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이전여행/01월 여행

청도 고택여행 종합(삼족대 ~! 운강고택 ~ 대비사 ~불령사)

허영꺼멍 2014. 1. 21. 11:49

 

 

기묘사화 그리고 낙향

청도를 지킨 사람들

 

봄이면 부야리 일원에 복사꽃이 피어 만고의 시름을 잊어라하고, 여름이면 유효연지 수줍은 연꽃 활짝 피어 근심을 잊게 하며, 가을이면 집집마다 담장 너머 잘 익은 감 주렁주렁 매달려 새들을 유혹하며, 겨울날 운문사 절집 고요한 정취 또한 빼 놓을 수 없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찾아도 좋은 이번 여행은 삼족대와 운강고택 만화정을 거쳐 기묘사화로 낙향한 그들의 애끊는 가슴 아픈 흔적을 따라 가 본다.

 

청도IC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운문댐 운문사 방향으로 약 19.3km 길 따르면 58번 국도와 합류하는 매전마을을 지나 매전교삼거리 앞 동창천 위 정자 하나 물빛에 반영되어 만나게 되는데 바로 삼족대이다. 삼족대로부터 약 5.4km 더 진입하면 운강고택이 동창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삼족대 선암서원 - 운강고택 그리고 주변 고택 -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 - 대비사 - 임당리김씨고택 - 만화정 -  불령사 순이다.

 

 

 

삼족대

김대유(14791551)는 문신출신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연산군 4(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숙부 탁영 김일손이 처형되면서 부친인 동창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유배길 에 오른다. 조정 출사의 꿈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것이였다. 중종 1(1506)이 왕으로 오르면서 귀향에서 풀려난 김대유는 다음해인 중종 2(1507) 장원급제로 진사에 등용되지만 고향으로 내려왔고, 중종 13(1518) 조광조의 건의로 현량과가 설치되고, 어수선한 조정에서 새로운 인재 등용을 바라던 중종에 의해 향리에서 천거되어 전생서 직장을 거쳐 중종 14(1519) 현량과 병과로 급제 여러 직책을 거쳐 정언에 오르자 이를 사직하고 칠원 현감이 되었지만 그해 조광조가 임금이 될 꿈을 꾼다는 소문과 함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이란 글을 벌레가 파먹도록 한 후 이를 임금에게 보여주면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로 인해 현량과가 폐지되고 급제자를 취소하자 현감직 마저 내놓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력하며 지냈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 1(1545) 직책이 복과되어 조정에서 부르니 왕명을 받들어 먼 길을 가다 중도에 병이나 다시 돌아와 은거하다 명종 7(1552) 274세로 졸했다.

 

 

기묘사화로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빗물 한 방울도 허투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는 동창천 암벽 위 소나무 숲에 정자를 지어 후학

양성에 노력하며 지냈던 한국형 정자로 그의 호 삼족당을 따서 삼족대라 한다.

 

기묘사화로 정치판은 요동쳤고 김대유는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낙향하면서 비통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내려와 탁 트인 전망을 배경으로 물이 맑아 맑은 청()을 사용하여 지명이 청도인 동창천 암벽 위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현량과가 부활하여 조정으로 부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초야에 묻혀 지내기로 작심을 하였을 수도 있다. 호는 삼족당으로 "나는 60세가 넘었으니 ()()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榮和(영화)에도 ()하고, 朝夕(조석)으로 식사도 남 못지않게 할 수 있으니 ()에도 ()하다. 그러니 나의 ()三足堂(삼족당)이라 하리라하였다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중종시대가 끝나고 인종시대가 열리면서 복과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먼 길을 단숨에 가지 못하고 병을 얻어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올 때 그는 세상의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남명 조식(1501~1571)선생은 김대유를 백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지만 세가지 재주에 만족해 삼족당이라 부른다며, 무예가 출중

하며, 운문산 주변 말을 달리며 사냥도 즐기는 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남명 조식이 김대유를 읊은 시로는 天上雲門曲, 人間鹿

門客, 傍觀百具足, 自得三爲畫 즉 하늘 위의 운문곡조에 땅위의 큰 인물이 김대유(金大有) 곁에서 보니 백가지 재주를 갖추었

 스스로 세가지에 만족하고 있구나라며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세상을 덮을 영웅이라 하였다.

 

경북문화재자료 제189호 삼족대 그리고 1973년 세운 김대유 신도비와 참봉 김용희의 중수기문이 있다. 조선 중기에는 조식, 박하담, 주세봉 외 여럿 문인이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된 곳으로 김대유의 호를 따서 삼족대라 불렀다. 삼족대는 정면 3,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여느 다른 정자와는 달리 사방으로 토담을 쌓고 정자로 들어서는 일각문과 2칸의 방, 부엌, 우물이 있어 일반 사가처럼 보이지만 한국적 미를 두루 갖춘 정자로 알려져 있다.

 

삼족대와 함께 이곳에 또 하나의 인물로 사림파가 무오사화를 통해 죽임을 당하던 시기 낙향한 인물 소요당 박하담이 있다. 비슷한 정치인생을 걸어온 두 사람은 이곳 삼족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빈 낚싯대 드리우고 보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두 사람을 두고 조선시대 청도의 양대 기둥이라고 한다.

 

삼족대에서 다시 길을 따른다. 매전교를 건너 919번 지방도로 들어선 후 방금 스쳐온 삼족대를 올려다본다. 소요당 박하담이 지척에 있는 김대유를 만나기 위해 동창천변에 도착하여 아마도 삼족대를 올려다보면 언제 찾아올까 기다리며 고개 내밀고 기다리던 심대유는 손을 흔들며 반겼을 것이다.

 

 

선암서원

 

청도 고택의 주인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곳

 

▲ 선암서원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득월정을 안채에서 볼 수 없도록 담장을 가려 놓았다.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 곳으로 1568년 향현사였던 곳을 선조 10(1577) 현 위치로 옮겨와 선암서원으로 불렀다. 선암서원이 자리한 곳은 동창천이 휘감아 흐르는 곳으로 주변에서 보기드문 경관을 뒤로하고 있다. 선암서원도 대원군 서원 철폐령을 비켜가지 못하고 훼손, 고종 15(1878) 소요당 후손에 의해 다시 중간되어 선암서당으로 불렀다 한다.

 

▲ 대문채에서 바라보이는 중사랑채이다. 안채가 있는 공간에서 강단으로 가기 위해 중사랑채 문을 통과해야 하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운강고택 주변에서 만나는 고택들

▲ 운남고택 장독 뒷 담장 너머로 운강고택 건물이 보인다.

 

 ▲ 도일고택  ▲ 섬암고택 ▲ 운남고택 
 

도일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동생 박기묵(1830~1911)이 합천군수 재임(1899) 당시 만든 집으로 훗날 박재수(1894~1973) 소유로 넘어오면서 도일고택이라 불렀다. 섬암고택은 문화재자료 제268호로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둘째 아들 박재소(1840~1873)이 분가하면서 만든 집으로 사랑채와 대문채는 1990년 도로공사 당시 철거되어 안채, 중문채, 도장채가 남아 있다. 운남고택은 운강고택 서쪽에 있는 운남고택은 문화재자료 제270호로 조선 후기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셋째 아들 박재충(1850-1869)이 분가한 집으로 고택으로 들어서면 운남재 현판 글씨가 멋을 잔뜩 부렸다. 운강고택과 담장 하나로 살아가면서 담장 지붕에 올리는 망와(望瓦)를 올리지 않았다. 운남고택의 돌담은 은근 정이 가는 곳이다. 명중고택은 문화재자료 제269호로 소요당 박하담의 12세손 박시묵의 손자 박래현(1861-1896)이 고종 18(1881)에 별서로 만든 후 둘째 아들 박순희(1896~1934)이 살면서 명중고택으로 불렀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형태를 갖춘 모습으로 한국동란 당시 대문채가 소실되고 1990년 도로확장 과정에서 사랑채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운강고택

소요당 박하담(1479~1560) 선생은 성종 10(1479) 920일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연산군 4(1496) 20세에 동향 선배인 탁영, 김일손, 오졸재, 박한주 등이 무모사화로 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고, 다음해 결혼하였다. 30세가 되던 중종11(1516) 생원시에 합격, 중종 14(1519) 기묘사화, 을묘사화 등 시대적 배경에 절망하여 벼슬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은둔하면서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노력하였다, 명종 15(1560) 82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고 다음해 비슬산 칠엽동에 장례하였다. 그의 호는 낙향 후 조성한 소요정의 이름을 따서 소요당이라 불렀다.

 

현재 중요민속문화재 제106호로 9동의 건물에 80칸의 규모를 가진 조선후기 사대부집이다. 건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이 각자

자 영역을 두고 그 영역 세 곳이 합쳐 '' 구조를 하고 있다. 대지는 총 1,700여 평이다.

 

소요당 박하담이 세상을 뜨고 순조9(1809)이 되던 해 11대손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가옥을 만들었고. 순조 24(1824) 박시묵이 중건, 1905년 박순병이 중수를 거쳐 오늘날 6대손 박정주 선생이 소유하고 있다.

 

운강고택은 정치적 격동기를 피해 고향으로 낙향하여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옛 건물 외벽은 가문마다 저마다 독특한 그림을 기왓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큰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이 꽃담에 한문으로 길할 길()을 중앙에 두자를 모아 적고 양 측면에 기왓장을 포개는 방식으로 표창을 하나씩 두고 또 길()자를 한자씩 넣는 기왓장 그림을 한 면 가득 그려 놓았다. 곡식을 보관하는 곡간이 2, 안채와 행랑채 등에 딸린 부엌이 3, 신분별 화장실 4곳이 있는데 행랑채는 측간, 안채는 뒷간, 하인은 통시라 하였다고 한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대문간채를 시작으로 큰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로 구분되며,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안채, 행랑채, 곳간채, 중문채로 구분되어 있다. 대문간채는 왼편은 머슴이 기거하는 공간이지만 오른편은 측간(화장실)을 배치해 놓았다.

 

사랑채와 중문간채 사잇 담장에 고택에서 보는 기왓장으로 ()’과 함께 담벼락에 신경쓴 흔적과 함께 선비의 곧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운강고택 주인장은 가끔 만화정에 올라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강고택에서 약 400m 지점에 동창천변 벼랑 위 1856년 만화정을 올렸다. 지금은 919번 지방도가 그 옆을 통과하는데 금전교 지나 왼편이다. 별서로 지어진 또 하나의 공간인 셈이다. 운강고택 주변에는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등이 모여 있다.

 

운강고택을 출발하여 대비지가 있는 산중으로 들어선다. 오른편 길부지를 지나 왼쪽으로 작은 소류지 독방지가 나오면서 박곡리로 들어서며, 박곡리 마을 끝자락 왼편 절집이 바로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

 

아픔이다. 큰 몸집으로 작은 공간에 갇혀 있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화재로 인하여 화상을 입었다. 흡사 사람이 화상을 입은 것과 꼭 닮아있어 더욱더 안타까운 불상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꼭꼭 숨겨 버린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화상으로 신도 앞에 나서기 싫어 스스로 숨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을 힘주어 열자 한줌의 햇살이 공간을 비집고 불상 주변을 밝혀 준다.

 

▲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석탑과 그 안쪽으로 불상을 모신 또 하나의 전각이 나온다.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은 보물 제203호로 불상은 1928년 마을 화재 당시 얼굴윤곽은 형체를 잃어 버렸다 일부분은 파손되었지만 불상이 갖추어야 할 자비로움은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인상과 뚜렷한 삼도 그리고 가녀린 허리 등 조각수법에서 장인의 세련미와 기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대좌는 상, , 하대로 구분하여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는 불상으로 불상이 있던 이 일대가 당시 소작갑사 또는 대작갑사 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이는 마을주변에서 사찰용 기구 와 와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화강암 재질에 전체높이 2.76m, 불상높이 1.54.m, 대좌높이 1.2m로 우리나라에서는 대불에 속하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항마촉지인 수인을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석가여래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다소 뒤떨어져 균형미를 잃었다.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은 1928년 마을화재로 훼손, 1963121일 보물 제203호 지정 되었고, 199253.5m 토석담장 시공 및 1993년 파손된 광배 접착하였다.

 

불상을 둘러싼 보호각 그리고 보호각을 둘러싼 토석담장속에는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 외 또 다른 불교유적이 있다. 보호각 앞 1기의 탑은 기단부를 제외하고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망실되어 정확한 탑의 형체를 알 수 없지만 삼층석탑으로 추정되며 상부 초층탑에 가로 세로 320mm, 깊이 140mm 방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석재를 이용 복원하였는데 탑 높이는 2.78m이다.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던 절터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마을 주변 일 것이고 불상의 크기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 존재하였을 것이지만 불교배척을 통해 절집이 어쩌면 당시 권력가의 재산으로 넘어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마을 주민의 협력으로 떠돌지 않고 어쩌면 옛 터 한 귀퉁이 땅일지 모를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마을주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을 떠나 곧장 직진하면 마을길 끝자락 대비지를 휘감아 길이 이어지고 마지막 길목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때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대비사가 있다. 대비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종무소, 요사 그리고 부도탑군이 있다.

 

 

대비사 

대비사가 있는 이 일대를 일제강점기 당시 박곡 지명 이전에는 계곡이 많아 백곡이라 불렀다 한다. 갈래갈래 뻗어 내린 산허리는 크고 작은 계곡을 만들고 물길은 흘러 작은 소류지를 만들고 소류지 따라 생겨난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 작은 절집 대비사가 아낌없이 속을 내보이고 맞이해 준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호거산에 자리한 아담한 절집 대비사는 창건 당시 주변의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 백곡이라 부른 계곡 위 절집을 지었을 것이다.

 

대비사의 정확한 중창기록은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평왕 11(589) 원광법사에 의해 창건, 고려 인종 때 원응이 중창하였다는 설과

신라 진흥왕 28(567) 신승이라 불리는 창건주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대비사 창건설화로 557년 신승이 운문산 금수동 북대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한지 3년이 되던 날 산과 계곡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놀라 우는 것을 보고 산에 오령이 살고 있음을 알고 7년 동안 5개 사찰을 조성하였는데 그때 만든 사찰 중 하나가 대비사로 소작갑사라 불렀다 한다. 운문산 중심에 대작갑사(운문사)를 두고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두었다.

 

 

대비사에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로전, 요사, 요사채, 삼성각이 자리잡고 계곡쪽에 부도전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으며, 보물 제834호로 정면 3, 측면 3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1685(조선 숙종 11)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안을 살펴보면 복숭아꽃 필 무렵 황하강에 살던 잉어가 험난한 물살을 거슬러 용문에 도착하는데 워낙 협곡 물살이 거칠어 올라가기 힘어 용문에 오른 잉어는 천신의 도움을 받아 우레와 번개를 쳐 그 꼬리를 불태워 용이 되는데 그 그림이 대비사 대웅전(보물 제834) 창방 단청에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대비사 경내를 거쳐 계곡으로 내려서면 대비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2004년 조성한 부도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부도 16, 6

가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부도는 취하청권(영조44/1768), 화우상?, 영성, 김파, 영파, 매월취헌, 청련혜명, 영암인철, 무명 8기 및 비로 포공 장선(1801년 유공비), 수월 삼성(1724), 용암 백곡(1725), 취하 청권(1775), 허곡 만웅(1813), 허현 설안(1717)등이 확인되고 있다.

 

대비사 지명은 불교의 대자대비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설과 신라 왕비의 대비가 수양차 절에 머물면서 소작갑사가 대작갑사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비사는 당초 박곡리마을에 세워졌지만 고려시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백곡에 존재했다는 계곡은 메말라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나마 부도전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과 인근 계곡으로 흘러든 계류가 모여 대비지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물색 색감이 두렵게 만든다. 옛날에는 말을 타거나 박곡마을에서 걸어 들어왔을 대비사로 오는 길목은 첩첩산중으로 호랑이가 나올 법도 할 만큼 인적이 끊어진 곳이지만 지금은 도로가 잘 형성되어 있는가 하면 절집이 거의 평지에 위치한 것이나 다름없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대비사 입구에 있는 대비지

 

절집 앞 대비지가 참 맑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하였던가? 스쳐가는 길목에 절집 앞이지만 염치불구하고 낚시대 하나 드리우고 머물다 가고픈 생각이 스쳐간다.

 

대비사는 막다른 길에 있어 다시 운강고택까지 되돌아 나간 후 임당리 김씨고택을 찾아 오른편을 따라 진입한다.

 

 

 임당리김씨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8

 

사극을 통해 왕의 그림자 역할을 하던 내시를 보아왔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내시로, 때로는 남성을 잃은 나약한 남자로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내시가 되기까지 그들만의 사연은 제각기 다르지만 남성을 제거하고 살아간다는 결정을 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고통보다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내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기록되고 있다. 옛날에는 개가 어린아이 똥을 핥다 고추를 잘라먹는 일이 생겨 고자가 된 아이를 데려다 궁궐 법도를 교육하여 내시가 되었다 한다. 왕의 그림자를 자청하면서 점차 내시의 영역은 폭을 넓혀 권력으로 치닫는 과정을 거치면서 천민의 자식이 신분상승을 위해 거세를 하거나 출세의 지름길로 내시가 되면서 왕의 측근에서 궁중여론을 이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곧장 안채와 왼편으로 큰사랑채가 있다.

 

김씨고택 또는 내시고택이라 한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45호로 일반적인 고택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가옥은 총 7동으로 남향이 아니라 임금이 있는 서북쪽으로 몸채를 두었다. 안채로 들어서는 문 역시 사랑채 좌측 칸에 중문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였다. 벌묘에서 내시부통정 김일준가세계명문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궁중 내시 김일준(1863~1954)의 집으로 정3품인 통정대부까지 했던 인물이다.

 

 

   

첫번째 사진부터 연못, 안채 고방, 안채, 큰사랑채, 별묘 순이다.

 

 

고택이 특별한 것은 큰사랑채에서 유일한 출입문 중문과 안채, 작은사랑채를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시라는 신분으로 인해 그들 나름데로의 철처한 생활을 위해서 인지 모를 일이다. 내시는 후손을 잇고자 양자를 입양하였는데 임진왜란 이전부터 16400여 년을 내시로 한 내시 가문이다.

 

▲ 안채와 큰사랑채가 일반적 고택과는 달리 전혀 다른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성기를 거세하고 입궁하여 내빈원에서 내시가 해야 하는 법도를 배우고 140여 가지의 업무를 나눈 후 각자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인원이 300~400명 정도였다. 그들만의 품계도 있었는데 최하위 종9품 상원에서 최고위 종2품 상선으로 소학 삼강 행실 공자 맹자 대학 사서 등의 학문을 통한 승진 시험 있으며, 품계가 높아지면 처첩을 두었고, 경복궁 옆 오늘날 효자동(옛 화자동) 주변에 집을 소유하고 궁으로 출퇴근하며, 가계를 잇고자 양자도 받아 들였다 한다. 양자 역시 내시로 대를 잇는 내시집안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경국대전에 내시의 양자조건으로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조건이였다고 한다.

 

▲ 안채로 들어서는 문 옆에 헛담이 아름답다.

 

시대를 막론하고 내시라하여 정을 통하는 사건이 없는 게 아니었다. 고려 의종 당시 의종의 유모와 결혼한 환관 정함은 권력을 이용하여 관리를 모함한 사건, 환관 백선연의 궁녀 무비와의 정을 통한 사건, 조선 태조 당시 세자 방석의 현빈 유씨와 내시 이만이 정을 통하고 사형당하는 일까지 비일비재 하였다.

 

궁에서 왕의 그림자로 살던 내시가 연로하여 물러나면 내시 촌을 이루어 살았다. 당시 내시라는 신분이 민가에서는 입담꺼리였기 때문에 그들만이 모여 살았다. 은퇴하여 사는 내시라 하여도 위세가 대단하여 지방 고을 수령은 꼼짝도 못할 만큼 두려운 존재들로 알려졌던 내시들 중에서 내시 촌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고 사는 내시가 있었는데 오늘의 여행지가 바로 내시로 인생을 살아온 조선시대 궁중 내시로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인 통정대부 벼슬까지 오른 김일준(1863~1945)의 고택 여행이다.

 

임당리 김씨고택(내시고택)이 확인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청도군 운강고택 주변에는 운남고택, 명중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등 많은 고택이 있다. 문화재 등록을 위해 주변 고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운강고택으로부터 3.4km 거리에 김씨고택을 조사하던 중 조상의 제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별묘에서 이 집안의 내력이 담긴 축문 “‘내시촌통정김일준가세계이 발견되면서 우리나라 내시집안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집의 주인은 내시로 정3품 벼슬을 지낸 김일준의 고택에서 확인된 가첩을 통해 1500년대부터 400여 년 간 16대를 잇는 궁중내시 집안으로 확인되었다.

 

 

 

궁중 내시의 집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앞서간다. 담장너머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단 한 번도 흘러나오지 않았을 김씨고택은 안채, 중사랑채, 큰사랑채, 고방채, 큰고방채, 대문간채, 별묘 등 7동과 행랑채, 광채가 있으며, 대문체 좌측에 집 주인이 거주하는 큰사랑채를 두고 우측에 사당을 두었다. 대문체에서 마주보는 중사랑채는 양아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들어서자 대를 잇는 궁중내시 집안답게 일반 사가의 집이 남향을 고집하는 것과는 달리 임금이 계신 북서향으로 향하고 있다. 항상 궁궐을 바라보며 잠을 자고 일어나는 철저하게 계획된 집 구조를 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건물이 이집 주인이 머물던 큰사랑채와 내시 부인인 안방마님이 머물던 안채이다.

 

큰사랑채와 안채는 독립적 공간으로 만들고 안채로 통하는 통로를 하나만 만들어 놓고 큰사랑채에서 출입하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 다른 고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청송군 송소고택은 여자들이 편하게 출입하도록 대문 앞에 작은 쪽담을 만들어 두는 배려가 돋보이지만 이곳은 오히려 철저한 구속을 강요하고 있다. 남자구실을 못하는 내시에게 안방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필사의 노력 이였는지도 모른다.

 

안채 또한 담장으로 가려 집안의 노출을 최소화 하여 공간이 폐쇄된 느낌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를 감시받지만 안채로 일단 들어서면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집이 북서향을 향해 어두운 공간에 한줌의 빛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바닥에 하얀 자갈을 깔았다. 안방을 지키고 있는 내시의 부인은 친정 부모가 사망하는 흉사가 아니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만큼 통제되는 폐쇄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산을 못하니 아이도 없는 안방마님 역할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감옥 같은 흙담을 바라보며 그들의 신세타령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김일준은 고종 즉위 후 홍선대원군이 개혁을 하던 1863년 출생하여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그리고 동학농민운동(1894)에 이어 갑오개혁(1894-95)으로 근현대화로 전환되면서 내시제는 폐지되었다. 김일준이 죽은 후 달성서씨, 최영철. 김문선, 김판득씨가 대를 이었고 17대손 내시는 직첩을 받았지만 내시제 폐지로 사실상 내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8대부터 양자가 아닌 정상적으로 계보가 이어지면서 이곳에도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고택은 사당 지붕 막새에 강희 25년 병인 윤4명문을 통해 1686년 사당과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오늘날 모습은 1800년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후손들은 내시였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조상을 외면하여야 했다.

 

 

내시부가 폐지된 후 한일합방 이전인 1903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관부를 폐지하면서 내시를 궁에서 내몰았다.

 

내시라 하면 남성이 없는 고자를 두고 말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남성이 없는 고자는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내시가 아니라 환관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환관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말이다. 환관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과거를 통해 내시를 임용하여 왕의 측근에 두고 정사를 보조했다. 그럼 환관은 누구인가? 남성으로 생식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환이 없는 남자로 궁중 아낙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건을 갖춘 남자 즉, 환관인 것이다. 환관이 궁중에 점점 늘어나면서 내시가 하던 업무를 하나 둘 가져왔고 조선조에 이르러 환관이 왕의 주요업무를 하면서 내시는 사라지고 환관이 내시가 되었다. 내시를 환관, 환자, 화자, 엄인, 내관, 내시 등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시는 생식기가 없는게 아니라 고환이 없어 생식기능을 잃은 것으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성관계도 가능하였다 한다. 발기가 어려워 부부관계를 도구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와 발기가 가능하지만 사정을 못해 후대가 없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살펴보면 내시가 되기 위해 머리카락으로 고환을 묶어 피 공급을 차단하면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방법으로 남근은 남겨두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이를 거세라 하였다. 음경까지 자르는 경우는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궁형이 있다. 우리가 아는 내시의 조건과는 사뭇다른데 이는 중국 환관들과 같이 보는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은 남성을 제거하여 말려 단지에 넣어 보관하였다 죽으면 다시 봉합하여 같이 묻었다 하는데 그 이유는 수태기능이 없는 노세로 환생하는 속설 때문으로 우리나라 환관은 고환만 제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찌되었던 고환을 제거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환관들이 양반보다 14~19년을 더 수명연장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운강고택의 별서 정자

만화정

 

 만화정은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 동창천을 내려다보며 머물던 곳으로 살림채가 딸려 있어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창천이 흘러 밀양 박 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섶말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비단내로 불리는 동창천변 언덕에 운강 선생이 철종7(1856) 만들어 공부하며 학문을 강의했던 만화정 있다. 한국동란 당시 만화정에서 운문들판을 내려다보았는데 주변에 2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모여들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 이곳 만화정에서 하루 묵었다 전하는 만화정은 40 이곳 운강고택에 딸린 일종의 별채이다.

 

 

만화정은 젊은 인재를 교육하기 위해 사재를 동원하여 배움을 길을 열었는데 오늘날 장학제도의 근간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속 정치가 그러하듯 오늘날의 정치 역시 옛날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청도로 내려와 동창천 자락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삼족당 김대유 선생과 소요당 박하담 선생의 가슴 한편 묵지근한 세월을 담아놓고 동창천을 찾은 철새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 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천불천탑 불령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94호 전탑

 

설렘으로 산을 오른다. 절집에 들렀지만 법당을 스쳐 법당 뒤편에 우뚝 서 있는 석탑을 먼저 만나본다. 안동시와 영양군, 칠곡군을 여행하면서 만나던 거대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전탑. 모전석탑과 달리 작은 석탑에 왜 매료되어 먼 길을 찾아왔는지는 탑 앞에 서 보면 누구나 알 만큼 탑은 신비롭다. 작은 크기의 불상과 삼층석탑이 벽돌로 제작되어 석탑을 이루고 있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난 그 벽돌 속 펼쳐진 세상이 좋다.

 

불탑이란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화순 운주사가 천불천탑으로 유명하지만 이곳 천불탑은 탑 외벽에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을 새겨놓아 천불탑이라 한다. 모전석탑은 돌을 일정한 크기의 벽돌을 만들어 탑을 쌓은 것을 말하며,

 전탑은 흙으로 벽돌을 찍어내어 만든 것으로 불령사 전탑 벽돌은 독특하게 불상과 탑이 연이어 새겨져 있다.

 

불영사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불영사에는 독특한 전탑 1기가 사찰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문화재자료 제294호 천불탑이다. 전탑은 흙으로 벽돌처럼 일정한 크기로 구워 만든 탑으로 5단 바닥돌 위 1층 기단 그리고 5층 탑신을 올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도굴로 인하여 무너져 있던 탑을 1968년 수습하여 세우는 과정에서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어 5층으로, 다시 복원을 위해 20093층으로 만들었다.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령사 문양전이 양산 통도사와 경주 박물관에도 있다. 한곳에서 작업한 문양전이 여러 곳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불령사 탑이 무너

지면서 하나씩 주워가면서 유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이와 유사한 문양전이 울산 농소동 중산리(호계3), 경주 인왕동 폐사

(국립경주박물관소장), 석장사지(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 영묘사지, 삼랑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다 한다.

 

탑에 사용된 벽돌은 이웃한 안동시, 영양군의 전탑과 달리 문양전을 사용하였는데 삼층탑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연화좌대 위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 뒤편으로 광배가 표현하고 3구의 불상과 2기의 석탑이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여 이 탑을 두고 한 탑군속에 천불천탑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다. 삼층탑 주변으로 삼각형 산과 인당초 문양이 둘러져 있으며, 안동시와 영양군 일대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특정 계파가 만든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영사에는 대웅전으로 2000년에 지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법당이 있다. 중심불로 소조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협시불로 관음, 지장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요사채 인법당에는 석가모니불영산회상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18세기로 추정되는 석조석가여래좌상,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석조관세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런

한재미나리

 

▲ 지하수를 뽑아올려 키우는 미나리는 이제 이 지역을 먹여 살리는 상품이 되었다.

 

이곳 미나리는 청정자연암반수를 이용하여 재배한다하여 알려진 곳으로 봄, 가을 미나리 출하시기가 되면 이 일대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다. 싱싱한 미나리 향과 함께 삼겹을 쌈싸먹는 곳으로 먼곳에서 미나리를 먹기위해 이곳을 찾기도 한다.

 

▲ 미나리를 손질하고 계신다.

 

가을 미나리가 끝나 이제 끝물이라며, 봄미나리가 나는 봄철에 오라며 끝물 미나리 한 묶음을 포장해 주셨다. 가격은 8천원으로 다른 곳에 비하여 비싼편이지만 맛과 향이 윌등한 곳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고택여행을 준비하고 떠났지만 문이 닫혀 있는 안타까움에 담장너머로 속살을 엿봐야 하는 우리나라의 암담한 문화재 현실은 언제쯤 고쳐질까.

 

 

http://blog.daum.net/okg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