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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트레킹 - 부여 정림사지 백제의 자존심 오층석탑을 만나다.

허영꺼멍 2017. 8. 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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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자존심-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  2017.08.03 ⊙




신라 경주에 불국사가 있다면 백제 부여에는 정림사지가 있다. 백제 부여 사비도성의 중심에 자리잡은 정림사지는 단순 사찰의 의미를 뛰어넘는 백제의 자존심이다. 정림사지는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에 건립된 사찰로 나성으로 둘러싸인 사비도성 내 남북 일직선상으로 중문--금당-강당을 설치하고 회랑을 배치한 사찰이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 정림사지 전경

여행별점 : ★★★★☆

백제의 아픈 상처 '정림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84


고려시대(1028)에 제작된 기와 명문을 통해 정림사지로 불리는 이곳은 백제의 희망과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42년 강당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게 된다.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현종 19(1028) 정림사가 중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오늘날 정림사지로 불러지고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

 

아픈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높이 833m의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이 탑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탑신에 글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당시 장수를 치하하고 자신의 공적을 기록 한 내용으로 당 고중 현경 5(660) 815"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 , ‘대당이 백제를 평정하여 비를 새기다라는 의미이다.


▲ 건물터를 지나 일직선상에 자리잡은 오층석탑과 석불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 소정방(蘇定方)은 기공문(紀功文)을 새겼다하여 당평제비 또는 소정방비라 불렀다 한다. 글은 당시 능주장사 판병부 소속 하수량이 짓고 하남사람 권회소가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백제의 멸망시킨 소정방은 의자왕, 태자융, , 인 및 대신과 장군 88,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수도 낙양으로 압송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니 백제의 아픈 역사 현장 중심에 서 있었던 탑이다.




▲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공적 기록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에서 660718일 의자왕을 사로 잡혔고 백제의 역사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굴욕의 역사인 항복의례를 82일 하게 된다. 이후 815일 당나아 소방정은 백제의 자존심인 석탑에 자신의 공적을 총 2,126자 새기게 된다. 내용은 승자의 기록으로 백제 정벌의 합리화를 미화시키고 참전한 장수의 칭송과 의자왕과 백제 포로 압송에 관한 내용이다.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


정림사지오층석탑 뒤편 건물에 안치되어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높이가 562m이며, 훼손과 마모가 심하여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왼손 윤곽을 통해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 할 뿐이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1993년 보호각을 조성하였다.


▲ 보물 제 108호 석불좌상





강당지와 함께 나란히 있는 석불좌상은 정림사지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부처의 모습이라기보다 훈훈한 마음씨를 느끼게 하는 마고할미로 여겨지지만 손의 취한 형태가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것으로 비로자나불을 두고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 독특한 얼굴 모습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불 에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만 있는데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불은 사찰을 만들 당시 세웠던 본존불로 추정되는데 이는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석불의 상대부분은 연꽃이 활짝 피어나 있고, 중대의 8각 받침돌 각 면에는 눈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는 연꽃을 뒤집어 놓은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해 두고 있는 정감이 가는 석불이다.



정림사지 박물관을 돌아 나오다.


부여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백제의 자존심 정림사지오층석탑의 당당한 모습에 호흡을 한번 가다듬게 만든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백제말 120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현존하는 백제 유적으로 유일한 탑이라는 점은 당시 처절한 전쟁으로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소멸을 단편으로 말해주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림사지는 백제사비성을 재건할 당시 백제를 상징하는 사찰로 함께 창건되지만 백제 6607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부흥을 누려왔던 정림사지도 흥망성쇠를 함께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쓸쓸하게 탑 하나만 남겨놓게 된다.


▲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보물 제 1767호) 


사찰은 철저하게 파괴되지만 정림사지오층석탑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야 하는 큰 짐을 지게 된 셈이다. 정림사지라는 지명은 원래 이곳에 있던 사찰의 이름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고 단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정림사지란 고려시대(1028)에 제작된 명문을 통해 정림사지로 불리고 이곳에 남아있는 탑을 두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고 한다.

 

석탑의 조성은 탑을 세우기 위해 하부층에 판축토를 사용하여 그 위 120cm의 점질토 판축을 함으로서 탑의 무게를 잃지 않도록 하였다. 1층 탑신에 당의 소정방 전승을 기리기 위해 새겨 넣은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있어 이 탑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평제탑이라 불렸다. 이곳을 평정한 소방도 모든 것을 다 소멸시켜도 우뚝 서 있는 탑은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남겨 놓음으로서 그곳에다 자신의 승전기록을 남겨 유일하게 백제석탑으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석탑의 앞에는 연지와 중문지가 자리 잡고 연지는 동서로 2.1m의 간격을, 좌우로 조성된 네모형 연못으로 동서의 길이가 15.3m,남북의 너비가 11m이며, 경주 안압지와 함께 이곳 연못 뻘 속에서 백제시대 기와,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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