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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트레킹 - 계룡산 신원사 그리고 중악단

허영꺼멍 2017. 4. 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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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작을 알리는 

공주 계룡산 신원사


| 여행일자 : 2017년 00월 00일


신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의자왕 11(651) 보덕이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이 중창을 한 후 충렬왕 24(1298) 무기. 조선후기 무학이 중창하고 고종 3(1866) 관찰사 심상훈이 중창하면서 신원사로 개칭 후 1876년 보연이 중건하였다.



▲ 신원사

▲ 신원사 전경. 정형탑오층석탑(시도유형문화제 31호)

국가 산신 제사처 중악단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


신원사는 계룡산에 위치한 4대 사찰 중 남쪽에 있는 사찰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전각 중 대웅전 향각, 영원전 대방 및 요사채를 복원하였으며, 향각에는 명성황후가 봉안했다는 불상이 전해진다. 그 외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오층석탑과 부도 및 계룡산 중악단이 사찰로부터 50m거리에 위치해 있다. 신축된 대웅전은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협시불로 대세지보살 및 관음보살을 두고 있으며, 중악단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산신제단으로 궁궐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 부처님 반듯하게 누운모습


신원사로 들어선다. 언제나 방문하여 특별한 것이 없는 그냥 조용한 절집이다. 조금 특별하다면 경내에서 올려다 보면 계룡산 천황봉이 조망되며, 그 능선에 누워있는 부처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가 아주 특별하여 천진와불이라 한다.


▲ 신원사 대웅전(충남시도 유형문화재 제80호)






계룡산 연천봉 자락에 있는 신원사의 임진왜란으로 사찰 전각이 소실되자 위치를 옮겨 중창을 하였는데 본래 위치는 중악단 남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에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창건 후 여러 번 고쳐지었다 전해지는 신원사 대웅전은 조선 고종 13(1876) 보연이 다시 세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에 다포양식을 하고 팔작지붕을 올려놓고 아미타여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협시불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 신원사 오층석탑(충남시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신원사 경내로부터 떨어진 산신제단인 중악단 남쪽에 있는 석탑으로 현재 4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전해지나 본래는 2층 기단 위 5층 탑신을 올린 오층석탑으로 탑 서쪽 앞에는 배례석이 갖추어져 있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195712월 해체복원을 통해 탑신 1층 몸돌에서 사리구장치와 개원통보, 황송통보, 함원통보, 파손이 심한 자기로 만든 주전자, 녹색유리로 만든 병을 수습하였다.






계룡산 중악단(보물 제1293호)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1394) 처음 제를 지내기 시작한 중악단(中嶽壇)은 국가에서 직접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신라 당시 5악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북쪽에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에는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에는 계룡산을 중악으로 단을 만들고 산신에게 제를 지내던 곳이다.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은 효종 2(1651) 일시 폐지되었다가 고종 16(1879) 명성황후에 의하여 다시 재계되어 중악단을 짓고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 전하며,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설치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올려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고 있다.


▲ 담장 밖에서 바라 본 중악단 전경

중악단의 건물은 유교의 사당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들어서는 입구의 대문채와 중문채는 대가집의 주택형식을 하며. 본전 건물은 불교 법당 형식이며 지붕은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모든 건축수법이 동원되어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낸 국내 유일의 특이한 건물이다.


▲ 계룡산 중악단 측면 모습

계룡산 중악단은 대문간채를 시작으로 중문간채를 통과하면 중악단에 이른다. 사방 담장에는 다양한 문양의 독특한 아름다운 작품이 있는가하면 입구 대문간채 오른편 작은 공간에는 명성황후가 잠깐 머물었던 곳이기도 하다.


▲ 궁궐이나 나라에서 하사하는 특별한 건축에만 올려지는 잡상.(밀양 표충사 대웅전에도 있다)


중악단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쌓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 명성황후가 중악단을 제건 후 기도를 올리며 기거했던 방사

구릉지에 동북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지고 중악단만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 중악단 정면 모습





명성황후는 왜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서원하는 기도를 올렸을까? 어떤 애절함에 이끌려 당대 사찰에서 만날 수 없는 궁궐 건축물에서나 가능한 지붕 위 잡상을 올렸을까. 명성황후는 중악단 재건과 함께 고종과 순종의 만수무강과 조선의 국운 융성을 기원했다 한다.


▲ 중악단 현판은 조선 후기 문인 출신 이중하 글씨이다.

중악단 현판은 청국과 영토회담 때, “목이 잘릴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며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 해 간도의 땅이 우리 영토임을 주장한 조선 후기 문인 이중하(李重夏 1846~1917) 작품이며,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건물이다. 또한 대문간채 소슬삼문에는 외여닫이문이 달린 출입문을 통해 중채문을 거쳐 중악단으로 들어선다.



중악단 '꽃담'에 빠져 들다.


(), (), (), (), (), ()’ 이 문자는 무병, 장수, 복록을 기원하고, 평화와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이며, 계룡산 중악단 꽃담(花墻)에 와편으로 장식 해 놓았다. 꽃담은 길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악단 꽃담은 투박하지만 토속적이며, 당시 정서를 반영한 소박한 듯 보이지만 기품이 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공허한 마음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중악단 담장 너머 매화가 한창이다. 토담벽 기왓장과 벽돌로 만든 조각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단순한 건물 외벽을 이처럼 화사하게 표현해 내는지 그냥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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