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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트레킹 - 여주여행 2편 세종대왕 영릉 이야기

허영꺼멍 2015. 12. 29.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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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쌍실무덤 영릉(英陵)

 사적 제195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26일

 

 

명성황후생가-세종대왕릉-효릉왕릉-하리& 창리 & 영월루-신륵사-고달사지-파사성 & 마애불-포츠골미륵좌불-도곡리석불좌상

 

▲ 세종대왕 동상

 

세종(世宗)의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예종 1(1469) 조성되었다. 세종릉이 영릉인 이유는 조선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으로서 합장릉은 최초이며,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던 기존 방식을 유언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봉분형식을 하면서 십이 지신을 대신하는 방위표시로 문자화 하였다.

 

▲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 사진전에서 본 모습

 

조선 4대 임금 세종은 태조 6(1397)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 18(1418) 양녕대군이 폐세자되자 왕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22세 나이로 임금이 되어 세종 2(1420) 집현전 설치 후 한글창제까지 역대 임금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은 칭송을 받는 세종(출생 1397-1450, 재위 1418-1450)이다.

 

정문 그리고 만나는 세종전

 

▲ 세종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세종전

주차를 한 후 매표를 하고 들어서면 정문 왼편으로 세종대왕 업적을 담은 유물전시관 세종전과 세종대왕 당시 장영실이 발명한 15점의 유물이 야외에 복재되어 전시되어 있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던 혼천의, 태양을 이용한 양부일구 해시계, 자격루 물시계, 빗물의 량을 측정하던 측우기 외 여러 장비들로 직접 만질 수 있도록 해 놓고 있다.

 

 

제사를 준비하던 재실

 

▲ 재실 전경

 

정문 오른편으로 세종대왕 동상과 위쪽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다. 세종릉을 관리하는 재실은 이웃한 효종릉 재실에 비하여 구조가 매우 간단할 정도로 한 채의 독립된 공간을 두고 있다. 재실은 지금의 위치로부터 조금 더 아래인 매표소 못미처 공터에 자리하였다 한다. 현재의 재실은 1970년 복원하였다.

 

훈민문으로 들어서다.

▲ 재실을 지나 왕릉구역으로 들어서는 첫 문인 훈민문

 

훈민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연못과 오른편으로 소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넓게 펼쳐진 길을 따라 들어서면 왕의 혼령이 머무는 공간으로 들어서는 금천교를 만나게 된다.

 

금천교 앞에는 이곳부터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서는 의미로 홍살문을 세워놓고 죽은 왕의 혼이 이용하는 신도와 살아 있는 왕이 이용하는 어도인 참도가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 금천교 지나 신들의 영역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치한 나무 기둥을 세워 놓은 일종의 나무문이다. 홍살문은 홍전문, 홍문으로도 불리며, 기둥 사이 솟아있는 화살모양의 살대는 곧고 바름을 의미한다. 홍살문 앞 가로지르는 물길을 건너는 금천교는 어구 또는 금천으로 부른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배산임수 의미로 홍살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이며,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 남아 있었지만 이후 훼손된 것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신들의 공간에서 만나는 영릉

 

▲ 정자각 전경.

정자각은 정면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지 않았으며, 좌우 계단이 있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수복방과 비각이 있으며, 왼편으로 수라간이 있다. 정자각에서 열려진 문으로 영릉이 위치하며, 영릉은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다. 정자각은 제향을 하는 공간이며, 수복방은 관리를 하는 노비가 머물던 곳이다.

 

 

정자각은 위에서 보면 우물정자를 취하고 있어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양쪽으로 계단을 두었는데 이는 동입서출 즉,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선다는 의미이다. 제단에 재물을 올려놓고 뒷문을 열어 두는 방식이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 왕릉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자리한

영릉비가 있는 영릉비각

 

 

 

 

영조21(1745) 영릉비를 오른편에 세우게 된다. 비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에 관한 약력과 세종대왕릉 천정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능침을 따라 가로로 올라갔다 내려서는 탐방길을 열어 놓고 있다. 헌릉에서 영릉으로 옮겨올 당시 입지적 조건으로 높지 않은 곳을 선정하라 지시 한 만큼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당당한 체구의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석양 등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릉(英陵)

 

▲ 정면에서 바라 본 영릉

장명등 뒤로 혼유석과 왕릉 그리고 좌우 우쭉 서 있는 망주석

묘역을 중심으로 정면에 묘역을 불 밝히는 장명석이 자리하고 앞에서부터 장군복장을 한 눈이 부리부리한 무석인이 호위하고 그 옆에 돌로 만든 양 한 마리가 있다.

 

그 다음 열에 문신석과 함께 양 한 마리가 서 있으며, 장명등 뒤로 제례때 음식을 올리는 재단으로 생각 할 수 있지만 이곳 혼유석은 영혼이 나와 놀 수 있게 만든 공간으로 두 분의 합장릉이라 두 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망주석을 높게 세웠다.

 

세종의 릉과 비인 소헌왕후(1395-1446) 심씨의 릉이 처음부터 이곳 여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종 28(1446)이 되던 해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세종은 당시 광주(오늘날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능을 만들었는데 훗날 자신이 죽은 사후 들어갈 석실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금술이 좋았다 한다. 세종이 승하하자 뜻에 따라 합장하였으며, 이후 세조 당시 영릉 자리가 불길하다며 이전을 하려하였지만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 예종 1(1469) 영릉 터에 있던 상석 외 다수의 석물을 그 자리에 묻고 여주로 옮겨오게 되었다.

 

▲ 상당한 크기와 위엄을 자랑하는 장명등

 

영릉(세종. 소헌왕후)는 사적 제195호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 만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1(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

 

▲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다리 모습

 

능침 앞에는 널찍한 혼유석이 놓여 있다. 일반인의 무덤에서는 음식을 올려놓고 제례를 지내는 용도로 쓰이지만 왕릉의 혼유석은 능의 영혼이 능침에서 나와 놀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영릉의 경우 혼유석 두 개가 놓여 있어 합장릉임을 알 수 있다.

 

 

 

 

▲ 왕릉 앞으로 탐방로를 터 놓고 있다.

 

영릉이 이곳 여주로 옮겨오는 데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정인지, 한명희, 서거정의 참여로 이루어 졌다. 예종실록에는 예종 1년 상당군 한명회(韓明澮),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 윤 서거정(徐居正)을 불러 세종의 릉을 옮길 높지 않은 곳을 물색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옮겨지게 된 것이다. 영릉에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고 동쪽 방은 소헌왕후, 서쪽은 세종대왕을 모셨다.

 

 

 

조선시대 왕릉 중에서 남한에는 약 40기의 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여주에서 왕릉 여행을 떠난다. 왕릉은 궁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는 게 상례이지만 특별한 경우의 왕릉인 영월의 장릉과 북한의 제릉, 후릉을 제외하고는 궁에서 80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헌릉에서 옮기고자 하는 곳이 여주로 80리가 넘어 조정 대신의 반대가 있었지만 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거리가 짧다는 설득으로 여주에 능침이 결정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영릉(英陵)은 천하의 명당으로 조선의 국운이 백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이란 말이 나올 만큼 조선 3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을 잇는 산책탐방길 약 800m 지점을 걸어가거나 세종대왕릉 주차장에서 800m 걸어서 가도 된다. 거리가 조금 멀다면 세종대왕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에서 조금 더 오르면 효종대왕릉으로 향하는 이정표와 함께 효종대왕릉 주차장에 도착하게 되며, 곧장 재실을 경유하여 효종대왕릉으로 향할 수 있다.

 

 

봉림대군 효종대왕릉

 

▲ 보물 제 1532호 여주 효종 영릉재실

 

왕릉은 재실을 두고 있다. 제향에 필요한 많은 제기와 제관이 머물도록 만들어진 공간으로 왕릉에 필수적인 공간이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효종 왕릉의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골격이 잘 남아 있다.

 

 

재실 입구에서 한그루의 나무를 만나는데 여주 효종대왕릉 회양목이다. 천연기념물 제459호이며, 1673년에 조성한 재실에 있는 만큼 300년을 훌쩍 넘게 자란 나무이다.

 

여주 효종 영릉재실(보물 제1532)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 건물로 영릉재실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에 능 조성시 인근에 건립되었으나, 1673년 영릉을 천릉하면서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짜임새 있게 건립되었고, 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대문 포함)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 멸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 있으나, 이곳은 조선시대 왕릉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홍살문 그리고 정자각

세종왕릉에 비해 거리가 짧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인조4년 봉림대군으로 책봉되지만 병자호란 당시 형이던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불모로 가게되며 귀국 후 형이던 소현세자가 죽게 되자 세자책봉과 함께 1649년 왕위에 오른다. 재임기간 동안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을 하지만 현종은 얼굴에 난 종기 치료 중 죽음에 이른다. 훗날 독살설이 나오지만 알 수 없다.

 

▲ 신들의 공간으로 건너는 금척교

세종대왕릉과 달리 홍살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대왕(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이지만 산 지형을 따라 조금은 독특하게 묘가 배치되어 있어 궁금증을 더해주는데 이는 당시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다. 본래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서쪽에 있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석에 물이 새는 일이 방생하자 묘를 옮길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세종대왕릉에 이어 효종대왕릉이 이곳으로 옮겨오니 세종대왕릉과 불과 1km 못 미치는 거리이다.

 

▲ 예감

 

정자각을 돌아가면 왕릉 언덕 아래로 사각형식의 석함을 볼 수 있는데 제사가 끝난 뒤 음식을 치우는 철상을 하면서 축문을 읽고 태워 묻는 곳으로 예감이라 한다. 민가에서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로 태워 허공에 날려 버리는 것이다.

 

▲ 정자각에서 입구를 바라 본 전경. 홍살문과 금척교가 조망된다.

▲ 세종대왕릉과 달리 영릉비에서 오르는 길은 없다.

효종릉으로 오르는 길은 왼편으로 계단이 아닌 잔듸길이다.

 

영릉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1673(현종 14)에 이곳으로 천장한 사실과 그 후(1674) 인선왕후의 능을 앞쪽에 따로 모셨음을 기록한 석비인데 비각과 함께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릉이 합장릉인 점과는 달리 따로 모셨으며, 대왕의 능은 상단 좌측에 위치하며 인선왕후 능은 아래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영릉(寧陵)

인선왕후릉

▲ 산지형을 따라 흘러내리듯 비스듬한 인선왕후릉

현종 14(1673) 옮겨온 다음해인 1674년 인선왕후를 이곳에 모시게 된다.

 

풍수가에 의해 나란히 모시지 않고 효종대왕릉 앞 비탈진 곳에 비스듬하게 쌍릉을 만들었는데 이런 독특한 형태를 두고 동원상하릉이라 하며,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렀다.

 

 

 

효종왕릉

 

▲ 장명석을 중심으로 배치된 석상이 세종대왕릉과 같다.

효종의 묘는 음력 10월 말 땅을 파고 묘역을 조성하여 공사가 부실하였고 그 결과 장마철 봉분을 감싸고 있는 석물에서 균열이 발생된다. 당시 기술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현실은 오늘날 부실공사였고 다시 보수를 하였지만 또 무너지는 등 15년 동안 해마다 수리에도 소용없자 여주로 옮겨 갈 것을 결정하였다.

 

▲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

▲ 세종대왕릉에 비하여 왕릉 석물이 이끼가 심한 상태이다.

▲ 효종왕릉에서 바라 본 부인 인선왕후릉. 영릉이지만 거리가 제법 멀다.

▲ 영릉 아래를 시작으로 두 릉의 사이로 올라갈 수 있는 탐방로가 열려 있다.

▲ 재실에서 바라 본 겨울 전경이 을시년스럽다.

 

조선 4대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다. 효종왕릉도 영릉(寧陵)이다. 말로만 들으면 두 왕릉이 모두 영릉 같지만 세종대왕은 , 꽃부리 영이며, 효종대왕은 . 편안할 영이다. 세종대 왕릉은 사랑하는 비를 위해 먼 저간 소헌왕후 옆에 세종의 자리를 만들어 둘 만큼 아름다운 사랑이다. 조선 17대 효종대왕릉은 먼저 안장된 후 풍수적 이유로 한 공간에 합장을 하고 있지만 떨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본래는 세종대왕릉은 영릉, 효종대왕릉은 녕릉으로 불리다 2011년 영릉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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