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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트레킹 - 충남 공주 동학사

허영꺼멍 2017. 3. 2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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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을 품고 사는 비구니의 도량처

충남 공주 '동학사'


| 여행일자 : 2017년 00월 00일


동학사(東鶴寺)는 한 때 상원사(上願寺)라 불렸던 적이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신라 성덕왕 23년인 724년 상원(上願)이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하다가 입적한 곳에 그의 제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고 상원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태조 4년인 921년에 연기 도선이 중창하여 태조의 원당이 되었다고 하나 도선은 이미 898년에 입적을 하였으므로 신빙성이 없다고 불교계에서는 보고 있다.


▲ 일주문 현판 계룡산 동학사

▲ 동학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58호)

충신이 잠든 비구니 사찰 '동학사'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29-3

★★☆☆☆


동학사는 비구니들의 전문 강원으로서 비구승의 독경 음이 끊이질 않는 아늑하고 호젓한 산사이다. 동학사를 접한 첫 느낌은 과연 여성의 사찰이라 그런지 소담하면서도 뭔가 있는 것 같은 청아한 분위기속에 마주치는 스님들은 탈속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하고 있다.


▲ 동학사 일주문

▲ 동학사 홍살문



계룡산 하면 동학사를 떠올릴 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오늘날 소박했던 사찰이 최근 엄청난 규모로 사세가 확장되어 예스러움이 사라져 버려 안타깝다. 동학사를 방문하기 위해 동학계곡 옛길을 따라 오른다. 주차장으로부터 오르다 보면 홍살문을 지나게 된다. 홍살문이 왜 그곳에 있는가 하는 점이 한 번쯤 생각할 수가 있는데 홍살문은 아마도 삼은각, 숙모전 등 역사적인 인물을 모신 곳이기에 궁궐이나 관아, , 묘 앞에 보통 세우는 홍살문을 세워 두었다.


▲ 동학계곡

▲ 동학사 주차장으로 부터 동학사로 향하는 길






홍살문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절집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관음암, 길상암, 미타암이며, 관음암에서 위쪽 산길로 오르면 문수암이 있다. 서로 담장을 함께 사용하는 사찰을 지나면 충의절신을 모신 숙모전과 삼은각 그리고 계룡산을 품고 사는 비구니의 도량처인 동학사가 나온다.

 

동학사 그리고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58)


석탑의 이름은 삼층석탑이라 불리는데 사찰이 창건될 무렵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양식 수법이 고려 시대로 보이는 높이 1.76m의 소박한 석탑이다. 현재 삼층 탑신은 없어져 겨우 파손된 부분이 남아 있을 뿐이며 초층탑신에 비해 2층은 낮아진 공법이 사용되었고 5단의 옥개석 받침 위에 올려져 있다. 탑신에는 우주가 표시되어져 있다.



본래 청량사(남매탑 부근) 암자에서 옮겨 놓은 탑으로 1층 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3층 몸돌은 없고 선덕왕 23(723) 동학사를 지을 당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는 높이 1.76m의 고려시대 탑이다. 현재의 탑은 2008년 복원한 모습이다.


▲ 동학사






동학사는 억울한 고혼들의 안식처로 알려져 있는데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를 짓고 절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라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동학사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들 증명이 어렵지만 우선 사찰의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동학사라 불렀다고 하며, 고려충신인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를 이 절에 제향 했으므로 동학사라 불렀다는 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포은 정몽주 제사를 지내는 삼은각


동학사 건물 옆에는 작고 큰 부속 건물이 함께 있는데 1394년 조선 태조 3년에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인 운선과 함께 단을 쌓아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재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으며 1399년인 정종 1년에 고려 유신 유방택(柳方澤)이 찾아와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의 초혼제를, 다음해 이정간이 공주 목사로 와서 단 이름을 삼은단 이라 하고 전각을 지으니 지금의 삼은각이다.


▲ 삼은각

처음 동학사를 찾는 사람은 삼은각을 보고 의아해 할 수가 있는데 이는 사찰 이 얼마나 한에 맺힌 억울한 사람의 혼령을 모셔 두었는가를 알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후 1457년인 세조3년에 삼은각 옆에 김시습이 조상치, 이축, 조려 등과 함께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니 단종이 제단을 증설하였다. 동학사에는 많은 영혼의 초혼제가 치러진 곳인데 단종이 제단을 증설한 후 다음해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이 제단을 살펴보고 정순왕후, 안평대군, 금성대군,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명의 성명을 비단에 싸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후 초혼각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하고 동학사라 사액한 후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1728년 영조4년에 신천영의 난으로 절과 초혼각이 소실되고 1758년 정조 9년 정휴겸이 위토를 팔아버려 제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다.



▲ 동계사

1814년 순조14년에 월인 (月印)이 예조에 상소하니 사옥과 혼록봉장각을 세워 주었으며 1827년 순조 27년에 홍희익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만들고 충청좌도어사 유석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이 제답을 시주해 다시 제사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후 1964년 고종1년에 금강산에 있던 보선이 와서 옛집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에 숙모전이라 바꾸었으나 19506.25에 소실되고 1960년에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현재 숙모전은 단종대왕, 안평대군, 사육신의 위패를 봉한 하고 있으며, 삼은각에는 포은, 묵은, 야은 선생을 봉안하였고, 동계사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모셔 두었다.






 

계룡산의 도참설을 믿고 숱한 사람이 동학계곡 따라올라 참선을 하며 미래의 도읍지로서, 사교의 요람으로서 그들은 갈망하거나 만족해 왔을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곳 계룡산을 웅장하기는 오대산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하기도 삼각산에 미치지 못하나 골짜기가 깊숙하게 들어앉은 것이며, ()안 서북쪽에 용천(龍川)이 있어 심히 깊게 넓게 흘러서 국한에 큰 시내를 이룬 것은 개성이나 한양에는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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