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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서 만나는 신라 고승의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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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고 동굴에서 썩은 해골 물을 마시면서 깨달음에 원효대사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귀국하였으나 의상 대사는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노래와 춤을 추는 등 불교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위해 노력하였고, 당나라에 머물던 의상 대사는 당나라가 신라를 넘보는 정보를 듣고 귀국하여 신라를 구하고 화엄사상을 설법하였다. 동시대를 살면서 여덟 살 차이로 서로 다른 길을 걷던 이 두 사람의 인연은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사에서 서로 만나 한마음으로 절집을 만들었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경주로 가는 도중 지림사(한절)에서 유숙하던 의상은 문수산 자락 서광을 바라보고 예사로운 기운이 아니라고 느껴 그곳을 찾아가 절을 짓고 축서사라 하였으며, 그리고 다시 창건한 사찰이 바로 부석사이다, 부석사로부터 그 후 청량사에서 그 흔적을 만나는데 당시 의상이 부석사를 짓던 무렵 원효는 봉화 땅에 남화사를 짓고 옮겨 각화사를 창건하였고 원효 역시 그 흔적이 청량사에 머물게 된다. 오늘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지림사-축서사-부석사-각화사-창량사로 두 고승의 발길이 머문 곳이다.
▲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소조여래좌상
지림사
당나라 유학길에서 돌아오다 머물었던 지림사
금속성 거친 숨소리는 915번 문수로 내성천 자락을 따라 오르다 북지교를 건너 호골산 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조용했다. 쓸쓸함에 외로워 마저 보이는 북지리 마애불좌상(국보 제201호)은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무뚝뚝한 여행객을 반겨준다. 지림사 즉, 한절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의상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경주로 향하던 길에 이곳 한절에 머물다 축서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를 통해 이미 그 앞에 창건된 사찰로 한때 소속암자가 27개로 대찰 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 복지리마애불좌상(국보 제201호)은 높이 4.3m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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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트인 자리를 지나 텅 빈 절간 왼편 호골산 자연 암벽 끝자락 적당한 크기로 감실을 조성하고 석벽에 북지리 마애불좌상을 새기니 석공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 할 따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글픔이 엄숙한 고요를 흔들고 지나간다. 신라시대 조성한 마애불 중에서 높이 5m, 폭 4m의 대형작품으로 조성 당시 27곳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로 “한절”이라 하였다.
불상은 1947년 주변 부지정리중 발견된 후 보호각을 만들어 보존해 왔어나 좁은 보호각으로 인해 새롭게 조성하였지만 왠지 틀속에 갇혀 버린 느낌이다. 마애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미소를 머금은 따뜻한 눈빛으로 7세기 후반 모습이다. 결코 악에 굴하지 않는 당찬 모습에 선한 미소를 드리운 얼굴, 큰 체구의 넉넉한 조각수법은 소외된 가난의 삶의 애환을 불심으로 현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세심한 석공의 손놀림으로 돋을새김 하였을 것이다.
불상 뒤편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구분하였으며, 주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으나 지금은 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마모되었다. 지림사에 또 하나의 문화재가 확인되었는데 봉화북지리석조반가사유상(보물 제997호)로 현재 경북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배꼽아래부분만 남아 있는 석조반가사유상으로 왼쪽 무릎 위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있는 수준급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6년 복지리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불상을 옮겨간 것으로 높이가 1.6m로 상반신은 사라졌다. |
▲ 지림사는 신라 진덕여왕 당시 창건된 사찰로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에 위치하였다 한다. 500여명의 승려가 기거 할
만큼 대찰로 알려진 지림사는 그 후 폐찰이 되었고 1949년 재건을 시작하였으나 오늘날까지 겨우 전각2동을 유지 할
뿐이다.
최근 원통전 뒤편 바위에도 삼존불의 형상 및 탑 1기를 새겨 놓은 흔적이 확인 될 뿐이다. 경상북도 안동시와 봉화군, 영주군 등 유교문화가 성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문화가 탄압되었고 그로 인하여 사찰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 가능성과 폐찰이 된 후 철저하게 외면당하던 한절의 흔적은 1947년 넝쿨을 걷어내면서 다시 세상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인고의 세월을 보상해줄 그 무엇도 없는 게 안타깝다.
축서사
부석사 큰집으로 불리는 절집
지림사를 나와 축서사로 향했다. 915번 지방도를 따라 문수로에서 월계길 축서사방면으로 우측도로를 따라 약 9.7km 이동하면 문수산(1250m) 해발 750m 지점에 의상이 지림사에서 서광이 비치는 곳에 계시를 받아 창건하였다는 축서사에 도착한다. 축서사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의상이 지림사에서 머물며 축서사 창건을 준비하였으며, 축서사가 만들어지고 곧이어 3년 뒤 부석사가 창건되었으니 3곳의 사찰의 인연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훗날 사람들은 축서사를 두고 부석사의 큰집이라 말하는 이유가 두 사찰의 닮은꼴 때문이다.
축서사 절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황급하게 자리를 뜬다. 부석사 그늘에 묻혀 쓸쓸함을 더해주는 절간에 옛 흔적은 없고 새로운 절집만 자리하고 있다. 어딜 봐도 최근에 조성한 흔적들로 변변한 문화재도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유교문화의 핍박에 피멍든 사찰의 건재함을 만나려던 기대감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숨겨온 파란만장한 아픔의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는 옛 대웅전 전각인 보광전이 아직도 제 몸 다독이며 건재하다. 축서사는 많은 전각과 산내 암자를 거느렸고, 대중이 44명 기거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사찰을 전소시켜 겨우 대웅전 1동만 지켜내고 나머지 전각은 전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스님들이 대웅전을 지키기 위해 토벌하기 위해 나온 일본군을 향해 얼마나 저항했을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온다.
축서사가 위치한 문수산(1206)은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하여 문수산으로 불리는 곳으로 지림사 절에서 앞산을 보니 문수산 해발 700m 지점에 빛이 보여 다음날 찾아가 보니 한 동자가 불상 앞에서 절을 하였고 자신은 청량산 문수보살이라 말한 후 불상만 남겨두고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접한 의상대사는 그곳에 절을 만든 것이 축서사로 아쉽게 옛 흔적은 사라지고 그 흔적을 더듬어 새롭게 조성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은사의 말사로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673)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소실되어 지금은 보광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재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대웅전은 지금 보광전으로 대웅전 오른편에 나란히 위치하며, 금색이던 석조비로자나불(보물 제995호)을 1950년 항공스님이 오늘날 모습인 흰색으로 채색하여 모시고 있다. 또한 광배는 화려한 문양의 목조광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에는 독특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절간 앞에 서 있는 1기의 석등(경북 문화재자료 제158호)은 높이 2.3m로 무심한 세월에 가냘픈 몸매로 서 있는 듯 쓸쓸해 보인다. 닫집의 화려함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금방이라도 법당을 나설 것 같은 용 조각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 석조 비로자나불은 높이 108m, 어깨 넓이 55m, 머리높이 31cm, 대좌 높이 96m로 서벽 쪽에 봉안되어 있는 독특한
위치와 9세기경 신라조각 수법을 계승, 동화사와 각연사비로자나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하고 있다.
▲ 옛 대웅전이던 보광전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불교미술은 정교하고 색체가 아름답다.
보탑성전을 통해 들어서면 우뚝 서 있는 사리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오른편으로 선열당, 왼편으로 심검당, 안양원, 강의원이 자리 잡고 계단을 오르면 중심에 대웅전, 오른편에 보광전이 보인다.
▲ 사찰의 중심에 있는 한옥식 석탑으로 탑에는 미얀마에서 기증한 진신사리와 절집에서 수습된 사리를 포함 112개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탑으로 2005년 9월 20일 충남 논산 자광불교연구소 김광열씨 작품이다.
의상은 축서사에서 머물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왜 이곳 축서사로부터 40여리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사찰 부석사를 축서사 창건한지 3년 만에 또 만들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베흘림으로 유명한 무량수전
부석사로 들어서는 길 바람이 소리를 내며 은행나무 가로수길 을 앞서 달린다. 한가롭던 산중 묵언 중이던 바람을 깨우며 마음속 고요를 흔든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 축서사에 머물던 의상에게 왕명으로 사찰을 만들고 화엄의 대교를 설법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곳으로 국보는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벽화, 무량수전 앞 석등이 있고, 보물로 3층 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가 있다.
부석사로 진입하기 위해 일주문을 넘어서면 숲길이 곧장 사찰로 안내하고 제일 먼저 기적비와 당간지주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256호인 당간지주를 지나 안으로 접어들면 삼층석탑 2기와 요사채가 자리 잡고 일직선상에 범종각이, 뒤편으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있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삼층석탑과 동부도, 원흥국사비가 자리 잡고 부석, 삼성각, 주지실, 서부도가 왼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삼층석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자인당, 웅진전, 단하각, 조사당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계 건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왕명에
의하여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 광해군 때 단청을 하였으며,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부처는 남향이 아니
라 동향으로 향하여 있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의상이 왕명으로 사찰을 만들고 화엄의 대교를 설법하던 곳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자리 잡고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 현종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 중창하고, 우왕 2년(1376)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수한 후 1916년 무량수전은 전면 해체 수리 복원하였다. 부석사의 배흘림기둥은 다른 건물과 달리 배흘림을 강하게 표현하고 내진에 고주를 세웠다.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불상은 높이 2.78m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풍만한 얼굴윤곽을 통해 자상함이 넘쳐나고 손은 향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두툼하게 표현한 입술은 근엄하기도 한 소조불상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어 고려 초기불상으로 아미타불로 짐작된다.
▲ 선묘각에는 부석사를 만들 때 의상을 도와준 선묘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전설 만큼에 불과한 선묘가 실지 부석사
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선묘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비록 큰 규모의 전각은 아니지만 사찰 내 묘령의 여인 영정
이 걸려 있다는 그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이다. 영정은 1975년 모시고 있다.
중국 동주에 머물던 699년 의상은 병을 얻었고 치료하던 중 선묘라는 연인이 의상을 사모하였고 그 덕분에 병을 털고 일어났지만 의상은 적산법화원으로 옮겨가 탁발을 하였는데 선묘가 따라와 속마음을 전했지만 이미 불가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하자 선묘는 신라로 돌아가기 전 한번 들러 달라고 하였다. 불경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묘가 있는 집에 들렀지만 하필 그날 없어 만나지 못하였고, 선묘는 뒤늦게 왔다간 사실을 알고 그동안 만든 의상을 들고 항구로 가니 배가 멀어져 가자 급한 마음에 옷이라도 받아 달라며 던졌고 의상은 그 옷을 받았지만 선묘는 이후 몸을 던져 바다의 용이 되어 고국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다길 을 보호했다 한다. 세월이 흘러 태백산 근처 새로운 절터를 찾았지만 그곳에 이미 다른 종파의 스님이 있어 난처해 할 때 용이된 선묘가 3일간 모습을 드러내며 큰 돌을 공중에 세 번이나 올렸다 내렸다하니 다른 종파 스님이 놀라 그 절을 떠났고 그 자리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는데 선묘는 석룡이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지면에서 무려 2척의 깊이 속에 48척의 크기로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이어진다고 하며, 공중에 떠 올렸던 바위는 절 옆에 내려앉았는데 그 바위를 부석이라고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만든 절이라 하여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각화사
태백산 사고를 관리하는 각화사
절간에 들르면서 뭐 볼 것이 절간에 널브러져 있을까요. 대웅전을 마주하면 누구나 한번쯤 고개를 돌려본다. 그 흔한 당간지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옛 절간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변변한 석등도, 탑도 없는 각화사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를 관리하기 위해 창건된 태생부터가 독특한 사찰이다. 태백산맥이 내려 뻗다 각화산(1177m)을 만나고 그 곳에는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한곳인 태백산 사고를 두게 된다.
▲ 태백산 사고로부터 2km 아래 위치해 있던 각화사는 원효대사가 서동리 (현 춘양고등학교)에 있던 남화사를 폐하고
676년 옮겨온 곳으로 남화사를 생각한다하여 각화사로 불렀다 한다.
종루를 오르면 떡하니 걸린 월영루 그리고 중심으로 대웅전과 산신각 겨우 몇몇이 머무르는 전각이 고작이다. 2시간만 잠을 청하고 15 개월의 참선을 하였던 각화사는 살아 있는 산짐승도 묵언을 할 정도로 고요함 그 자체다. 앙상한 가지에 등신불처럼 메마른 잎사귀가 배회하다 잠깐 스쳐가며 바람에 너풀거릴 뿐이다.
▲ 각화사 문화유산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189호 귀부와 오른편으로 조선시대 석종형 9기 부도 가 조성되어져 있다. 석탑
으로는 각화사 삼층석탑이 있는데 도굴 후 인근 개울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옮겨온 탓에 형체가 심하게 훼손되어있다.
각화사는 남화사를 옮겨온 절집이다. 원효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을 당시 봉화에 각화사를 창건하였지만 어떤 이유인지 사찰을 7.6km 떨어진 각화사로 옮겼고 조선왕조신록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상의 흔적을 따라 오다 원효의 흔적과 만나면서 서로 다른 사상 라이벌이였던 두 사람의 경쟁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 승려 의상은 화엄종의 개조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시대 승려 원효는 화쟁사상 중심으로 불교 대중화에 앞장 선 인물로 두 사람의 행적은 봉화 청량산에서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이지 만나게 된다.
서동리동.서삼층석탑
남화사 옛터에 남은 석탑
▲ 탑은 조각수법이 같은 쌍탑으로 높이 3.9m이다. 2층 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으로 1962년 해체 복원과정에서 99개의 소형탑이 확인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
각화사의 옛터 남화사에는 봉화 서동리 동, 서 삼층석탑(보물 제52호)이 남아 있다. 춘양중학교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 운동장에 위치하고 있다. 학교가 옛 절터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봉화 서동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왜 운동장에 있는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탑은 봉화 각화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래 탑이 위치한 춘양중학교는 원효가 창건한 남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각화사로 옮겨 가면서 이곳은 폐찰로 사라졌지만 오늘날 2기의 쌍탑은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1962년 복원 당시 삼층석탑 내에서 발견된 소탑은 흙을 이용하여 찍어낸 탑으로 불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하면 소형 불탑 99개 또는 77개를 탑 안에 모시면 99억 개의 탑을 만든 것과 같다는 의미로 8세기~10세기 유행하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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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원효와 의상의 만남
어지럽게 낙엽이 흩어져 있는 길을 따라 오른다. 걸음걸이가 다소 무거워질 즈음 청량사 절간 앞에 도착하여 찻집에 들러 차 한 잔 마주하고 굳어진 발바닥 감각을 주물며 지난날의 야윈 삶을 뒤적거려 본다. 창밖 햇살은 유리창을 겁도 없이 넘나들고 머릿속에는 수많은 날들이 멈추지 않고 어지럽게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한다.
▲ 청량산에는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봉, 의상대라는 명칭이 남아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청량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33개 암자가 청량산 주변에 있었다 한다.
신라 문무왕 당시 원효대사 .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이신 법장 고붕선사(1351~1428)에 의해 중창된 고찰로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하나의 사찰을 두고 원효대사와 의상대가의 만남이다. 서로 자신들만의 표현방식으로 절집을 경쟁적으로 만들던 두 사람이 청량산에서 하나의 절집을 두었다는 것은 청량사의 절터가 천하명당이였기 때문일까?
▲ 금탑봉에서 내려다 본 청량사는 고요하기만 하다. 금탑봉 중층에는 신라 말 대문장가였던 최치원 관련된 유적이
있다. 치원암. 총명수. 풍혈대 등이 있는데 최치원이 바위틈 물을 마시고 총명해졌다하여 총명수라 부르는데 가뭄
때도 일정한 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총명수 바로 옆에는 최치원이 머물던 치원암이 있었다 한다.
중심법당인 본전은 유리보전이며, 금탑봉 아래 응진전은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 방식으로 공포는 외1출목 내2출목의 형식을 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47호 유리보전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을 협시불로 두고 있으며, 약사여래 부처님은 종이재질로 만든 지불이다.
청량산 협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청량사는 앞서 만든 원효와 의상의 절집과는 크게 다르다. 대웅전마저 없는 절집으로 대웅전을 대신하여 유리보전에 아픈 중생을 구원해주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는 점은 두 성인의 불교사상은 각자 조금씩 달라도 중생을 위한 마음은 뜻이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발 800m 지점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길이 90m, 높이 70m, 바닥폭 1.2m 청량산 하늘다리는 국내 산 안에 설치된 현수교량 중 가장 길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등반코스를 하늘다리를 연계하여 대부분 입석을 출발하여 웅진전-총명수-어전대-김생폭포 김생굴-하늘다리-청량사 순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마치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전각을 만나면서 왜 첩첩산중 신도마저 찾기 험난한 곳에 절집을 만들었는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다. 산중 암자를 수없이 거느린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유교와 불교의 다툼과 일제의 만행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통해 이들을 지켜내려 노력했던 사람들의 고마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짧은 문화유산 여행을 뒤로하며 봉화와 영주를 넘나들며 1박2일간의 긴 여정은 청량사에서 마감하며 옛 불심의 수많은 아픔을 하루빨리 재건하여 더 이상의 훼손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은 종교적 유산으로 재단 할 일부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선조가 남겨놓은 민족의 자긍심으로부터 지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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