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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트레킹 - 경주 골굴사 ~ 기림사

허영꺼멍 2015. 10. 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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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671-1    

경주시 그리고 골굴사 & 기림사

 

골굴사에 도착하다.

 

▲ 보물 제581호 골굴사 마애불

 

함월산 기슭에는 예로부터 굴법당을 짓고 전각을 세웠던 골굴암이 존재했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형체는 사라지고 일부 작은 동굴 속에 모셔둔 총 12개의 석굴과 붉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이 남아 온화한 모습으로 자비를 실천하고 계신다. 골굴석굴(조선시대 겸재 정선)그림에는 목조전실이 그려져 있지만 지금은 형체도 없는 골굴사를 찾아 여행을 떠나 본다.

▲ 주차장 앞에 자리한 백구 '동아보살' 조각상

골굴사 입구 주차장이 위치한 곳에 백구 조각상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동아보살로 공덕기에 관한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동아는 내가 골굴사 주지로 부임한 1990년 겨울에 태어나 나에게 입양되었으며,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하여 동아라고 불렀다.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 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하며 기도객들을 안내했다. 보통 진도견들은 가축이나 산짐승을 해치는 습성이 변하지 않았지만 동아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되어 세간에 유명세를 타면서 20여차례 강아지를 분양하여 1200여만원을 사중에 보시하여 대적광전과 선무도 대학 건립에 공덕을 지었으며 유럽에 까지 그의 강아지가 분양되었다. 만년에는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을 참석했다. 지난 음력 215일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봉불식을 하루 앞둔 329일 오전에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그 나름의 생을 입적하기 위해 동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절을 떠났다. 10여일이 지난 뒤 오륜탑 언덕 넘어 양지바른 곳에 동아의 죽음을 거두었다. 사중에서는 동아의 49재를 기부하고 매년 음력 215일 동아의 기제사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보살이라 불렀다. 다음 생은 꼭 사람으로 환생하여 골굴사에 출가하는 인과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이다. 2010516일 함월산 골굴사 주지 설적운 합장.”

 

▲ 골굴사 오륜탑

무술을 연마하는 마당 앞에 세워져 있다.

 

골굴사의 역사는 1500년 전 천축국에서 건너온 광유성인이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중 골굴사는 인도사원 양식인 석굴사원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골굴사는 조선중기 화재로 소실되고 폐허로 방치되자 박씨 일가에 의하여 태고종에 등록된 사설사암으로 전해져 왔지만 1989년 개인에게 매매된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를 역임한 설적운 스님이 다시 매입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로 등록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이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오르면 대적광전, 오륜탑, 선원으로 향하며, 오른쪽 계단길을 오르면 마애여래불, 관음굴, 지장굴, 산신당, 약사굴로 향하게 된다.

 

▲ 푸른눈의 외국인이 많이 있는 숙소인 원융당

▲ 골굴사 대적광전

 

▲ 독특한 바위에 자연으로 생긴 굴에 안치된 여러 부속 전각

중앙에 관음굴이며, 오른쪽 보호각에 마애불이 있다.

▲ 바위 내 다양한 전각형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 여궁. 산신각

 

제일 큰 석굴인 관음굴을 비롯하여 지장굴, 약사굴, 라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이 있으며, 전설을 뒷받침하는 남근, 여궁 바위와 선무도가 있다. 관음굴에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하고 벽면에는 청동 108관음보살상을 원불로 봉안하고, 한때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 전하지만 지금은 없지만 이 굴법당에서 잠을 자고 나면 병들고 허약한 사람은 생기를 되찾는다 전하며, 선무도 법당에서 관음굴 사이에 있는 남근석 및 여궁바위는 생남기도처로 아들을 얻지 못한 부인이 산신당 바닥에 자연적으로 패인 여궁을 덮은 판자를 깔고 앉아 밤새 기도하면 다음날 여궁에 물이 고임으로서 기도 성취를 증명해 준다는 야릇한 전설이 있다.

 

▲ 남근바위

▲ 여궁 산신각

 

 

골굴사 산신당 여궁과 남근 바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왔다. 산 전체가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골굴사는 불교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바위를 신성의 대상으로 삼아 기원하는 샤머니즘 신앙이 발달했다.

 

이러한 연유로 좌측의 남근 바위와 정면의 산신당 여궁은 삼신을 빌어 자손을 기원하는 동경주 지방 정신문화의 산실이었다.

 

▲ 관음굴법당

 

예부터 자손이 귀한 집안의 부녀들이 남근바위를 참배하고 난 뒤 산신당의 여궁(마루아래 위치)을 깨끗이 소재하고 그 위에 앉아 밤 새 기도를 하면 이튿날 아침 여궁에 정수가 가득히 고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소원정취의 징표이기도 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정월이면 그 인연으로 태어난 자손들과 가족들의 참배가 줄을 잇는다.”

 

▲ 마애불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 본 대적광전. 1층은 보제루이며, 2층은 대적광전이다.

 

 

골굴사 마애불

 

▲ 마애불로 향하는 석문.

사람이 몸을 숙여 빠져 나가야 하는 자연 굴이다.

 

 

관음불 측면 밧줄을 붙들고 오르면 기묘한 동굴형상의 바위길이 나오며, 바위길을 돌아 나가면 아찔한 높이와 경사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여느 마애불과는 달리 자연적인 바위색이 마치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 암벽이 짙은 황토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보물 제581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선한 미소가 돋보인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골굴암의 주존불로 동남쪽을 향한 암벽의 약 4m 높이에 새겨져 있다. 높다란 상투 모양의 머리와 뚜렷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띤 형태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신라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건장하지만 평면화된 신체, 얇게 빚은 듯 계단식으로 평행되게 한 옷 주름, 무릎에서 형식적으로 나타낸 물결모양의 옷 주름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과 몸의 굴골을 표시한 V자형 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광배는 불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기림사사적기에는 골굴암에 열두 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그 주불인 듯하며 만든 시기는 9세기경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경주 골굴 석굴도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어 있으나 지금은 곳곳에 가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

 

▲ 마애불 재단 앞에 적혀 있는 글

▲ 마애불 벽면 아래 흠폭 패인곳에 새겨놓은 낙관을 닮은 글

▲ 마애불 불꽃광배 아래쪽에 새겨진 글

 

지금은 비록 부식되고 일부 떨어져 나갔지만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고 뚜렷한 모습을 하고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조각된 불상은 마치 살아있는 입체감을 통해 그 신비를 더해준다. 보통 화강암의 어두운 조각품보다 밝은 모습이라 생동감을 더해주며, 햇빛이 통과할 때면 더욱 온화한 모습과 부처 주변에는 많은 글씨가 적혀있는 흔적이 남아져있다. 조각품은 삼국시대로 추정되며하지만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 주름으로 보아 철안 도피안사,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하여 통일신라후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 마애불에서 내려서는 가파른 계단길

▲ 골굴사 금강약수

 

 

 

 

골굴사에서 유명한 것으로 약수이다. 기림사와 함께 오정수로 유명한 이곳에 금강약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지금은 식수로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금강약수를 마시면 기운이 왕성하여 허약하고 병든 사람이 먹으면 건강을 회복한다는 전설이 있지만 지금은 약수터가 메말라 버렸다.

 

골굴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선무도이다. 불교무예는 육체만 아닌 정신세계의 깨달음을 추구를 기본 바탕으로 선무도가 되살아나고 있다. 선무도는 일반무술과 명상, 요가, 기공, 참선을 통해 정신세계의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 육체적 무술단련이 함께 병합되어 참다운 무술인을 배출한다. 골굴사는 최근 선무도의 요람이라 말할 수 있다. 선무도 관람은 오전 11:30분, 오후 15:30분 대적광전 앞에서 펼쳐지며, 월요일은 휴무이다.

 

기림사

 

▲ 기림사 일주문

 

골굴사와 인접한 거리에 위치하여 골굴사를 방문한 후 곧장 기림사로 향하면 된다. 기림사는 포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골굴사로부터 약 4.2km 구간에 위치하고 있다.

 

▲ 기림사 사천왕사가 지키는 천왕문에 도착한다.

 

함흘산 자락에 한때는 불국사를 거느린 대사찰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지금은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전락해 버린 안타까운 사찰이 있으니 천축국 승려 광유가 창건한 임정사로 훗날 원효가 확장하면서 오늘날의 기림사이다. 찬란했던 한때의 명승을 말해주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의 중요 문적과 근세조선의 역대 왕의 어필이 보관되어 있다.

 

▲ 사찰 안내도

 

사찰에는 기림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을 필두로 삼천불전, 관음전, 명부전, 약사전, 웅진전, 삼성각, 진남루, 매월당 사당이 자리하고 특히 대적광전의 창살문양은 변산반도에 있는 내소사의 창살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하다.

 

▲ 기림사 오정수

 

오정수를 두고 장군수는 나한전 삼층석탑 아래에 묻혀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장군이 난다하여 혹시 반역자가 나올까봐 우물위에 석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도 밤탑 밑에 귀를 기울이면 물방을 소리가 들린다. 전하며, 감로수는 북암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물빛은 우유빛이지만 일단 뜨면 무색이라고 한다. 오탁수는 물맛이 좋아 까마귀가 쪼아 먹었다 전하는데 지금은 두 군데만 물을 먹을 수 있다. 장군수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 발각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이 혹시 장군이 날까봐 삼층석탑으로 막아 버렸다고 그러는 설도 있다.

 

 

진남루로 들어선다.

 

진남루는 남방에서 진압한다는 뜻으로 일본을 두고 한 말인데 당시 임진왜란을 통해서 기림사는 전략적 요충지로 의병과 승병 활동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승군 지휘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진남루

 

기림사 진남루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의 기능이나 용도 및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진남루란 명칭은 사적기에 의하면 무량수전야차유진남루라 하여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임란 때 기림사가 수군과 승병활동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정면 7,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누()라고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전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용도가 바뀌게 되면서 창호가 개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정면이 긴 건물에서 목조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는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건축이다.”

 

 

옛 절간 흔적 기림사 내 공간

 

 

▲ 왼편 웅진전과 그 앞에 삼층석탑 그리고 정면에 대적광전이 위치하고 있다.

 

▲ 기림사 유일한 석탑

 

기림사 연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함월산 기림사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때에 이미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다.

 

대적광전(보물 제833)은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이며, 유물전시관에 있는 건칠보살상(보물 제415)은 반가부좌 형태를 취한 보기드문 보살상이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의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대적광전에서 불사리와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의 금은자사경(보물 제959)들은 기림사의 오랜 역사와 사격을 나타내는 성보이다.”

 

 

중심법당 대적광전

 

▲ 보물 제633호 기림사 대적광전

▲ 보물 제958호 기림사소조비로자나삼존불

대적광전은 선덕여왕때 만든 이후 무려 8차례나 다시 지었는데, 1997년 해체공사를 할 당시 종도리에서 4종 묵서가 발견, 1755년 개조중수, 17656차 중창, 19787차 중수 가 기록되어져 있으며, 본존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왼쪽은 노사나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전형적인 삼신불허 흙으로 만든 불상이란 점이 독특하다.

 

또한 불상의 모습이 거의 같아 보이지만 손의 위치가 각기 다르며, 비로자나불의 무릎 위 옷주름이 한 겹 더 접혀 있다.

 

기림사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8)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위시하여 좌우 노사나불, 석가불 모신 형태로 향나무 틀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삼신불로 대적광전에 모신 16세기 초 불상이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633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적광전은 비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12(643)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조선 인조 7(1629)과 정조 17(1793)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철종 13(1862)에는 큰불이 일어났으나 대적광전만은 화를 면하였고, 1878년과 1905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은 정면이 5, 측면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자 모양을 한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답게 크고 웅장하며, 비교적 넓은 공간인 안쪽은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건물은 산사의 건물들이 주 칸은 좁고 기둥은 높은 성향을 지닌 것과는 구별된다. 견실한 구조와 장엄한 공간 구성이 돋보이며, 옛 모습을 보존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불당 가운데 하나이다.”

 

 

유형문화재 제214호 웅진전

 

▲ 삼층석탑 뒤에 위치한 웅진전

기림사 응진전은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곳은 아라한을 모신 건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 후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은 기둥 6개의 5칸이고 측면은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막돌 장대석을 한단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뒷면에는 둥근 기둥을 하고 옆면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단정한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18세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중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건물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약사전

 

▲ 약사전 전각

기림사 약사전은 경북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이며,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에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에는 조선 효종 5(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 4(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삼천불전

 

▲ 삼천불전

삼천불전은 1817(순조17)에 초의선사가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모셨다가 1818(순조18)에 대둔사로 이운을 해 옮겨 간 후 1990년 새롭게 건물을 단장하고 만든 곳이며 관음전은 천안천수 관세음보살님으로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그리고 11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많은 중생들의 고통 소리를 보기위해 천개의 눈이 필요하며, 손 내밀어 구재하기위해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바쁜 부처님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그 외 명부전, 약사전, 삼성각이 있는데 또 다른 것으로는 진남루가 있다.

 

 

 

매월당 영당

 

▲ 매월당 영당

입구에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매월당이 남산에 작은 산실을 짓고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만들었는데 그 자리에다 사당을 만들고 훼손이 심해지자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림사에 초상을 봉안하고 사당에 딸려있던 논과 밭을 넘겨주었다 한다.

 

1996년 사당이 훼손상태가 심하자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해 두었다..

매월당 영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은거하였던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 매월당 영당 담장 너머 보이는 풍경

 

고종 15(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 유림이 경주부운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생은 세종 17(1435)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단종 3(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 10(1465)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성종 2(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하였으나 성종 24(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이다.”

 

 

불교문화재로 기림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 기림사대적광전(보물 제833), 기림사소조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8),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 기림사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제205), 기림사응진전(시도유형문화재 제214), 기림사진남루(문화재자료 제251), 기림사약사전(문화재자료 제252), 경주기림사소장유물(문화재자료 제301) 등이 있다. 기림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은 현재 기림사 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림사에 있는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으로 조선시대 나무불상 특징을 잘 표현하고 대좌에 홍치(弘治) 14(연산군 7, 1501)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관세음보살상 건칠불의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건칠불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불상으로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후 속을 빼낸 불상이다.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

상지은니대반야경, 상지은니방광반야바라밀경, 상지은니불설대방광십륜경, 자지은니등집중덕삼매경, 백지금니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감지금니묘법연화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대방광불화엄경,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삼매참법, 불설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 금광명경, 불설불모출생삼법장반야바라밀다경,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불설예수시왕생칠경, 정본일절여래대불정백산개총지, 법원주림, 대방광원각략소주경, 법화삼매참조선강의, 선문염송집, 백지묵서지장보살본원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목우자수심결,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선문삼가염송집, 관세음보살례문, 대장일람집, 선종유심결 등 5471책으로 불교 기록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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