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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7-2 경주 '장항리 사지'를 찾아가다. |
▲ 장항리사지 전경 2015년 10월 방문 당일 서탑 복원수리 과정에 있어 일부 사진은 지난 여행 사진으로 대처합니다.
경주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만큼 볼 것도 많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연결하는 여행코스도 많이 있지만 오래전부터 경주에서 조금 홀대받는 듯 보이는 여행지로 ‘장항리사지’를 찾아 여행길을 나선다. 장항리사지는 경주에서 뚝 떨어져 있는 외곽지대로 다들 기피 하지만 사실상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는 탐방객이라면 석굴암 여행을 마치고 10분만 투자하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가까운 곳이다.
▲ 2015년 10월 현재 서탑은 복원수리 중이다.
장항리 사지에 도착하니 언덕 위 탑을 보수하느라 철책으로 둘러쳐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나도 모르게 허탈감이 입에서 나온다. 최근 경북지역을 둘러보는데 한결같이 문화재 탑들이 보수를 하였고 기간이 길어 제데로 만나지 못했다. 오늘 찾은 장항리사지 역시 공사완료 시간은 8월말이었지만 9월초에 찾앗는데 역시나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장막을 한번 치면 왜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 주차장에서 바라 본 전경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계곡을 건너 나무데크를 따라 오르면 장항리사지에 도착한다. 이곳 장항리 사지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경주에서 만나는 수 많은 탑 중에서 5층 쌍탑은 신라를 통틀어 경주 나원리석탑(국보 제39호)과 경주 장항리석탑(국보 제236호) 뿐이며, 나원리석탑에 비해 탑 몸신에 새겨진 조각은 신라시대 불심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염원을 담았다. 장항리사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토함산 동쪽이자 동해에서 경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장항리사지 석조대좌
▲ 장항리사지 석조석불대좌 사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조각이 제일 잘 나타나 있다.
장항리석불을 모셨던 곳으로 양 사방을 따라 다양한 조각을 새겼지만 대부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버렸다. 석불에 세워져 있던 장항리석불은 지금 경주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항리석불
장항리사지에서 수습되어 경주박물관 야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항리사지 석불은 현재 광배와 무릎 아래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면 입상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지만 장항리사지에서 확인되는 대좌의 구멍으로 추정해 볼 때 입상이 아니고는 그런 비석받침 구멍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불상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장항리 절터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과 불상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을 하반신이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입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크기가 대략 4.8미터, 옛날 척도로는 1장 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들여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부처의 키가 1장 6척이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항리사지 동탑
불상을 놓았던 대좌가 남아 있는데 아래 위 두 개로 되어 있다. 아래 돌은 여덟 방향에 창 모양의 안상을 만들고 네 곳에는 동물을, 다른 네 곳에는 신장을 조각하였다. 위에 얹은 돌은 아래 위로 붙은 연꽃을 16송이씩 조각하였다. 이 곳에 깨어진 불상이 있엇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일부를 붙여 세웠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절 배치에서 보이는 금당 앞의 종문이나 뒤의 강당, 화랑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 서탑에 비하여 동탑 조각이 조금은 뒤떨어져 보인다.
1920년대 인근 금강굴이 생겨나면서 숲속에 가려져 있던 절터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923년 4월 28일 일본인 도굴꾼은 당시 경주 최고의 석탑을 통해 부장품을 노렸고, 토암산 인근 금광에서 사용되던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매설하고 폭파 후 사리함을 훔쳐가 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치로다는 1929년 8월 장항리 절터를 조사하기 위해 찾았을 때 계곡 주변 탑의 부재가 흩어져 있었다 한다. 1923년 도굴 된 이후 6년이 지난 시기에도 누구하나 장항리사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탑이 도굴로 훼손된지 9년이 되던 1932년 10월 25일 장항리 사지 훼손된 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를 착수하게 된다. 당시 복원을 하면서 장항리사지 석탑을 두고 신라고적 석탑 중 가장 최고 최미의 대표적 석탑이라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미를 가진 석탑이었을까 궁금해 진다. 서탑 복원과 달리 동탑은 1966년 대종천 계곡에서 발견된 조각을 수습하여 올려두었다.
장항리사지 서탑(국보 제236호)
석탑의 복원은 서오층석탑은 원형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으나 동오층석탑은 기단부분이 사라져 탑날개만 포개 놓았을 뿐이다. 석탑 1층 탑신 4면에 각 2명의 왼쪽 밀적금강, 오른쪽은 입을 크게 벌려 조각하는 나라연금강 인왕상을 양각 해 놓아 이 탑이 호국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서오층석탑은 높이 9m이다.
현재 지붕돌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하층 기단은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다. 1층 몸돌 4면에 도깨비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두짝의 문을 각각 조각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서있는 인왕상을 정교하게 새기어 희귀한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 연꽃대좌 위 올라서 있는 아주 우수한 작품이다.
장항리 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추정되며, 금당지 좌우 동쪽과 서쪽에 있는 오층탑은 1923년 불탑은 일제에 의하여 도괴되고 1932년 서탑만 복원하였으며,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는데 파손된 불상은 입상으로 경주박물관 입구 왼편 야외전시장에 자리잡고 있다. 탑정사로 알려진 장항사지터는 철저하게 유린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유독 불상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윗부분과 광배만 남은 채 발견된다. 특히 불대좌 위 좌불을 모신 것이 아니라 입불을 모셨다는 것이다. 손목이 잘려나간 입불을 모신 불대좌는 두종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 또한 의문으로 밑에 놓인 받침 측면에 뛰어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위쪽은 연꽃이 개화한 모습으로 감싸고 있다.
탑을 지키는 금강역사는 인도의 신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지키는 수로자로 수문장 임무를 맏고 있다. 사면에 새겨진 금강역사는 한면에 좌,우 각각 1명씩의 금강역사를 새겼는데 왼쪽 밀적금강,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으로 입을 닫고 있는 밀적금강과, 입을 열고 있는 나라연금강으로 부처의 사리를 지키고 있다. 입을 벌린 ‘아’는 범어의 첫 소리 입모양이며, 입을 닫은 ‘훔’ 은 범어의 마지막 소리 입모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의 말을 지키고 따르겠다는 표현이다.
장항리 석탑이 주목받는 이유는 금강역사 수문장이 지키는 문의 중앙에 용의 얼굴을 한 두 개의 문고리가 있다는 점, 서탑 금강역사 머리 두광 표현과 연꽃 위 서 있는 것은 국내유일한 조각이다. 이와 반대로 동탑은 연꽃이 아니라 돌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인하여 동탑과 서탑 조각 장인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추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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