글귀가 음각되어져 있다.

 

 

석탑 뒤편으로 분황사에서 유일하게 있는 보광전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있다. 조선 영조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입상은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 뚜껑에 " 건룡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 라는 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분황사의 봄

▲ 분황사의 여름

 

분황사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590-658)와 원효대사(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755)에 강고내말 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609)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충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1. 분황사 모전석탑, 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3. 분황사 석정, 4. 지장전 터, 5. 금당 터, 6. 보광전, 7. 요사채, 8. 화장실, 9. 삼문, 10. 화장실, 11. 동종, 12. 매표소, 13. 출입문, 14. 주차장, 15. 당간지주 순이다.

 

분황사에는 분황사 국보로 지정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을 비롯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분황사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 구황동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가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분황사 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 분황사 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이 있다.

 

 

10. 보문단지

 

  

▲ 벚꽃이 지고 난 보문단지 전경

 

스쳐가듯 잠시 만난 보문호는 경주 여행에서 잠시 쉬어가며 여행하는 곳이 보문호수이다. 경주시 동쪽 명활산 옛 성터 아래 위치한 보문저수지는 195211일 착공하여 19631230일 준공되어 농업용수로 사용되다 보문단지가 조성되면서 길이 308m, 높이 22m 인공호수로 변한 약 50만 평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보문호 주변을 따라 호텔, 놀이시설, 산책로가 조성되어 경주 여행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곳이다. 보문단지는 경주 문화재 발굴과 함께 1974년 공사를 착공하여 1975년 보문관광단지로 확정하였으며, 19948월 관광특구로 지정된 오늘날 경주 종합관광단지이다.

 

보문단지 수문 방향으로 바라 본 전경

 

 

보문단지는 계획된 상업 지구였지만 오늘날 오래된 호텔과 텅빈 상가, 운영이 중단된 오리배, 보문단지 주변을 무질서하게 달리며 탐방객을 아찔하게 하는 사륜오토바이(ATV)와 전동스쿠터, 부족한 주차장으로 인하여 스쳐가는 탐방객이 늘어나고 있다. 보문단지는 연인들이 잠시 들러 가거나 물레방아 앞에서 인증샷 하나 남겨 가는 것이 전부일 만큼 볼 것이 한정되어 있는 곳이 바로 보문단지이지만 봄과 가을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벚꽃을 만끽하려는 상춘객과 단풍을 즐기려는 인파가 호수주변 산책길을 찾아 몰려들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포트존

 

 

선덕여왕 포트존은 선덕여왕과 산리시대 대신들의 회의인 화백회의 장면을 청동 조형물로 제작하여 조성하고 이곳 주변을 사랑의 하트 조명을 밝혀 두고 있다. 선덕여왕 포트존은 주차장과 인접하며, 호수를 전망하며 머물다 가기 좋은 공간이다. 호수로 돌출된 지형을 이용한 공원으로 하트 모양의 철쭉과 LOVE 모양의 철쭉 그리고 하트 조명이 선덕여왕과 화백회의를 하는 곳까지 이어지며, 포트존에는 빈 의자가 있어 앉을 수 있다.

 

▲ 보문단지 목월공원

 

 

 

보문호수를 따라 자전거 전용도도 및 산책로가 이어지며, 골프장과 오리배, 국내 최대 높이 100m를 자랑하는 고사분수대 등이 있으며, 보문호수를 돌아 볼 수 있는 총연장 8km 구간 보문호반길은 2010년 시작으로 2014년 개통되었다. 보문호 주변을 따라 약 15천여그루의 벚꽃이 있으며, 상당수가 수양버들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자전거를 빌려서 보문호를 한 바퀴 돌아 볼 것을 권하고 싶을 만큼 보문호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제각기 다른 풍경을 그려낸다.

 

 

 

연분홍빛 봄바람이 천년고도 경주시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어디라 말할 것 없이 경주 전역이 봄이 되면 벚꽃의 향연에 빠져 들지만 그 중에서 꼭 들러 가는 곳이 보문관광단지 내 보문호숫가를 따라 걷는 길이다. 가로수 벚꽃나무와 달리 호수를 따라 거닐며 만나는 벚꽃은 호수에 꽃대를 늘어뜨린 수양벚꽃의 환상적인 아름다운 모습이다.

 

벚꽃이 떨어진 보문정 봄 전경

 

 

 

보문 삼거리에서 보문호를 따라 이동하면 본격적인 벚꽃길이 열린다. 호수를 따라 조성된 벚꽃 길을 따라 여행하면서 만나는 여행의 포인트는 바로 보문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이용하여 경주 힐튼호텔 까지 이동하는 코스로 특히 힐튼호텔 옆 보문휴게소를 통해 지하로 통하는 길을 이용 건너편으로 가면 수양버들처럼 늘어지는 독특한 벚꽃의 모습과 연못에 반영되는 아름다운 장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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