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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밀양] 영남루에서 만난 밀양백중놀이

허영꺼멍 2015. 6. 3.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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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40       

경남 밀양시 "영남루"에 오르다

영남루-밀양강 석화-무봉사

 

▲ 밀양시 입구에 위치한 영남루 전경

 

날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영남루를 오르면서 괜 서리 콧노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밀양하면 강변과 영남루를 우선 떠올린다. 밀양시로 진입하는 밀양교 건너 오른편에 위치하여 오며가며 찾는 탐방객이 잠시 쉬어가던 영남루(嶺南樓)는 옛 객사의 부속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아랑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각,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무봉사, 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 밀양읍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천진궁, 가요계 큰 발자취를 남긴 박시춘 선생 생가 등이 있다.

 

영남루

보물 제147호

 

▲ 천진궁에서 바라 본 전경

▲ 밀양강변에서 바라 본 전경

 

밀양 영남루는 정면 5, 측면 4칸의 익공식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2층 누각형식의 조선 후기 건물이다. 본래 이곳은 객사의 부속 건물로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1844년 다시 지어졌다. 영남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이자 영남3(진주 촉석루, 울산 태화루, 밀양 영남루)로 알려 진 유명한 곳이다.

 

▲ 진입로 측면에서 바라 본 영남루

▲ 영남루 오르며 바라 본 전경

 

 

신라 법흥왕 당시 영남사라는 절을 창건하였지만 고려 현종 당시 절이 사라지고 금벽루로 불리는 작은 누각이 있던 곳을 고려 예종 당시 영남루를 만든 후 공민왕 14(1365) 당시 밀양 부사 김주에 의해 중수 된 후 지속적인 중건이 이루어 졌지만 선조 15(1582) 병화(兵火)로 일부 소실되자 인조 15(1637) 부사 심흥이 재건하였지만 헌종 8(1842) 다시 소실된 것을 1844년 부사 이인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남루는 1943년 서울 숭례문과 함께 국보 제24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121일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 영남제일루. 이인재 아들 이증석이 열살에 쓴 글

▲ 교남명루

교남지방은 경상남북도 통칭하는 말

귤산 이유원 씀

▲ 영남루 중심 현판

 

송하 조윤형 씀

▲ 강좌웅부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큰) 고을

귤산 이유원 씀

 

▲ 강성여화

강과 밀양읍성이 한때 어울려 마치 그림과 같다.

▲ 용금루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

 

▲ 영남루

이현석 7세때 씀(1843년)

이인재 밀양부사의 작은 아들임

 

영남루에는 많은 현판이 내걸려 있다. 정면에 보이는 구한말 당시 명필가 하동주가 쓴 영남루(嶺南樓)를 시작으로 고남명루(嶠南名樓), 이현석(이인재 밀양부사 작은 아들)7세때 쓴 영남루(嶺南樓), 강성여화(江城如畵), 강좌웅부(江左雄府), 영남루(嶺南樓. 송하 조윤형), 용금루(湧金樓),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이인재 아들 이증석이 열 살에 쓴 글) 외에도 많은 시와 현판이 내걸려 있다.

 

▲ 영남루에 오를 수 있으며, 영남루에 오르면 많은 현판을 만날 수 있다.

 

▲ 영남루에서 바라 본 전경

 

영남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밀양강가 절벽 위에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지은 조선시대의 누각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 밀양군의 손님을 머물게 하던 밀주관의 부속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의 간격을 넓게 하고, 마룻바닥을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좌우의 건물이 층계와 복도로 연결되어 건물의 배치에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을 유지하엿고, 전체적 규모는 한결 웅장해져 영남제일루의 명성에 어울리는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의 영남루는 고려시대 말91365)에 밀양군수 김주가 신라시대의 절 영남사터에 같은 이름의 누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를 걸치면서 여러 차례 증축과 임진왜란 등 전란때에 화재, 역대 밀양부사의 중건 등을 거쳐 1844년에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남루라 쓴 현판은 명필 성파 하동주가 쓴 것으로 유명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들이 영남루를 읆었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의 하나로 불리기에 충분한 경관과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 천진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

▲ 천진궁 내부 전경

 

현종 5(1665) 세워진 천진궁은 영남루 마주하고 있다.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 건물 이였으나, 경종 2(1722) 공진관을 대신해 위폐를 보관하는 객사의 기능을 담당, 일제에는 헌병대에서 감옥으로 사용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천진궁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폐고려 태조의 위패,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지금 천진궁은 1957년 수리 후 천진궁으로 바꾸고 정문에 만덕문이라 하였다.

 

 

천진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이다. 영남루 건물 앞에 위치한 공간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천진궁은 1665(현종 6)에 건립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으나, 1722(경종 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오른쪽 벽에는 신라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시고 있다. 1957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봄. 가을로 어천대제(음력 315)와 개천대제(음력 103)를 지내고 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의 주심포식 건물로,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워 건물의 권위와 웅장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해방 후 이를 복원하려는 지역민의 노력도 단지 옛 건물의 복원이 아니라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이 지방민의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밀양아리랑 비석

 

밀양 아리랑은 동부지역 대표적 통속 민요로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아랑의 전설로 만들어 졌다는 밀양아리랑은 아랑의 슬픈 사연은 어디로 갔는지 노래 전체 분위기는 활달하게 진행된다. 밀양아리랑이 나오게 된 것은 아랑의 정절을 흠모한 밀양의 부녀자들이 노래로 찬미하여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불렀다고 한다. 아리랑은 보편적으로 느린 것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어 아랑을 통한 아리랑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밀양아리랑은 5음계로 "라도레미솔"이다. ""로 시작해서 ""로 끝맺는다.

 

 

우리나라 아리랑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유래를 밝히는 주장이 있다. 아리랑은 "나는 사랑하는 임을 떠난다."는 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 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밀양 영남루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설,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하는 말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어 보인다. 아리랑은 대중이 쉽게 아무나 따라 부르는 노동민요이다. 어떤 악보나 악기의 반주가 필요 없는 단순 암기에 의존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리랑으로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있다.

 

 

아랑각, 아랑이야기

 

▲ 아랑각

 

아랑각은 1965년 주민에 의해 중건한 후 2004년 새롭게 아랑각을 단장하고, 현판은 1910년 구한말 명필가인 하동주가 쓴 것이며, 1972년 육영수 여사가 김은호에게 의뢰하여 만든 영정과 함께 1957년부터 매년 음력 416일 아랑제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

 

▲ 아랑각 현판

▲ 김은호가 그린 영정

▲ 정순아랑지비가 세겨진 아랑유지비

 

아랑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명종(1545-1567) 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전설의 주인공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아랑은 당시 밀양부사의 딸로 성은 윤씨, 이름은 동옥 혹은 정옥이다. 어느 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핍박을 받자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 한다. 그 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비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다.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중창한 것이다. 사당 안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관을 봉안하였다.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이다. 매년 아랑제 행사에서 규수를 뽑아 제향을 받들고 있다.”

 

아랑유지비는 전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유기된 장소라 전하고 있다. 비석에는 아랑유지라는 글과 뒷면에는 융희사년오월일 즉, 1910년으로 이웅덕, 박상희 립이라 새져겨 잇는데 이 두 사람은 당시 관청에서 은퇴한 고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아랑각 내 그려진 그린

 

아랑의 본명은 윤정옥(尹貞玉/다른 구전에는 "동옥"이라함)으로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로 관노인 통인 주기(일부 "백가"라고 전함)가 신분을 망각한 채 사모하던 중 달 구경을 나온 아랑을 추행하려 한다. 아랑의 반항이 거세지가 비수를 꺼내 위협하려다 아랑은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르고 대숲에 버려졌지만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고 달아났다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윤부사가 떠난 후 밀양에 부임하는 신임부사는 부임하는 첫날 의문의 주검을 당한 채 발견되는 일이 이어진다. 급사한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자 누구도 부임하려 들지 않아 폐군이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누구라도 부임을 자청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자 젊은 붓장사 한명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사나 한번 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밀양부사를 자원하고 밤을 맞으니 피투성이의 처녀가 나타났다. 기겁을 한 신임부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귀신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지 묻자 귀신은 자신이 아랑으로 그 자초지경을 아뢰며 원한을 갚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자신을 겁탈하려다 죽인 관노의 갓 위에 나비가 되어 앉겠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 아랑각 내부에 그려진 그림

 

다음날 부사는 관속을 전부 모아두니 과연 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어 관노의 갓 위에 앉는지라 부사는 관노를 문초하니 결국 그 죄상이 밝혀져 대숲을 살펴보니 아랑의 시신이 썩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랑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만들며 매년 음력416일 제관을 뽑아 원혼을 달래는 제향을 드리니 더 이상 원혼이 나타나지 않고 고을이 잘 되었다고 전하며 밀양아리랑이 이곳 영남루에서 비화되었다 한다.

 

무봉사에서 만나는 특별함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인 무봉사(무봉암)는 영남루에서 밀양아리랑 비석 오른편 아랑각으로 내려서기 전 언덕길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헤공왕 9(773) 법조(法照)가 큰 봉황새가 날아가 앉자 상서로운 곳이라 여기고 절을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와 고려 고승이던 범률국사가 하안거를 하다 이곳 지형이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 숲에 가려져 보이는 무봉사

 

공민왕 8(1359) 영남사가 소실되면서 무봉암은 재건 후 무봉사로 부르지만 선조 25(1592)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이후 중창과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절에는 지형상 협소한 공간에 대웅전, 삼성각, 종루, 요사채가 있으며, 중심건물인 대웅전에는 보물 제493호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무봉사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당시 무봉사가 위치한 아동산에 태극무늬가 잇는 나비 떼가 몰려들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지고 삼국이 통일되었다하여 이후 태극나비가 나타나면 경사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 여기며 국성접이라 부르며 보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19544월에는 정부에서 태극나비 우표를 만들어 기념하였다고 한다.

 

 

무봉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말 국운이 기울어 사회혼란이 가중되던 어느 해,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기 직전 후백제 견휜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느날, 춘삼월도 아닌 음력 2월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아동산)을 뒤덮으며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있었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 다녔던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당시 통일신라는 국론이 분열되는 등 모신 혼란에 휩싸여 있던 때라, 사람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어지럽던 사회 혼란은 멈추고 마침내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왕면과 함께 국성접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조 5백년과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앗다가 1945815일 오후 3시쯤 태극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들었으며. 그해 819일과 1025일에도 각각 나타났다고 하며 그래서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 무봉사 보물 제493호 무봉사석조여래좌상

 

혜공왕 9(773) 법조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 여래불좌상은 본래 영남사 터에서 광배와 대좌가 없이 발견된 불상으로 높이가 97cm의 좌상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773(혜공왕 9)에 법조가 영남사의 암자로 창건했다는 무봉사 대웅전에 모셔져 잇는 높이 97cm의 앉은 불상이다. 원래 불상 뒤의 광배와 앉는 대좌가 없는 채로 영남사 터에 있었던 것을 근처에서 출토된 광배와 대좌를 맞추어 여기에 모셨다.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에 알맞은 가슴이다. 목에는 세 줄의 삼도가 뚜렷하고 양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텁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는 두 줄의 불룩한 선으로 머리의 빛과 몸의 빛으로 구분되었고, 안에 넝쿨과 연꽃을, 밖에 불꽃을 아름답게 새겼다. 다시 정면에는 다섯의 작은 부처를 새겼고,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드물게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것은 경주 남산의 미륵곡석불좌상에서 보이는 정도로 드문 예이다. 한 개로 된 사각형의 대좌에는 두꺼운 연꽃무늬가 단순 명료하게 새겨졌다. 부처는 단정하고 양감 있게 표현되었으면서도, 법의의 주름이 간략해지고, 광배의 꾸밈이 화려하고 복잡해진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밀양읍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

 

▲ 밀양읍성 전경(일명 남천강 해천)

 

밀양 읍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조성하였는데. 밀양읍성은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을 철거하면서 우리나라 대부분 성이 사라졌다. 밀양읍성은 조선 초 성종 10(1479) 축조, 1902년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면서 파괴되었다. 성은 길이 2.1km, 높이 2.7m로 성안에 객사와 동헌, 관아, 연못, 우물 4개가 조성되었으며, 선조 23(1590) 성곽을 정비하면서 밀양부사 신집(1541~1609)이 성 둘레에 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어들여 성을 지키려 하였는데 당시 연못 1개와 우물 8개를 팠다고 한다.

 

 

박시춘 선생 생가

 

 

 

우리나라 가요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박시춘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져 있다. 박시춘 선생의 본명은 박순동으로 1913년 탄생하여 1996년 타계하셨다. 1931"애수의 소야곡"을 작곡 후 문공부장관상, 6.25종군유엔표창, 1982년 신세계음향회장을 역임하였다.

 

 

영남루 석화

 

▲ 영남루 석화. 석화는 영남루 천진궁 앞에 보호각 내 있으며, 아랑각을 내려서면 군락을 이루고 있다.

 

▲ 천진궁 앞 석화

▲ 아랑각 아래 석화

 

영남루에서 석화를 만날 수 있다. 석화(石花)는 영남루 경내와 주변에서 확인되는데 그 형태가 국화꽃 모양이 무리지어 형성되어 있다. 안내글에 의하면 비온 후에 그 자태가 더욱 선명하다 한다. 석화가 무리지어 있는 곳은 영남루 입구 또는 아랑각 밑으로 내려서면 강변을 따라 수 없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밀양 백중놀이

 

 

▲ 밀양 백중놀이 작두말타기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가 밀양 영남루 앞에서 방문객의 박수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오늘날 농사일은 사람을 대신하여 기계가 거의 해결을 하지만 기계가 없던 시절 오직 호미를 들고 논매기를 하였고 음력 715일 백중날이 다가오면 고된 호미일손을 놓는 호미씻이(다른 지방에서는 풋굿, 초연, 써레씻이, 길꼬랭이, 꼼배기놀이, 세서연라 한다)를 한다. 지역 양반들은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며 이날만큼은 머슴이 대접을 받는 두레굿으로 백중놀이라 하며, 놀이는 농신제를 시작으로 작두말타기, 춤판, 뒷풀이로 이어진다.

 

 

 

농신제가 시작된다. 대자연 삼라만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쑥대향을 피워놓고 막걸리로 잔을 채우고 축문을 읽고 절을 한다. 그리고 음식을 나눠먹는다. 오늘 올라온 음식은 밀떡과 밀과 콩을 뽁은 것으로 모여든 관중에게 골고루 나눠 준다. 밀양 백중놀이에서 제를 올리고 나눠 먹는 참이 꼼배기참으로 밀을 갈아 맡을 박아 찐 떡과 밀과 통을 볶은 것과 함께 술상을 차려내는 음식이다.

 

 

▲ 양반들의 가마를 대신하는 지게로 만든 작두말을 타고 흥을 돋운다.

 

하늘 위 상제님, 천상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멸구 잡충 없이하여 금년농사 잘도 해서, 천지착한 어진백성 걱정일랑 덜어주고 총각신세 면케 하소.”

 

작두말타기가 시작된다. 백중놀이 시작하기 열흘 전부터 머슴 중에서 최고를 뽑아 좌상(座上), 무상(務上)이라 부르며 삿갓을 뒤집어쓰고 지게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운 후 풍악을 울리며 공연장을 서너 바퀴 돌아가며 흥을 돋운다. 작두말이 앞장서고 뒤에 북채가 따른다. 올라탄 최고의 머슴은 나팔을 세 번 길게 불며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지게목발 이전에는 머슴들이 소등을 타고 하던 놀이라 한다.

 

▲ 머슴이 양반으로 분장한 째보양반의 춤사위

 

 

 

▲ 쨰보양반이 벌리는 한바탕 춤사위

 

양반 복장을 한 머슴이 춤을 춘다. 양반처럼 하얀도포자락 휘날리며 손에 부채를 들고 갓을 쓴 양반은 머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든 사람으로 째보양반이라 부른다. 춤사위는 느릿하게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폭이 넓고 신명나게 논다.

 

 

▲ 병신춤을 보여주고 있다.

 

공연 중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병신춤이 펼쳐진다. 병신춤은 당시 머슴보다 못한 양반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며 골탕 먹이는 춤으로 흉내 내는 표정이 압권이다. 병신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이 있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몇 병신춤꾼이 신명나게 한바탕 논다.(병신춤에는 난쟁이, 중풍장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곱추, 히줄대기, 봉사, 절름발이 등이 등장한다고 한다.)

 

 

▲ 병신춤을 함께 열연을 하고 있다.

 

범부춤은 상투에 망건을 쓰고 못살게 굴던 아전을 빗대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진다. 움직이는 보폭이 넓고 관중을 향해 순식간에 접근을 하며 흥을 돋운다. 춤을 추며 신명나게 놀다보면 병신춤꾼이 다가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다섯 장정이 큰 두레북을 매고 굿거리장단에 북을 두들기며 춤을 춘다. 다섯 머슴이 추는 북춤으로 이를 오북춤이라 한다밀양 백중놀이의 이름도 몇 번을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미씻이, 꼼배기놀이, 병신굿놀이 등으로 바뀔 정도로 백중놀이에는 다양한 장르가 표현되고 있다. 백중놀이는 198010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밀양 백중놀이 이름이 몇 번 바뀌면서 오늘날 제각기 다른 형태의 놀이였던 꼼배기놀이와 병신굿놀이가 하나 되어 공연되는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꼼배기놀이란 꼼배기참을 먹으며 논다하여 불러지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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