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 쌍실무덤 영릉(英陵) 사적 제195호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26일
|
명성황후생가-세종대왕릉-효릉왕릉-하리& 창리 & 영월루-신륵사-고달사지-파사성 & 마애불-포츠골미륵좌불-도곡리석불좌상 |
▲ 세종대왕 동상
세종(世宗)의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예종 1년(1469년) 조성되었다. 세종릉이 영릉인 이유는 조선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으로서 합장릉은 최초이며,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던 기존 방식을 유언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봉분형식을 하면서 십이 지신을 대신하는 방위표시로 문자화 하였다.
▲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 사진전에서 본 모습
조선 4대 임금 세종은 태조 6년(1397)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 18년(1418) 양녕대군이 폐세자되자 왕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22세 나이로 임금이 되어 세종 2년(1420) 집현전 설치 후 한글창제까지 역대 임금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은 칭송을 받는 세종(출생 1397-1450, 재위 1418-1450)이다.
정문 그리고 만나는 세종전
▲ 세종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세종전
제사를 준비하던 재실
▲ 재실 전경
정문 오른편으로 세종대왕 동상과 위쪽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다. 세종릉을 관리하는 재실은 이웃한 효종릉 재실에 비하여 구조가 매우 간단할 정도로 한 채의 독립된 공간을 두고 있다. 재실은 지금의 위치로부터 조금 더 아래인 매표소 못미처 공터에 자리하였다 한다. 현재의 재실은 1970년 복원하였다.
훈민문으로 들어서다. ▲ 재실을 지나 왕릉구역으로 들어서는 첫 문인 훈민문
▲ 금천교 지나 신들의 영역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치한 나무 기둥을 세워 놓은 일종의 나무문이다. 홍살문은 홍전문, 홍문으로도 불리며, 기둥 사이 솟아있는 화살모양의 살대는 곧고 바름을 의미한다. 홍살문 앞 가로지르는 물길을 건너는 금천교는 어구 또는 금천으로 부른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배산임수 의미로 홍살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이며,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 남아 있었지만 이후 훼손된 것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
신들의 공간에서 만나는 영릉
▲ 정자각 전경. 정자각은 정면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지 않았으며, 좌우 계단이 있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수복방과 비각이 있으며, 왼편으로 수라간이 있다. 정자각에서 열려진 문으로 영릉이 위치하며, 영릉은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다. 정자각은 제향을 하는 공간이며, 수복방은 관리를 하는 노비가 머물던 곳이다.
정자각은 위에서 보면 ‘丁’ 우물정자를 취하고 있어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양쪽으로 계단을 두었는데 이는 동입서출 즉,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선다는 의미이다. 제단에 재물을 올려놓고 뒷문을 열어 두는 방식이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능침을 따라 가로로 올라갔다 내려서는 탐방길을 열어 놓고 있다. 헌릉에서 영릉으로 옮겨올 당시 입지적 조건으로 높지 않은 곳을 선정하라 지시 한 만큼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당당한 체구의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석양 등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릉(英陵)
▲ 정면에서 바라 본 영릉 장명등 뒤로 혼유석과 왕릉 그리고 좌우 우쭉 서 있는 망주석
세종의 릉과 비인 소헌왕후(1395-1446) 심씨의 릉이 처음부터 이곳 여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종 28년(1446)이 되던 해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세종은 당시 광주(오늘날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능을 만들었는데 훗날 자신이 죽은 사후 들어갈 석실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금술이 좋았다 한다. 세종이 승하하자 뜻에 따라 합장하였으며, 이후 세조 당시 영릉 자리가 불길하다며 이전을 하려하였지만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 예종 1년(1469) 영릉 터에 있던 상석 외 다수의 석물을 그 자리에 묻고 여주로 옮겨오게 되었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
▲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다리 모습
능침 앞에는 널찍한 혼유석이 놓여 있다. 일반인의 무덤에서는 음식을 올려놓고 제례를 지내는 용도로 쓰이지만 왕릉의 혼유석은 능의 영혼이 능침에서 나와 놀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영릉의 경우 혼유석 두 개가 놓여 있어 합장릉임을 알 수 있다.
▲ 왕릉 앞으로 탐방로를 터 놓고 있다.
영릉이 이곳 여주로 옮겨오는 데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정인지, 한명희, 서거정의 참여로 이루어 졌다. 예종실록에는 예종 1년 상당군 한명회(韓明澮),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 윤 서거정(徐居正)을 불러 세종의 릉을 옮길 높지 않은 곳을 물색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옮겨지게 된 것이다. 영릉에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고 동쪽 방은 소헌왕후, 서쪽은 세종대왕을 모셨다.
조선시대 왕릉 중에서 남한에는 약 40기의 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여주에서 왕릉 여행을 떠난다. 왕릉은 궁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는 게 상례이지만 특별한 경우의 왕릉인 영월의 장릉과 북한의 제릉, 후릉을 제외하고는 궁에서 80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헌릉에서 옮기고자 하는 곳이 여주로 80리가 넘어 조정 대신의 반대가 있었지만 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거리가 짧다는 설득으로 여주에 능침이 결정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영릉(英陵)은 천하의 명당으로 조선의 국운이 백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이란 말이 나올 만큼 조선 3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을 잇는 산책탐방길 약 800m 지점을 걸어가거나 세종대왕릉 주차장에서 800m 걸어서 가도 된다. 거리가 조금 멀다면 세종대왕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에서 조금 더 오르면 효종대왕릉으로 향하는 이정표와 함께 효종대왕릉 주차장에 도착하게 되며, 곧장 재실을 경유하여 효종대왕릉으로 향할 수 있다. |
봉림대군 효종대왕릉
▲ 보물 제 1532호 여주 효종 영릉재실
왕릉은 재실을 두고 있다. 제향에 필요한 많은 제기와 제관이 머물도록 만들어진 공간으로 왕릉에 필수적인 공간이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효종 왕릉의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골격이 잘 남아 있다.
재실 입구에서 한그루의 나무를 만나는데 여주 효종대왕릉 회양목이다. 천연기념물 제459호이며, 1673년에 조성한 재실에 있는 만큼 300년을 훌쩍 넘게 자란 나무이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 멸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 있으나, 이곳은 조선시대 왕릉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홍살문 그리고 정자각 세종왕릉에 비해 거리가 짧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인조4년 봉림대군으로 책봉되지만 병자호란 당시 형이던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불모로 가게되며 귀국 후 형이던 소현세자가 죽게 되자 세자책봉과 함께 1649년 왕위에 오른다. 재임기간 동안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을 하지만 현종은 얼굴에 난 종기 치료 중 죽음에 이른다. 훗날 독살설이 나오지만 알 수 없다.
▲ 신들의 공간으로 건너는 금척교 세종대왕릉과 달리 홍살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대왕(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이지만 산 지형을 따라 조금은 독특하게 묘가 배치되어 있어 궁금증을 더해주는데 이는 당시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다. 본래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서쪽에 있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석에 물이 새는 일이 방생하자 묘를 옮길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세종대왕릉에 이어 효종대왕릉이 이곳으로 옮겨오니 세종대왕릉과 불과 1km 못 미치는 거리이다.
▲ 예감
정자각을 돌아가면 왕릉 언덕 아래로 사각형식의 석함을 볼 수 있는데 제사가 끝난 뒤 음식을 치우는 철상을 하면서 축문을 읽고 태워 묻는 곳으로 예감이라 한다. 민가에서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로 태워 허공에 날려 버리는 것이다.
▲ 정자각에서 입구를 바라 본 전경. 홍살문과 금척교가 조망된다.
영릉(寧陵) 인선왕후릉 ▲ 산지형을 따라 흘러내리듯 비스듬한 인선왕후릉
효종왕릉
▲ 장명석을 중심으로 배치된 석상이 세종대왕릉과 같다.
효종의 묘는 음력 10월 말 땅을 파고 묘역을 조성하여 공사가 부실하였고 그 결과 장마철 봉분을 감싸고 있는 석물에서 균열이 발생된다. 당시 기술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현실은 오늘날 부실공사였고 다시 보수를 하였지만 또 무너지는 등 15년 동안 해마다 수리에도 소용없자 여주로 옮겨 갈 것을 결정하였다.
▲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 ▲ 세종대왕릉에 비하여 왕릉 석물이 이끼가 심한 상태이다. ▲ 효종왕릉에서 바라 본 부인 인선왕후릉. 영릉이지만 거리가 제법 멀다. ▲ 영릉 아래를 시작으로 두 릉의 사이로 올라갈 수 있는 탐방로가 열려 있다. ▲ 재실에서 바라 본 겨울 전경이 을시년스럽다.
조선 4대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다. 효종왕릉도 영릉(寧陵)이다. 말로만 들으면 두 왕릉이 모두 영릉 같지만 세종대왕은 ‘英, 꽃부리 영’이며, 효종대왕은 ‘寧. 편안할 영’이다. 세종대 왕릉은 사랑하는 비를 위해 먼 저간 소헌왕후 옆에 세종의 자리를 만들어 둘 만큼 아름다운 사랑이다. 조선 17대 효종대왕릉은 먼저 안장된 후 풍수적 이유로 한 공간에 합장을 하고 있지만 떨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본래는 세종대왕릉은 영릉, 효종대왕릉은 녕릉으로 불리다 2011년 영릉으로 변경되었다. |
여행지에 관한 여행정보는 블로그 검색을 하시면 됩니다.
|
.
'2020 이전 여행지 > 도시 트레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트레킹 - 부산 달맞이 언덕 비오는 날 벚꽃길을 걷다. (0) | 2016.04.09 |
---|---|
도시트레킹 - 부산에서 벚꽃 즐기기 온천천 시민공원 벚꽃 (0) | 2016.04.02 |
도시트레킹 - 부산 동래구 충렬사에서 만난 봄이야기 (0) | 2016.03.09 |
도시트레킹 - 경남 창원시 마산 가고파 꼬부랑벽화마을 (0) | 2016.01.08 |
도시트레킹 - 여주여행 1편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서 (0) | 201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