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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양동마을에 잠시 거닐다.

허영꺼멍 2015. 4. 2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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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경주 유네스코 문화유산 양동마을

양동마을 - 옥산서원 - 독락당

 

 

봄날 양동마을에서 고즈넉한 시골길 발길을 옮겨가듯 봄을 담아 본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완만한 비탈을 따라 자연을 닮은 담장과 경계를 이루며, 600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향나무의 한결같은 마음에 눈으로 안부를 묻기 위해 긴긴 겨울 두터운 무게를 벗어 놓고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양동마을에 들어선다.

 

▲ 양동마을 전경

 

양동마을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소졸당 마루에 걸터앉아 네모난 공간을 올려다보며 우리 조상들의 건축기술에 감탄사를 논하곤 하였다. 향단에서는 비탈진 공간에 적당하게 자리 잡고 안채와 사랑채 부엌의 제각각 공간 배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유네스코 지정 이후 관리 문제로 관가정(보물 제442), 향단(보물 제412)은 출입을 할 수 없는 공간으로 대문이 굳게 잠겨 버렸다.

 

▲ 양동마을은 평지와 언덕을 따라 마을이 조성되어 있는 독특한 곳이다.

 

양동마을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개방되어 사람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곳에 입장료를 받으면서 닫아 버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은 동네만 돌다 가는 이상한 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외국인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발길을 돌리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과 문을 닫고 문화유산을 지켜내겠다는 편리한 방식에 참으로 기가 찰 따름이다. 우리의 문화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널리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 단순 문을 걸어 잠그면 훼손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생각은 오히려 건물을 빨리 노후화시키는 일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 해 봐야 할 것이다. 입장료는 받으면서 양동마을 내 보물급 건물 4곳에 지킴이를 두는 것이 어렵단 말인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양동민속마을은 조선 초기 마을을 이루면서 대대로 살아온 월성 손씨, 여강 이씨의 동족 집단마을이다. 손씨가 처음 마을을 이루면서 외가였던 이씨가 들어온 곳으로 일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아산 장씨가 마을을 이루면서 양좌촌으로 불렀다고 하지만 근거가 뚜렷한 인물로는 세조 5(1459) 문과에 급제한 손소가 장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마을에 들어와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 한다.

 

보물 제412호 향단

언덕 중간에 위치한 향단은 문이 굳게 잠겨 출입을 할 수 없다.

 

향단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정면에 자리한 건물로 보물 제412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언적(14911553)선생이 경상감사 재직 당시 만든 건물로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한 몸체로 2개의 마당을 두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9, 측면 1칸이며, 행랑채 뒤편 본채에는 행랑채와 같은 집을 앞 뒤 2채 두고 있다.

 

 

▲ 보물 제422호 관가정

수졸당 사랑채로 들어서는 문이 닫혀 있다.

 

"관가정"은 보물 제442호로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청백리로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농사짓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의미가 말해주듯 관가정 주변은 탁 트인 공간으로 농사짓는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마당에서 남쪽으로 있는 공간을 손님을 맞는 사랑채로 꾸미고 나머지는 안채로 이룬 집으로 안채 동북쪽에 사당을 두고 담 양쪽 옆면과 뒷면으로 막아 집 앞을 넓게 활용하면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을 하고 대문과 사랑채가 연결된 독특한 구조와 관가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 이언적 손자 이의잠이 만든 수졸당

 

회재 이언적의 손자인 이의잠이 지은 공간이다. 수졸당에 올라서니 마당에 개 한 마리가 몇 마리 멸치가 담긴 밥그릇을 멀리하고 들어서는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화단에는 자목련과 겹벚꽃이 피어나고 소담한 담장이 뱀처럼 휘어져 마당으로 들어서는 착각을 준다.

 

 

수졸당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집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1576-1635)이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사랑채는 이의잠의 6세손인 양한당 이정규가 영조 20(1744)에 지은 것이다. 나란히 붙은 사랑채에 비해 대문채의 기단과 지붕이 낮은 것은 두 건물의 격식의 차이를 나타낸다.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어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 언덕에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꾸어 반달동산이라 부르며, 담장을 따로 두른 사당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보물 제411호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종가별당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조선 중기 종가별당으로 손님접대를 하거나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이언적의 후손인 장손 여강이씨 이지락선생과 아들이 지키고 있다.

 

홍선대원군 글씨로 알려진 좌해금서

 

무첨당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종가 별채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뒤쪽에 높게 서있는 건물이 사당이고, 동쪽에 서있는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이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남성들이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를 하였던 큰사랑채로도 쓰였다. 대청의 오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라는 편액은 홍선대원군의 글씨이다.”

 

 

물봉골 중심에 자리한 무첨당(無添堂)은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만든 여주이씨 종택이다. 무첨(無添)은 조상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간다는 의미이며, 좌해금서(左海琴書) 편액은 홍선대원군의 글씨이다. 홍선대원군이 왕이 되기 전 여주 이씨 문중의 절대적 지지가 따랐고 그 이유로 홍선대원군과 여주 이씨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내려준 편액으로 좌해(左海)는 서울의 왼편인 영남지역을 말하며, 금서(琴書)는 선비가 가까이 두고 즐겨야 하는 거문고와 서책을 말한다.

 

▲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 경산서당

 

물봉골과 안골 사이 정상부근에 위치한 경산서당은 이언적 후손인 이의윤을 배향한 곳으로 19703월 포항종합제철 안계댐의 부지로 편입되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경산서당과 관리사는 외문을 만들어 측면으로 통과하도록 하였으며, 중심에 강당(講堂)과 동재(東齋)를 두고 있다. 다른 서당에 동재와 마주하는 서재가 있는 반면 동재 한 공간을 좌우로 나눠 사용한 듯 보인다. 강당은 정면 5, 측면 2칸으로 좌, 우 각각 1칸의 마루방을 두었으며, 두 짝 안여닫이 문을 마주보며 열어 올리도록 해 두었다.

 

경주 손씨 종택 서백당

 

경주 손씨 종택 "서백당"은 오늘날까지 경주 손씨 대종택이자 거주하는 공간으로 손소가 풍덕류씨 류복하의 사위가 되어 양동으로 이주한 세조 5(1459) 서백당을 지었다. 서백당을 지키고 있는 500년 된 향나무로 손소 선생이 집을 짓고 기념으로 직접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서백당 사랑채와 침방 사이 외담이 서 있다.

 

서백당에 관한 안내 글을 올려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집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인()자 백 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서백당은 ()’자 모양 대문채 안에 자 모양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과 사당이 있으며, 안채는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사랑채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특히 서백당 사랑채와 침방 사이에 외담을 세워 시선을 처리하였으며, 대청을 거쳐 쪽문이 만들어져 있다.

 

▲ 서백당에 자리한 500년 이상 추정되는 향나무

▲ 서백당에서 내려서면 만나는 은행나무길

양동민속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가옥으로 50평 남짓 16세기 만든 무첨당(보물 제311), 관가정(보물 제442), 향단(보물 제412) 및 다수의 중요민속자료 가옥이 있다. 양좌동초안 기록을 보면 1819년 까지 91호가 거주하였지만 1073165(손씨 28, 이씨 88)로 늘었다가 1970151호로 줄어들고 1979년에는 손씨 16, 이씨 80호가 거주했다.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약 500여 년간 대를 이어서 현재까지 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마을로서 20107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은 조선초기 마을을 이루면서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 여강이씨의 동족집단마을이다. 손씨가 처음 마을을 이루면서 외가였던 이씨가 들어온 곳으로 일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아산장씨가 마을을 이루면서 양좌촌으로 불렀다고 한지만 근거가 뚜렷한 인물로는 세조 5(1459) 문과에 급제한 손소가 장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마을에 들어와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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