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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시작되면 전국은 단풍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복잡하고 더디기만 한 여행지를 찾기보다 홍선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47개 서원중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한곳인 도동서원을 찾아 길을 열어 본다. ▲ 다람재에서 바라 본 도동서원 전경
도동서원은 조선 선조 원년(1568) 비슬산 자락에 터 잡은 쌍계서원이 임진왜란을 통해 소실되자 1604년 도동서원으로 재건되었으며,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조선 중기 문신 학자 외증손 정구(1543~1620)를 모신 곳으로 사적 제 488호이며, 서원에는 국내 유일 건물 담장이 강당과 함께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람재를 넘어서다 도동서원을 여행하려면 우선 다람재를 거쳐야 한다. 느티골과 정수골 사이 산등성이로 그 모습이 다람쥐를 닮아 다람재라 부른다 하지만 높지도 않은 산길이 돌고 돌아 오르는 것이 다람쥐도 쉬어 가는 곳이란 의미라고도 한다. 그래서 일까 딱 고만고만한 높이에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전망대에서 시원하게 흘러가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 칠백리 푸른 물길과 함께 도동서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 다람재에서 바라 본 도동서원 전경 다람재를 내려선다. 가을이 눈앞에서 현란한 손놀림으로 유혹을 한다. 다람재 내리막길이 끝나고 한 무리 자전거 행렬이 스쳐간다. 낙동강 자전거 길이 다람재를 통과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독특한 모습으로 가을을 펼쳐 놓고 있다. 400년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심었다 한다. 수령이 400년 된 은행나무로 경주 운곡서원, 풍기 소수서원 은행나무처럼 대부분 곧게 위로 자라는 반면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려 운치를 더하는데 높이 25m 은행나무를 두고 김굉필나무라 하며 학자수라고도 한다. ▲ 은행나무가 흡사 누운향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공자 사당이나 서원에는 은행나무를 심었고 그곳을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 즉, 행단이라 불렀다 한다. 행단(杏壇)이란 공자(孔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행(杏)자가 살구나무의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으로 과연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나무 그늘이 살구나무인지 은행나무인지 알 길이 없다. 행단에 관하여 정약용은 조선 정조 당시 지은 어원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이 잘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상징하게 된 것이라 하는데 정작 공자의 나라 중국 행단 유적지에는 살구나무나 은행나무는 없다는 것으로 어원의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나라 서원에서 은행나무를 만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안동도산서원은 활엽수 고목이, 병산서원은 배롱나무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도동서원에 올라서다 선조 38년(1605) 유림들은 김굉필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607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道東)’을 사액 받은 후 숙종 4년(1678) 김굉필 외증손 정구를 추가 봉안하였다. 그 후 홍선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당시에도 국내 47개 서원은 철폐령에서 빠졌는데 도동서원이 그중 한곳이며,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올리고 있는 곳이 바로 도동서원이다. ▲ 강당에서 마주 본 전경 으로 꽃 담장 중심에 위치한 환주문과 누각 수월루 전경 도동서원 첫 관문은 외삼문과 누각 수월루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을 올린 누각 형태의 2층 건물로 1층은 출입문과 관리사 전사청을 두고 2층은 누각을 올렸다. 본래 수월루는 1855년 창건 이후 1888년 화재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세월이 흘러 1973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판은 약산 김태수의 글씨이며, 수월루란 ‘강물위에 드리워진 달’을 의미한다 한다. ▲ 누각 형식의 수월루와 단지를 뒤집에 올려 놓은 환주문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는 앞 전망이 탁 트인 반면에 이곳 도동서원 수월루는 은행나무 숲이 조망권을 병풍처럼 쳐 놓고 있으며, 수월루는 복원과정에서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바꾸어 졌다고 한다. 수월루를 지나 소박한 자연을 닮은 돌계단이 환주문으로 안내한다. 열려진 문 중심에 문 받침대 꽃 석조물이 문에 비하여 큼직하게 놓여 있어 보행이 조심스럽다. 이 뿐만 아니다 들어서려면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할 만큼 입구를 낮추고 위에는 서원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사모지붕에 절병통을 올려 빗물 누수를 막고 있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 한다. 선비들이 학문의 공간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려면 선현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도록 의도적으로 문 높이를 낮추어 놓았다. 그리고 담장에는 돌과 흙 그리고 기와를 사용하여 독특한 디자인을 완성해 놓았다. ▲ 도동서원 중정당 환주문 안에 들어선다. 정면 중정당 그리고 뒤편 내삼문을 거쳐 사당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오른쪽으로 거인재를, 왼편으로 거의재를 두고 뒤편에 화장실을 두었다. 중정당 오른편은 사주문을 통해 전사청으로 출입을 하며, 왼편으로는 장판각을 두었다. 전사청은 장판각과는 별도의 공간으로 문간채를 통해 출입을 하며, 문간채에서 오른쪽으로 곡간채를 두고 있다. ▲ 여의주를 물고 있는 기본 용두와 분실 후 끼워 넣은 고기를 물은 용두
기단에는 용머리를 한 장식이 4개가 일정한 간격과 높이로 배치되어 있다. 이중 오른편 2번째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용두)는 진품이며 나머지는 분실된 후 새롭게 가공해서 삽입한 것으로 현재 분실된 1개는 회수하여 국학진흥원에서 보관전시 중이다. 용머리는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주술적 의미로 보인다. 강당인 중정당에는 이 뿐만 아니다. 계단이 정면 2개와 측면 1개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옆에 꽃과 다람쥐가 새겨진 돌이 눈길을 끈다. 왜 하필이면 다람쥐 일까하는 생각에 방금 스쳐온 다람재가 문뜩 떠오른다. 다람재를 연상해서 다람쥐를 새겼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오른쪽 다람쥐는 올라가는 모습이고 왼쪽 다람쥐는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혹시 올라가는 계단이 오른쪽이고 내려서는 계단이 왼쪽으로 이곳은 계단 사용설명서가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간다. 정면에 중정당과 뒤편 사당이 수월루를 시작으로 환주문과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좌우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인 거인재와 거의재가 있다. 중정당은 크게 꾸미지 않은 간결한 형태이지만 강당 기단부 석물과 석재 쌓은 모습이 아주 독특하다. 강당에서 눈여겨 볼 것으로는 기단부 석물과 석재 그리고 기둥 과 정료대이다. 도동서원 담장은 국내 최초 중정당과 함께 담장으로서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아래는 큰 막돌을 쌓고 그 위에 둥글납작한 돌 그리고 위에 황토와 함께 암키와로 층을 쌓는데 그 중간 중간 수막새를 지그재그로 넣어 변화를 통해 고풍스러운 멋을 부렸다. 담장은 일정한 높이로 경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변화무상하게 달라지며 전 담장이 동일한 디자인을 하고 있다. ▲ 그냥 스쳐가지말고 한번만 눈길을 주면 독특한 기단석 허튼쌓기를 볼 수 있다. ▲ 지방 유생이 하나씩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는 기단석의 돌은 제각기 모습을 달리하고 있지만 절묘하게 맞췄다. 예술의 극치라 말 할 정도로 기단석 막돌허튼층쌓기는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는 둥글둥글한 돌이나 제각기 다른 모습의 돌을 쌓은 것과는 달리 네모진 돌을 미고석 쌓기처럼 크기가 다른 돌을 이빨 맞추어 마치 퍼즐 맞추기처럼 정교하여 조화와 균형미를 맘껏 뽐내고 있는데 대부분 사용된 석재의 규격이 다른 이유는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지역에서 들고 온 돌을 가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 자라 또는 거북머리돌과 꽃문양을 만난다. 제향공간 계단석에서 예상치 못한 독특한 디자인이 어떤 의미인지 모호하다. 강당 앞에 자라 모습을 한 석물 1기가 버티고 있다, 사당으로 가는 길에는 거북 머리를 한 석물 1기가 중앙에 있는데 뒷산이 거북 형상으로 거북이가 목이 말라 내려오는 오항혈(鰲項穴) 즉 자라목에 해당되기 때문이라 한다. 즉, 중정당을 등에 짊어진 한 마리의 거북 또는 자라와 사당을 짊어진 한 마리의 거북 또는 자라가 서원 내 있는 것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반 주심포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로 간판이 두 개가 달려 있다. 입구에 내걸린 간판은 도동서원 사액현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며, 안쪽 현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초서 예서에 뛰어난 배대요(1563~?), 중정당은 해서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 김생의 필법을 연구한 조선 후기의 문신 이관징(1618~1695)의 글씨이다. 강당으로 올라서면 기둥에 하얀색으로 띠를 두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흰종이(한지의 종류 상지(上紙))를 감은 것으로 서원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이라고 전하며,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건물 상단 중심에 세워져 있다. 건물 오른편에 정료대와 비슷한 석조물이 있는데 이는 제수품을 올려놓고 검수하는 일종의 탁자로 생단이라 한다. 사원이라면 유생들이 기거하기 위해 있는 공간으로 동재와 서재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을 한 공간으로 앞쪽으로 툇마루를 만들지 않은 대신 측면에 넓은 마루공간을 두었는데 한 칸은 마루방으로 두칸은 온돌방이다. 동재와 서재를 이곳에서는 동제를 거의재, 서재를 거인재라 부른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건물이 북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도 내시종가로 알려진 임당리김씨고택 안채도 북향으로 놓여 있는데 매일 임금을 생각한다는 의미이지만 이곳은 배산임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향을 포기한 것이라고 한다. ▲ 사당으로 향하는 계단 김종직이 죽은 후 6년이 되던 1498년 조정에서는 뜻밖의 시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림파와 훈구파가의 정권 다툼이 심했는데 사림파 시조였던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한 편의 글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였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해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사림파였던 김굉필도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조광조를 만나게 되었고 조광조는 스승으로 삼으면서 훗날 김종직을 시작으로 김굉필, 조광조 순으로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게 된다. ▲ 사당 서원 최 상단부분에 위치한 사당은 한휜당과 외증손 한강 정구(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중정당에서 올라가는 긴 계단과 그 옆으로 작은 계단이 또 하나 있다. 문이 닫혀 있어 특별한 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제향공간으로 이곳 동쪽 담장에는 차()라는 사각 구멍이 있는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축문을 태우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있다고 한다. 보통 제례가 끝나면 바람 부는 방향으로 불을 붙여 재를 만들어 날리는 게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곳에만 유일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서원은 향교와는 차이가 있다. 서원이 오늘날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공립학교이다. 서원은 학문에 열중하는 반면 향교는 과거를 위한 준비하는 공간을 성격이 약간 다르다. 김굉필은 1454년 한성 출신으로 27살에 생원시에 합격 후 마흔에 정6품 벼슬인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1504년 세상을 뜬 성리학자로 시림파 시조 김종직을 스승으로 두었다. ▲ 서원 앞 전경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현재 도산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필암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소수서원, 도동서원 등이다. 도동서원 누대인 수월루에 올라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다. 안동 병산서원에서 만나는 만대루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흐르는 낙동강은 변함이 없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도동서원 수월루에서 바라보는 은행나무의 도도한 자태와 가을의 정취는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베롱나무 길 열려있는 여름의 정취에 비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홍선 대원군은 국가재정과 군역, 당정의 폐단이 서원과 관련 있다며 개혁을 하려든다. 서원의 난립과 폐단이 자초한 결과로 고종 2년(1865) 만동묘를 철폐, 고종 3년(1866) 서원에 주어지던 면세와 면천 조정을 통한 비사액 서원 철폐, 고종 7년(1870) 사액서원 중 붕당을 만들고 악행을 하는 일부 서원 철폐, 고종 8년(1871) 첩설된 서원 모두 철폐하여 전국 1700여개 서원 중 마지막까지 철폐를 면한 서원은 사액서원 중 47곳에 불과하였다.
47개 서원 중 도학서원으로는 서악서원(경남 경주. 1561, 김유신. 설총), 무성서원(전북 정읍. 1484. 최치원), 소수서원(경북 영주. 1543, 안향), 숭양서원(황해 개성. 1573, 정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1605. 김굉필), 남계서원(경남 함양. 1552. 정여창), 심곡서원(경기 용인. 1650. 조광조), 옥산서원(경북 경주. 1573. 이언적), 필암서원(전남 장성. 1590. 김인후), 도산서원(경북 안동. 1574. 이황), 문회서원(황해 배천. 조선중기. 이이), 파산서원(경기 파주. 1568. 성혼), 돈암서원(충남 논산. 1634. 김장생), 여주 강한사(경기 여주. 1785. 송시열), 흥암서원(경남 상주. 1702. 송준길), 봉양서원(황해 장연) 1625. 박세채) 그리고 충렬서원 및 사우로는 강화 충렬사(인천 강화. 1642. 김상용), 광주 현절(경기 광주. 1688. 사학사, 김상헌), 우재서원(경기 김포. 1648. 조헌), 용연서원(경기 포천. 1691. 이덕형), 사층서원(경기 하남. 1725. 신임옥사 4충신), 덕봉서원(경기 안성. 1695. 오두인), 노강서원(경기 의정부. 1695. 박태보), 고양기공(경기 고양. 1841. 권율), 홍산 창렬사(충남 부여. 1717. 윤집), 청주 표충사(충북 청주.1731. 이봉상), 노강서원(충남 논산. 1675. 윤황), 충주 충렬사(충북 충주. 1679. 임경업), 광주 포충사(광주 남구. 1601. 고경명), 금오서원(경북 구미. 1570. 길재), 옥동서원(경남 상주. 1518. 황희), 병산서원(경북 안동. 1614. 류성룡), 동래 충렬사(부산 동래. 1605. 송상현), 진주 창렬사(경상 진주. 1595. 김천일), 고성 충렬사(경남 통영. 1606. 이순신), 거창 포충사(경남 거창. 1737. 이술원), 창절서원(강원 영월. 1685. 사육신 6인 외 3인), 철원 포충사(강원 철원. 1665. 김응하), 충렬서원(강원 철원. 1650. 홍명구), 평산 태사(황북 평산. 고려 초. 신숭겸, 유검필, 복지겸, 배현경), 해주 창성(황남 해주. 1687. 백이숙재), 노덕서원(함남 북청. 1627. 이항복), 영유 삼충사(평남 평원. 1603. 제갈량, 악비, 문천상), 안주 충민사(평남 안주. 1681. 남이흥), 영변 수충사(평북 향산. 1794. 청허, 휴정, 송운, 유정), 평양 무열사(평안 평양. 1593. 석성), 정주 표절사(평북 정주. 조선 순조. 정시) 등이 있다.
국내 서원 중 현재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된 곳은 도산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필암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소수서원, 도동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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