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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산책로 - 충북 제천 덕주사를 찾아서 제2편 중원미륵리사지

허영꺼멍 2015. 8. 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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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           

신라 패망 그 이후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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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미륵리사지

 

▲ 중원미륵리사지 전경

 

월악산 국립공원 하늘재 아래에 위치한 우리나라 유일의 북향 절터인 미륵사지(사적 제317)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다만 신라가 패망하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머물렀다 전하는 덕주사와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지에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특수한 지역이며, 옛 사찰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유적이 수습되고 그 중에서도 석불입상과 석탑, 석등, 주춧돌, 돌거북, 큰 공기돌 바위가 대표적이다.

 

미륵사지 일명 미륵대원지는 평지에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마의태자 일행이 월악산에 두 쪽으로 나누어 덕주공주는 덕주사를 창건 및 남향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오빠 마애태자는 석굴사원과 목조건물로 미륵사를 만들고 북향을 바라보는 미륵을 세웠다 전한다.

 

▲ 국내 최대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충주 미륵리사지 귀부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로 사찰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을 하고 있는 거북형의 귀부로 길이 605cm, 높이 180cm로 국내에서 가장 큰 거북형 비석 받침돌이다. 거북등의 상직적 문양은 새기지 않고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양각되어 있으며, 등에 비좌가 있지만 홈이 너무 얇아 과연 비신을 올려 세웠는지 의문이 가며, 비신은 유적지에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충주 미륵리사지 사각석등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기단석과 화사석이 다 갖춘 석등으로 평면 8각형이 대부분인 석등과는 달리 4각형이며, 화사석은 고려시대 일부 석등에서 확인되는 기법을 동원하였다. 이와 유사한 석등으로는 개경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사각석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비법으로 고려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부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고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미륵리 석등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석불입상과 5층석탑 사이에 있는 석등으로 균형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4각 받침에 연꽃을 새기고 8각형 돌기둥을 올렸다.

 

석등은 아래 기단부를 시작으로 연꽃모양의 하대석과 사각돌로 다듬은 간주석에 뒤집어 놓은 하트 모양의 안상을 한 면에 새겨놓았으며, 사각 간주석 위에 상대석을 놀리고 그 위애 네 개의 화사석으로 기둥을 세운 후 옥개석으로 지붕을 올리고 마지막 보주로 장식한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다.

 

석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양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미륵리오층석탑은 보물 제95호로 높이 6m로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가 하면, 일반적인 탑과 달리 웅장하지만 각 층의 체감률이 고르지 못해 투박해 보인다.

 

 

충주미륵리 오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높이 6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목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물 제96호로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북향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는 석굴 사원으로 법당을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은 상태로 웅장함과는 달리 소박한 표정과 얼굴부분은 하얀색을 띠어 다른 부분과 차별이 확연하며, 조각솜씨로 통해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원 미륵리사지 석조보살의상은 도유형문화재 제47호로 장방형의 괴석 표면에 존상을 부조했는데 사각형의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석조 보살은 외부 벽면에 새겨 넣기 위해 제작된 사각형 돌에 새긴 부처로 길이 95cm, 두께 50cm, 68cm 이다.

 

미륵리석불입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거대한 원통에 가까운 모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 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미륵입상 앞 재단 왼편에 세워져 있는 석조보살의상

 

중원 미륵리사지 석조보살의상은 현재 도문화재자료 제47호이다. 미륵입상 앞 재단 왼편에 사각 돌에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장방형의 괴석 표면에 존상을 부조했는데 사각형의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리고 있으며 오른발은 왼쪽다리 뒤쪽으로 구부렸다. 머리에는 보관을 쓴 것처럼 보이며 관장식은 양귀를 싸고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인 듯하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려 손목을 몸으로 향하여 손바닥을 복부에 대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리면서 위로 쳐들어 목 아래에서 법의자락을 살짝 잡은 듯이 보인다. 이 존상은 본래 석굴내부 감실에 삽입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95cm, 두께 50cm, 68cm 이다.“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한 주변 석굴 서측석벽에 붕괴 위험성에 따라 2015년 해체보수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석굴사원 흔적으로 벽에 불상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원미륵리사지는 사적 제317호이다. 석굴사원은 중앙에 주존불인 미륵여래입상을 세우고 석굴 벽에는 여래좌상 삼불좌상 등이 있고 발굴당시 '미륵당 명창삼년금당개개와' 명문을 통해 고려 명종 22년 금당의 기와를 새로 고쳐 세우고, 명창3년 대원사주지승원명이란 명문을 통해 미륵사지 본래 명칭이 미륵대원사로 추정 하고 있다.

 

▲ 미륵리사지 전경

 

미륵사에는 석굴사원에 있는 높이 6m 석불입상(보물 제96)을 비롯하여 국내 최대크기 인 길이 6.5m의 돌 거북 비석 받침대 및 5층 석탑(보물 제95),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9), 연꽃이 화려한 당간지주와 계곡 건너 큰 거북바위 위에 직경 1m 남짓한 둥근 바위가 있다. 둥근 바위는 바보온달이 가지고 놀던 공기돌이란 전설이 있지만 이 일대가 미륵사지로 불교와 관련이 있는 조성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석탑구조와 불상안치 등 고려시대 사찰 터로 추정하고 있지만 팔각석등 및 11가람 배치 흔적으로 사찰은 고려시대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미륵대원터 또는 중원 미륵리사지로 사적 제317호는 삼국유사에 "미륵대원계립령등령야"라는 기록을 통해 계립령(하늘재)길과 연관되어 고려 초기에 설치 운영되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기능을 다 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터에서 고려 초기 사찰 유적이 대량 확인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 충주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미륵대원지 입구에 위치한 당간지주 흔적을 만나게 된다.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충주미륵대원지 안내글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있는데 간대 윗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1.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2.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보살의좌상 3.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4. 충주 미륵대원지 오층석탑

5.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6. 온달장군 공기돌 7.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8. 당간지주 9. 전통사찰 미륵세계사

10. 미륵리원터 11. 충주 미륵대원지 삼층석탑 12. 미륵리 불두 13. 대광사

 

▲ 미륵리 원터

 

 

 

 

 

미륵리사지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길목에서 고려시대 충주 미륵리 원터를 만나게 된다.

 

현재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와 인접해 있지만 각기 다른 기능으로 원을 만들어 사용하다 조선시대 조령길이 열리면서 미륵리는 점점 사람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주 미륵리 원터 안내글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네모 안에 네모를 둔 형태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의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 미륵리 삼층석탑

 

하늘재 갈림길 반대편 언덕 위 자리한 미륵리 3층석탑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중원미륵사지의 동쪽 200m 떨어진 한적한 곳에 탑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미륵리 불두

하늘재 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서면 미륵리 불두를 만나게 된다.

 

미륵리 불두는 충주시 향토유적 제9호이며, 높이 138cm, 최대너비 118cm 의 대형 화강암으로 만든 불두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고려시대 지방 불상양식을 엿볼 수 있는 미완성 석불의 불두로 추정하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를 시작으로 미륵리 불두가 있는 곳에서 왼편 산자락을 따라 들어서면 약 2km 구간의 하늘재로 향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하늘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충주 미륵대원지를 거쳐 하늘재로 향하는 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3(156)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죽령보다 2년 앞선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에도 길목이 되어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보물 제96호호 지정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조성하였으며 태자의 누이 덕주공주는 석조여래입상과 마주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마애불을 조성하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계립령은 시기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신라시대에 계립령, 고려시대에 대원령으로 불리웠으며 대원령을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한울재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한휜령은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 한 것으로 부근에 한휜령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신라의 패망이 어찌 한 목숨 살고자 칼날 앞에 굴욕이겠는가. 비록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오늘날 삼국을 통틀어 가장 많은 찬란했던 문화유산을 남겨 놓은 곳이 경주가 아니던가. 경순왕을 따라 함께 고려로 가지 않을 만큼 신라 패망에 누구보다 더 가슴 아파하였을 마의태자의 선택이 오늘날 새롭게 재조명되길 희망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붓을 들었고 패자의 기록은 삼국사기를 통해 너무나 빈약하여 그 흔적을 구전에 의지 할 뿐인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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