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이전여행/05월 여행

[경남 하동]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허영꺼멍 2010. 5. 30. 22:04

하동포구 재첩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길을 잡다.

 

발길 닿는 곳을 따라 질주하는 세상 굴레를 잠시 벗어놓고 탈선해 보면 아스라한 봄빛이 굽이굽이 강물을 어루만져 유혹을 한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어루만져 12개 군을 동면에서 깨우니 첫 소식이 매화꽃이다. 특히 하류에 위치한 백운산 자락은 3대를 잇는 장인을 배출하면서 매화꽃은 섬진강의 봄을 재촉하여 서둘러 2,000여개의 장독 속에서 숙성되길 염원한다.

 

 

 

 

매실꽃잎이 낙화를 시작하면 섬진강은 지각생 매화와 산수유 그리고 성급한 벚꽃이 강줄기를 따라 북상을 하면서 청보리의 파릇함과 벚꽃의 화려한 꽃비가 끝없이 흘러내린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에 위치한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보성강과 합류 그리고 광양만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은 고려 말, 왜구들이 섬진나루터에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밤새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몰려나와 울부짖어 왜구들은 침입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전하며, 훗날 왜구에게 포로가 된 병사들을 위해 수천마리의 두꺼비가 강물에 다리를 놓아 구출하고 뒤쫓는 왜구가 강물 중간에 도달하자 두꺼비가 물속으로 사라져 빠져죽게 되었는데 훗날 두꺼비 섬(蟾)과 나루 진(津)을 합쳐 섬진강이라 불렀다 한다.

 

섬진강의 봄은 비단 물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섬진강 꽃길 그리고 야생 차밭의 다향을 머금고 유명한 천년고찰을 품고 있다.

 

 

하동포구 팔십 리 “모래에 이름 석 자 남겨보며”

하동포구 팔십리길 하류 은빛모래 뿌리내린 송림은 매서운 모래바람 용케 버텨 울창한 숲 만들어 놓고 260여년 세월 굽이도는 물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영조 21년(1745) 도호부사 전천상이 방풍림 목적으로 심은 하동송림은 현재 2km 구간 750여 그루 노송으로 자리를 지키며 국내 제일 노송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동포구 팔십리길의 첫 여정은 백사청송(白沙靑松)으로 손색없는 하동포구를 시작으로 길을 잇고 있다. 팔십리 물길은 속과 겉이 다르다. 빠른 속 물길과 달리 수면 위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급선회하는 용트림도 잠시 모래를 적셔 그림을 그리고는 여유만만이다. 곧 닥쳐올 광양만에서 분해되어 사라지는 강물이지만 아직은 더 흘러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에 여유로운 것이 아니다. 힘들고 지친 여정을 달려 온 만큼 화를 낸다면 섬진강 팔십리 살아남을 생명은 없을 것이다. 섬진강을 회유하는 은어와 참게 그리고 재첩에게 무한의 생명력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광양청매실농원 “매실이 익어가는 이야기를 엿듣다”

하동읍에서 섬진교를 두고 고민한다. 봄이면 틀림없이 광양 청매실농원으로 군 소리 없이 한걸음에 달렸을 그 길은 매화꽃이 바람에 흔들리면 꽃향기는 장독 속에서 익어가기 때문이다. 섬진교를 건너 곧장 오른편을 도로를 따라 달리면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청매실농원 이정표가 산길로 안내한다.

 

 

 

 

 

홍쌍리매실농원으로 국내 최고의 매실농원이 섬진강 강바람에 꽃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곳이다. 삼월이면 흐드러지게 핀 하얀 매화꽃에 정신을 잃을 정도이며, 매화가 익어가며 들려주는 2,000여개의 장독 모습도 독특하게 다가온다. 매화농원에서 가장 절정인 순간은 하얀매화밭 아래 청보리가 연초록 세상을 만드는 순간이다. 매화농원을 내려선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섬진교를 건너 구례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최참판댁에서 “서희를 떠올리며”

소설 토지속으로 빠져든다. 조준구의 모략으로 서희는 집을 떠나며 한 말이 “주인은 최서희! 똑똑히 알고 있으세요” 거장의 대하소설은 시대적 배경을 담아내고 그 속에 작품이 지닌 서사의 힘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으로 대하드라마가 연속극으로 등장해도 질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 대하소설의 양대산맥 조정래와 박경리가 있다. 그 중에서도 박경리의 토지는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그려내면서 다양한 계층간의 시대적 격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그 세트장이 하동에 있다. 세트장으로 가는 길목은 뒷산에서 갓 캐온 다양한 봄나물과 악양 들판에서 주름진 손으로 칼질을 한 쑥이 햇볕에 숨이 죽어 난전을 펼친 할머니의 주름살을 닮아가고 있다.

 

 

 

평사리 일원에 자리한 최참판댁 세트장은 악양 들판과 옆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비록 한 뼘의 땅이 없더라도 최참판댁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석지기가 된 착각을 가져 올 만큼 세트장을 신경 쓴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세트장을 둘러보는데 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TV를 통해 알만큼 다 아는 익숙한 배경들이 펼쳐지고 건물에는 도우미가 직접 옛 모습을 연출해 더욱 실감을 더해주는 곳으로 영화와 TV드라마 촬영지로 부상하고 있다. 최참판댁을 물러나 악양 들판 연초록에 보리싹 하나 뽑아들고 보리피리를 만들어 본다. 세상살이 고단할 것인데 악양 들판은 예전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물오른 수양버들이 앞 다투어 자리 차지하는 길목을 돌아 나와 화개장터로 향한다.

 

화개장터에서 “역마살을 떠올리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 보셔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전라도쪽 사람들은 나룻배타고/경상도쪽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오손도손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구경 한번 와 보셔요/오시면 모두모두 이웃사촌/고운정 미운정 주고받는 / 경상도 전라도의 화개장터/ 조영남의 화개장터와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 화개장터는 여행지로 급부상하였지만 정작 화개장터에 가면 이 모든 것이 옛말이 되어 버렸다. 화개장날은 오일장으로 1일과 6일인데 장터라고 해봐야 이제는 관광 상품 파는 장소로 전락하고 겨우 화개장터였다는 비석만 있을 뿐이다.

 

 

 

 

 

역마살이 낀 장돌뼁이 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각설이 타령이 시장을 누비면서 서로의 풋풋하고 따스한 온정이 지역감정들을 밀치고 자리 잡았던 화개장은 남해안 해산물을 농산물과 교환되는 단연 최고의 큰 장터로 한때는 굴림 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서 떠돌이 남사당을 만나 옥화를 잉태한 주막도 없는 현대화 물 결속에 떠밀려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주차장과 다리가 연결되면서 줄배 구경도 힘들다.

 

살아 꿈틀 꺼렸던 화개장터는 이제 쌍계사 십리벚꽃길, 쌍계사, 구례로 향하는 길목역활을 수행하며, 장터마을과 다리건너 원탑마을로 지금은 몇 채의 가옥이 인근 야산에 차를 생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화개장터 앞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고량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 2003년 7월28일 구례 간전면 운천리와 하동 화개면 탑리를 잇는 남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섬진강을 오가던 줄배 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상징하는 빨강색과 파랑색의 태극문양이 섬진강 물결에 씻겨 줄배의 아쉬움을 대신 할 뿐이다.

 

우리나라 5대 장터로 사투리가 공간을 메우면서 형성되었던 화개장터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장소로 전략해 버렸지만 어쩔 수없는 현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대형마트가 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잘 뻗은 도로를 이용하여 수송되는 작금에 시장의 기능은 이제 추억으로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이다. 화개장터에서 나와 마을로 접어들면 봄철 그 유명한 쌍계사 십리벚꽃길로 향하게 된다.

 

 

십리벚꽃길에서 “다정스레 손잡고 걷는 연인들”

봄의 기운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남녘의 땅 하동에는 매화꽃향기가 시샘하는 봄바람과 하얀 여린 꽃망울 터뜨리고 연이어 벚꽃과 산수유 꽃이 지천에 피고 지는 아름답고 황홀한 전원풍경을 선보여 화개장터 입구에서 쌍계사까지 지방도로 1023호선으로 약 4km 거리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우수상 수상의 영광과 연인에게 혼례길 로 이미 널리 알려진 길이다.

 

 

 

 

십리벚꽃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벚꽃의 수령은 거의 50-60년을 족히 살아온 고목이다. 십리벚꽃길은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1년 지역민이 벚꽃 1,200주, 홍도화 200주를 심은 것으로 화개 면장이던 김진호씨가 쌍계사로 가는 길목이 좁다며 도로확장을 위해 길을 재정비하면서 일본에서 묘목을 공수해 온 것으로 한때는 친일청산 이유로 외면당하기도 했지만 봄이면 만개하는 벚꽃터널의 유혹 역시 만만치 않았다. 벚꽃 사이 가끔 홍도화가 붉게 피어 흡사 홍매화를 연상하게 하는 십리벚꽃길은 화개장터에서 시작되어 쌍계사에서 끝이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 10리길은 족히 넘는 길로 어린 묘목이 자라고 있는 하동 송림공원에서부터 지리산 칠불암까지 이어지는 벚꽃 길은 꽃비 내리는 봄을 충분하게 만끽 할 수 있다. 벚꽃 길은 쌍계사 입구로 안내한다.

 

쌍계사 “범패에 취하고픈 날”

 

꽃비 내리던 날 촉촉하게 젖은 옷깃 여미며, 일주문 앞에 도착하니 무거운 벚꽃 잎 가볍게 바람에 떨어지며 삼신산 쌍계사 현판이 눈에 각인된다. 쌍계사의 역사는 성덕왕 21년(722)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스님의 정상(머리)을 모시고 오면서 옥천사로 출발하여 문성왕 2년 (840)년 진감선사에 의하여 대가람을 이루고 인근 경남 고성에 옥천사가 있어 두 개의 이름이라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과 두 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 정강왕이 진감선사를 앙모하여 쌍계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는 진감국사의 범패로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眞鑒國師:774∼850)는 범패(불교음악), 차(茶)종자를 한반도에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시대 인물로 선종발전에 대들보로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는 혜소선사로 시호(諡號)가 진감(眞鑑)이며, 성씨는 최 씨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쌍계사 진감선사부도비에 따르면 본관이 황룡사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

 

31세에 출가 후 당나라에서 창주(滄州)에 있던 신감대사 제자가 된 후 810년 당나라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종남산에서 참선과 수행 830년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주석하면서 쌍계사와 인연을 맺고 화엄종 포교방식을 탈피하고 범패를 통해 선사상을 확대하면서 쌍계사는 대가람으로 알려진다. 비문에 의하면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르는 곡조와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며 범패를 배우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사찰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파격적인 포교방식이 성공한 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쌍계사에는 또 하나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850년 선사나이 76세인 불교로 출가한지 41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진성여왕 1)진감선사대공탑비가 당대 최고 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에 의하여 탑비를 진감국사 일대기로 메워지면서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전설이 생겨난다.

 

고운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로 당대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부산 해운대 동백섬 바다기슭에 최치원 선생이 새긴 "해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바로 해운(海雲)이 고운 최치원 선생의 또 하나 자이다. 최치원은 점점 쇠퇴하는 신라왕실에 실망하면서 벼슬을 내 놓고 전국을 유람하며 은거생활을 하면서 말년을 해인사에서 보낸 후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이 없고 떠돌다가 객사하였다는 설과 자살하였다는 설이 난무할 뿐이다.

 

쌍계사와 인연을 맺은 진감국사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엮어낸 쌍계사 철감선사비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서려져 있다. 평소 부도탑과 부도비를 만들지 말 것을 권장하던 진감국사는 정작 자신은 죽어 부도비를 남긴 것이다. 이율배반적 행위라 볼 수 있지만 평소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칭송하면서 기리기 위하여 진감국사의 뜻을 어긴 것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생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살아생전 업적을 추하게 볼 수 있지만 정작 최치원의 뜻은 달랐다.

 

진감선사비문은 2500여자로 최치원은 그의 생전 뜻을 어기며 비문을 직접 작성하고 새기는데 " 이름은 멀리해도 이름이 남는 명성은 기념할 만한 것으로 불법은 문자를 떠난 것이지만 문자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밝힐 수 없다" 며 비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비문은 전체 높이 3.63m, 비신 높이 2.02m, 비신 폭 1m으로 통일신라시대 작 품이며, 임진왜란과 전쟁을 통해 대부분 파손되었는데 쌍계사 진감선사비는 파손되지 않고 모든 형태가 보존되어져 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부도비가 대웅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웅전 앞에 부도비가 있는 예는 전무하다는 점을 볼 때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을 향하지 못하고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찰로 접어들며 최치원 선생의 입산시를 읽어보자. 僧乎莫道 靑山好/山好何事 更出山/試看後日 吾 跡/一入靑山 更不還 스님들이시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산이 좋을진댄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십니까. 시험 삼아 저의 뒷날 자취를 보시겠습니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저의 모습을…….

 

매화꽃 향기를 따라 길을 거닐다 보면 쌍계사 입구에 나무장승 및 큰 바위가 자리 잡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쓴 글씨라는 전설을 간직한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란 글귀가 있고 더 오르면 다포집형태로 삼신산 쌍계사 및 선종 대가람이란 현액이 걸린 일주문이 있다.

 

해강 김규진이 쓴 글로 알려진 일주문은 큰 기둥과 작은 기둥이 머리가 큰 다포집을 겨우 떠받치고 그 위로 계단을 오르면 맞배집 형태의 금강문-천왕문-팔영루-대웅전으로 능선 비탈을 이용, 일직선상에 놓여있지만 진입로는 약간측면을 돌아가도록 만들어 두었다.

 

이어지는 건물 중 팔영루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율로 범패를 만들면서 팔영루라 불렀다 전하지만 중국 위나라 조자건이 고기 노는 모양을 보고 범패를 익혀 어산(魚山)이라 부른 것을 보아 팔영루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팔영루는 보편적으로 사찰이"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루"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범패를 가리키는 교육장으로 활용되어 왔다.

 

범패 즉 음성공양을 두고 말하는 말로서 소리 내어 하는 공양으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범서(梵書)를 찬탄하는 불교의 모든 음악을 통칭하고 있다. 진감국사가 범패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9년(760)범패가 이미 존재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월명사 도솔가 조}에 두 개의 해가 떠서 왕이 해결책을 물으니 범패승을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부르면 괜찮을 것"이란 구절로 보아 범패는 이미 진감국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범패는 어려운 형식이었거나 신라풍이라는 향풍(鄕風:)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도 범패가 있는데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고 흘러들어가 고풍(古風)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국사가 가져와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풍(唐風)으로 분류되면서 범패 보급의 시발점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대웅전 오른편 기단부에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서 마애불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대부분 암벽을 이용하거나 쪼아서 옮겨 놓는데 이곳 마애불은 화려한 모습은 없고 근엄한 표정으로 다소 여성스러운 풍을 풍기고 있다.

 

마애불을 조각할 때 부처를 음각하거나 양각 또는 선을 따라 깊게 홈을 파서 윤곽을 잡는 것과는 달리 아예 작은 바위에다 네모 반듯한 암실을 만들고 그 안에서 바깥표면과 일치하도록 돋음 양각을 해 놓았다.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부처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일주문에 내걸린 삼신산의 삼신할미가 아닐까? 예로부터 단군시절 이 지리산 일대를 관장하는천황할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천황할미를 이곳 쌍계사 이전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조성된 것은 아닐까 싶은 의혹이 드는 것은 마애불을 통해서 부처가 아닌 다른 영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는 탓일 것이다.

 

마애불은 입체감이 뛰어나고 큰 귀와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손은 서로 맞잡고 소매 속으로 넣고 정좌를 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실 바로 윗 단은 나무아미타불이라 기록되어져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총 1.35m 높이로 안정감 있는 자세로 정좌하고 앉아 있다.

 

쌍계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전각이 팔상전(捌相殿)이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세분화 하여 그린 팔상도와 영산회상도를 모시는 전각으로 팔상전 또는 영산전이라 부른다. 범패가 노래를 통해 불법을 전하였다면 팔상도는 그림 속 부처님의 일대기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는 목적에 있으며, 보통 팔상전에 모셔진 부처는 작고 경배대상은 팔상도와 영산회상도이다. 팔상도는 부처의 일생을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나눈다. 팔상전으로 대표적인 사찰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며,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개심사, 송광사, 해인사 및 쌍계사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길이 410m. 폭273m의 17세기 중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석가불을 중심 상단에 모시고 사보살, 사천왕, 육제자, 사분신불, 타방불, 팔부중이 좌, 우 2열로 채우고 조선 숙종 7년(1681)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하지 않은 탱화적 기법을 통해 사바세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팔상전팔상탱은 1.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향하는장면 2.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산하는 모습 3. 태자가 성문 밖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모습 4. 출가하는 모습 5. 설산에서 신선과 수행하는 모습 6. 수행 중에 겪는 고통 7. 녹야원에서최초로 설법하는 모습 8. 쌍림수 아래에서죽음에 이르는 모습 등이 있다.

 

쌍계사에서 또 하나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 육조영당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꾼 생활을 하다 금강경 소리를 듣고 홍인대사 문하에서 가사를 전해 받고 훗날 황실로 초대되어 조서를 지내면서 석가모니로 부터 33대 육조 혜능대사로 알려진다.

 

쌍계사에서 육조 혜능대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쌍계사 창건과 관련한 이야기로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육조 혜능의 머리를 당나라 홍주 개원사에서 역사 장정만에게 돈 2,000냥을 주고 매수하여 조계사의 육조인 육조탑에서 존중 혜능의 두골을 훔치게 하여 가져와 옥천사를 만들었다는 설과 혜능대사가 육조 혜능을 평소 흠모하여 찾아갔을 때 이미 고인이 되어 머리만 모셔와 돌로 만든 석감에 넣어 안치하였다하는 설이 있지만 사람의 머리를 가져온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의 불전에 있는 석탑은 1800년대 7층 석탑을 옮겨와 석감위에 올려놓았으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계사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웅전은 조선 중엽의 전형적 목조건물로 건축미에서 단연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게 하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 아미타불, 좌측 약사여래불을 모시며, 관음, 세지, 문수, 보현 등 4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칠존불을 모신 대웅전 불상은 아마타불을 제외하고는 조성시기 및 재료, 양식 등 동일하다. 삼세탱불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을 한 문수 보현 등 8대 보살,재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 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 용녀와 용왕 그리고 2금강과 사천왕을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의 불상은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부처는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조각솜씨가 우수하며 둥근 얼굴형에 경직되거나 온화한 미소를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고 자세하게 살펴보면 약간의 미소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세탱불은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화엄사처럼 거대한 석등은 아닐지라도 석등1기가 눈에 들어온다. 흡사 호롱불을 켜고 불경을 연구한 것처럼 호롱불 등잔을 닮은 석등은 모진 세월을 대변하듯 중간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양식을 반영하고 8각형으로 뻗어 올라가며 위 부분에 연꽃잎으로 장식해 놓고 있다.

 

쌍계사 홍도화 한그루가 담장에서 세월을 말해주고 있어 짧게 눈인사 올리고 다시 내려와 계속 벚꽃 길을 따라 달렸다. 쌍계사 입구보다 인적이 뜸한 곳이라 다소 여유가 있다. 좌우에는 야생 차밭이 초록 세상 만들기에 분주하고 도로는 칠불사 주차장에서 끝난다.

 

칠불사에서 “한기를 느끼다”

남방불교전래설을 말해주는 칠불사는 지리산 토끼봉 아래 800고지에 위치한 고찰로 쌍계사 북쪽 도로를 따라 진입하면 10여분에 도착할 수 있다.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허황옥 왕비 오빠였던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이곳에 운상원이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03년 8월 보름날 밤 일곱 왕자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모두 성불했다는 전설을 지닌 칠불사는 1800년 화재로 10여 동의 전각이 소실되고 그 후 복구되었지만 여순반란군토벌(1948)로 소실된 후 다시 지은 전각으로 1978년 복구 과정에서 신라 당시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만들었다는 2중 온돌방인 벽안당 아자방을 복원하였다.

 

 

 

칠불사 첫 만남은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서 시선이 위에 고정될 만큼 높은 위치에 동국제일서원 편액을 달고 있는 보설루를 계단을 만나게 된다. 보설루를 지나면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왼편에 아자방이 있다. 전설로 굳혀진 지명과 관련하여 왕자가 성불한 운상원, 수로왕이 머물던 범왕사, 허황옥이 머물던 대비사, 3정승이 머물던 삼정이 지명이 있다한다.

 

아자방은 방 모양이 亞자와 같아 아자방으로 불리는데 벽안당 아자방은 세계건축대사전에 수록될 만큼 우리나라 온돌문화 중 독특한 방식으로 길이가 약 8m로 네 귀퉁이를 70cm 높여 좌선처를 만들고 중앙에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행경처로 한번 불을 지키면 49일 동안 온기가 가시지 않는 특징과 100명이 동시에 좌선할 수 있으며, 서산대사가 좌선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 순조 28년(18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이기도 하다. 1951년 화재로 불에 타 초가로 복원 후 1978년 복구하면서 유리로 창을 내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칠불사에서 내려선 후 다시 화개장터까지 달려가면서 찻집에 들러 다향의 향기에 잠시 매료되어 본다.

 

화개장터에서 구례방향으로 따르면 이번에는 피아골계곡으로 향하는 865번 지방도를 따라 진입하면 연곡사가 피아골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연곡사 “부도탑을 돌아 나오며”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는 연곡사 유물 대부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인조5년(1627) 소요대사에 의하여 복구되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밤나무를 이용하여 위패를 만드는 신주목으로 봉납하게 되면서 고역에 참다못한 승려는 하나 둘 떠나고 사찰은 폐쇄되는 위기까지 치닫고 결국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폐허로 변하게 된다.

 

1981년 주지였던 장숭부 스님이 정부지원과 시주로 구 법당을 철거하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하면서 대적광전, 명부전, 일주문, 종각 등을 보수 중창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연기조사가 지리산 피아골로 풍수를 찾아 다녔는데 연못에서 갑자기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지자 연기조사는 곧장 그 연못 위에다 사찰을 만들고 연곡사라 불렀다 전하며,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사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폐찰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후기 동부도로 출발하여 고려시대 부도인 북부도와 조선시대 부도로 알려진 서부도가 사찰을 호위하고 있다.

 

연곡사에 숨겨진 비석이 하나있다. 부도로 향하는 길목에 겨우 작은 비석하나만 서 있어 스쳐가기 쉽지만 비석의 사연은 의병장이던 고광순 순절비이다. 담양출신이던 의병장 고광순은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지를 만들고 의병활동을 하다 왜군의 기습으로 순절하면서 절도 함께 소실되고 이를 기리는 비석을 사찰에서 드문 예로 경내에 비석을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불교문화재로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 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연곡사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연곡사동부도비(보물 제153호),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등이 있다.

 

연곡사를 내려서면서 주변경관을 살펴보면 야생차밭의 이랑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연곡사에서 다시 길을 잡고 구례로 진행하면 금락환지를 자랑하는 운조루와 만나게 된다.

 

 

 

운조루 “쌀독에 쌀이 없다”

 

운조루는 남한 삼대 길지인 금락환지에 자리 잡은 조선 양반가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 사랑채로 지금은 전체를 운조루라 부른다. 구름 속에 나는 새가 사는 집으로 불리는 운조루는 중국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 혜사에서 첫머리인 운과 조를 따서 만든 "루"각으로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명당자리의 증거로 운주루에서 거북돌이 출토되었지만 1989년 도난을 당하고 지금은 운을 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운조루는 명당 터임에도 불구하고 걸쭉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10대손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운조루의 주인인 유이주가 평북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산을 넘는 과정에서 호랑이를 만나 채찍으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께 받치고 뼈는 잡귀를 막기 위해 운주루 홍살문에 걸었는데 이를 안 사람들이 뼈를 민간요법과 민간신앙에 의하여 조금씩 탐을 내다보니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임금이 백 칸에 살기에 아무리 벼슬이 높아도 99칸이 최고였던 당시 운조루도 아마 99칸의 대저택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60여 칸이 전해져 오며, 굴뚝을 건물보다 낮게 배치하여 바깥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볼 수 없도록 하여 그들의 배고픔을 같은 아픔으로 느끼며 쌀 두지(뒤주)로 불리는 통나무 원형에 쌀을 담아 놓고 누구라도 항상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아래에 구멍을 내어 두는 넉넉함을 통해 운조루 주인의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운조루 쌀통은 퍽 재미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 표기해 놓고 언제라도 쌀을 가져 갈 수 있도록 입구에다 내 놓고 있다는 점은 주인장 과 굳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쉽게 찾아와 가져 갈 수 있도록 한 주인장의 세심한 배례가 엿보이며, 쌀이 줄어들지 않으면 주인은 며느리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하거나 얼마나 인심을 얻지 못하면 쌀을 퍼가지 않느냐는 것으로 당시 이곳 운주루의 주인은 인접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넉넉함을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1776년 무관 유이주(1726-1797)가 만든 사랑채 운주루는 비록 주인은 떠났지만 그 날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덕을 베풀고 살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운조루에서 지척에 있는 화엄사는 봄이면 화엄매로 유명하다. 운조루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로 향하다 18번 국도로 접어들면 18번국도 끝자락에 화엄사가 자리 잡고 있다.

 

 

구례화엄사 “화엄매에 취하고”

노고단 남쪽 기슭 해발 250m 산간 구릉지에 위치한 화엄사는 화엄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스님이 창건한 후 문무왕 10년(670) 3층의 장육전을 의사대사가 주석하면서 건립하고, 신라후기 승려 도선에 의하여 확장, 고려 문종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받치던 곡물을 저장하는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만들 정도로 번창하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630년 각성스님에 의하여 다시 전각을 보수 중창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오늘에 이른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 (국보4, 보물5, 천기1, 도지정4)인데, 국가지정문화재(10점)로는 국보 제12호 화엄사각황전앞석등, 국보 제35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 국보 제301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32호 화엄사동5층 석탑, 화엄사서5층 석탑(제133호), 화엄사대웅전(제299호), 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제300호), 구례화엄사화전석경(8,980점 외 일괄 : 제1040호), 천연기념물 제38호 화엄사의 올벚나무가 있고, 시·도 지정문화재(4점)로는 도유형문화재 제49호 화엄사보제루, 화엄사9층암석등(제132호), 문화재자료 제34호 화엄사, 남악사(제36호)가 있다.

 

화엄사에 피는 올벚나무는 수령 300년,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4.42m로 병자호란(1636)으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후 전쟁에 필요한 활을 만드는 목재로 벚나무를 사찰마다 심게 하였는데 당시 주석하신 벽암스님이 인조의 뜻을 받들어 올벚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중 한 그루는 80여 년 전 절을 수리하면서 베어 적묵당 안마루에 깔았다. 화엄사 맞은편 암자 앞에 1그루가 지금도 살아 있다.

 

화엄사에는 각황전과 석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가장 큰 법당인 각황전과 가장 큰 석등 때문.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늘씬하게 늘어선 모습이 흡사 궁궐을 방불케 한다. 처음 이곳은 의상대사가 만든 2층 4면 7칸의 장육전이 있던 곳으로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셨지만 정유재란을 피해가지 못하고 소실된 후 숙종 25년~28년(1699~1703)에 계파 성능선사에 의하여 중창하고 1730년 형조참판 이진휴가 편액을 봉양하니 오늘날 최고의 법당으로 자리메김하게 되며, 숙종 임금에게 불교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 불렀다. 각황전 내에는 보통 3불을 모시는 것과 달리 3붕 4보살을 모셨는데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이 모시고 있다.

 

화엄사를 들어서다 보면 불이문을 시작으로 금강문과 천왕문이 일직선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게 된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개의 태극형상을 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만 불이문-금강문-천왕문은 태극형상을 이루고 보재루-운고각-대웅전 또한 태극형상을 하고 있다. 이 태극형상은 처음 만나는 것이 세간법을 비유한 것이고 두 번째가 출세간법으로 불교의 오묘함을 곧장 반영해 보여주는 것이다.

 

화엄사에서 다시 내려선 후 구례군에 입성하면 구례교차로가 나온다. 이때 17번을 이용하여 순천방향으로 길을 잡다가 문척 교차로에서 861번을 따라 섬진강을 건너 강변을 따르면 사성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사성암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그야말로 차로 이동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산길을 돌고 돌아가면 절벽에 위태롭게 올라서 있는 사성암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

 

 

사성암 “절벽에 손톱으로 그려야 했던 벽화는”

 

전남문화재자료 제33호 사성암은 백제시대 오산(530m) 정상부 벼랑지역에 성왕 22년(544) 연기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오산암으로 불리다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를 한 후 4명의 고승을 배출하였다 하여 사성암으로 고쳐 불렀다 한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오산 정상에 참선하기 알맞은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서 도선, 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를 했던 곳이라 기록한 문집이 있다.

 

 

 

사성암이 자리한 오산은 금강산과 같은 경승지로 평가되며,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부를 만큼 산 정상에 올라서면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배석대, 낙조대를 비롯하여 12대가 있으며, 눈 아래로 섬진강이 펼쳐지고 지금은 벼랑 위 아슬아슬하게 절집이 자리 잡고 마애여래입상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220호)은 총 높이 3.9m로 음각조각 수법을 통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가슴아래 뭔가를 받치고 있는 미타정인 모습으로 약사불로 추정되며, 불꽃무늬와 넝쿨무늬로 장식된 광배가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 관한 전설로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 전하며 토지 촬영장소로 서희와 길상은 암자를 찾아가는데 바로 사성암이다.

 

사성암 난간을 따라 절집을 여행하다 보면 큰 바위에 소원을 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일명 소원바위로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하며, 소원바위를 지나면 위태위태한 암벽 끝 난간에 흡사 성곽처럼 보호대를 만들고 안쪽으로 서로 바위와 바위가 연결통로를 잇고 작은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사성암을 여행하고 다시 내려선 후 구례군으로 진입하여 19번 국도를 이용하여 지리산 온천까지 길을 달린다.

 

지리산온천 “하루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에 장군대좌로 기록되어 있는 지리산온천 일대는 신비의 영수로 알려진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 온천으로 피부병과 신경통, 관절염, 당뇨병, 부인병 등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게르마늄원소로 인해 산소를 활성화 시켜 저온상태로 6개월 이상 보관해도 수질에 변화가 없고 자연치유력을 증강시켜 면역기능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 축출효능이 탁월하다.

 

온천지역에는 많은 온천탕과 식당 및 숙박시설을 두루 갖추고 지리산으로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여행 중 일박하는 코스로 적당하다.

 

지리산온천 주변은 이른 봄 산수유로 물들이는 곳으로 전국에서 유명한 산수유 상위마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지리산온천랜드 앞 도로를 따라 산길로 오르면 상위마을이다.

 

 

 

 

산수유마을 “꽃 여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수유 꽃여행의 대명사로 불리는 상위마을은 지리산온천에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소박한 마을로 전국 최고의 산수유 생산을 자랑한다. 산수유 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이 일대는 10리길은 노란 봄꽃 산수유를 보려는 인파로 지리산 자락 해발 700m 에 위치한 마을이 한바탕 시끄러워 지고 지리산온천 일대부터 산수유축제가 열린다

 

 

산동마을에서 만나는 산수유는 중국 산동성에 사는 여자가 이곳으로 시집오면서 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전하며, 이 일대의 지명이 산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산수유는 비단 상위마을에만 피고 지는 봄꽃이 아니다. 지리산 온천 주변과 산동면 일대는 온통 노랗게 꽃망울 터뜨린다. 가을이면 노란 산수유는 붉은 색으로 바뀐다. 10월에 만나는 상위마을의 산수유 열매는 구기자보다 크며 신장계통 및 당뇨, 고혈압, 관절염 한약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붉은 모습과 말리는 모습 또한 색다른 여행이 될 것이다.

 

상위마을의 노란색과 붉은색을 펼쳐놓는 산수유의 모습처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상위마을은 여순 10.19사건 및 빨치산 토벌로 인해 수난의 시대를 겪기도 하였고 여순 10.19사건에 연루되어 토벌대에 붙들려가며 "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한 채..." 19살 처녀 백부전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산동애가 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위마을의 산수유여행은 지리산 온천부터 계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상위마을까지 진입한 후 상위마을 중앙을 가로 흐르는 계곡 앞에서 최고 절정을 이루며 정자에 올라서면 마을을 내려다보고 산수유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내려서는 길은 그와 반대로 마을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정겨운 시골운치와 함께 산수유를 볼 수 있다.

 

 

여행을 마치며

 

섬진강 여행은 봄바람을 따라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이면 녹색향연이 펼쳐지는 야생화 차밭이 기다리고 있으며, 가을이면 지리산 골짜기의 단풍도 아름답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생각 외로 많은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풍경과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