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12경 부용대
음력 7월 중순경 하회마을 양반들이 낙동강에 나룻배를 띄워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시를 짓고 뱃놀이를 했던 높이 64m 부용대로 향한다. 짧은 그 길을 따라가며 욕연정사를 시작으로 화천서원, 부용대, 겸안정사로 향한다. 류씨 형재의 흔적을 따라서...,
▲ 부영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 전경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 앞 낙동강변(화천) 건너 절벽 위 부용대로 오르는 길목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된 유성룡이 낙향 후 만든 옥연정사, 화천서원을 지나 정상 부용대에 서면 눈 아래 하회마을 초가집과 기와집의 절묘한 조화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하면 류운룡이 후학 양성을 위해 만든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하회(河回)'는 물돌이를 두고 하는 말로 조선시대 지리서인 택리지에는 최고의 명당 터로 주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땅으로 비유하고 있다.
▲ 반대편 부용대 선착장에서 바라본 전경. 류성룡은 배를 젓어 건너온 후 손님이 찾아오면 다시 배를 저어 맞이했다.
나룻배로 화천을 건넌다. 하회마을 담장을 부지런하게 끼웃 꺼리며 여행을 하였다면 화천을 건너는 순간부터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한눈에 마을 전경을 담을 수 있는 부용대로 오르는 길은 양반걸음으로 느릿느릿 오르기 좋은 적당한 언덕을 따라 이동한다. 건너편 부용대로 가기위해 나룻배를 탄다. 요금 왕복 3,000원을 승선권을 배를 타고 구입 후 곧장 떠난다. 반대편 내려오는 사람이 많으면 탑승에 관계없이 낙동강을 건너는데 강폭이 최대 300m, 최고 수심이 5m 이지만 물이 줄어 건너야 할 폭이 좁아 나룻배는 앞 뒤 없이 곧장 후진으로 건너편에 눈 깜짝 할 사이 도착한다.
▲ 옥연정사 앞 모래해변에 낙조가 스며들고 있다.
나룻배로 화천을 건넌다. 하회마을 담장을 부지런하게 끼웃 꺼리며 여행을 하였다면 화천을 건너는 순간부터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한눈에 마을 전경을 담을 수 있는 부용대로 오르는 길은 양반걸음으로 느릿느릿 오르기 좋은 적당한 언덕을 따라 이동한다. 건너편 부용대로 가기위해 나룻배를 탄다. 요금 왕복 3,000원을 승선권을 배를 타고 구입 후 곧장 떠난다. 반대편 내려오는 사람이 많으면 탑승에 관계없이 낙동강을 건너는데 강폭이 최대 300m, 최고 수심이 5m 이지만 물이 줄어 건너야 할 폭이 좁아 나룻배는 앞 뒤 없이 곧장 후진으로 건너편에 눈 깜짝 할 사이 도착한다. 옛 옥연정사로 숨어들었던 류성룡을 찾아온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큰 소리로 부르다 발길을 되돌려야 했던 강나루가 아닌가. 현실로부터 숨어들기 좋은 부용대 아래 야트막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모래 길을 걷는다.
옥연정사에서
玉淵精舍
나룻배에 내려서니 낙동강변을 따라 굵은 모래가 벌판을 이룬다. 첫 길목에서 만나는 옥연정사는 겨울 메마른 가지에 보일 듯 말 듯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임진왜란사를 통해 회고록 장비록을 집필했던 그 곳이 아닌가.
▲ 간죽문을 열고 바라본 전경
류성룡은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한 후, 선조 9년(1576) 원지정사를 짓고 부용대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지내던 중 마을과 인접하여 혼자만의 공간으로 부족해 하던 어느 날 부용대 주변에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게 된다. 앞은 호수의 풍광을, 뒤는 높은 언덕이 위치하고, 오른쪽에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편으로 흰모래가 띠를 두른 곳. 바로 오늘날 옥연정사이다.
▲ 옥련정사 간죽문을 열고 들어서야 한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제88호이며, 국보 제 132호 징비록의 산실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형편이 어려워 정자를 짓지 못하자 탄홍스님의 도움으로 선조 9년(1576) 짓기 시작하여 선조 19년(1586) 즉, 임진왜란 일어나기 4년 전 류성룡 선생의 나이 45세에 완공되었다.
▲ 산승 탄흥이 머물던 완적재가 있는 건물
태백산맥 끝자락 화산(64m) 기암절벽 아래 적당한 공간은 강 건너 마을이 있지만 부용대 절벽이 만든 깊은 소(沼)로 인하여 왕래가 쉽지 않아 번잡했던 원지정사를 떠나 작은 공간하나 만들어 노후 조용하게 쉬려 하였으나 청빈한 삶에 비용이 만만찮아 고민하던 류성룡(1542∼1607)에 손 내밀고 도와준 사람이 산승 탄흥이다. 탄흥의 도움으로 정자를 짓기 시작하는데 선조 9년(1576)~선조 19년(1586)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 사랑채로 세심재라 부른다.
집은 당2칸을 황희지의 글귀를 인용하여 감록헌으로, 두칸의 방을 세심재라 하였다. 북쪽 집은 3칸으로 산승 탄흥이 머물던 곳으로 완적재라 하였으며, 동향 집 2칸은 친구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원락재라 칭하며, 옥과 같이 물빛이 깨끗하다 하여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하였다.
▲ 측면으로 본 사랑채
서쪽으로 난 간죽문을 열고 들어서면 곧장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음을 닦고 씻는 곳이란 의미로 세심재(洗心齋)라 부르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 우 방 1칸씩을 두었으며, 서당으로도 사용하였다. 사랑채 옆으로 별당채가 있다. 별당채는 원락재(遠樂齋)라 하는데 친구의 방문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며, 징비록을 서술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안채는 탄홍스님이 기거하며 공부하였다 전하며, 안방과 부엌 그리고 작은 두칸의 방이 딸려 있다.
간죽문을 바라보며 짓은 시로는 “ 노옹파오수 (老翁罷午睡) 부수행곡정 (負手行曲庭) 행처의이란 (行處意易蘭) 출문간수죽 (出門看修竹) 적여강풍회 (適與江風會) 청음산빙옥 (淸音散氷玉) 시유고문인 (時有叩門人) 망형수주객 (忘形誰主客) 즉, 노옹이 낮잠에서 막 깨어나, 뒷짐 지고 뜨락을 거닐도다, 거닐다가 기분이 더욱 상쾌해 지면, 문을 나서 대 숲을 바라보네, 강 바람 이라도 불어 나부끼면, 옥이 부숴지는 해맑은 소리, 더러 날 찾는 이 있는데, 누가 주인이고 나그넨지 몰라라.” 하였다.
▲ 위에서 바라본 옥연정사
선조 38년(1605) 낙동강이 범람하면서 하회마을에 있던 살림집이 사라지자 류성룡은 옥연정사로 들어와 징비록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서쪽 벼랑 아래 터 잡은 옥연정사를 통해 류성룡의 호는 서쪽 벼랑을 뜻하는 서애(西厓)이다.
간죽문 반대방향으로 길을 나서면 곧장 화천서원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 문신 출신인 겸암 류운룡(1539~1601) 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인재 양성을 위해 정조 10년(1786) 완공 후 그해 9월 류운룡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지만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966년 후손에 의해 다시 조성한 서원이다.
화천서원
▲ 화천서원 전경
류운룡은 자는 응견, 호는 겸암, 본관은 풍산이며. 류성룡의 형이다. 안동 풍산 하회리에서 태어나 지방관을 거쳐 1593년 풍기군수로 재임, 1601년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은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에 오르면서 형인 류운룡을 해직시켜 어머니를 보호하도록 선조에게 건의하니 선조가 형제의 효성에 탄복하여 허락하니 류운룡은 가족을 태백산 끝자락 오늘날 봉화군 춘양면으로 피난하여 화를 피했다, 그 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신임을 얻자 원주목사로 임명되지만 노모의 건강을 위해 사퇴하고 춘양면으로 돌아왔으며, 63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 화천서원 담장을 따라 옥연정사로 향하는 가족 여행객
▲ 부용정 오르는 언덕길에서 바라본 화천서원
화천서원 옆을 거쳐 부용대로 오르는 길에 ‘여기서부터 450보’란 문구가 보인다. 정말 450보일까 싶어 헤아려 보니 450보에 조금 못 미쳤다. 양반걸음걸이로 뒷짐 지고 오르는 450보의 여유가 현대인은 시간에 쫓겨 400보 조금 넘기면 도착하는 거리다.
▲ 양반 걸음으로 450 보의 여유로운 부용대 가는 유교문화길
하회마을 앞 만송정은 낙동강변 퇴적층이 만든 옥토에 강 건너 부용대 기를 다스리기 위해 조선 선조 당시 류성룡의 형인 문경공 류운용이 1만여 소나무를 인공으로 조림한 숲으로 1906년 100여 그루의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음력 7월 6일이면 만송정과 부용대를 줄로 잇고 불꽃을 낙하하는 선유줄불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몇 해 전 만하여도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를 가는 길은 층길로 불리는 절벽 중간 가파른 길로 지금은 출입을 제한하고 화천서원 옆을 따라 정상으로 유도하는 널찍한 산길이 열려져 있다.
▲ 부용대에 올라선 여행객이 눈 아래로 펼쳐지는 하회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부용대에 오르니 하회마을이 한 눈에 조망된다.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부용은 연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꽃을 내려다보는 곳이란 의미지만 아무리 봐도 왜 연꽃형상인지 느낌이 오지 않는다.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라…….
▲ 내려다 보니. 앗 키스타임
부용대는 태백산맥 끝부분으로 해발 64m의 절벽이다. 부용대 내력으로 중국고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하며 맨 처음 북쪽에 위치한 언덕이라하여 북애로 불렸다 한다.
▲ 부용대애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 전경 속 고택들
▲ 초가집과 기와집이 섞여 있는 모습
▲ 내려다 본 만송정 전경
▲ 낙동강 나룻배 전경
▲ 겸암정사로 내려서는 길
부용대에서 서쪽 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솔 숲 샛길 산길을 잠시 내려서니 겸암정사가 나온다. 류운룡이 1567년 도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곳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입구가 좁다. 그곳에 계시는 분이 웃음으로 맞이하며 농이라며 한마디 하신다. “이곳은 잘났다고 목에 힘주면 다치는 곳”이라며 낮은 문을 가리킨다. 퇴계 이황이 직접 쓴 현판과 마당에서 열고 누마루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져 있었다.
겸암정사
▲ 겸암정사 앞 장작더미가 손님을 맞는다.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풍산류씨 겸암 류운룡의 정자이다.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한 곳으로 부용대 서쪽 낮은 언덕 위 자리한 2층 누각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에 대청을 두고 양 옆으로 방을 두었는데 한쪽은 창문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개방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 겸암정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본 전경
부용대 서쪽 아래에 있는 겸암정사는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곳이다.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겸암정'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쓴 글씨다. 누마루에 올라서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아래로는 절벽을 따라 낙동강물이 휘감는 곳에 올라선 겸암정사 내부는 지형적 조건 때문인지 좁은 느낌이 들지만 아직도 사용가능한 디딜방아가 있었다.
▲ 겸암정사 아래 물속에 넘어져 있는 나무
▲ 겸암정사 대문이 무척 낮다.
▲ 겸암정사 누마루
▲ 누마루 정면으로 만송정이 바라 보인다.
▲ 겸암정자 내 초가집 아래는 아직도 사용가능한 디딜방아가 있다.
나오는 길목 겸암정사 난간에 붙어 있는 ‘올라가지 마시오’를 가리키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제발 신발신고 난간을 넘어 정자에 올라가지 말 것을 당부한다. 적어도 이곳 부용대를 찾고 겸암정사를 찾은 이들이라면 적어도 양심이 곧지 않은 일은 삼가 달라며,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닌 전통방식이라며 자신들도 불편하지만 찾는 이들은 이 점을 이해하길 바란다면서 하루 빨리 전통가옥 주변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나 나면 좋겠다고 하신다.
안동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동소주는 백미를 하룻밤 맑은 물에 재운 후 다음날 쪄 낸다. 쪄낸 고두밥을 식혀 누룩과 함께 섞어 물과 함께 항아리에 넣고 13일을 숙성시킨 후 증류하여 안동소주를 만든다. 안동소주가 특별난 첨가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술임에도 불구하고 속앓이나 소화불량 및 식욕부진에 한방약 다음으로 쳐 준다.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 장수가 머물면서 만든 술이 안동소주의 시초로 술을 만들 게 된 계기가 참으로 유별나다.
또한 7월 보름에 부용대 일원은 불야성을 이룬다. 뽕 숯에 소금을 넣고 창호지 봉투에다 담은 후 매듭으로 묶은 후 부용대에서 강을 가로질러 만송정까지 잇는다. 흔히들 촌에서 깡통에 숯불을 만들고 구멍을 낸 후 돌리면서 원을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숯봉지에는 마지막으로 쑥을 불을 붙이면 강을 건너오면서 터지기 시작한다. 행사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달걀껍질을 이용하여 불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달걀껍질 일부를 자른 후 안에다가 피자마 기름을 채운 후 솜심지를 만들고 불을 붙여 짚으로 묶은 볏짚 또아리 위에 올려놓고 강위에 띄운다. 줄불놀이의 기원은 명료치 않지만 어쩌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당시 중국을 방문한 지역민이 중국의 폭죽놀이를 하회마을에 맞도록 불꽃으로 대신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쥐불놀이는 정월에 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액운을 쫒는 역할이 주종을 이루지만 왜 하필이면 7월 달 밝은 보름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축제는 9월말~10월초에 열린다.
풍천면사무소에서 914번 지방도 따라 강덕교를 건너 광덕사거리에서 600m 지점 광덕삼거리를 지나 100m 지점 갈림길로 접어들면 하회겸암정사를 거쳐 부용대로 오르거나 광덕삼거리에서 왼편 광덕솔밭길을 따라 화천서원을 거쳐 부용대로 오를 수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려면 안동하회마을에서 풍천면사무소에 도착 후 914번 지방도를 따라 이동하면 되는데 총 6.5km 로 약 20분 소요된다.
조선중기 문신 출신 류성룡(1542~1607)은 경북 의성군 사촌마을에서 출생, 선조 30년(1597) 그의 나이 56세가 되던 해 5차례 사직을 하려 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다음해인 선조 30년(1597) 11월 19일 파직되고 12월 5일 북인들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자 58세가 되던 선조 32년(1599) 2월 16일 하회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사에서 이순신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류성룡은 권율장군을 의주목사로, 이순신 장군을 전라도좌수사로 천거한 인물이다. 1600년 복관되었지만 벼슬길을 거부하고 은거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제1편 안동하회마을 및 제2편 하회마을 부용대 편을 마칩니다.
http://blog.daum.net/okgolf/5465196 <- 1편 하회마을 클릭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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