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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의 물줄기 대곡천 중류 기슭 한반도 암각화를 대표하는 울산광역시 반구대암각화는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만 무려 75종 200여점으로 다양한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대백과사전이다. ▲ 반구대 암각화 전경
암각화는 가로 8m, 세로 2m, 높이 3.6m의 암면에 "ㄱ" 자 형태로 1965년 울산시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사연댐을 만드는 과정에 물속으로 수장되어 인근의 천전리각석 보다 훼손이 덜한 상태로 고래, 개, 늑대, 사슴, 호랑이, 여우, 곰, 멧돼지,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암각화를 세분화 하면 동물 중 멧돼지의 교미중인 모습과 임신한 모습, 성기를 노출한 사람, 그물에 걸려든 고기, 작살에 찔린 고래, 내장을 그린 모습, 탈을 쓴 무당 등 당시의 시대상을 윤곽선을 돌출하기, 안쪽 파내기를 통해 입체적으로 쪼아낸 흔적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 숲길 끝자락에서 만나는 반구대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최초 확인된 2000년 당시 296점으로 조사되었지만 최근 고래 1점, 육지동물 3점, 인물상 2점 등 총 6점이 추가확인되어 합계 307점이 되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만큼 암각화에 50여 마리에 이르는 고래의 다양한 모습이 놀라움 그 자체로 고래의 종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고래수염과 이빨, 머리모습, 등지느러미 등 상세한 기록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암각화 중 고래가 유독 많이 그려져 있는데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다양한 고래종류를 새겨놓은 것으로 지금은 찾기힘든 향고래를 2마리 새긴것은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은 선사시대에 이미 장승포 부근은 고래잡이가 성행하였음을 말해주며, 우리나라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국가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암각화 탁본 귀신고래는 목 아래 짧은 홈을 25개 표현하였고, 혹동고래는 폭이 넓은 주름을 그렸으며, 북방긴수염고래는 수증기를 내 뿜고, 향고래는 사각형의 머리를, 범고래는 등과 배를 암각 돌출로 명암을 주었는가 하면, 돌쇠고래는 등지느러미를 앞쪽에, 돌고래는 등 중앙에 지느러미를 상세하게 새겨놓고 고래 등에 새끼를 업고 다닌다는 암각화는 새끼라는 표현보다는 지나가는 큰 고래 위에 작은 고래가 지나가는 모습을 수면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그 이유로는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로서 돌고래에 속하는 살쾡이가 있지만 고래 그림은 앞면주둥이가 상당히 뾰족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살쾡이는 머리가 둔탁한 모습을 한 둥근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래가 새끼를 업고 가는 것은 해당되지 않고 임신한 고래로 상상한다는 것은 고래 머리에 새끼를 임신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상식선을 벗어나는 것으로 수면 위에서 아래로 본 고래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흑등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돌쇠고래, 돌고래, 향고래 등으로 우리나라를 회유하는 고래가 주종을 이루며, 추가로 발견된 암각화를보면 동일 크기의 두 마리 고래와 누워있는 호랑이 그림으로 고래 2점, 호랑이 2점, 사슴 1점, 인물 1점 등 6점이 추가되어 세계 암각화에서 가장 표현력이 뛰어나고 고래 종류까지 파악되는 유일한 암각화로 알려져 있다. ▲ 계곡 건너편 암각화 전경 당시 울산에는 많은 고래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암각화로 1899년 근대포경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이보다 더 앞선 시대 무기를 가지고 고래를 잡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 포경은 경남 거제도, 장생포, 함경도, 강원도에서 포경업이 1947년까지 성행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인 I. W. C에 가입하며 고래잡이는 중단되고 동해 앞바다에는 고래가 거의 멸종위기에 처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에 의하여 발견된 이후 1995년 국보285호로 지정, 관광 붐을 통하여 언론매체에 알려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두고 학계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유래가 없는 3백 종의 동물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불모의 땅으로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사하라 사막이 옛날에는 초원지대였음을 말해주는 것은 당시에 남겨진 타드라트 아카쿠스 암각화의 덕분으로 암벽화에 말, 코끼리, 소, 개, 기린 등이 있는 반면, 울산 암각화는 고래를 잡는 다양한 모습과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등 당시 이곳에는 상당한 인구와 함께 여러 종류의 고래가 지금의 울산 앞바다에서 서식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반구대 암각화 주변 함께 둘러보는 공간 국내 유일 암각화 박물관 ‘울산암각화박물관’ 선사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소중한 스토리를 들려주는 공간이다. 반구암각화 여행에 앞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이곳 울산암각화박물관에는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공간이다. 1층 전시실에는 선사탑을 시작으로 암각화의 이해 그리고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의 복제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대곡천암석표본과 반구대암각화를 통해 확인된 당시의 동물 외 황성동 패총 출토유물 등이 있다. ▲ 반구대암각화 입구에 자리한 암각화박물관 반구대암각화박물관 2층에 전시중인 울산 황성동에서 수습된 고래뼈 유물 2010년 한국문물연구원이 발굴한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래뼈 출토된 층위의 AMS 연대는 5510±60 BP~4700±50 BP 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에 해당되므로 지구상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반구대 암각화에 관하여 사전에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울산암각화 박물관이 조성되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래를 형상화하여 반구대박물관을 건축하였으며, 위에서 내려다 보면 한 마리의 큰 고래형상을 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주차 및 관람료가 무료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계곡에 도착하면 막상 암각화를 만나기 어렵다. 방문객을 위해 망원경을 설치해 놓았지만 그것도 자세한 관찰이 어려운 만큼 박물관에 들어서면 벽면에 실물 크기의 반구대 암각화를 복재해 놓았다. 박물관은 2007년 1월 착공 후 2008년 2월 완공하고 그해 5월 30일 개관하였다.
울산 15 정자 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반구대 집청정 집청정과 반고서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포은 정몽주를 떠올려 본다. 역성혁명을 꿈꾸던 이성계와 정도전은 당시 정몸주를 정적으로 간주, 이성계의 5번째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를 왕위로 오르도록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게 된다.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56세였다. ▲ 집천정 전경,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정몽주도 한때 귀향길에 올랐다. 1376년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친교를 맺자는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면서 울주군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면서 울주군 근처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흔적으로 반구대암각화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집정천과 반고서원, 언양 작괘천이 있다.
집청정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 절경에 빠져 많은 시와 글을 남겼고 이를 집청정시집으로 260여 명의 한시 406편을 수록하고 있다. 흔히 이곳을 구곡문화를 꽃 피운 곳으로 부르는데 구곡이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성리학과 결부시킨 것으로 겸재 정선이 남긴 진경산수화 배경이 대곡천으로 알려져 있다. ▲ 반구대 공룡발자국 화석 앞에서 바라 본 집천정 방향 전경 반구대 집청정은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의 증손 운암(雲庵) 최신기(崔信基 1673-1737)가 18세기 포은 정몽주(1337~1392)를 기리고 장수(藏修)와 강학(講學)의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1743년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 최신기의 손자 최석겸이 새로 짓고 1932년 최신기의 9대손인 최준식이 정면3칸 측면 1.5칸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최신기의 14대자손(장손 최원식)들이 한국 효 정신을 가르치는 예절방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집청정을 활용하고 있다.
집청정이란 집 앞을 흐르는 대곡천인 반계구곡(磻溪九曲) 맑음을 모으는 정자라는 의미이며 집청정 편액 외 오른쪽에 청류헌(聽流軒), 왼쪽에 대치루(對峙樓) 현판을 내걸었다. 거북이 한 마리 넙죽 엎드린 형성 '반구대' 반고서원 반고서원 유허비 반고서원 유허비(3기)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반고서원 앞 계곡을 건너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비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고려 우왕 1년(1375)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당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귀양살이를 하게되었는데 그 당시 반구대를 자주 찾아 "중양절감회" 라는 시를 남기는 등 그 흔적이 남아있어 반구대를 포은대로 부르기도 하였다. ▲ 반구대 전경 중앙절감회 客心今日轉凄然 객심금일전처연 나그네 마음, 오늘따라 더욱 쓸쓸하여 臨水登山瘴海邊 임수등산장해변 물 따라 산 올라 바닷가에 다다랐다. 腹裏有書還誤國 복리유서환오국 가진 지식 오히려 나랏일을 그르치고, 囊中無藥可延年 낭중무약가연년 품 속에 약이 없으니, 남은 수명 언제련가. ▲ 반고서원 반고서원은 고종 8년(1871) 홍선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으며, 그 후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를 세웠으며, 1965년 오늘날 자리로 옮겼다. 반고서원은 조선중기 인물가 정몽주 이언적 정구 세분의 모신곳으로 조선 숙종 38년(1712) 유생들의 뜻을 모아 조성하였으며, 영조 4년(1728)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 다시 복원하였으며,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찰된 후 1983년 오늘날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반구대 명문 집천정을 지나면 반고서원과 유허비가 있는 계곡 건너편 암반에 옛 시인과 묵객이 즐겨 찾아 수많은 이름과 비문을 남겨 놓았다. 집청정 앞 20-30m 단애 층암이 거북이 머리를 닮았다하여 반구대(盤龜臺)라 부르며, 반구대에 정몽주 유배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 있으며, 포은대라 부른다. 반구대 아래는 많은 시와 학을 그려 놓았다.
암반에 새겨진 명필들 속에 반구(盤龜), 옥천선동(玉泉仙洞) 글씨가 눈에 띈다. 감실을 만들고 새겨놓은 날개를 접고 동쪽으로 부리를 향한 학 그림은 매우 정교하고 입체적이다. 연로개수기 고개를 넘다. 집청정을 지나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목 벼랑길은 폭이 2.5m로 차 한대가 겨우 너머 갈 수 있는데 오르막 끝지점 왼편에 비지정문화재인 연로개수기 안내판이 있다. 대곡천 가장자리 바위면에 새겨진, 일종의 마애기로 훼손이 심한편이다. 마애기는 1655년 이 길을 보수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 연로개수기 글자 지금까지 확인된 명문을 통해 길의 이름이 연로였다는 것과 더불어 1655년 이전에 이미 길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옛 지명 연로는 벼루길로 주변 바위가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루에서 음차 한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 등의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반구대 대곡리 공룡화석지 다리를 건너 대나무 숲길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계곡 앞 바위에 공룡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3호로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시대에 하천평야지대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이 남아 있으며, 최근 발굴과정에서 반구대 암각화 앞 일대에 공룡발자국이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 반구대 대곡리 공룡발자국 용각류 팔용과(Brachiosauridac) 에 속하는 60톤급 공룡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고성룡족 등 24여 개 발자국이 경상계 하양층군 사연리층 중회색 사질이암층에서 확인되고 있다.
암각화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확인된 공룡 발자국 외 반구대암각화 앞 기준으로 동서 41m, 남북 14m 범위 암반층에서 5마리 이상으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화석 81점이 추가 발굴 되었는데 초식공룡 용각류와 조각류 및 육식공룡 수각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발자국 크기는 길이 25~50㎝, 폭 29~54㎝으로 천전리공룡과 함께 이 일대에 많은 공룡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어 이 일대에 관하여 지금이라도 정밀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보고 내려서다 선사인이 걸었던 길, 지금은 댐이 되어 옛 모습은 많이 지워져 버렸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암각화로 향하는 그 길은 다리건너 숲을 지나 산허리춤을 붙잡고 들어선다. 나무데크 앞에서 약 600m 황톳길을 따라 들어서면 반곡천과 대곡천이 합류하면서 물길이 시언호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목 건너편에 암각화가 손길을 거부하며 자리잡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고래 사냥하는 선사시대 유물로는 국내 반구대암각화가 표현력과 현실감이 으뜸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땅을 일군 선사인은 당시 첨단 무기를 통해 고래를 포획하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암각화를 타임캡슐에 담아 후손에게 남겼지만 정작 우리는 이런 문화재를 어찌 보존하며, 훼손을 막고 후손에게 다시 대물려 주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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