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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트레킹 - 전북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 전동성당 그리고,

허영꺼멍 2016. 11. 22.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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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 경기전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전주는 나와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여름이면 전주 덕진공원의 홍연 향기에 취하며, 가을이면 경기전 단풍에 넋놓던 그런 시절의 추억을 따라 이른 시간 대충 모텔에서 라면하나 끊여먹고 부슬비 내리는 길을 나와 곧장 경기전(사적 제339)을 찾았다.


▲ 태조 이성계 어진

▲ 전주사고 앞 은행나무

경기전에서 조선을 만나다.

전주한옥마을 공영주차장(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00-1)

★★★★★


경기전에는 주차공간이 없다보니 경기전 주변 담장을 따라 불법주차를 하는데 경기전이 한옥마을 안에 자리잡고 주변 도보거리에 풍남문과 객사 그리고 전동성당이 있으므로 전주한옥마을 공영주차장(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00-1)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 경기전 입구 홍살문 너머 내신문이 열려져 있다.

사적 제339호 경기전에는 조경묘, 어진박물관, 태종대왕 태실 및 비 그리고 체험공간을 두고 있다. 경기전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경기전 담장을 따라 정문, 서문, 동문에 매표소를 두고 있다. 경기전은 옛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주변 빌딩숲과 한옥마을의 경계에 위치한 경기전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쁜 한복을 대여하여 입고 출입하는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경기전으로 들어선다. 경기전 정문을 시작으로 홍살문을 거쳐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영정을 모신 경기전(慶基殿) 정전(正殿)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홍살문에서 오른쪽으로 가을이면 활엽수 숲이 자리잡고, 오른쪽 쪽문으로 들어서면 체험을 할 수 있는 여러 건물을 만난다.

 

경기전(慶基殿) 정전(正殿)


조선왕조는 조선 건국 기념을 위해 태종 10(1410) 전주에 어진을 봉안 할 공간인 진전(眞殿) 조성과 함께 태조 이성계 어진을 봉안하니 어용전(御容殿)이다. 세종 21(1439) 전주 사고 설치 후 태종 24(1442) 진전을 경기전(慶基殿)으로 부른다.


경기전이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 당시 태조 어진은 경기전으로 떨어진 전남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지는가 하면, 선조 26(1593) 아산객사로, 선조 29(1596) 강화도, 선조 30(1597) 묘항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 정전 그리고 정전 좌우에 놓여져 있는 드무 

선조 30(1597) 어진이 모향사 보현사에 머물 당시 전주 경기전은 정유재란(1597)으로 소실되자 광해군 6(1614) 경기전 중건과 함께 어진을 다시 경기전에 모시게 되었다. 이후에도 어진은 여러곳을 피해 다녀야 했으며, 2010년 어진박물관 개관과 함께 보존 관리되고 있다.


▲ 화재 대비를 위한 거북 문양

경기전(慶基殿) 정전(正殿)에 도착한다. 정면 3, 측면 3칸의 일자집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 정전 앞으로 쇠솥처럼 보이는 솥이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드무(豆毛), 물을 담아 화재에 대비하여 좌우 각 6개를 두었다. 드무는 별전 뜰아래 2, 제기고 앞에 2개를 두어 화재를 대비하였으며, 겨울철 물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넣었다. 정전 건물에는 이 외에도 조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철망과 발을 설치하였으며, 정자각 지붕에 화재막는 의미의 암수 두 마리 거북을 조각하여 올려 두었다.


전주사고


전주사고에서 예종대왕태실비가 있는 이 일대에는 가을이면 낙엽송이 그려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전주사고 앞 대각선으로 서 있는 은행나무가 물드는 시기에는 절정에 달한다.


▲ 전주사고


전주사고(全州史庫)는 경기전 내 위치한 건물로 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14735월 완성하여 6월 진남루에 봉안했던 실록을 옮겨 보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사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를 실록이라 한다. 실록은 특별히 만든 건물에 봉안하는데 이를 사고라 한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진 태조 어용을 보관하는 곳으로 전주, 경주, 평양으로 어용을 모신다하여 어용전으로 부르다 태종 12(1412) 태조진전으로 바뀐 후 세종 24(1442)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각각 부르다 정유재란 당시 모두 소실된 후 광해군 6(1614) 11월에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새로 짓고 영정을 다시 모셨다.


당시 경기전의 규모는 지금 보다 더 넓은 부지였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전용 수상소학교를 경기전 터에 짓는 과정 에서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리면서 일부 건물도 사라져 버리고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이 남아 있다.


예종대왕 태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로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 예종대왕 태실 주변으로 오래된 노거수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선조 12(1578)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매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통독부가 태항아리를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경묘

 

조경묘에는 영조가 세손이던 정조에게 이한과 부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쓰게하여 봉안하고 있다. 현재의 조경묘는 청종 5(1854) 보수한 건물이다.


조경묘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이며, 전주이씨의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과 부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위패는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 조경묘 담장에 가을이 찾아왔다.


조경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는 경기전 담장을 나와 뒤편으로 나오면 또 하나의 홍살문과 함께 만나는 건물로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부인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도성을 쌓거나 고치는 일을 하던 관청의 사공 벼슬을 지닌 인물이다.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며, 조선 영조 47(1771) 조경묘가 세워졌다.


어진박물관


조선태조왕 이성계상(국보 제317)는 가로 150cm, 세로 218cm26점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1점이 전부로 임금이 쓰는 익선관 모자와 곤룡포를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얼굴 표정을 밝게하기위해 입체감을 주기위해 음영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경기전에 있는 영정은 고종 9(1872) 낡은 원본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며,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어진이모도감의궤에 의하면 고종 9(1872) 태조 어진을 이모한 한 낡고 오래되어 구본 어진을 불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내 매장했다 전한다.


▲ 태조 이성계 어진

조선태조왕 이성계상(보물 제931)는 가로 150cm, 세로 218cm26점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1점이 전부로 임금이 쓰는 익선관 모자와 곤룡포를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얼굴 표정을 밝게하기위해 입체감을 주기위해 음영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경기전에 있는 영정은 고종 9(1872) 낡은 원본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며,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어진이모도감의궤에 의하면 고종 9(1872) 태조 어진을 이모한 한 낡고 오래되어 구본 어진을 불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내 매장했다 전한다. 이밖에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세워져 있다.


▲ 용문암막새 / 조선시대 암막새로 경기전 서면 발굴과정에서 수습되었다.

용의 발톱이 5개인 와당과 함께 3개인 와당 조각이 출토되었다.


경기전에서 좀 특별한 공간으로 어진박물관이다. 2010116일 개관한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성한 곳으로 국보 제317호 태조어진과 일월오봉도, 용선, 봉선을 전시하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어진을 전시하고 있다.



전동성당 도로를 건너면 사적 제339호 경기전을 만나게 된다. 경기전을 찾는 탐방객은 예쁜 한복을 곱게 입고 저마다 사진을 담기 바쁘다. 한옥은 경기전 바로 앞 한복대여집에서 빌리면 된다. 1시간 30분에 5,000원이기본이며, 의상과 장신물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전동성당'

사적 제288호


▲ 전동성당. 방문당일 출입이 제한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용하고 있는 성당이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은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종교시설이자, 호남 최초이자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성당이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1937~1957년까지 천주교 전주교구 대성당으로 사용된 곳이며, 오늘날 문을 개방하고 있어 누구라도 쉽게 방문을 할 수 있다.




전동성당이 있는 곳은 본래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자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던 순교지로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보드네신부가 부지를 매입하여 1908V.L 프와넬 신부 설계로 1914년 회색벽돌과 붉은색벽돌을 이용하여 건물 벽을 만들고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하여 완공하였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하며, 종탑과 계단은 비잔틴 양식을 통해 외부에서 느끼는 웅장함은 당시 엄청났을 것이다.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성당건물은 당시 일제가 풍남문 성벽을 헐었고 성당을 짓기위해 성벽에서 나온 돌과 흙을 이용해 벽돌을 구웠다. 전동성당은 큰 규모와 장엄한 내부 공간 및 다양한 벽돌 디테일을 이용한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풍남문 밖에서는 외세종교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교수형 집행이 이루어 진다. 이때 한국 교회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를 비롯하여 많은 신도가 순교를 하게되었다. 이후 기독교가 허용되면서 선교사가 들어왔고 당시 보두네 신부는 교수행이 이루어 졌던 일대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을 만들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신도가 모여들면서 큰 성당의 필요성에 따라 1908년 명동성당 내부를 건축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공사를 착공하여 1914년 외관공사, 1931618일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교구장에 의해 축성식이 치루어졌다. 그리고 첫 교구장으로 김양홍 신부가 맏았다.





전주읍성의 남문 풍남문(보물 제308)’


전주 남문시장 입구에 위치한 풍남문은 전주객사 현판 풍패지관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豊沛鄕(풍패향)南門(남문)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전주읍성 중 출신성분이 높은 사람이 다니던 성문으로 추정된다.


▲ 풍남문

▲ 풍남문 측면 전경

도깨비가 그려진 '풍남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73

★★★★☆


옛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은 고려 1388년 관찰사 최유경이 축조한 후 1734년 개축하면서 동문,남문, 북문을 축조하였지만 지금은 남문만 전해져 온다. 선조 30(1597) 정유재란 당시 파손된 후 영조 10(1734) 일부를 복원하고 명견루로 개칭한 후 영조 43(1767) 화재로 소실 영조 44(1768)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중건하면서 풍남문으로 불렀다. 그 후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고 지금의 풍남문은 1981년 보수되면서 1층에 정면 3, 측면 3칸을 두고 2층에는 정면 3,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풍남문의 고주는 무량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고주를 쳐올리고 고주의 몸에 퇴량을 달아 지붕을 따로 설치하는 건축양식과 창덕궁 금천교 남면의 도깨비 석상, 남원 실상사 입구의 도깨비 장승, 수원 팔달문 문루에 있는 도깨비, 경주 불국사 청운교 도깨비 잔청 등을 볼 수 있듯 이곳 풍남문 호남제일성에는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 풍남문 옆 소녀상



전주 여행의 중심은 한옥마을로부터 시작된다. 한옥마을을 따라 한옥마을의 풍경을 내려 다 볼 수 있는 오목대, 자만벽화마을에 위치한 이목대, 이목대 도로건너 전주향교, 그리고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경기전과 전동성당 그리고 전주 먹거리 일번지 남문시장과 풍남문까지 모여 있다. 전주 한옥마을 여행을 보다 편하게 여행하려면 주차를 전주천변에 위치한 하천변에 자리한 남부시장(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331)에 주차를 한 후 여행하면 주차의 어려움으로부터 한결 편하다. 주차는 시장에서 물건 구입 후 받는 무료 주차권을 이용하면 90분간 무료이다.



전주 한옥마을


도시의 빌딩과 한옥촌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한옥촌은 주로 중인층이나 고관대작이 머물던 주택으로 50평 남짓 규모이며, 일제점령기 당시 전군가도가 생기면서 1930년대 형성되었다.


▲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는 한옥마을

▲ 한옥마을 골목길

점점 퇴색되어 가는 전주한옥마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00-1

★★☆☆☆


전주 한옥마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국의 진정한 한옥의 기품을 비로소 느낄 수 있지만 태조로 에서 만나는 한옥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그려낸다. 전국 최대의 한옥촌으로 알려져 있는 한옥마을에는 900여 채의 한옥이 담장하나 경계로 서로 기와를 물고 그 속에 전통술을 비롯하여 한지 공예품, 찻집, 전시관, 체험관 등 다양한 공간과 특히 마지막 왕손 이석씨가 머물면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색적인 체험도 할 수 있다.



전주 전통문화구역(한옥마을)에는 약 600여 채의 한옥이 담장을 나눠 가지며 모여 있다. 도심의 고층건물과 전통 한옥가옥이 도로 하나를 두고 마주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곳으로 1999년 전주한옥마을로 지정 이후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 2011년 미술랭가이드는 전주한옥마을에 최고 평점인 별 3개를 주었으며, 우리나라 가고픈 여행지 1위를 차지 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고 다니다보면 고풍스런 옛 가옥을 자주 만나게 된다. 낡고 퇴색된 그리고 무너질 듯 위해한 담장을 통해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보려하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옛 멋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전통가옥을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간다.



명절을 앞 둔 자갈치 시장에 서 있는 느낌이다. 식당과 패스트푸드가 숨 막힐 듯 자리하고 있는 것도 눈살 찌푸리게 한다. 분명한 것은 한옥마을에 먹거리를 찾아 온 것이 아니라 한옥마을을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의 옛것을 이해하고 방문하였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정체성이 모호한 곳으로 전략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옛것이라는 한옥마을을 미끼로 먹거리 중심의 상업화가 만연한 참으로 불편한 여행이었다.


전통가옥이라 하여 반질반질한 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너머 풍경을 마주할 공간이 없었다. 편하게 햇살을 피해 머물다 갈 공간도 당연히 없었다. 전주 특유의 멋과 풍류는 찾기 어려워도 다양한 먹거리는 즐비했다. 한옥마을에서는 201111월 변경고시로 한식 외 중식, 양식은 입점을 할 수 없다하지만 막상 거리에 들어서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뭘 먹을까부터 생각할 만큼 먹거리 골목으로 변해져 버렸다. 어쩌다 우리의 전통가옥이 모여 있는 마을이 상업화에 맞물려 담장을 헐어 가계 만드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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