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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자성대공원을 찾아서

허영꺼멍 2014. 1. 23. 11:35

 

 

왜성이라 외면받는

 부산진지성

 

▲ 현재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아오는데 2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코스가 짧고 단조롭다.

 

부산만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부산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륙도를 거쳐야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일본을 떠난 배가 도착하는 전쟁의 발판이자 수탈한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항구가 필요하였고 오늘날 자성대 인근을 매립하여 부두를 만들었다. 오늘의 여행지는 임진왜란 첫 격전지 이었던 부산진성 이야기이다.

 

▲ 신선대에서 내려다본 컨테이너 부두

 

여행에 앞서 부산 자성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각종 글을 종합해 보면 부산진성의 지성으로 부산성의 한 부분이다 는 것. 공식적으로는 부산진지성이며 현재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이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의문은 왜 자성대로 부르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뒤져봐도 자성대에 관한 정확한 어원의 출발은 모호했다.

 

▲ 부산 동래전투 그림

 

개인적으로 자성대는 일본점령기 당시 굳혀져 버린 지명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임진왜란 첫 전투는 부산진성 전투(1592.4.13.~14)이다. 1592523(음력 413) 고니시 유키나가와가 이끄는 왜군 제118,700명과 왜선 700여척이 새벽 부산진성에 내침한 사유로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니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假道) 쓴 목판을 성 밖에 내걸자 경상좌수사 박흥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경상우수사 원균도 우수영을 떠나 도망가기 급급했다. 부산진성에는 첨사 정발장군(1553~1592)이 남아 항쟁을 결의하고 주변에 급히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414일 새벽 6시 왜군은 부산진 근처 포() 안으로 배를 붙여 상륙을 개시하였고 초종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정발장군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말하며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39세 나이로 정발장군과 그 휘하 장수들은 전사하였는데 당시 부산진성에서 저항했던 군민 3000여명도 같이 희생되었다. (다른 이야기로는 생포되어 하루 동안 묶여 있다 살해당했다고 한다)

 

▲ 일본이 쌓은 자성대 왜성

 

왜군을 맞이하여 첫 전투를 치룬 곳은 부산진성이다. 자성대라는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성대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다대포진성을 함락한 후 곧장 동래진성전투를 통해 승리하면서 해안가에 위치한 부산진성을 왜장 모리(毛利輝元) 부자는 부산진지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왜성을 축성하여 소서성. 환산성이라 부르며 지휘소로 활용하였다.

 

조선이 왜적을 지키기 위해 만든 성이 한순간에 왜군이 조선을 수탈하는 제일선봉 장소로 바뀌었고 다시 왜군을 몰아내고 명나라 만세덕 휘하 군대가 주둔하면서 만공대로 불렀다. 해안 입지적 조건으로 인해 군사적 요충지였던 부산진성은 이후 성과 사대문을 설치하고 관아를 고쳐 부산진첨사영으로,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일본은 수탈을 목적으로 항구를 조성하면서 자성대 일원을 매립하였고 그로 인하여 바다와 거리가 먼 육지 속에 섬으로 변하였으며, 근대에 들어 1974년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1975년 동문과 서문, 장대를 복원하고 동문을 건춘문(본래 진동문), 서문을 금루관, 장대는 진남대라 편액을 내걸었다.

 

자성대는 부산포에 있던 내성과 외성 중 외성으로 큰 성에 딸린 아들성이라하여 왜적이 자성으로 부른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면서 굳어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 옛 해안은 컨테이너 물류장으로 변해있으며, 그 위로 동서고가도로가 질주하고 있다.

 

7부두와 자성대부두 사이 동서고가도로가 관통하며 그 아래로 물길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동천이라 한다. 부두가 생기기 전 조선시대는 오늘날 자성대 공원 앞까지 바닷물이 흘렀다고 한다. 동천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여 배가 들어 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매립되어 그 흔적을 짐작 할 뿐이다. 지금은 주변에 도심이 자리 잡고 항구와는 먼 거리에 있지만 조선시대 당시 바닷물이 성곽을 따라 흐르며 배가 성벽에 닿을 수 있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부산진지성은 개발이란 이유를 내걸고 헐어 버리고 주변 바다는 수탈을 목적으로 매립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 도심 속 작은 섬처럼 삭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바다로부터 부산 내륙으로 들어서는 첫 조선의 땅 부산진성 그리고 일본이 수탈을 위해 만든 일본왜성을 오늘날 자성대라 부르지만 공식적 명칭은 부산진지성이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자성대는 일본이 점령하면서 왜성이 존재했다는 이유 때문에 외면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산진성의 아픔을 말해주는 유일한 흔적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서문 옆으로 주차장이 있어 이곳으로 부터 출발을 한다.

 

부산진지성 서문에 도착하면 성문 좌, 우에 서문성각우주석으로 불리는 다른 돌 기둥 두 개가 서 있다.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즉 남쪽은 사람의 목과 같고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의미로 이곳이 해상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 군사적 중요한 거점임을 말해주고 있다.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단 한발도 허용치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이지만 정작 왜군이 몰려오자 성의 수장부터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다.

 

 ▲ 서문 측면 전경  ▲ 성 안에서 바라본 서문

 

▲ 서문성곽 우주석으로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19호이다. 서문 양측 성곽에 있는 우주석은 옛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

학교에 있던 것을 1975년 정비사업 당시 옮겨와 서문 금루관 입구에 세웠다.

 

▲ 영가대 전경

 

서문을 통과하여 길을 따라 이동하면 영가대 건물이 나온다. 영가대는 1614년 광해군 당시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 인근에 선착장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고 인조 2(1624)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인 영가(永嘉 옛 안동지명)를 따서 영가대(永嘉臺)라 불렀다 한다. 영가대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일본상인 별장 이였던 능풍장으로 옮겨졌다 사라진 후 2000년 표지석을 세웠고 2003년 자성대공원에 복원하였다.

 

▲ 조선통신사 역사관

 

영가대 바로 앞에 작은 건물이 있어 관리소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곳은 조선통신사역사관으로 조선통신사절단에 관한 간단한 기록과 모형을 전시하고 있어 들렀다 가면 좋다.

 

▲ 도로변에서 올라오면 2층에 전시실이 있으며, 영가대에서 곧장 2층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전시실 내부 전경

 

          ▲ 최영장군 비각이 답답하게 갇혀 있다.

          ◀ 동문 모습

           ▼ 표기가 없어 ??

   

영가대 앞 계단으로 올라오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에서는 산책로는 곧장 최영장군비각으로 향하고 최영장군 비각에서부터 왜성의 앙상한 뼈가 보이기 시작한다. 왜성을 따라 오르면 진남대가 위치하고 있다.

 

 ▲ 왜성 주변으로 오래된 고목이 드문 드문 자리하고 있다.

 

 ▲ 최영장군 사당으로 부터 성벽 아래로 나 있는 산책길을 따라 오르면서 만나는 왜성

 

 ▲ 왜성은 우리나라 석성이 수직인 모습과는 다른 비스듬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왜성을 쌓는 돌은 큰 돌을 외곽에서 차곡차곡 쌓는 수법이다.

▲  정상에 유일한 건물 진남대

 

일본에 의해 조선 성을 허물고 선조 26(1593) 모리테루모토(毛利輝元) 부자에 의해 다시 일본식으로 만든 성곽으로 정상부분에 진남대가 있다. 진남대는 정면 5, 측면 4칸에 2층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장군의 지휘소이다. 일제에 의해 사라진 진남대를 1975년 복원하고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님이 쓰신 鎭南臺(진남대) 현판을 내걸었다.

 

 ▲ 진남대 측면모습.

 

▲ 진남대 옆에 세워져 있는 천장군기념비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귀화한 명나라 장군 천만리(千萬里) 후손이 만든 천장군기념비와 최영장군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매년 103일 일족이 모여 총독장 화산군 영양천공 전첩유적비앞에서 중시조를 향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수영에 있는 수영사적공원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석축을 쌓고 부산만을 응시하며 적군의 동태를 살폈던 그 역사의 현장은 오늘날 시민들의 공원으로 전략해 버렸다. 자성대공원에서 불과 10km 거리에 있는 수영사적공원 역시 노인들이 머무는 공원으로 전략 해 버려 부산의 여행지에서는 이 두 곳이 빠져 있다. 수영근린공원(수영 사적공원)1968년 공원으로 지정된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성안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남문(지방유형문화재 제17)의 홍예문과 임진왜란 당시 조직된 25인의 의용단(기념물 제12), 수영야류(중요 무형문화재 43), 수영동 곰솔(천연기념물 제270),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 안용복 장군 충혼탑과 수강사, 수영민속예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부산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창건된 병풍사를 비롯, 수영사적공원은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 왜성의 특징을 잘 살펴 볼 수 있지만 주변에 나무가 많이 자라 왜성 전체를 바라보기 어렵다.

 

부산은 항구다. 오늘날 수 없는 배가 오륙도 관문을 통과하여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곳이자 임진왜란의 최초 격전지이기도 한 이곳 부산에서 자성대와 수영 사적공원이 산책하는 산책로로 묻혀 버리기보다 나라를 유린당한 뼈아픈 역사의 현장인 만큼 그 아픔을 각인시키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는 재정비가 시급하지 않나 싶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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