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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트레킹 - 전주 한옥마을 그리고 주변 문화재를 따라가다.

허영꺼멍 2016. 7. 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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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을 여행하다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남부시장 풍남문 전동성당 경기전 한옥마을 자만벽화마을.이목대-전주향교-청연루-남부시장 순으로 여행하면 된다. (현재 경기전 주차장은 운영하지 않으며, 청연루에서 한옥마을을 잇는 골목은 차량진입을 할 수 없다.)





▲ 전주 한옥마을 전경


전주 여행의 중심은 한옥마을로부터 시작된다. 한옥마을을 따라 한옥마을의 풍경을 내려 다 볼 수 있는 오목대, 자만벽화마을에 위치한 이목대, 이목대 도로건너 전주향교, 그리고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경기전과 전동성당 그리고 전주 먹거리 일번지 남문시장과 풍남문까지 모여 있다. 전주 한옥마을 여행을 보다 편하게 여행하려면 주차를 전주천변에 위치한 하천변에 자리한 남부시장(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331)에 주차를 한 후 여행하면 주차의 어려움으로부터 한결 편하다. 주차는 시장에서 물건 구입 후 받는 무료 주차권을 이용하면 90분간 무료이다.




남부시장에서 허기를 채우다.


▲ 순대국밥에는 피순대와 내장이 함께 어우러져 얼컨하고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전주여행 먹거리 여행하면 전주 비빔밥을 떠 올리겠지만 사실 전주에는 많은 먹꺼리가 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중에서 34년 째 피순대국으로 유명한 조점례(71) 남문피순대(T.232-5006)가 있는 한옥마을 남문시장 북문으로 향한다.


시장에 들어서면 피순대는 한 곳이 아니라 양쪽으로 서로 간판을 내걸고 있을 만큼 시장 내 유명한 곳으로 전주 문화재단 선정 전주 맛집(2007)을 시작으로 다양한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제!’라는 2006211면 광고로 조선, 중앙, 동아, 한계레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순대국밥의 가격은 6,000원으로 가격면에서 저렴하며, 맛이 뛰어나다. 메뉴에는 순대국밥과 피순대, 잡채순대가 있으며, 순대국밥을 주문하면 된다.




전주읍성의 남문 풍남문(보물 제308)’


전주 남문시장 입구에 위치한 풍남문은 전주객사 현판 풍패지관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豊沛鄕(풍패향)南門(남문)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전주읍성 중 출신성분이 높은 사람이 다니던 성문으로 추정된다.


▲ 호남제일성

▲ 풍남문

도깨비가 그려진 '풍남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73

★★★★☆


옛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은 고려 1388년 관찰사 최유경이 축조한 후 1734년 개축하면서 동문,남문, 북문을 축조하였지만 지금은 남문만 전해져 온다. 선조 30(1597) 정유재란 당시 파손된 후 영조 10(1734) 일부를 복원하고 명견루로 개칭한 후 영조 43(1767) 화재로 소실 영조 44(1768)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중건하면서 풍남문으로 불렀다. 그 후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고 지금의 풍남문은 1981년 보수되면서 1층에 정면 3, 측면 3칸을 두고 2층에는 정면 3,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풍남문의 고주는 무량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고주를 쳐올리고 고주의 몸에 퇴량을 달아 지붕을 따로 설치하는 건축양식과 창덕궁 금천교 남면의 도깨비 석상, 남원 실상사 입구의 도깨비 장승, 수원 팔달문 문루에 있는 도깨비, 경주 불국사 청운교 도깨비 잔청 등을 볼 수 있듯 이곳 풍남문 호남제일성에는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전동성당'

사적 제288호


오늘날까지 이용하고 있는 성당이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은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종교시설이자, 호남 최초이자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성당이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1937~1957년까지 천주교 전주교구 대성당으로 사용된 곳이며, 오늘날 문을 개방하고 있어 누구라도 쉽게 방문을 할 수 있다.


▲ 전동성당

▲ 도로에서 올려다 본 전동성당

1914년 만든 전동성당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00-1

★★★★★



전동성당이 있는 곳은 본래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자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던 순교지로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보드네신부가 부지를 매입하여 1908V.L 프와넬 신부 설계로 1914년 회색벽돌과 붉은색벽돌을 이용하여 건물 벽을 만들고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하여 완공하였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하며, 종탑과 계단은 비잔틴 양식을 통해 외부에서 느끼는 웅장함은 당시 엄청났을 것이다.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성당건물은 당시 일제가 풍남문 성벽을 헐었고 성당을 짓기위해 성벽에서 나온 돌과 흙을 이용해 벽돌을 구웠다. 전동성당은 큰 규모와 장엄한 내부 공간 및 다양한 벽돌 디테일을 이용한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풍남문 밖에서는 외세종교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교수형 집행이 이루어 진다. 이때 한국 교회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를 비롯하여 많은 신도가 순교를 하게되었다. 이후 기독교가 허용되면서 선교사가 들어왔고 당시 보두네 신부는 교수행이 이루어 졌던 일대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을 만들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신도가 모여들면서 큰 성당의 필요성에 따라 1908년 명동성당 내부를 건축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공사를 착공하여 1914년 외관공사, 1931618일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교구장에 의해 축성식이 치루어졌다. 그리고 첫 교구장으로 김양홍 신부가 맏았다.




조선을 개국하다 경기전(사적 제339)’

 

풍남문을 중심으로 전동성당을 만난다. 전동성당 도로를 건너면 사적 제339호 경기전을 만나게 된다. 경기전을 찾는 탐방객은 예쁜 한복을 곱게 입고 저마다 사진을 담기 바쁘다. 한옥은 경기전 바로 앞 한복대여집에서 빌리면 된다. 1시간 30분에 5,000원이다.


▲ 태조로에서 만나는 경기전 입구 두명의 수비장이 지키고 있다.

▲ 경기전 입구 홍살문을 지나 또 하나의 문 '정전'

이성계의 영정을 찾아가는 '경기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91-5

★★★★☆


사적 제339호 경기전은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된 곳으로 조선 태종 10(1410) 창건하고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유일한 곳으로 창건 후 어용전으로 부르다 태종 12(1412) 태조 진전으로 개명 후 세종 24(1442) 경기전 영승전으로 바뀌고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후 여러 곳으로 영정을 피신 시켰다가 광해군 6(1614)에 중건하면서 영정을 다시 봉안하고 경기전으로 부르며,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판을 봉안한 유형문화재 제16호 조경묘가 뒤편에 위치해 있다.


경기전 입구에서 하마비를 만나게 되는데 다른 곳 하마비에 비하여 매우 독특하다. 하마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비 앞을 지날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비석을 하나로 세워 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 하마비는 네 마리의 동물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라 적어 놓았다. 비는 광해군 6(1614) 세웠으며, 청종 7(1856) 중각하였다.


▲ 홍살문을 지나 정전(보물 제1578)으로 향한다.

▲ 보물 제1578 정전에는 이성계 어용이 보관되어 있다.

▲ 어용에 보관되어 있는 이성계 초상화


조선태조왕 이성계상(보물 제931)는 가로 150cm, 세로 218cm26점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1점이 전부로 임금이 쓰는 익선관 모자와 곤룡포를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얼굴 표정을 밝게하기위해 입체감을 주기위해 음영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경기전에 있는 영정은 고종 9(1872) 낡은 원본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며,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어진이모도감의궤에 의하면 고종 9(1872) 태조 어진을 이모한 한 낡고 오래되어 구본 어진을 불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내 매장했다 전한다.


▲ 전주 사고

전주사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를 실록이라 한다. 실록은 특별히 만든 건물에 봉안하는데 이를 사고라 한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 조경묘

조경묘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이며, 전주이씨의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과 부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위패는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 예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로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선조 12(1578)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매실 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통독부가 태항아리를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진 태조 어용을 보관하는 곳으로 전주, 경주, 평양으로 어용을 모신다하여 어용전으로 부르다 태종 12(1412) 태조진전으로 바뀐 후 세종 24(1442)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각각 부르다 정유재란 당시 모두 소실된 후 광해군 6(1614) 11월에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새로 짓고 영정을 다시 모셨다. 당시 경기전의 규모는 지금 보다 더 넓은 부지였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전용 수상소학교를 경기전 터에 짓는 과정 에서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리면서 일부 건물도 사라져 버리고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이 남아 있다.

 



전주한옥마을에 옛것은 없다?


도시의 빌딩과 한옥촌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한옥촌은 주로 중인층이나 고관대작이 머물던 주택으로 50평 남짓 규모이며, 일제점령기 당시 전군가도가 생기면서 1930년대 형성되었다.


▲ 전주 하옥마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한복입은 탐방객

▲ 샛노란 가을 300

점점 퇴색되어 가는 전주한옥마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00-1

★★☆☆☆


전주 한옥마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국의 진정한 한옥의 기품을 비로소 느낄 수 있지만 태조로 에서 만나는 한옥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그려낸다. 전국 최대의 한옥촌으로 알려져 있는 한옥마을에는 900여 채의 한옥이 담장하나 경계로 서로 기와를 물고 그 속에 전통술을 비롯하여 한지 공예품, 찻집, 전시관, 체험관 등 다양한 공간과 특히 마지막 왕손 이석씨가 머물면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색적인 체험도 할 수 있다.



▲ 한옥마을 전경

전주 전통문화구역(한옥마을)에는 약 600여 채의 한옥이 담장을 나눠 가지며 모여 있다. 도심의 고층건물과 전통 한옥가옥이 도로 하나를 두고 마주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곳으로 1999년 전주한옥마을로 지정 이후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 2011년 미술랭가이드는 전주한옥마을에 최고 평점인 별 3개를 주었으며, 우리나라 가고픈 여행지 1위를 차지 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고 다니다보면 고풍스런 옛 가옥을 자주 만나게 된다. 낡고 퇴색된 그리고 무너질 듯 위해한 담장을 통해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보려하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옛 멋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전통가옥을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간다.


명절을 앞 둔 자갈치 시장에 서 있는 느낌이다. 식당과 패스트푸드가 숨 막힐 듯 자리하고 있는 것도 눈살 찌푸리게 한다. 분명한 것은 한옥마을에 먹거리를 찾아 온 것이 아니라 한옥마을을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의 옛것을 이해하고 방문하였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정체성이 모호한 곳으로 전략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옛것이라는 한옥마을을 미끼로 먹거리 중심의 상업화가 만연한 참으로 불편한 여행이었다.



전통가옥이라 하여 반질반질한 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너머 풍경을 마주할 공간이 없었다. 편하게 햇살을 피해 머물다 갈 공간도 당연히 없었다. 전주 특유의 멋과 풍류는 찾기 어려워도 다양한 먹거리는 즐비했다. 한옥마을에서는 201111월 변경고시로 한식 외 중식, 양식은 입점을 할 수 없다하지만 막상 거리에 들어서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뭘 먹을까부터 생각할 만큼 먹거리 골목으로 변해져 버렸다. 어쩌다 우리의 전통가옥이 모여 있는 마을이 상업화에 맞물려 담장을 헐어 가계 만드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주시는 입장료를 징수하더라도 순천 낙안읍성처럼 특정 구역을 정하고 상점을 철거하고 예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 시켜야 할 것이다. 먹거리는 바로 옆 남문시장이 있지 않은가. 한 해 얼마나 많은 탐방객이 다녀갔다며 홍보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옛것을 만날 수 있는 그런 한옥마을이 되길 희망해 본다.




자만벽화마을 거쳐 이목대 오목대


오목대 여행을 하기 위해 찾아 길을 따르다 보면 이목대 앞 도로변에 도착한다. 도로변 양쪽에는 유료주차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편리하다. 자만마을에는 탐방객의 주차공간이 없으며, 무단 주차는 단속대상이다.


▲ 자만마을 벽화

▲ 자만마을 벽화 제일 위 육교로 향하는 길

벽화가 여기도 있네? 자만마을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4-6

★★★☆☆


전주로 진입하는 입구 오목대와 이목대를 도로가 생겨나면서 갈라 놓았고 오늘날 도로를 넘나드는 다리가 놓여 있다. 오목대로 향하는 입구 이기도 한 이목대가 있는 자만벽화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정착했던 달동네로 2012년 이 마을을 알록달록한 색체로 칠하기 시작하면서 40여채 집 담장에는 저마다 하나씩 벽화를 간직하는 곳이 되었다.


▲ 이목대

자만벽화마을 입구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6이목대는 이성계의 4대조인 할아버지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전주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안내글에 의하면 대한제국 광무 4(1900)에 목조가 살았던 터를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를 오목대 동쪽 높은 곳에 세웠는데 이후 도로 확장으로 옮겨진 위치라 한다.


다리 건너 오목대로 향하다.


오목대(전북지방기념물 제16)에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은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전망대 역할을 겸하고 있다. 특히 한옥촌의 야경이나 기왓장의 즐비한 모습을 보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오목대


남원시에서 국도를 따라 전주시로 진입하는 첫 관문에 한옥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이목대. 오목대는 두 개의 유적지가 한곳에 모여 있어 통합하여 부르지만 정확하게 따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목대는 전주이씨 가문의 탄생지로 철길 건너 있으며, 고종황제가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라 새긴 비가 있다.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1380)황산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5대조 조상인 목조가 살던 곳에 들러 승전기념 자축연을 베푼 곳으로 고종황제가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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