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제4국 키워드
‘가야’를 찾아서
김수로 탄생설화와 허황옥공주의 숱한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도심속 누리길 여행이다. 2013년 12월 11일 '김해 함안 고분군'이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가 확정되면서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은 그 역사의 현장을 통해 잃어버린 제4국 가야를 만나보자.
잃어버린 제4국의 키워드 ‘가야’ 그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김해시 관광안내도 한 장 들고 남해고속도로 동김해 IC에서 하차하여 곧장 김해 팔경 중 제3경인 수로왕릉과 가장 인접한 수릉원 내 민속박물관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민속박물관이 무료주차장인 이유도 있지만 수릉원을 중심으로 왼편 도로건너 봉황동유적과 김해회현리패총을 같이 둘러보는 코스가 이어지고, 오른편으로 대성동고분박물관을 거쳐 국립김해박물관 그리고 구지봉을 거쳐 수로왕비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야의 거리를 여행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장소로 사전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코스는 수로왕릉을 시작으로 봉황동유적지를 여행 후 대성동고분박물관을 둘러 본 후 가야의 거리를 따라 이동 후 국립김해박물관을 거쳐 산길을 이용 구지봉에 오른 후 다시 수로왕비릉을 거쳐 김해읍성북문을 거쳐 수릉원에 도착하여 차량을 이용하여 해은사와 분산성을 마지막 여행하기로 정하였다.
김해 수로왕릉
사적 제73호
가야의 거리는 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거리로 한국의 아름다운 거리 100선으로 선정되었으며 해변천을 따라 가야의 생성, 문화, 생활의 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번 여행은 가야의 거리 주변을 따라 가야의 흔적을 엿본다. 여행의 첫 출발점으로 신라 유리왕 19년(신라 42년) 김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황금알을 깨고 나온 첫째 아들이 바로 수로이며,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김해 수로왕릉으로 향한다.
▲ 김해 수릉원 정문 숭화문
말을 세우고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숭화문(崇化門) 앞에 하마석이 떠억 버티고 있다. 높은 관리들에게 말에서 내려라 마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에 하마석 하나면 직위를 떠나 말에서 내려야 하니 높으신 분들은 하마석을 발로 걷어 차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 수로왕릉에서 바라본 분산성
금관가야의 방주, 가락국 시조 김수로(42~199)의 납릉은 일제강점기 당시 도굴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석실묘 내부에서 20세로 추정되는 여자 2명의 순장흔적을 확인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실록에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중심으로 사방 30보를 묘역으로 정하면서 납릉을 보호하려 하였고, 세종 28년(1446)에는 영역을 더 넓혀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훼손을 막았던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오늘날 모습은 선조 13년(1580) 후손이던 허수가 정비작업하면서 비석을 세웠다. 능비는 인조 25년(1647) ‘가락국 수로왕릉’을 새기고, 고종 15년(1878) 숭선전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구지봉에 있던 조형물을 연못 윗편 정원으로 옮겨왔다.
구지봉에 수로왕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천강육란석조상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을 모태로 1976년 가락중앙종친회가 만든 것으로 구지봉 원형회복 일환으로 수로왕릉으로 옮겨졌다. 6개의 알이 등장하는 신화는 6가야가 형제로 맺어진 관계를 상징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고려 중기 가락국기에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조선 초기 고려사 및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수로왕 신화를 황금알 1개로 기록하고 있다.
김수로왕의 역사는 가락국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언덕 위 구지봉이다.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떨어지고 불과 반나절 만에 사람으로 변해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하는데 그 중에 가장 키가 크고 먼저 사람으로 변해 “수로”라 불렀다 한다. 수로는 왕이 된 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으로 받아들였으며, 158세를 살다 199년 죽었다는 설이 있다.
▲ 나무기둥에 붉은 칠을 하였다 하여 홍문(홍살문)으로 불린다. 정면으로 보이는 가락루 전경
숭화문으로 들어서면 홍문과 마주한다. 홍문 너머로 가락루가 걸려 있다. 신성시되는 지역으로 들어서기 전에 세우는 문으로 홍살문(紅-門) 또는 홍문(紅門)이라 한다. 말에서 내려 홍전문(紅箭門)으로 들어선 사람은 신분을 막론하고 이곳부터 경의를 표하라는 신성한 구역인 신도로 들어간다는 의미 일 것이다.
▲ 가락루는 2층 구조를 한 누각 형태로 릉에서 만나기 힘든 구조물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가락루가 기다린다. 가락루를 들어서면 왼편으로 숭신각과 신도비각이 자리고 앞으로 숭정각이 있다. 그리고 정면으로 납릉정문이 있으며, 가락루 입구에서 왼편 경모문으로 들어서면 서재와 동재, 숭재가 자리 잡고 협문을 통해 고직사가 있으며, 납릉정문에서 오른편으로 협문으로 들어서면 숭인전과 안향각 그리고 숭안전이 있다.
▲ 수로왕릉 앞 입구 납릉정문으로 썽어가 그려져 있어 쌍어문이라 한다.
설은 이러하다. 기원전 1세기 인도 서북쪽 중앙아시아 쿠샨족이 인도를 침략하자 아요디야(아유타) 지배층 사람들은 전란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그들이 정착한 곳이 중국 사천성 안악현 보주(普州)라는 것이다. 보주에 정착한 그들은 여자아이 허황옥을 출산하였고 그가 15세가 되던 47년 사천성 지역에 소수민족의 반란이 생겼고 그때 허황옥 가문도 가담되어 양자강 연변 무한(武漢)으로 강제 이주 당한 후 16세가 되던 다음해 양자강에서 뱃길로 가야까지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로왕은 낙동강 주변 나라가 없이 촌락을 이루며 살던 시절 42년 3월 구지봉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려 인근 이삼백 명이 구지봉에 모이니 갑자기 “여기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구간(九干)들이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며 다시 물었고 구간은 “구지봉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으니, 너희들은 구지봉의 흑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龜何龜何(구하구하) 首其現也(수기현야) 若不現也(약불현야)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노래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춤추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구간은 이 말에 몇일간 노래하며 춤을 추었는데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와 각각 사람으로 되면서 첫째가 수로(수릉)왕이 되었고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 불렀다고 삼국유사 권2 기이제이 가락국기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평지형 수로왕릉으로 선조 13년(1580) 후손 "허수"에 의해 정비하면서 비석을 세웠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수로왕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자 땅 속에서 물이 솟아올라 작업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이때 ‘신보’라는 신하가 무척산 정상에 연못을 만들면 물길이 끊어질 것이라 하여 무척산에 연못을 만드니 신기하게 물길은 끊어지고 무척산 정상에는 지금도 천지가 있다한다.
▲ 왕릉 앞에 있는 문무인석과 마양호석
납릉을 살펴보면 정면으로 5m 원형봉토분과 그 앞에 능비가 서 있고 좌우 문무인석이 있다. 그리고 아래편으로 마양호석이 일렬로 배치되는 독특한 배치방식을 하고 있으며, 납릉문 위에 쌍어가 그려져 있다. 마양호석을 두고 사람들은 말과 양 그리고 호랑이라는 생각보다 염소와 양 그리고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외외로 많았다. 조각상의 표현이 첫 눈에 확 들어오도록 정교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다 보니 착각하는 것 같아 설명을 해주자 그제야 알았다며 웃는다.
▲ 신도비각
신도비각은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로 고종 22년(1885)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 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인 납릉문 왼편으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
▲ 신도비각 아해 나무 잎사귀 모양이 톡특하게 장식되어 있다.
6가야 탄생이 수로왕 42년부터 562년 제10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낙동강 하류 서쪽을 따라 변한 12국이 연맹하여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등 6개의 가야 연명체를 구성하고 그 중심에 금관가야 수로왕이 주도적으로 우수한 철기로 무장한 기갑부대를 운영하며 외국과 해상을 통한 무역 및 안으로는 철기제조와 논농사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납릉 정문 앞 오른편 숭정각 안에 모셔져 있는 초상화
▲ 숭안전은 1989년 신축되어 2대 도왕을 비롯하여 9대까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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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신전, 숭안전 등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내부 개방을 하지 않는다.
숭선전은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가락국 2대 도왕 원년(199)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 1878년에 숭신전으로 선액 되면서 3컨욿 건립되었다. 1926년과 1954년 두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 숭신전 옆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안향각
안향각은 춘추대제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곳으로 정조 16년(1792)에 2층 3칸 건물로 창건되었으나 1824년에 1칸으로 건립되어 1932년 한번의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 불탑으로 추정되는 탑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고기가 있다. 잉어인지 붕어인지는 식별이 어렵다.
수로왕릉(首露王陵) 쌍어문(雙魚文)
수로왕릉하면 두 마리의 물고기를 이야기 한다. 물고기 표석은 인도 아요디아국 문장으로 알려지면서 허황옥공주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인도 관련 가설로 “인도 아오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보주: 쓰촨성)에 잠시 머물다 동해를 거쳐 김해 가락국으로 이동하였다는 주장이지만 수로왕 사후 납릉을 조성하고 납릉 정문에 쌍어를 그렸다면 당시의 그림이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너무 깨끗한 상태가 아닌가. 쌍어가 있는 납릉 정문은 정조 17년(1793)에 외삼문으로 만든 후 헌종 8년(1842)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기록으로 보면 이전가야시대 그림을 옮겼다는 것과 헌종 8년(1842) 외삼문을 이전하면서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시대 쌍어가 옮겨졌다는 설에는 가야시대 이후 황폐된 납릉 주변에 건물이 없었다는 것과 조선 초기 이후 건물이 생겨났다는 점으로 가야시대 그림을 옮겨왔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조선시대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민화를 비롯하여 물물교환 화폐로 사용된 쌍어별전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사찰에서 물고기 그림이 등장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전남 고창군 선운사 쌍어, 경남 김해시 은해사 쌍어문 그리고 경북 청도군 대비사 대웅전 안을 살펴보면 복숭아꽃 필 무렵 황하강에 살던 잉어가 험난한 물살을 거슬러 용문에 도착하는데 워낙 협곡 물살이 거칠어 올라가기 힘들다 한다. 용문에 오른 잉어는 천신의 도움을 받아 우레와 번개를 쳐 그 꼬리를 불태워 용이 되는데 그 그림이 대비사 대웅전(보물 제834호) 창방 단청에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는 잉어가 용이 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이 있을 만큼 당시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때 수로왕릉에 있는 쌍어는 조선시대 그려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왜 사찰도 아닌 납릉에 쌍어를 그렸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쌍어의 해석은 제각기 다르다. 외국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는 것이고 쌍어가 순수 우리나라 그림이니 외국은 일단 보류하고 사찰에서는 물고기가 부처를 보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범어가 물고기 형상이고 범종을 두드리는 것 역시 물고기이다. 납릉 위에 그려진 것도 납릉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려진 것은 아닐까하는 추정을 해 본다. 쌍어가 탑으로 추정되는 모양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유입된 종교적 의미로 접근이 가능하다.
▲ 경모문으로 바라본 숭재
▲ 박물관에 걸려져 있는 상상 초상화
사찰에서 물고기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불국사 대웅전,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는 용이 큰 물고기를 물고 있으며, 범종을 치는 당목을 고래 형상으로 만들었다. 사찰에 있는 풍경도 물고기이며, 묵어 역시 물고기이다. 납릉에도 물고기 두 마리가 산다. 어떤 이유에서 납릉 현판아래 사는지 그 이유는 역사학자의 몫으로 남겨보면서 김해 수로왕릉을 빠져 나온다.
수로왕릉에는 두개의 문이 있다. 홍살문이 있는 정문과 수릉원 방향에서 진입하는 옆문이다. 수릉원 민속박물관 주차장이 무료로 운영되므로 주차를 민속박물관 앞 주차장에 한 후 수로왕릉을 거쳐 수릉원 그리고 대성동고분박물관을 잇는다. 수릉원은 크게 볼 것이 없는 밋밋한 공간으로 여가 체육시설 정도로 보면 되지만 수릉원을 통해 도로하나 건너면 곧장 대성동고분박물관과 고분군으로 이어지므로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공간이다.
수릉원을 거닐다
대성동고분박물관과 수로왕릉 사이에 있는 도심 속 공원화사업으로 조성한 수릉원으로 “수로왕과 허왕후가 거닐었다고 하지만 이미지화 작업의 하나일 뿐이다. 수릉원을 중심으로 대성동고분군과 박물관, 수로왕릉, 봉황대공원, 회현리패총이 에워싸고 있다.
▲ 수릉원 초입에서 본 허황옥 왕비 동상과 숲길
수릉원은 가야사 허황옥과 김수로의 이야기로 조성된 만큼 동쪽은 곧게 뻗어 자라는 수종을 식재하여 남성을 표현하였고, 서쪽은 유실수를 심어 여성을 표현하였다. 인공으로 조성한 언덕 위에는 인도불교를 상징하는 피나무를 심어 허황옥과 인도설을 뒷받침해 두었다. 공원 내에는 허황옥 동상을 세워 놓았다.
▲ 수로왕비릉 조각상
▲ 한마당을 내려다 보도록 만들어져 있는 2층 관람실 가야루와 연못
▲ 사색의 정원으로 가는 길 | ▲ 샘을 흘러 내려 계류가 흐른다. |
▲ 허황후를 위하여 | ▲ 사색의 정원 |
김해민속박물관
수릉원을 따라 돌다보면 가야루 앞에서 김해민속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여행의 시작점으로 넓은 주차장이 무료개방되어 있어 이곳에서 주차를 하고 인근 지역을 걸어서 여행하면 된다.
▲ 김해 민속박물관 정문
▲ 1층 전시실 모습
김해문화원에 보관 전시하던 민속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2005년 10월 1일 개관한 김해민속박물관은 근현대사로 접어들면서 잊혀져 가는 우리의 옛것을 알리는데 한 몫하고 있는 작은 공간이다. 수릉원 입구에 자리한 지상 2층 규모로 1층은 민속을 히해하기 위한 공간으로, 2층은 민속생활관 재현을 통해 공감대를 통한 소통의 장소로 꾸며져 있다.
수릉원을 빠져 나와 도로를 건너면 작은 언덕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는데 바로 대성동고분으로 향하는 산책로이며, 아래로는 대성동고분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대성동 고분은 직접적인 무덤은 없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사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천년고도 신라에 대릉원이 있다면 김해에는 대성동고분이 있는 것이다.
대성동고분 . 고분박물관
김해시에는 국립김해박물관 그리고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지척에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찬란한 금관가야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은 공간으로 박물관이 위치한 대성동고분에서 1990년부터 발굴조사로 통해 수집된 유물을 전시와 고대 구야국과 금관가야를 엿볼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공간이다.
대성동고분은 1991년 1월 8일 국가사적 제341호로 지정되면서 2001년 정비사업 승인을 처쳐 대성동고분박물관을 착공하여 2003년 7월 30일 준공하였다. 박물관은 주전시관과 야외전시관 기획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가야문화환경정비사업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지상 1층 공간에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1층 전시실 전경. 전시실은 도입과 개관의 장, 고분의 장, 교류의 장, 문화의 장으로 안내되어 있다.
대성동고분
▲ 수릉원에서 1-4호분 발굴지를 시작으로 노출전시관을 돌아 고분전시관으로 여행하면 된다.
▲ 1-4호분 고분으로 향하는 평탄한 언덕길
대성동 고분군 조사를 통해 3세기말부터 순장하는 풍습이 확인되었으며,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해안을 통해 활발한 무역을 엿볼 수 있으며, 낙랑과 왜와 교섭의 증거가 되는 한경(漢鏡)과 파형동기 각종 벽옥제 석제품이 확인되었다.
▲ 야외 노출전시관
박물관 앞으로 노출전시관을 시작으로 23-24호분 발굴지를 거쳐 5-22호분 발굴지와 1-4호분 발굴지를 돌아 올 수 있다. 노출 전시관은 29-39호 목곽묘를 재현하고 있다.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 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 방법과 유물 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주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 도칠토기 등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30호분은 이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러한 무덤간의 중복축조는 대성동고분을 비롯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 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가야기마민족상징 조형물
기마민족 가야는 수로왕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세운 나라로 42년부터 532년까지 해상을 통한 활발한 무역과 철기로 중무장한 기마병력을 거느렸지만 신라에 복속되면서 사라져 버린 잊혀진 소국이다. 수로왕릉과 그 주변에서 확인되는 무덤으로 인하여 다양한 복장문화재가 출토되면서 가야는 새롭게 기록되기를 원하지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제1편 수로왕릉을 떠나 제2편은 지척에 있는 봉황대 주변 유적지로 찾아가 본다. 차량을 가지고 이동하려면 봉황동유적지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면된다.
대성동고분군박물관에서 오른편 도로를 따라 조금만 이동하면 봉황대 주변을 따라 다양한 가야시대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 실제 발굴된 유물로 인하여 이 일대가 가야시대 당시 수로를 끼고 무역을 하였던 장소였을 가능성과 함께 주거지역이 확인되었다.
봉황동유적지 & 조개패총
사적 제2호
가야시대 포구의 모습을 연출해 놓은 체험장으로 가야시대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발굴하여 산길을 따라 진입하면 망루를 지나 우리나라 최초 조개무덤 발굴현장인 봉황리 조개무덤으로 이어진다. 조개무덤을 전시실로 만들고 단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절개하여 개방한 조개무덤으로 당시 김해지역이 바다와 얼마나 인접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고 있다.
▲ 여행순서는 주차장에서 고상가옥 가야의 배를 둘러 본 후 망루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빠져 고상가옥 아래로 이어지는 길 끝자락
회현리조개무덤을 여행 후 다시 고상가옥으로 되돌아 온 후 산 능성을 따라 여의각, 가라대, 황새바위를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김해 봉황동 유적지는 봉황대라고 부르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 생산 유적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일본인에 의해)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패총과 합쳐진 지역을 통칭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 가야민족의 상징 철마기마병 조각상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 봉황동 해상 주거지역
이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시대적 발전과 함께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으로 자리 잡고,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집단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해시는 2002년~2005년 가야문화환경 정비사업 일환으로 옛 모습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 조성한 고상가옥과 주거시설은 가야시대 일반적인 주거로 반지하식 형태지만 봉황동 유적지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들었다.
▲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진 가옥
▲ 가야의 배로 명명된 배가 재현되어 있다.
2012년 4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목제 가야선박 일부 부재가 김해 봉황동 119-9번지 유적지에서 발굴 되었다. 목재는 가야에서 자라는 나무 수종이 아니라 일본 열도와 중국 남쪽에서 자라는 녹나무와 쐐기로 사용된 나무는 일본 열도에서 자생하는 삼나무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조사되면서 당시 일본에서 건조한 선박으로 추정하면서 조심스레 삼나무가 울릉도에 자생하였다는 것과 수입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 망루를 거쳐 주거지역이자 조개무덤으로 향하는 길
▲ 조개무덤으로 향하는 산길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조개껍데기 흔적들
▲ 옛 가야인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는 주거지를 복원 해 놓았다.
▲ 고상가옥 주거지역
여의각 전설을 따라
▲ 출여의낭자 여의각
고상가옥 주거지대 바로 윗쪽길 언덕 위에 여의각과 그 옆 산길에 비석이 있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재위 492~521) 당시 남대정동에 출정승과 북대사동에 사는 황정승이 친하게 지내며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시키기로 약속을 하였다 한다. 세월이 흘러 황정승을 아들을 낳아 “세(洗)”라고 불렀으며, 출전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았지만 그 둘의 우정도 잠시였고 출정승은 딸 여의가 아들이라고 속이며 남자 행상을 하였는데 이를 의심한 황의정승 아들 황세는 봉황대 정상가는 길에 있는 개라암(황세바위)에서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하였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여의가 바위 뒤로 잠시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삼대로 오줌을 누어 남자처럼 소변 줄기를 만들어 위기를 면하였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여장남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어려워 결국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편지에 적어 물에 거슬러 보내면서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둘 사이는 과거 결혼을 약속했던 것을 두 집안이 다시 상기하면서 혼약을 하였다.
▲ 숲 속에 있는 여의 위령비
그러던 어느 날 황세는 신라군과 싸워 큰 공을 세우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겸지왕이 하늘장수라는 칭호와 함께 외동딸 유민(流民)공주의 부마가 된 것이었다. 결국 여의는 파혼당하고 혼자 살다 24살이 되던 해 기다리다 죽게 되었고, 부마가 된 황세 역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다 그 해 마음의 병으로 죽게 되자 성안 사람들이 두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놀던 개라암(황세바위)애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을 황세들, 동남쪽을 여의돌이라 불렀다. 유민공주도 임호산에서 수도 정진하니 임호산을 유민산으로 불렀다 전하고 있다. 이 들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음력 5월 5일이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라대
▲ 가라대 정상에 바위들이 모여 있어 앉아 쉬기 좋다.
금관가야의 생활유적지로 추정되는 봉황동 일원에는 조개더미와 함께 다양한 고분, 유물 등이 확인되고 있다. 고상가옥 거주 지역 윗길에 출여의낭자(出如意娘子)를 기리는 작은 여의각(如意閣)이 1975년 새로 정비되었으며, 그 윗편 정상 바위에는 누군가 올라 한글과 한문으로 “가라대”를 새겨 놓았다. 과거 이곳을 가라대, 독현, 망해대, 여의현, 회현 등으로 불러지다 조선 고종 초(1870 이전) 부사 정현석이 “봉황대(鳳凰臺)”라 부른 후 1983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7호로 지정된 후 2001년 해제 및 사적 제2호인 김해 회현리 패총과 통합되어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부른다.
▲ 언제 누가 새긴것인지 모르겠지만 한문과 한글로 가라대라고 새겨 놓았다.
가라대를 한 참 내려본다. 가야대도 아니고 가락대도 아닌 가라대이다. 즉 가라산 대라는 의미로 본다면 이 일대가 ‘가라’라는 것이다. 우연한 귀동냥으로 허황옥 공주가 왔다는 인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로 ‘물고기’를 ‘가야’ 또는 ‘가라’라 발음한다는 것이다. 그럼 정말 인도에서 이곳에 와서 토착세력과 함께 가야를 만들었을까?
▲ 가라대 정상에 굵은 수종의 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며 쉬어가라 한다.
▲ 가라대에서 황새바위로 내려서는 계단길
▲ 개리암(황세바위) 남자인지 확인하려고 오줌멀리누기를 했다는 바위
▲ 봉황대에서 마주한 김해 분산성 전경으로 오른쪽 봉우리 하얀 테두리가 분산성이며, 왼편 정상이 김해천문대이다.
회현리 패총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지 마지막 길목에 있는 회현리 패총은 흔히 봉황동 조개무덤이라 부른다. 여의각에서 조금만 길을 따라 내려서면 봉황동 유적지 끝자락에 조개 형상의 지붕을 두고 그 안으로 들어가 관람을 하도록 자동문을 설치해 놓았다.
▲ 회현리 패총
사적 제2호 회현리 패총을 두고 가락국 최대 생활 유적지라고 한다. 1907년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처음 발굴 된 후 1920년 발굴조사 후 1963년 국가사적 제2호로 지정 및 2001년 봉황동유적지로 지정, 2006년 완성된 패총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조개껍데기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실물 패총을 전시하고 있다. 조개무덤으로 알려진 패총은 가야시대 A. D 1~5세기 형성된 깊이 8m 조개더미로 세계 최대 깊이로 열려져 있으며, 패각류를 비롯하여 토기파편, 탄화미 등 확인되었다.
▲ 금방 누군가 석화구이를 해먹고 껍질을 버려 놓은 듯 하다.
▲ 조개무덤이 상부층으로 갈수록 점점 줄여든 모습
김해 회현리에서 발견된 조개더미로 김해패총이라 부른다. 1907년 이마니시(今西龍)가 이끄는 팀에 의해 발굴 그 후 1920년과 1943년~35년 일본 학자가 매장지를 조사하였고 조개더미 속에서 붉은 토기류를 비롯하여 회색 토기와 신라 토기의 파편과 철부, 철도자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어 오래전 이 일대가 조개를 버렸던 오늘날의 쓰레기장 이였음을 짐작케 하였다.
김해 수로왕릉을 시작으로 수릉원 그리고 봉황동유적지를 통해 가야사의 단편적인 부분을 만나면서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왜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은 먼 거리에 있는지, 왜 수로왕에 물고기 형상의 쌍어가 있는지하는 것이다. 뜬금없는 생각으로 보면 오히려 인도에서 수로가 나타나고 김해에서 허황옥이 맞이하였다면 어떨까? 어찌되었던 수로왕의 이야기는 신라에 흡수된 가락국의 위상과 후손의 지위를 스스로 높이기 위해 불교와 함께 스토리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여진다. 수로왕릉을 떠나 이제는 수로왕비릉의 흔적을 따라 가야의 길을 따라 이동해 본다.
수로왕릉 – 수릉원 – 대성동고분(대성동고분박물관) - 봉황대공원 – 회현리패총(봉황동패총) - 국립김해박물관 – 구지봉 – 수로왕비릉 – 김해읍성 북문(공진문) - 사충단 – 가야역사테마파크 – 혜은사 – 분산성 – 봉화대 순으로 여행
계속 이어집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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