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가 위치한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백두산을 거쳐 백두대간을 잇고 해남에서 끝을 맺으니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를 따 두륜산이라 부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신라 진흥왕5년(544)아도화상이 창건한 고찰이다. 한국불교의 원동력 호국불교의 정신이 꿈틀거리는 청정수행도량 대흥사는 조선후기 연담유일, 초의의순 스님이 기거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는 100여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의기투합 한 곳으로 서산대사의 옷과 밥그릇을 봉안하고 있는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삼재가 들지 않는 대흥사에 의발을 봉안케 하라는 유언을 한 후 대흥사는 빠른 발전을 하였다.
대흥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정면에 자리한 천불전 좌우 전각을 남원이라 부르며, 개울 건너 북원이라 부르며, 네 개의 산이 호위를 하고 있어 사천왕상을 따로 조성하지 않고 천불전 가허루를 넘으면 천개의 불상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독특하게 저마다 가사(옷)를 입고 있다. 천불전에 모셔진 불상은 1811년 소실된 후 완호스님에 의하여 다시 옥석으로 제작되었다. 천불은 쌍봉사 화승이던 풍계스님이 경주 불석산에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도록 하였다.
석공 열 사람이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후 세 척의 배에 옮겨 해남으로 향하던 도중 배 한척이 풍랑으로 일본 나가사키 현으로 흘러가자 일본인은 절을 짓고 모시려 하였지만 꿈속에서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 머물 수 없다는 현몽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순조18년인 1818년 지금의 자리에 안치되어져 있다. 지금도 천개의 불상 중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768구의 불상 하단에는 일(日)자가 표시되어져 있다. 천불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며 다불사상이 깃든 것으로 누구라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천불을 살펴보면 자신의 얼굴과 꼭 닮은 한분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천불을 모실 때는 법신(비로자나불), 보신(노사나불), 화신(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반드시 모시고 동쪽으로 오방불이신 아측불, 남쪽으로 보생불, 서쪽으로 아미타불, 북쪽으로 불공여래, 가운데 애일여래를 중심에 모시고 주변을 천불로 안치한다. 천불전의 가사는 일 년에 한 번씩 갈이 입는데 신도가 직접 가사를 만든다. 또한 갈아입은 가사는 삼재를 막는다하여 신도들이 앞 다투어 가져간다.
대흥사 불교유적으로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보물 제1347호), 대흥사서산대사유물(보물 제1357호), 대둔산대흥사일원(사적 및 명승 제9호), 대흥사천불전(시도유형문화재 제48호), 대흥사천불상(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 대흥사용화당(시도유형문화재 제93호), 대흥사대광명전(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대흥사서산대사친필등유물일괄(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대흥사관음보살도(시도유형문화재 제179호), 해남대흥사북미륵암동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5호), 해남대흥사만일암지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6호)등이 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불은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마애불로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옷주름은 신라 말기 형태를 따르고 있는 대불로 우수한 조각기법과 양감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여래의 사리탑을 모신 삼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부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통일신라 양식을 따른 일반형 석탑이다. 1967년 탑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이 확인되었다.
대흥사 입구 부도전에 있는 팔각원당형의 석조부도로 전체 높이는 2.7m이며, 탑신 전면에 청허당이라 새겨놓아 서산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부도에 그려진 다양한 조식은 다른 부도에서 흔치 않은 것이며, 탑비에 조선 인조 25년(1647) 건립을 밝히고 있어 부도탑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도탑에 새겨진 문양으로 중대석에 사자와 화문, 상대석에 연화문. 거북. 연꽃. 게, 옥개석에 다람쥐 등이다. 불교에서 이런 그림이 새겨진 것은 경북 영주 성혈사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73세 고령으로 승군을 이끌고 출정한 서산대사(1520∼1604)를 위해 승군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가 충절을 기려 하사한 서산대사화상당명 총 2점이며, 교지는 임진왜란 초 발급 된 후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 재발급 되었다.
교지(敎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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