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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 수영사적공원을 아시나요?

허영꺼멍 2014. 2. 4. 10:38

 

 

부산의 숨겨진 역사 뒤안길에서 만나는

비겁한 역사의 현장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여행의 시작은 수영팔도시장으로 진입하여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25인의 의용단~수영민속예술관~좌수영남문~수영고당~선정비~안용복 장군 사당 순으로 여행하면 된다.

 

수영근린공원(수영 사적공원)1968년 공원으로 지정된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성안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남문(지방유형문화재 제17)의 홍예문과 임진왜란 당시 조직된 25인의 의용단(기념물 제12), 수영야류(중요 무형문화재 43), 수영동 곰솔(천연기념물 제270),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 안용복 장군 충혼탑과 수강사, 수영민속예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 수영공원 내 안용복 동상

 

1592413일 정발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이끄는 18,700 명의 병력과 700여척의 왜선이 부산포를 통과하여 육지로 상륙하니 불과 1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산진성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지만 결국 패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선언하고 경상좌도 병사 이각과 경상좌수가 박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도망을 하였는데 박흥은 부산과 경상도 해안 방어를 총지휘하는, 오늘날 해군함대 사령부 지휘관인 인물로 당시 73척의 배를 스스로 자침시키고 언양으로 도망하는 일이 벌여졌다. 송상현은 지원군도 없이 동래성에서 홀로 15일간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렸지만 결국 함락되면서 조선은 7년간의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싸이는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 징비록에는 “413일 왜군이 국경을 침범 부산포를 함락하자 경상 좌수사 박홍이 적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출병하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한다. 오늘 여행지는 바로 그 비겁한 박흥이 도망가자 왜군이 무혈입성한 수영성이다.

 

▲ 동래성 전투 재현 공연 장면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지형은 앞으로 광안리와 뒤로 흡사 연꽃을 닮은 금련산(415m)이 있어 뛰어난 자연경관과 전형적인 배산임해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도심의 중앙에 위치 또한 수영 팔도시장과 이어져 당시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수영이란 지명이 옛 수군 절도사영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좌수영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총 사령관이 머물던 진영으로 부산포에 있던 수군절도사영이 여러 번 옮겨 다니다 효종 3(1652) 다시 부산포로 옮긴 후 고종 32(1895)구 군사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했는데 처음 성이 축도된 시기는 알 수 없고 당시 숙종 18(1692) 좌수사 문희성이 보수하면서 둘레 약 2,785m, 높이 4m이며, 우물 4, 성문 4, 수구 4개 및 성 바깥에 옹성과 치성, 보루를 설치하고 7개의 진이 소속 되어 65척의 전투선과 45척의 나룻배를 보유했다. 좌수영지에는 네 곳에 성문을 두었는데 동문(영일문), 서문(호소문), 남문(주작문), 북문(공진문)으로 이 중에서 남문은 6칸 규모로 가장 큰 문으로 북을 매달아 시각을 알리며, 북소리에 따라 일제히 성문을 여닫았었다 한다.

 

 

25의용단(시도기념물 제12호)

 

▲ 굳게 닫혀 있는 25인의용단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하여 산야로 달아날 것인가. 단 한 번의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리라

 

  

 ▲ 25 의용단

 

 

 ▲ 의용단 내 25인의 비석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 외부에서 바라본 모습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미리 겁을 먹고 성을 버린 채 도주하자 무혈 입성한 왜군은 성내 주민을 약탈, 살육하자 수병과 성민 25인이 성문 밖에서 피로서 결의하고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한 사실이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의 청원으로 알려지자 동래부사 이안눌이 그들의 행적을 모아 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이란 글을 써붙혀 그 듯을 기렸다.

 

 

 

 

 

 

순조 때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25인의 후손에게 역의 의무를 감해주고 포상하였고 철종 4(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의용단이란 비를 세워 매년 2회 제를 봉향하였다. 그 후 1974년 비석단을 정비하고 2000년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20013월 준공하였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출입이 원활하지 않다.

 

▲ 25의용단 담벼락을 따라 수영야류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수영팔경 기념비

 

 

 수영사적원

 

▲ 동래읍성 축제에서 만난 수영야류 말뚝이

 

수영야류, 좌수영어방놀이, 수영농청놀이의 전승 보존을 하는 공간이다.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운영하는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으로 우리 고유의 민속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무료공연을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 새롭게 부채모습으로 투명 천장을 올려 공연을 전천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수영 고당

수영 고당은 조선시대 수사가 국태민안을 위한 독신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후 수영성민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 하는 토지지신의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현제의 수영고당은 일제 강점기 왜병의 희롱을 물리친 송 씨 할머니의 장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당에 모시고 독신과 함께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수영향우회에서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일명 송 씨 할매당, 산정머리 할매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수영 고당 뒷모습/ 숲으로 둘러 싸여 있다.

수영고당의 창건은 400여 년 전(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동안 제당이 오래되고 허물어져 1936년 중건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1981년 애향인 김기배씨에 의하여 중수 되었으며, 2003년 그의 아들 김종수씨가 개수하였다. 제당의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은 성주신당이며, 왼쪽은 독신묘이다.

 

▲ 수영 고당 정면모습. 문이 잠겨 있다.

 

독신묘에는 병영의 대장 앞에 세우는 독기를 안치하여 군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어 일반 제당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며 수영주민들은 제당에 인접한 천연기념물인 푸조나무는 지신목으로, 곰솔나무는 군신목으로 여겨 자식이 구내에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 수영 고당과 신목에 무사안녕을 기원하면 큰 효험이 있다 믿었다.

 

 

수영성남문(지방유형문화재 제17호)

 

▲ 수영성 남문 입구에 좌, 우 2기의 석수가 있다. 

 

옛 조선시대 수영성의 남문으로 조선 숙종 18(1692) 설치되었다 전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지금의 위치에 200m 떨어진 옛 수영초등학교에서 옮겨와 1993년 보수하였다. 수영문의 일부인 홍예문은 아치형으로 쌓고 양옆은 박견 또는 석수(개 조각상)가 올려져 있어 전남 순천시 낙양읍성에 이어 성을 지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 남문 모습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 선정비

   

 ▲ 부산 좌수영 선정비

    ◀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선정비로 이전해온 것이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옛터에 33기의 비석으로 조선시대 인조 17(1639)부터 고종 27(1890)사이에 수군절도사와 부관인 우후의 재임 중 공덕을 칭송하는 선정비로 좌수영성지 정비, 복원사업 일환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

 

천연기념물 제270호 곰솔은 400년 된 고목으로 높이가 22m로 좌수영내 머물던 군신들은 이 나무에 신이 있다하여 군선을 보호하고 제를 지내는 등 신성한 나무로 보호했다고 한다.

 

 

수영동의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

 

 

▲ 푸조나무 전경

 

▲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로 불리는 푸조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 주로 해풍이 많은 지역에 방풍림으로 조성되는 수종으로 수영사적공원 내 있는 푸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으로 높이 15.5m에 가슴높이 주간 둘레 6.3m,3.88m이고, 수관 폭은 동-15.6m, -14.9m, 위로 솟은 가지가 3,88m로 지상 1.08m 되는 줄기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자라 두 그루의 나무로 착각 할 정도며, 마을을 보호하는 신격화 된 나무로 당산목 또는 지신목으로 할머니 넋이 나무에 깃들어 있어 아이가 놀다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믿고 있다.

 

 

 

 안영복 장군 사당

 

▲ 사당을 중심으로 동상과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부산에서 태어난 안용복은 수군의 노 젓는 병사 신분인 능노군으로 활동했던 어부로 숙종 19(1693) 동래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는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이에 항의하다 박어둔과 안용복은 일본으로 잡혀가 일본 호키주 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막부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온 후 1969년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는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송도까지 추격하여 침범 사실을 문책하고 울릉우산양도감시관이라 자칭하고 다시 일본 호키주 태수에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는 등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조용했던 울릉도와 독도 주장을 2005년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 대사는 독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2006년에는 독도주변해역을 과학 조사라는 핑계로 주장하는 등 문제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훗날 이를 두고 동상을 세우게 되는데 동상은 제11회 신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곽순곤 조각가의 작품이다.

 

 

독도를 두고 일개 수군이 당당하게 침탈을 주장하여 국권을 회복하였는데 지금은 안용복 보다 정치인이 더 못한 것인지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유감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도데체 독도를 지킬 마음은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 수영민속 예술관 뒷 담벼락

 

좌수영성은 조선 숙종 18(1692) 다시 증축하나 일제 강점기 성을 버리고 간 비극의 공간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성을 헐리고 사라지면 겨우 남문 1기의 모습과 성 터 일부분만 남아 있는 어두운 과거사의 부끄러운 현장으로 199531일 수영공원 또는 수영사적공원이라 한다. 사적공원은 남문을 통과하면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로 막는다. 한그루의 나무가 시선을 끈다.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곰솔나무를 한 참 올려다본다. 당산 1기와 비석군 놀이마당과 25위용단, 안용복 기념관이 전부이다. 놀이마당에서는 수영야류와 동래학춤을 정기적으로 공연한다.

 

 

 

▲ 돌아 오는 길목에 낙조는 왜그리 슬퍼 보이는 지..

 

역사적으로 당당하지 못하여 노인들이 모여 술판이나 벌리는 수영사적공원이 최근 야외놀이마당에 철골구조와 파이트 트러스 구조로 전통 부채 형상의 투명 지붕을 올리고 원형관람석을 재정비하면서 놀이마당 공연이 늘어나 새롭게 부각되면서 수영구에서는 2016년까지 부지를 매입하여 남문과 서문 사이의 성벽과 누각을 복원하려는 구상을 밝혔다.

 

 

역사는 흐른다.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이 73척의 배를 가지고 육지에 상륙한 왜선을 후방 공격을 하였다면 역사는 다시 기록되어 할 만큼 상황을 달라졌을 것이다. 과거나 현재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갖은 노력은 하였지 정작 나라의 국운이 걸려있는 역사의 현장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제일 먼저 도망을 갔었고 성을 지키다 장열하게 전사한 사람은 그들이 지켜야 했던 무고한 백성들이였다.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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