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 그 속으로 떠나는 여행
선사인이 남긴 문화유산으로 최고의 선물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위치한 반구대암각화, 천전리 각석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고래사냥하는 선사시대 유물로는 국내 반구대암각화가 표현력과 현실감이 으뜸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땅을 일군 선사인은 당시 첨단 무기를 통해 고래를 포획하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등 인류유산으로 그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소중한 당시 현장을 담은 타임캡슐을 후손에게 물려주었지만 정작 우리는 이런 문화재를 어찌 보존하며, 훼손을 막고 후손에게 다시 대물려 주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다. 보존을 위한 방법론의 대안은 보호를 빙자한 훼손에 가깝거나 식수보호를 이유로 암각화의 사정은 타협대상에서 점점 멀어만 갔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지층에 구멍을 뚫어 쇠말뚝을 세우고 특수유리창으로 보호건물을 짓는 카이네틱 댐 방식이 제시되었고 이 또한 지층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됨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가 규모를 더 늘려 시설하는 방법으로 2003년 12월 31일 국회는 우여곡절 끝에 예산집행을 결정했다.
▲ 천전리각석에 새겨져 있는 암각화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스토리 워킹 태화강 그 첫번째 길
"선사문화길“
선사문화길에는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하여, 국보 제147호 천전리각석,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인 반고서원 유허비와 함께 반구대암각화 박물관, 천전리박물관 등 많은 이야기 꺼리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대곡박물관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2.4km 산길을 따라 산책 하듯 선사시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좋은 코스길 로 여행을 시작은 천전리각석 진입하기 전 대곡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을 전시한 대곡박물관을 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대곡리박물관은 1999년~2004년에 걸쳐 발굴조사 후 2005년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할 필요성을 느껴 2007년 10월 착공, 2009년 준공 그리고 2009년 6월 24일 개관, 1층은 제1전시실, 체험학습실, 기획전시실을 두고, 2층은 로비전시실, 제2전시실, 시청각실을 야외에는 하삼정유적의 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박물관을 나서 천전리각석 입구에 도착하면 낭패를 당한다. 걸어서 진입하기에는 어려운 천전리각석 입구에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다. 국보 제147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여행자를 난감하게 만든다. 불편한 마음으로 입구에 갓길 주차를 하고 대곡천으로 나서면 장마때 물이 불어나 갈 수 없는 다리와 함께 언덕길 너머 천전리각석이 있는데 진입로가 바로 천전리각석 언덕부분이다.
천전리각석
▲ 천전리각석을 탁본하여 그림을 시대별 색깔로 입혀 놓은 안내판, 울산에 위치한 천전리각석은 기하학적 문양을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암각화로 인근 반구대암각화의 경우는 수렵에 필요한 바다와 육상동물이 총 망라된 동물도감으로 고대
미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 천전리각석으로 가는 길 | ▲ 천전리각석 앞 각석계곡 | ▲ 천전리각석 앞 대천곡 |
천전리각석에 들어서면 바위면 가까이 접근을 못하도록 안내선이 있다. 안내선 너머 흡사 12폭 평풍을 둘러쳐 놓은 듯한 면적에 수많은 기하학적 문양을 비롯 동물 등이 그려져 있다.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암각화까지 약 2.4km이며, 대곡박물관까지는 1.0km 이다.
울주 천전리 각석은 국보 제 147호로 1970년 12월 24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대곡천변에 있는 바위면을 다듬어 새겼는데 약 15도 가량 경사진 형태의 바위면에 각종 동물모양과 동심원, 나선형, 음문,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역사시대에 새겨진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의 가는 선 그림, 신라시대 명문 등 고대미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 암각화 탁본의 일부분 사진입니다.
▲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즉, 암각화라 부른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확인
되고 있는 풍요와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신라시대 비문을 통해 이곳에 왕족이 찾아와 머물다 갔다는 사실과 이곳을 서석곡이란 이름을 지었
다는 것이다. 서석곡(書石谷)은 좋은돌이 있어 글을 새겼다는 의미로 바위에 남겨 놓았다.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류인 자색셰일층인 각석은 너비 9.5m, 높이 2.7m의 큰 암벽과 그 옆으로 작은 암벽전면에 새겨놓은 암각화 중 제일 큰 암반면 상단과 하단으로 다소 다른 모습의 기하학적 문양이 확인되며, 그 중에서도 신라화랑도가 각석 위 또 다시 그들의 흔적을 남겨놓아 시대를 달리하면서 추가된 암각화로 역사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여수 오림동에서 확인된 사람모양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암각화에서는 거의 사람을 찾아보기 드문데 이곳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에 확인이 되고 있으며, 화랑도가 그린 그림은 날카로운 철을 이용하여 가늘게 그린 반면 화랑도를 제외한 그림은 선이 굵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랑도 그 이전 날카로운 도구가 없던 시절로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시대 추가된 그림으로 신라 화랑이 무술을 연마 하면서 남겨놓은 흔적이다. 행렬도와 다양한 그림 그리고 글씨(명문)들로 화랑이 무술을 연마하는 이곳을 왕과 왕비가 행차 후 기념으로 기록한 암각화로 추정하고 있다. 을사년(법흥왕 12년/525)에 갈문왕이 이곳을 유람할 당시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부르고 글자를 적게 하자 사각형의 책모양을 만들고 300여자를 통해 당시 근황을 옮겨 놓고, 그 후 갈문왕 사후에 지몰시혜비가 그리움에 글씨를 남긴 곳을 찾아 기록을 남겼으며, 조선시대에는 화폭에 담겨질 정도로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명문은 "을사, 기미"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525년) 6월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것과, 사부지갈문왕 부인 지물시혜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적이 남은 천전리계곡으로 어린 아들(훗날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암각화로 "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의 행렬" 을 이루고 있으며, 용그림 등도 확인되고 있다.
천전리각석의 그림을 살펴보면 동심원은 모두 3개이며, 마름모꼴은 암면 곳곳에 있고. 선이 지워져 버려 희미한 것부터 뚜렷한 것 까지 다양하며, 일부 주장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마름모가 연결된 마름도 도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암반 제일 윗부분에는 많은 마름모가 일렬로 연결되어 있고 짐승과 기하학적 문양이 교차되거나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중간 중간 동심원을 넣었는데 사람 키 닿는 크기 정도의 암벽에 집중적으로 새겨놓았다.
각석계곡 그리고 공룡발자국
천전리각석 앞 계곡이라 하여 각석계곡이라 부른다. 오염원이 없어 물이 맑은 계곡 반대편 언덕에는 공룡 흔적과 반구대로 향하는 데크길이 시작된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반구대암각화 박물관으로 이어지며, 반구대암각화 박물관에서 반구대까지 간 후 되돌아가는 약 5km 스토리 워킹 코스로 오르막이 없어 아이들도 쉽게 따라 이동할 수 있다.
천전리각석 각석계곡 건너편 암반층 지층에서 공룡 발자국이 확인되었으며, 천전리공룡화석산지로 부른다.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로 약 1억 년 전 전기 백악기시대에 중대형 공룡의 발자국으로 울트라사우르스 급인 한외룡을 비롯 용각룡 열 마리의 발자국,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고성사우르스) 한 마리의 발자국 등 200여 발자국을 통해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암각화를 잇는 대곡천 일원은 선사시대를 거슬러 백악기로 여행을 한다.
▲ 가족이 울트라급 용각류 공룡발자국 화석 위에서 아이에게 발자국 설명을 해주고 있다.
▲ 산길로 접어들기 전 나무목재 데크에서 바라본 천전리 계곡의 늣여름 풍경으로 오른쪽에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바위가
경사면을 따라 깍여 있고, 중간에 물이 흐르며, 건너편 암반지층에는 공룡발자국이 산재해 있다. 중생대백악기(1억4,500만
년 전~ 6천6백만 년 전) 퇴적층으로 암갈색의 셰일 또는 이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룡은 천전리를 지나 대곡천을 따라 반구대로 향했을 것이다. 중간 중간 공룡발자국이 확인됨에 따라 이 일대는 상당한 규모의 호수였을 가능성과 여러 종의 공룡이 서식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공룡이 걸어갔을 길을 따라 걷다보면 울산암각화박물관 앞에 도착한다.
구곡양장으로 불리는 계곡을 걷다
옛 선인들은 골짜기마다 곡(曲)이 깊어 물길이 양의 창자를 닮아 구곡양장(九曲羊腸)이라 부르기도 할 만큼 천진리에서 반구대를 잇는 하천지형은 곡류하천지형이다.
울산암각화박물관
숲길을 빠져 나오면 건너편으로 고래형상 지붕을 하고 있는 반구대박물관이 나온다. 우선 박물관에 들러 암각화 조형물을 먼저 관람하는 게 좋다. 정작 반구대암각화에 도착하면 직접적으로 암각화를 관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암각화에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으며, 실물 크기의 암각화를 옮겨 놓았다.
집청정을 거쳐 가면서
▲ 박물관에서 반구대암각화로 이동하는 길목은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대곡천 물길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기묘한
모습들과 옛 건축물이 보이는데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이 집청정이다.
집청정과 반고서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포은 정몽주를 떠올려 본다. 역성혁명을 꿈꾸던 이성계와 정도전은 당시 정몸주를 정적으로 간주, 이성계의 5번째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를 왕위로 오르도록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게 된다.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56세였다. 정몽주도 한때 귀향길에 올랐다. 1376년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친교를 맺자는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면서 울주군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면서 울주군 근처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흔적으로 반구대암각화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집정천과 반고서원, 언양 작괘천이 있다.
▲ 집청정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 절경에 빠져 많은 시와 글을 남겼고 이를 집청정시집으로 260여 명의 한시 406편을 수록
하고 있다. 흔히 이곳을 구곡문화를 꽃 피운 곳으로 부르는데 구곡이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성리학과 결부시킨 것
으로 겸재 정선이 남긴 진경산수화 배경이 대곡천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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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몽주가 지은 포은집 | ▲ 집청정 앞 포은대 | ▲ 집청정 |
경주최씨 문중정각으로 영조때 운암 최신기가 지은 것으로 1932년 중수하여 오늘이 이른다. 집청정은 원래 고려 말 정몽주(1337~1392)가 이곳에 들러 시를 한편 남기면서 경주최씨의 운암 최신기가 정자 세웠다. 세월이 흘러 최신기의 14대자손(장손 최원식)들이 한국 효 정신을 가르치는 예절방으로 장소를 제공하여 집청정을 활용하고 있다.
▲ 집천정을 지나면 반고서원과 유허비가 있는 계곡 건너편 암반에 옛 시인과 묵객이 즐겨 찾아 수많은 이름과 비문을
남겨 놓았다.
국보 제285호 반꾸대암각화의 집청정 앞 20-30m 단애 층암이 거북이 머리를 닮았다하여 반구대(盤龜臺)라 부르며, 반구대에 정몽주 유배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 있으며, 포은대라 부른다. 반구대 아래는 많은 시와 학을 그려 놓았다.
▲ 반고서원은 조선중기 인물가 정몽주 이언적 정구 세분의 모신곳으로 조선 숙종 38년(1712) 유생들의 뜻을 모아 조성
하였으며, 영조 4년(1728)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 다시 복원하였으며,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찰된 후 1983
년 오늘날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반고서원 유허비
반고서원 유허비(3기)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반고서원 앞 계곡을 건너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비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고려 우왕 1년(1375)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당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귀양살이를 하게되었는데 그 당시 반구대를 자주 찾아 "중양절감회" 라는 시를 남기는 등 그 흔적이 남아있어 반구대를 포은대로 부르기도 하였다. 반고서원은 고종 8년(1871) 홍선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으며, 그 후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를 세웠으며, 1965년 오늘날 자리로 옮겼다.
▲ 연로개수기라 한다. 고개를 넘기 전 왼편에 아크릴로 글자를 표기해 놓았다.
집청정을 지나 반구대암각화로 가는 길목 벼랑길은 폭이 2.5m로 차 한대가 겨우 너머 갈 수 있는데 오르막 끝지점 왼편에 비지정문화재인 연로개수기 안내판이 있다. 대곡천 가장자리 바위면에 새겨진, 일종의 마애기로 훼손이 심한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명문을 통해 길의 이름이 연로였다는 것과 더불어 1655년 이전에 이미 길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옛 지명 연로는 벼루길로 주변 바위가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루에서 음차 한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 등의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 연로개수기로 향하는 벼랑길과 반대편 대나무숲 아래 바위에 공룡발자국이 남겨져 있다.
▲ 연로개수기 앞에서 바라본 포은대와 반고서원 유허비
▲ 반구대암각화를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나무데크길로 주변은 자연늪지이다.
▲ 나무데크를 지나 대나무숲을 만나고 숲 끝자락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공룡발자국이 있다.
▲ 용각류 팔용과(Brachiosauridac) 에 속하는 60톤급 공룡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고성룡족 등 24여 개 발자국이
경상계 하양층군 사연리층 중회색 사질이암층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리를 건너 대나무 숲길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계곡 앞 바위에 공룡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3호로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시대에 하천평야지대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이 남아 있으며, 최근 발굴과정에서 반구대 암각화 앞 일대에 공룡발자국이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타드라트 아카쿠스 암벽화보다 우수한
반구대암각화
태화강의 물줄기 대곡천 중류 기슭 한반도 암각화를 대표하는 울산광역시 반구대암각화는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만 무려 75종 200여점으로 다양한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대백과사전이다. 암각화는 가로 8m, 세로 2m, 높이 3.6m의 암면에 "ㄱ"자 형태로 1965년 울산시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사연댐을 만드는 과정에 물속으로 수장되어 인근의 천전리각석 보다 훼손이 덜한 상태로 고래, 개, 늑대, 사슴, 호랑이, 여우, 곰, 멧돼지,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암각화를 세분화 하면 동물 중 멧돼지의 교미중인 모습과 임신한 모습, 성기를 노출한 사람, 그물에 걸려든 고기, 작살에 찔린 고래, 내장을 그린 모습, 탈을 쓴 무당 등 당시의 시대상을 윤곽선을 돌출하기, 안쪽 파내기를 통해 입체적으로 쪼아낸 흔적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 반구대 암각화는 최초 확인된 2000년 당시 296점으로 조사되었지만 최근 고래 1점, 육지동물 3점, 인물상 2점 등 총 6점
이 추가확인되어 합계 307점이 되었다.
▲ 반구대 암각화에서 고래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만큼 암각화에 50여 마리에 이르는 고래의 다양한 모습이 놀라움
그 자체로 고래의 종류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고래수염과 이빨, 머리모습, 등지느러미 등 상세한 기록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암각화 중 고래가 유독 많이 그려져 있는데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다양한 고래종류를 새겨놓은 것으로 지금은 찾기힘든 향고래를 2마리 새긴것은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은 선사시대에 이미 장승포 부근은 고래잡이가 성행하였음을 말해주며, 우리나라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국가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경의 역사에 관한 고증은 우리나라가 전세계에 포경국가임을 선포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 부산 영도구 동삼동패총에서도 고래뼈가 조개더미에서 발견과 함께 기원전 6000년 도구를 이용하여 포경을 하였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귀신고래는 목 아래 짧은 홈을 25개 표현하였고, 혹동고래는 폭이 넓은 주름을 그렸으며, 북방긴수염고래는 수증기를 내 뿜고, 향고래는 사각형의 머리를, 범고래는 등과 배를 암각 돌출로 명암을 주었는가 하면, 돌쇠고래는 등지느러미를 앞쪽에, 돌고래는 등 중앙에 지느러미를 상세하게 새겨놓고 고래 등에 새끼를 업고 다닌다는 암각화는 새끼라는 표현보다는 지나가는 큰 고래 위에 작은 고래가 지나가는 모습을 수면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그 이유로는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로서 돌고래에 속하는 살쾡이가 있지만 고래 그림은 앞면주둥이가 상당히 뾰족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살쾡이는 머리가 둔탁한 모습을 한 둥근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래가 새끼를 업고 가는 것은 해당되지 않고 임신한 고래로 상상한다는 것은 고래 머리에 새끼를 임신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상식선을 벗어나는 것으로 수면 위에서 아래로 본 고래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 반구대 암각화 감투모양처럼 생긴 바위부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으며,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흑등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돌쇠고래, 돌고래, 향고래 등으로 우리나라를 회유하는 고래가 주종을 이루며, 추가로 발견된 암각화를보면 동일 크기의 두 마리 고래와 누워있는 호랑이 그림으로 고래 2점, 호랑이 2점, 사슴 1점, 인물 1점 등 6점이 추가되어 세계 암각화에서 가장 표현력이 뛰어나고 고래 종류까지 파악되는 유일한 암각화로 알려져 있다.
당시 울산에는 많은 고래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암각화로 1899년 근대포경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이보다 더 앞선 시대 무기를 가지고 고래를 잡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 포경은 경남 거제도, 장생포, 함경도, 강원도에서 포경업이 1947년까지 성행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인 I. W. C에 가입하며 고래잡이는 중단되고 동해 앞바다에는 고래가 거의 멸종위기에 처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에 의하여 발견된 이후 1995년 국보285호로 지정, 관광 붐을 통하여 언론매체에 알려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두고 학계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유래가 없는 3백 종의 동물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불모의 땅으로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사하라 사막이 옛날에는 초원지대였음을 짐작케하는 것은 오직 당시에 남겨진 암각화의 덕분이다. 타드라트 아카쿠스 암벽화에 말, 코끼리, 소, 개, 기린 등이 있는 반면, 울산 암각화는 고래를 잡는 다양한 모습과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등 당시 이곳에는 상당한 인구와 함께 여러 종류의 고래가 지금의 울산 앞바다에서 서식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대곡천 전경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암각화를 잇는 왕복 약 5km 스토리 워킹 코스를 가족과 함께 떠나보면 어떨까 싶다. 천전리각석과 공룡발자국을 통해 신석기시대를 거슬러 쥐라기까지 엿보면서 산길은 대곡천을 따라 길을 열지만 아쉽게도 상수도보호구역으로 계곡에는 발을 담글 수 없다.
천전리각석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잇는 이 길은 현재 많이 변해있다. 수몰과정에서 문화재에 관한 정밀조사를 무시하고 경제성장을 이유로 댐을 만든 결과 반대구암각화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선사시대 문화유산이 수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6천여년 전 이곳에 머물던 선사인은 바위에 그림을 새겼고 현재 확인된 크기만 가로 8m, 세로 4m로 육지 동물과 해양동물 그리고 사냥하는 모습을 그림책처럼 그려 놓았다. 또한 암각화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확인된 공룡 발자국 외 반구대암각화 앞 기준으로 동서 41m, 남북 14m 범위 암반층에서 5마리 이상으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화석 81점이 추가 발굴 되었는데 초식공룡 용각류와 조각류 및 육식공룡 수각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발자국 크기는 길이 25~50㎝, 폭 29~54㎝으로 천전리공룡과 함께 이 일대에 많은 공룡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어 이 일대에 관하여 지금이라도 정밀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즐거운 여행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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