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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를 찾아서 - 2편 수로왕비릉을 찾아서

허영꺼멍 2014. 2. 6. 10:26

 

잃어버린 제4국 키워드

가야를 찾아서

 

김수로 탄생설화와 허황옥공주의 숱한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도심속 누리길 여행이다. 2013년 12월 11일 '김해 함안 고분군'이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가 확정되면서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은 그 역사의 현장을 통해 잃어버린 제4국 가야를 만나보자.

 

 

구지봉을 중심으로 오른쪽 언덕아래는 수로왕비릉이 반대편으로 국립김해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어 함께 둘러 볼 수 있는 동선이 형성된다. 우선 국립김해박물관을 여행하고 출구로 나온 후 구지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박물관 출구 뒷편으로 이어져 있다. 올라가는 길은 지그제그로 쉽게 구지봉에 오를 수 있으며, 구지봉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바로 이어진다. 첫 여행의 출발지가 수로왕릉이 있는 수릉원으로 차를 회수하기 위해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도중 김해읍성 북문을 잠시 둘런 후 차를 회수하고 산길을 따하 해은사로 올라 분산성을 여행하면서 여행을 마무리 한다.

 

▲ 국립김해박물관 앞 가야의 거리 풍경

 

국립김해박물관

 

▲ 김해국립박물관 전경

 

가야의 이야기를 엿듣고,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국립김해박물관은 야외전시장과 실내 상설전시장, 특별전시관, 테마전시관 등 공간을 두고 있다. 야외에서는 고인돌과 가야시대 다양한 무덤을 실물 그대로 옮겨 복원해 놓았다.

 

 

박물관은 1998729일 개관과 함께 가야사 유물 유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본관은 철의 왕국을 상징하는 의미로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한 장세양(1947~1996) 건축가의 작품이다,

  

 

수로왕비릉

허황옥 공주의 이야기 속으로

사적 제74

 

수로왕비릉으로 들어서면 파사석탑을 지나 수로왕비릉 그리고 왼편으로 이어지는 터널 윗길을 따라 구지봉에 도착

하는 코스로 이어진다.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의 능으로 조선 고종 15년에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릉 앞에는 인도에서 올 당시 바다의 풍랑이 심하여 배에 무게를 맞추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로 쌓은 탑이 바로 파사석탑으로 릉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허황옥은 16세가 되던 해 인도를 출발 풍랑을 잠재우며 가야 김해에 도착하여 수로왕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 후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왕비의 두 아들을 자신의 성을 따 씨의 시조가 되게 하여 오늘날까지 김해 허 씨김해김씨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한다.

 

 ▲ 정문에서 바라 본 파사석탑 정각

 

▲ 정문에서 바라 본 김수로왕비릉

 

사적 제74호 수로왕비릉은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삼고 있다. 수로왕릉과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한 왕비릉은 지름 16m, 높이 5m 의 원형봉토분으로 능 앞에 '가락국수로왕비진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晋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긴 비석이 있다. 비석은 인조 25(1647) 김해 수로왕릉과 함께 봉분을 재정비하면서 세웠다.

 

 

▲ 파사석탑 보호각

  ◀ 파사석탑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27호 파사석탑은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48(수로왕 7) 16세 나이로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가져온 돌 또는 탑으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탑 형식과는 다른 돌을 포개놓은 모습이다.

 

탑의 부제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능본초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탑으로 신비를 더하고 있다.

 

▲ 파사석탑 아래부분 연꽃받침이 독특하다. 본래는 다른 것을 하나로 쌓아놓았다.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로운 파사탑은 또 다른 이름으로 진풍탑이라 한다. 원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1873년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겨 보호각을 세웠다.

 

 ▲ 석탑 몸돌이 독특하다.  ▲ 인도에서 가져 왔다는 독특한 돌

 

수로왕과 허황옥 왕비를 두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문무왕 당시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전설은 부모가 가락국왕 김수로가 왕이 되어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딸 허황옥을 김해로 보내라는 상제의 전언으로 출발한다. 허황옥은 부모의 명을 받아 가락국으로 떠나려 하였지만 바다가 노하여 뱃길이 가로막히자 석탑을 싣고서 풍랑을 잠재우고 가락국에 도착하였다는 것,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강요로 시작되는 셈이자 석탑이 의미하는 것은 불교가 맺어준 인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수로왕비릉 비석에 보주하는 글이 있다.

허황옥은 가락국 해안 망산도에 도착하니 수로왕이 직접 맞이하여 혼례를 하니 타 고왔던 배가 뒤집혀 유주남이 되어 지금도 망산도 앞 바위 되어 있다 한다. 첫 초야를 보낸 곳으로 명월산 자락 흥국사로 명월사라는 지명 역시 허황옥을 본 모습이 아름다운 달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는 남녀가 첫 만남에 혼인을 하는 역사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리고 전설을 살펴보면 허황옥 못지않게 등장하는 것이 불교적 색체이다. 배에는 허황옥만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오빠가 함께 왔고 그를 장유화상이라 부른다. 당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첫 발을 딛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비석에 보주라는 지명이 중국 사천성 안악현이라는 곳을 들어 중국설도 있다. 김해에서 중국 화폐인 화천’, 중국 청동거울 외 다수의 중국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불교적 색채를 띤 어떤 세력이 해상을 통해 유입되었고 그 세력과 가락국 김수로는 힘을 합쳐 가락국을 이끌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수릉원 앞 왼편 동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 끝자락에 구지봉이 있다.

 

수로왕의 묘역에서 허황옥의 묘역까지 직선거리가 약 1km 이다. 두 사람의 금술이 좋았다면 왜 먼 거리에 묘역을 각기 만들었을까? 개인적으로 수로왕과 허황옥 공주는 오늘날 정략결혼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의 세력과 허황옥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추정하게 하는 부분이다. 허황옥은 인도 출신이라는 것이 학설의 대부분을 지배하지만 김해에서 인도와 관련된 유물을 확인 할 수 없다. 꼭 찾아본다면 첫날밤을 보냈다는 흥국사 불상을 지키는 뱀 조각이 유일하다. 근거로 제시하는 쌍어의 이야기라면 수로왕보다 왕비릉에 당연하게 있어야 하지만 왕비릉에는 쌍어가 없다. 파사석탑 재료 역시 인도와 더불어 중국에서 생산된다 한다.

 

 ▲ 수로왕비릉 전경

 

▲ 구지봉에서 내려서다 바라본 수로왕릉

 

일제강점기 당시인 1920년 일본은 마산으로 가는 신작로를 낸다는 이유를 들어 구지봉 거북 머리와 수로왕비릉 중간길 즉, 거북의 목 부분을 잘라 버렸고 지금은 터널을 만들고 그 위에 산길을 다시 이어 놓았다. 수로왕비릉을 거쳐 자연스럽게 구지봉으로 향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구지봉은 수로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성스러운 곳이다. 그런 장소 옆에 허황옥 비의 릉이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수로왕 설화 옆에는 수로왕릉이 있는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는가.

 

 

 

구지봉

사적 제492호

 

사적 제492호 구지봉은 서기 42년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상자가 내려오고 그 속에서 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의 발원지로 알려 진 구지봉이다. 하나의 돌이 흡사 거북이 목을 빼놓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 구지봉 정 중앙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둥근 원형으로 주변에 소나무가 자라며 그 중앙에 거북모양을 한 구지봉이 있다.

 

 

 ▲ 구지가를 불렀던 구지봉

시도기념물 제58호 구지봉은 가락국 건국의 전설이 전해지는 구산동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 세워놓은 거북모양을 닮은 바위이다. 신라 유리왕 19년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김수로왕이 탄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1908년 참봉 허선이 세운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란 석비와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윗돌 위에 조선시대 명필가 한석봉이 쓴 글씨라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탄생설화에 나오는 노래 구지가역시 간절함이 묻어난다.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 놓아라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 구워서 먹으리

 

 ▲ 구지봉으로 향하는 길

 

 ▲ 조선시대 명필가 한석봉이 쓴 글씨라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위에서 본 고인돌 윗 부분에 또렷한 구지봉석 글씨체가 나타나 있다.

 

▲ 구지봉 입구에 있는 구지봉석

 

 수로왕비릉에는 수로왕릉에 비하여 특별한 것이 없다. 수로왕릉이 평지였던 반면 수로왕비릉은 가야시대 고분처럼 언덕에 조성을 하여 대조적이다. 훗날 사람들은 김수로와 허황옥이 천생연분으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것과는 사후의 모습이 너무 안탑깝다. 그리고 계속되는 의문은 꼬리를 물고 발목을 잡는다. 구지봉에는 수로왕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답이고, 쌍어가 그려진 수로왕릉은 수로왕비릉이면 복잡한 생각은 떨쳐놓고 갈 것인데 말이다. 왜 두 고분은 전설과는 달리 정 반대의 장소에 무덤을 만들고 그것도 각각 먼 거리에 있는 걸까.

 

구지봉을 떠나 차량회수를 위해 왔던 길 반대편 주택가로 이동하면서 김해향교와 김해읍성을 들렀다 갈 생각이였지만 남은 일정이 여의치 않아 김해향교는 다음기회에 만나기로 하고 인근에 있는 김해읍성 북문으로 향했다.

 

 

 

김해읍성 북문(공진문)

김해 동상동 314

 

세종16년(1434)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을 대비하기 위해 만든 석성으로 문종 원년(1451)에 둘레 4,418척, 높이 13척으로 931개의 여장을 세우고 성문을 보호하며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적대를 20군데 설치하고 옹성을 4곳, 우물 28곳 그리고 해자를 성벽을 따라 파 놓았다고 한다.

 

▲ 김해읍성 북문 전경

 

일제강점기 당시 김해읍성은 도시를 조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고종 32년(1895) 철거되면서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주변에는 주택이 들어서면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역사를 2006년 주변에서 성벽과 옹성 일부를 확인하면서 발굴을 시작하여 2008년 4월 북문을 복원하였다. 북문은 현종 7년(1666) 부사 이화학이 중건하였으며,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그리고 복원된 북문을 공진문이라고 불렀다 한다.

 

▲ 복원된 성벽으로 북문 성곽 일부분

 

차량을 회수하여 산길을 따라 올랐다. 롯데캐슬 가야1단지와 2단지 사이로 오르는 1차선 도로 첫 언덕길에서 사충단을 만날 수 있다. 여행 당일 사충단은 굳게 잠겨져 있어 곧장 해은사로 향했다. 사충단에서 해은사 까지 2.5km 거리로 올라오는 도중 내려다 보면 김해시의 멋진 풍경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사충단

 

시도기념물 제99호 사충단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주도하다 전사한 김득기, 송빈, 유식, 이대형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고종 8(1871) 조성한 묘역이다. 묘역은 도심의 팽창으로 인하여 분산성으로 오르는 입구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 분산성에서 내려다 본 사충단 전경

 

선조 25(1592) 동래성이 무너졌다. 왜장 구로다는 곧장 김해로 향하였고 김해부사 서예원은 인근 창원 우병사 조대곤에게 구원요청을 하였지만 구원병이 오지 않자 도주하는 일이 생기자 선비 신분 이였던 김득기, 송빈, 유식, 이대형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13천여 명의 왜적과 대항하였으나 결국 순국하였다.

 

 

사충단에서 2.5km 산길을 따라 오르면 천문대 아래를 통과한다. 전망대도 만나게 되는 산길은 생각보다 오르막이 없어 산책하듯 걸어서 오르는 연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차량은 가야역사테마파크를 통과하면서 포장도로는 끝이나고 산길로 접어든다. 운전이 서툴거나 차량이 혹시 상처나는 것이 싫다면 가야역사테마파크에서 주차를 하고 걸어서 가는게 좋다. 꼭 가겠다는 사람은 해은사 절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정말 운전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가는 길에 차량을 만나면 서로 교차할 폭이 없어 후진 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해은사까지는 도보로 약 600m 정도이다.

 

 

해은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 말사

 

김유신 가문에서 편찬된 개황력(개황록)’을 통해 고려 문종조(1076) 가락국기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1281) 가락국기로 이어지면서 건국설화는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과의 만남 그리고 결혼 그런데 여기서 또 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허황옥의 오빠라는 장유화상이다. 장유화상과 관련된 사찰로 김해 명월사(흥국사)를 비롯하여 하동 칠불사, 산청 왕산사, 김해 은하사, 남해 보리암, 감해 장유사에서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분산성 봉화대에서 바라 본 해은사 전경

 

남방불교전래설을 말해주는 칠불사는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허황옥 왕비 오빠였던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이곳에 운상원이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038월 보름날 밤 일곱 왕자 광불, 당불, 상불, 행불, 향불, 성불, 공불 모두 성불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김해 장유에는 장유화상의 탑으로 추정하는 비가 있어 실존하는 인물인지 가공된 인물인지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찰이 많이 확인되는데 장유화상이 창건한 또 하나의 사찰이 분성산에 있는 해은사이다.

 

▲ 해은사 사찰은 일주문이 없다. 사천왕상도 없다. 불이문이 절집문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해발 330m의 정상에 위치한 해은사는 2000여 년 전 가락국이 탄생된 7년 후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불경과 파사석탑 돌을 싣고 왔는데 그 돌과 함께 바닷길을 순탄하게 해준 동해용왕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만장대에 사찰을 세웠는데 바로 혜은사라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 말사로 지정되어 있다.

 

 ▲ 대왕각에 돌에 쌀을 뿌려주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 ?  ▲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 인도분위기가 물씬~

 

해은사 창건설을 인정하면 서천축 인도로부터 바다건너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최초의 전법도량으로 전하는 곳이다. 가락국의 원찰 이였던 해은사는 전란과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 30여 년 전 영산전을 재 중건하면서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 영정과 김해 허씨 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허왕후가 인도 망산도에서 가져왔다 전하는 봉돌이 있는데 신비한 영험이 있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 최근 만든 파사석탑

 

 ▲ 파사석탑과 산신각으로 향하는 입구에 둥근돌이 놓여 있다.

 

 ▲ 산신각 옆에 있는 남근석 바위는 소원을 들어 준다는 전설이 있다.

 

▲ 산신각에서 합장하신 분

 

산신각에 산왕대신이 모셔져 있으며, 입구 괴석은 남근을 상징 자손번창은 물론 많은 불자님들의 소원 성취를 이룬 영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암만 봐도 남근석은 아닌 것 같다. 타고봉(고지도를 통해 타고봉이 봉화대가 있는 지점으로 추정)에는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올 때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전하는 그 탑을 원형에 근접하게 복원 후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멸의 적멸보탑이 봉안되어있다.

 

▲ 사찰 입구 포대화상이 고목나무 아래 자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에 의해 가락국이 탄생되었고 가락국 탄생 후 7년이 되던 해 인도 아유타국 공주 일행이 해안에 도착하여 왕후가 되고 중궁전 동편에 호계사를 건립하고 파사석탑을 안치하니 우리나라 최초 탑, 사찰이 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탑과 사찰이 파손되자 당시 김해부사 정현석이 탑 일부를 허왕후 릉 앞에 옮겨 놓았다.

 

해은사 앞에서 보면 산길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으며, 등산로 입구로부터 조금만 들어서면 충의각이 자리잡고 충의각을 지나면 곧장 분산성이 나온다. 분산성을 조금 이동하면 봉화대가 그리고 봉화대를 돌아 나오는  길에 만장대를 만나는데 그곳에는 대원군의 친필이라는 글이 암각되어 있다. 돌아 나오는 길에서는 해은사로 되돌아 하산하지 말고 산성길을 따라 내려가면 주차장과 이어진다.

 

▲ 충의각 입구에 있는 안내판과 바닥에는 길게 다듬은 비석에 정국군 박공 축성 사적지 해석문이 있다.

 

충의각으로 가는 길 앞에 정국군 박공 축성 사적비 해석문이 자리 잡고 있다. 충의각은 분산성의 수축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로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는 고려 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종 8(1871)에 세운 것이다. 김해시는 외적 침략을 막기 위한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매년 양력 1028일 충의각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충의각으로 주변에는 구역을 정해놓은 돌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없다.

 

홍선대원군만세불망비" 2기는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후 이를 허가해 준 홍선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고려 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다. 부사동정대부정헌식영세불망비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부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고종11(1874)에 세운 것이다.

 

 

충의각 언덕에서 만나는 분산성

사적 제66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김해 중심부의 분성산 정상 분산성은 고려 말 우왕 3(1377)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1592) 때 무너진 것을 조선 말 고종 8(1871)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하지만 박위 부사가 가야시대 축성된 성을 다시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충의각 앞에서 언덕길을 오르면 언덕 너머 분산성 성곽을 만날 수 있다.

 

 

 ▲ 분산성에서 내려다본 전경

 

김해시내와 평야를 넘어 낙동강과 남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가락국의 최고봉 분성산(330m)의 정상부에 띠를 두른 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오늘날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사면에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김해시내와 평야를 넘어 낙동강과 남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가락국의 최고봉 분산(330m)의 정상부에 띠를 두른 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오늘날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사면에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분산성(사적 제66)은 고려 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말 1871년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쌓았다 한다.

 

▲ 성벽을 따라 봉화대로 가는 길. 수직성벽이 아찔하다.

 

▲ 봉화대 전경

 

봉수대 입구 암벽에는 정기만이 쓴 만장대기념목이 새겨져 있다. 만장대기념목(萬丈臺記念木) 천생만장대(天生萬丈臺) 아식천년수(我植千年樹) 임진맹춘(壬辰孟春) 정기만(鄭琪萬) , 만장대 기념식수 하늘이 만든 만장대에 나는 천년수를 심었다. 임진년 꽃샘추위가 한창인 봄날에 정시만이 쓰다라는 뜻으로 당시에도 기념식수를 심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 만장대 기록  ▲ 만장대 기념식수  ▲ 만장대 기록

 

만장대가 있는 분산성은 조선시대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전하며 그 증표로 분산성 봉화대 아래 바위에 "만장대"라는 글과 도장이 새겨져 있는데 대원군의 친필이라 한다.

 

 ▲ 봉화대 뒷편 대나무 숲길에서 만나는 만장대에 대원군 친필 암각이 새겨져 있다.

 

 ▲ 낙관까지 새겨진 독특한 모습

 

▲ 누군가 잊지 말고 들러서 확인하며 대리석에 방향을 돌로 쪼아 만든 후 바닥에 놓아 두었다.

 

▲ 성벽을 따라 데이트 즐기는 연인들

  

성벽을 따라 아래로 걷는 길과 성벽 위로 걷는 길이 있다. 성벽 위로 걷던 아래로 걷던 출구는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된다.

 

 

날씨가 맑은 날 성벽을 따라 거닐며 김해시를 내려다 보는 전경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자, 일출을 보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차량으로 진입이 가능하여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장점과 도심을 내려다 보는 묘한 매력이 있는 분산성은 김수로테마촬영장에서 주차하고 조금만 산길을 따라 오르면 성벽을 따라 되돌아 가는 코스와 해은사를 들렀다 가는 코스가 있다. 어느길을 선택하여도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 복원중인 성곽 부분

 

내려서는 길에 잠시 내려다 본 김수로 테마 촬영장은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몇몇 여행객은 그곳을 둘러보고 있다. 야심차게 기획하여 김해시가 지원하여 만든 김수로 촬영 세트장을 차라리 철거하는게 어떠할까. 너무나도 위험스러워 보인다.

 

 ▲ 흉가로 변해버린 세트장

 

▲ 무너져 내리는 세트장 건물을 둘러보는 여행객

 

▲ 세트장 모습이 안타깝다.

 

여행을 마치며,

김수로를 따라 가야의 역사길을 따라 걷다보면 가야를 손끝으로 조금이라도 느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많은 부분을 놓치고 여행을 하였던 것 같다. 김수로와 허황옥의 신비스런 설화에 갇혀 낙동강 일원에서 터 잡고 생활하며 그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전장에 나서야 했던 기마민족들의 모습은 가야의 거리에서 조형물로 잠시 만나 볼 뿐 그들의 흔적은 전무하였다. 역사적 전투를 치른 곳도 없고, 그들이 남긴 흔적도 이미 개발이란 이유로 또다시 땅 속에서 매장문화로 남아 버린 제4국 가야에 내일이란 희망을 걸어보며 길을 내려선다.

 

 

수로왕릉 수릉원 대성동고분(대성동고분박물관) - 봉황대공원 회현리패총(봉황동패총) - 국립김해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 김해읍성 북문(공진문) - 사충단 가야역사테마파크 혜은사 분산성 봉화대 순으로 여행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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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생각을 담아

 

되돌아 오는 길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일본과 중국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면서 오늘날 봉황동 유적지가 해상무역의 종점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뱃길이 이곳 봉황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앞서 발견한 선박 목재를 통해 일본, 중국 추정 가능한 선박이 봉황대 앞 까지 들어왔고 봉황대 일원에서는 이미 발견된 조개더미 외에도 산자락에서 조개껍질이 여러 곳에서 확인이 된다. 그러면 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이하러 그 먼 곳으로 달려가야만 했을까? 수로를 따라 봉황대까지 진입이 되던 시절이란 이야기가 아닌가. 전설의 시작인 명산도 까지는 길이 잘 틔어진 지금도 약 19.7km 거리이며, 서낙동강을 통해 더 가까이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굳이 가덕도 앞 해상으로 뱃길을 열어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 결론은 가야사를 대표하는 김수로왕의 전설은 허구를 기초로 하여 그들 집단을 신비스럽게 포장을 하였을 가능성이다. 허황옥이 아들 중에서 자신의 성씨를 따르게 한 부분 역시 두 집단의 정략적 결혼 여부를 알 수 있다. 왕과 왕비릉의 거리가 먼 부분과 인도설화를 주장하면서 왕비릉에서 쌍어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수로왕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설화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또한 허황옥을 통해 유입된 장유화상이 만들었다는 그 사찰 역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왕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지리산 칠불암에서 정말 부처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말하는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가야사를 두고 일본은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가면서 가야사를 자기들과 연관시키려 하고 있다. 독도 문제를 두고 쉬쉬하는 것처럼 가야사 역시 우리가 침묵하는 것은 가야사 관련 자료를 일본이 정리하였기에 우리의 답답함이 더해가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가야를 넘보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신화에 모견공주가 있다. 어디에서부턴가 배를 타고 야쓰시에 도착한 모견공주는 일본 규슈지역 3대 축제에 들 만큼 대단하다. 모견공주 행사에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행사를 쏙 닮은 다양한 행사가 치러진다. 일본의 신화 묘견공주가 가야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주장, 그리고 김수로왕의 7왕자 흔적이 일본 규슈 일대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수로는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고 장남은 2대 거등왕으로, 둘째는 허 씨 성을 가지고 허황옥의 대를 이었으며 나머지는 전설만 무성한 채 사라졌는데 그 인물들이 일본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일본 규슈 미야자키 현에 있는 산 이름 쿠지후루다케는 우리말로 구지촌봉이라 하는 점 등으로 볼 때 일본은 어찌되던 가야사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날조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금의 일본은 한반도 세력이 유입되어 만들어진 일본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런 주장을 한 학자는 매도당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해 구지봉과 관련한 유사한 설화를 가지고 그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김해 구지봉과 관련되는 가야사가 불쾌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은 가야사를 빼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삼국시대를 배우면서 왜 발해와 가야가 빠진 삼국시대를 논하는지 조차 반문하지 않는다. 왜곡된 역사를 두고 그래서 지금 일부 학자들은 가야를 두고 잃어버린 제4국이라 한다.

 

 

잡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