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암 석불사"
사월이 되면 새벽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르는 절집이 있다. 절집을 찾는다 하여 부처 앞에 절 한번 해본 적이 없다보니 절간이 가끔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스님과 마주치면 합장하고 인사를 나누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어차피 일면식 없는 사람이니 찬바람 나도록 쌩- 지나쳐야 할지 갈등을 하곤 했다. 절간은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외지인이고 절간을 지키는 강아지도 일단 자기 집이고 보면 남의 공간 그것도 신성시하는 구역을 침범하는 입장에서 조심스러운 것은 당연 한 것이다.
사월에 찾는 절집은 참으로 조용하다. 헛기침이라 하려들면 금방 꽃비가 내려 서둘러 연초록 꽃이 피어나 버릴까 더 조심스러운데 바로 일본 사쿠라(さくら) 때문이다. 연분홍색 겹벚꽃이 짧은 공간을 화려하게 수놓고 그곳에 새벽안개가 찾아오면 잠시 환상의 길로 바뀌는 곳인데 그 길 끝자락에 부산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독특한 절집이 하나 있으니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말사인 금정산 평풍암(屛風岩) 또는 석불사(石佛寺)로 불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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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불사 입구 전경
◀ 지난 봄날 허드러지게 핀 겹벚꽃
벚꽃길이 열리기 전 석불사를 찾아본다. 금정산 등산하는 사람들이 가끔 오다가다 들러 가던 조용하던 절간이 싸이 말춤 열풍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일이 생겼다. 인터넷에 싸이 말춤을 닮은 금강역사 사진 한 장 알려지면서 부산사람들 마저 “그곳이 어디야?” 할 만큼 궁금해 하던 곳이 바로 석불사이다. 석불사는 단순 그것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사찰이 하나의 돌집으로 만든 독특한 사찰이자 거대한 석불을 새겨놓은 독특한 사찰이다. |
미남교차로에서 구 만덕터널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구 만덕터널 입구 150m 못 미쳐 오른편으로 만덕고개길이 이어진다. 산길을 따라 3.2km 오르면 성불암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주차를 하고 다시 산길을 약 850m 오르거나 차량으로 800m 까지 오르면 소형주차장이 나온다. 금정산 대륙봉과 상개봉 사이 돌출된 능선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기암괴석이 수직 절벽을 이루는데 이를 병풍처럼 바위가 펼쳐져 있다하여 평풍암이라 부르며, 절을 석불사라 부른다.
▲ 옛 출입문이 종각 아래에 성문처럼 서 있다. 첫 문을 들어선 후 종루아래를 거쳐 또 지하로 통하는 문을 거처야 한다.
▲ 문이 앞쪽으로 열리지 않도록 하는 잠금장치 조각 |
▲ 옛 첫번째 출입문
대다수의 절집은 잠금잠치를 한 대문이 없다. 그런데 석불사 옛 출입구는 고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처럼 돌을 쌓고 11개의 돌을 따로 다듬어 아치형을 만들어 놓았다. 회색 철대문 아래 첫 계단에는 원숭이로 추정되는 얼굴을 돌출조각 해 놓았다. 아치성문에는 석불사(石佛寺)와 평풍암(屛風岩)을 새겨 놓았다. 글 순서로 보면 평풍암 석불사로 절 뒤편 바위가 병풍을 펼쳐 놓은 듯 하여 병풍암이라 부르며, 그곳에 돌로 만든 절집이 바로 석불사라는 것이다. |
문을 열 수 없어 더 이상의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이 길은 대웅전까지 이어진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종루 아래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또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짧은 터널로 이어진다, 그리고 계단으로 오르면 그곳이 대웅전 옆 계단이다. 석불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금강문. 인왕문) 극락문(해탈문. 불이문)이 없다. 출입문을 닫으면 절집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차단되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절 문 옆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사찰은 총문, 산문, 금당으로 불리는 문이 절집 앞에 있는데 우리나라처럼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출입문 역할로 바로 석불사 역시 출입문 기능이 전부로 보여진다.
▲ 삼층석탑과 2층 건물. 1층은 대웅전으로 사용하며, 2층은 천불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인 1926년 석불사를 조성할 무렵 동래는 온천장까지 전차가 다녔다. 석불사로 오르는 길목은 동래기생집을 찾던 사람들이 모여들던 그 시절 조용선 (일부는 조일현 스님이라 한다) 스님이 유명한 조각공을 불러 모아 은밀한 절집 불사를 시작했다. 불사 당시 조각공으로 신상균, 권장학, 원덕문이 참여하여 작품을 남겼으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 온 일본에서 조각기술을 배운 석조각 장인 김석담, 박판암이 참여하였다. 조각은 1940년부터 1960년까지 개조 및 새로운 불상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존불(신상균/ 1950), 11면 관음보살(1940년 신상균 작품을 1959년 권정학 개조), 동방지국천왕(1960) 등 시대를 계속 이어간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 삼층석탑 금강역사 표정이 익살스럽다.
절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에 종무소로 보이는 건물과 보광전이 있다. 흔히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시기 때문에 약사전이라 한다. 보광전과 대웅전 중간에 삼층석탑을 세워두었는데 금강역사 모습이 독특하다. 절집 입구에서 만나야 하는 금강역사가 탑에 그려져 있는데 이곳 금강역사는 악귀를 발로 짖누른 모습을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 싸이 말춤 원조라며 주장하는 조각
탑에 금강역사가 새겨지는 것은 신라시대 탑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악귀를 밟고 있는 것은 천황문 목각 사천왕상에서나 보던 것이다. 또한 이 탑이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싸이 말춤의 원조라는 웃지못할 주장이 나와 한때 이를 보려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던 곳이다.
▲ 대웅전 맞은편 허공에 조성한 범종루에 오래되어 승천하지 못한 묵어가 속을 내 놓고 있다.
▲ 측면에서 본 범종루 모습 . 범종루 아래 양쪽으로 두개의 문이 있다.
▲ 석불사 중심법당인 대웅전과 천불전
▲ 대웅전은 모든 것이 석재와 쇠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불사 중심법당 대웅전 앞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우선 대웅전이 있는 건물은 2층 구조를 하고 있다. 전부 화강암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다듬어 절집을 표현하고 있다.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문은 나무문과 그 위에 다시 철문을 닫는 이중문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유행하던 철구조로 만든 문을 바라보니 너무 돌로 만든 절집도 차가운데 철문까지 너무 차갑다. 1층은 대웅전으로, 2층은 천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대웅전 위에 천불전이라는 것은 한국불교 정서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
▲ 대웅전 앞 아치형 난간이 되어 있는 저곳으로 바깥에서 출입을 하였던 지하 통로였다.
▲ 지금은 지하통도가 잠겨져 있다. 마침 고양이가 문 밑으로 슬금 슬금..나도 놀랬다~
▲ 대웅전 앞 해태상의 모습이 낯설다.
▲ 대웅전 위 2층 공간인 천불전에 모셔져 있는 천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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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전 문에 있는 철재 장식 | ▲ 지금도 오래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사자 손잡이 |
▲ 칠성각이 독립되어 있다.
칠성각이 독립구조로 있다. 대웅전과 칠성각 사이에 길을 열고 뒤편 석불로 가는 길을 터어 놓았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으로 상징되는 칠원성군을 모시는 곳이다. 도교의 영향이 강한 칠성각은 소원, 장수, 재물을 관장하는 곳으로 보통 산신각과 같이 있는 반면 대웅전 옆 독립건물로 있다는 것이 이 사찰을 만든 창건주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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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을 벗어나 뒤편 석불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 넓은 공간을 따라 위 아래 할 것없이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부처가 다 모셔져 있다. 중앙에 관세음보살입상이 좌우 석벽을 깎아 사천왕상을 조각해 두고, 돌계단 길 위에 나한상과 독성 산신각을 두었다. 그 옆 바위틈으로 겨우 사람 한사람 들어서는데 비집고 들어서면 암벽 사이로 용왕당을 조성해 놓고 있다.
▲ 암벽을 잘 활용하여 석불을 조각했다.
이야기로는 석조건물이 된 이유로 조각을 하고 남은 석재를 다듬어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이지만 창건시기와 조각의 시기가 다소 간격이 있는 것과 일부 석재가 외부에서 가공된 돌로 추정해 보면 처음부터 돌로 절을 만들려고 한 것으로 보여진다. |
미륵존불(신상균/사망 1950년 제작) 은 오른손을 결가부좌 한 상태에서 바위 위 왼손을 높이 들어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11면 관음보살은 1940년 신상균이 조각한 것을 1959년 구포에 살던 권정학이 11개월에 걸쳐 직접 새롭게 조명하였다, 팔 한쪽이 동편 암벽 아래 걸쳐져 있고 가장 늦게 제작된 동방지국천왕(1960)은 보석을 들고, 남방천왕은 노한 것 같은 눈을 새겼지만 어찌된 일인지 웃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계단위쪽으로 쭉 이어지는 모습은 악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선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모습
조각된 불상은 좌우로 사천왕이 있고 해태상이 모셔진 벽면은 남방천왕, 서방천왕, 비로자나불이 계시고 반대편으로 동방천왕, 북방천왕, 약사여래불이, 선명한 선과 윤곽을 들어내고 정면에는 11면 관세음보살이, 관세음 보살상 위에 미륵존불이 벽면에 고정되어져 있다. 비로나자불 위편 벽면에는 월직사자와 8나한, 보현보살이 새겨져 있는가 하면 계단을 하나 더 올라가면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위로 문수보살, 8나한상 일직사자가 독성각 앞까지 조각되어져 있다.
▲ 산신각 아래 새겨놓은 나한불
창건 후 1950년 11면의 관음보살을 개조하여 완성하며 총29채의 불상이 양쪽벽면을 따라 모셔져 있다. 그중 신상균에 의해 미륵존불, 16나한, 석가여래가 만들어 졌고 권장학은 11면 관음보살, 북방천왕을 제작하였으며, 원덕문은 서방, 남방천왕, 비로자나불을 완성했다.
▲ 오른쪽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사천왕상
▲ 왼쪽에 서 있는 사천왕상은 햇볕을 등지고 있어 음지이다.
▲ 바위 틈 굴이 형성되면서 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있다.
▲ 관세음보살상 위 독입적인 돌에 좌상을 새겨 놓았다.
▲ 관세음보살상
▲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칠성각 좌우로 사천왕상이 있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전경
▲ 산신각 옆으로 사람 한명 겨우 지나가는 통로. 임산부는 갈 수 없다.
▲ 좁은 바위틈을 헤집고 들어서면 부처와 탁 틔인 전망대를 만나는데 전망대가 위험하여 막아 놓았다.
▲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들 사이로 공간이 생기고 공간마다 부처가 있다.
우리나라에 많은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아져 있다. 그 중에서도 사찰로는 군산에 있는 동국사로 일본 전통식 건축수법을 답습하고 있지만 석불사는 국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석재로 만들었는가 하면. 문살마저 철재로 만들고 문살에 조각도 철재로 만들어 다소 이질감이 있다. 부산 여행가이드에서도 이곳은 안내하지 않는다.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부산 사람도 모르는 사찰이 바로 이곳으로 일제강점기 창건된 사찰이라 하여 관심밖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풍사에 관한 사찰 정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나 역시 10여 년 전 우연하게 들른 후 병풍사를 알게 되었고 자료를 얻게 되었지만 창건의 역사는 알 수 없었다.
▲ 대웅전 처마 밑 앉아 있는 불상
병풍사 인근에는 최근 불사한 많은 사찰이 있고, 많은 신도가 길을 막아 둘 만큼 찾지만 병풍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찰을 조성 할 정도면 상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은 틀림없다. 또한 일본에서 조각기술을 배운 조각공이 만든 불상이란 이유로 외면당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식 사찰로 꾸며진 것도 아니고 보면 근대사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좋을 작품들임은 틀림없다.
▲ 내려서면서 만나는 임도
절집을 내려선다. 곧 봄날이 되면, 이곳은 겹벚꽃이 피어나 새로운 세상을 잠시 그려 놓을 것이고 그때 다시 찾아와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가볍게 찾아든 여유로움을 봄바람에 띄워 보내는, 즐기며 산행길을 따라 금정산 남문까지 가 볼 생각을 하면서 여행을 마무리 한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 서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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