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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 주왕산을 찾아서 제1편 폭포로 가는 길

허영꺼멍 2014. 5. 15. 10:36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주왕산을 걷다

 

푸른솔의 고장 청송을 대표하는 주왕산과 김기덕 감독 영화 촬영지로 부상된 주산지를 손꼽을 수 있는 곳. 국가명승 제11호 주왕산 국립공원은 태고적 신비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수려한 경관과 청정한 공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티 없이 맑은 물이 합류하여 폭포를 이루고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힘들지 않게 조성된 폭포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계곡에 잠시 머물러 발을 담그는가 하면 골바람에 쉬어가는 천혜적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 주왕산 입구 주차장 옆 계곡에서 바라 본 주왕산 전경. 먼산 봉우리에 기암단애가 시선을 끈다.

 

 

오늘의 코스는

대진사=망월대-학소대-1폭포(용추)-3폭포(용연)-2폭포(절구)-주왕암-주왕굴 순으로 결정

 

청송 주왕산은 독특한 지형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암석지질작용으로 인하여 7개 큰 봉우리로 만들어진 기암단애와 급수대 주상절리를 통과하면 골마다 하나씩 감춰 놓은 듯 노루용추폭포,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 달기폭포와 연화굴, 무장굴, 주왕굴이 있다.

 

 

 

▲ 주왕산 매표소가 있는 대진사

 

여행 첫 출발점에 자리한 대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2(672) 의상이 창건 또는 고려 태조 2(919)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군도를 위해 창건했다는 창건설이 전해진다 

 

주왕산은 중국 당나라 주도라는 사람이 군사를 모아 후주천왕으로 자칭하며 당나라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주왕과 아들 대전도군이 신라로 들어와 주왕산에 숨자 당나라는 주왕을 죽여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였고 신라는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을 비롯하여 잔당을 모두 죽였다 한다. 그 후 주왕이 숨었다 하여 주왕산으로 아들의 이름을 붙여 나옹화상은 대전사라 불렀다 전한다. 주왕산과 관련하여 또 다른 설로 신라의 주원왕이 수도를 한 산이라 주왕산으로 부른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는 거듭되는 화재로 인하여 사찰의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사찰터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과 규모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찰로 지금은 보광전과 명부전이 남아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던 곳으로 알려진 호국사찰이였다.

 

 ▲ 주왕산 초입에 자리한 대진사 나무그늘 터

주왕산에 관한 다른 기록으로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 진성여왕 6(892) 낭공대사가 창건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4(열선당, 탐진당, 수월당, 한산전) 4(보광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 3루각(용화루, 범종각, 응향각) 및 금강탑이라 부르는 쌍탑이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사찰 발굴과정에서 1968년 절터 옆에 있는 밭에서 높이 5.5cm - 15.2cm 소형금동여래입상 7점을 발굴하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높이가 6.3cm, 아래 너비가 9.6cm 금동이불병좌상도 함께 발굴되어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전사는 이여송 장군의 친필 목판(가로 42.5cm, 세로 24.5cm)이 있는데 원판은 분실되어 복사판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이 승병을 훈련시키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낸 편지글로 내용은 의승도대장 사명대사에게 나라의 일이 위급하니 세상의 명예와 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불도와 선도만 배우지 말고 서둘러 의승병을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오기 바라는 글이다.

 

贈義僧將松雲大禪伯 行拂下/ 無意圖功利/ 傳心學道仙/ 今聞王事急/ 摠攝下山顚/ 天朝將 太子少傳 李如松 謹稿

 

 

주왕사 창건은 주왕사적을 통해 보면 신라 헌덕왕 당시 김헌창의 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종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당시 822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장안국으로,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으나 반란은 실패하고 주방산(주왕산)으로 피신하여 옥정(주왕굴)에 숨어 있다 신라 장군 마일성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자 그 후 아들 김법문이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전사를 짓고 다시 고달산적 수신 등과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 대전사 화단

 

대전사 우물을 메운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우물을 막아버린 사연은 조선시대 매일 냇물을 길어다 부처님 청수를 공양하였지만 거리가 멀어 스님들은 절에 우물을 파기로 하고 앞뜰에 우물을 만들어 청수로 사용하니 대전사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자 성지도사가 찾아와 지세를 살펴본 후 대전사 터는 배가 바다로 떠서 항해하는 혈자리로 우물을 판 곳이 배바닥에 해당되어 화재가 일어났다고 한 후 우물을 막아 버렸다 한다. 그 외 대전사 보광전 앞 석탑은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모아 다시 조립하면서 사라진 부분은 새로운 석재로 보강하여 조성하였다. 확인된 석재를 통해 하층 탑신 각 면에 사천왕상을 새겨놓고 상층 탑신에는 보살상을 새겼지만 정확하게 원형이 몇 층인지 알 수 없고 단지 쌍탑이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대전사보광전(보물 제1570)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조선 현종 13(1672) 보수된 보광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다포계양식의 건축물로 본존불은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건물 공포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전사보광전석가여래삼존불(경북시도유형문화재 제366)는 조선후기 불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대전사보광전석가여래삼존불은 현종 13(1672) 조성된 것으로 본존불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협신불은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을 모시고 있다.

 

▲ 주왕산 최고 봉우리 기암단애

 

▲ 계곡 건너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 본 전경

 

▲ 대진사 왼편으로 우뚝 솟아 있는 장군봉

 

 ▲ 대진사 지나 탐방로 입구에 있는 국제적 멸종위기종 천연기념물 제324호 솔부엉이 모형

 

 ▲ 아들바위

 

탐방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만나는 주왕산 계곡은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 중 경관부분 우수상을 수상한 곳으로 거친 암석과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며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서 아들바위는 주왕계곡 입구에서 약 100m 지점에 있는 네모반듯한 큰 바위로 그 위에 작은 돌이 소복하게 올려져 있다. 아들바위는 바위를 등지고 다리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올리면 득남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 탐방로 옆 계곡에 위치해 있는 아들바위

 

 ▲ 시원한 숲길을 걷도록 이어지는 탐방로

 

 ▲ 폭포로 향하는 탐방로 대부분이 평지형에 가까울 만큼 힘든 코스가 없다.

 

 ▲ 산철쭉 군락지

 

아들바위를 떠나 완만한 평지 탐방로를 따라 이동하면 수달래(산철쭉)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특히 이곳 수달래는 신라말기 당나라에서 피신한 주왕의 원한이 전해지는 곳으로 수단화로 불리기도 한다. 주왕은 자신을 잡으로 온 마장군의 공격을 피해 주왕굴에 숨어 있던 어느 날 주왕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던 중 마장군이 쏜 화살에 죽게 되자 그 핏물이 주왕골을 따라 흘러 내렸는데 그때 핀 꽃이 수달래로 주왕이 죽고 난 후 피었다 하여 수단화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주왕의 전설과 함께 오늘날까지 매년 5월이면 수달래 축제를 한다.

 

 ▲ 자하성

 

자하교 앞 쉼터에서 왼편으로 작은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이 바로 자하성의 옛 흔적이다. 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주왕이 주왕산에 숨어 든 후 당의요청을 받은 신라 군사를 저지하기 위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약 12km(30) 돌담을 쌓았다한다. 당시 돌문과 창고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성터의 흔적만 겨우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는 축성시기가 주왕 전설 당시인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 이후로 추정하는 주장이 있다.

 

▲ 자하교 앞 쉼터에서 곧장 산길 탐방로를 따라 이동하면 폭포로 향하며, 자하교를 건너면 주왕암, 주왕굴로 향하는 갈림길을 만나

게 된다. 출발은 폭포 방향으로 간 후 되돌아 올때 시루봉 아래 갈림길에서 주왕암 방향으로 이동하여 탐방하면 된다.

 

 

▲ 급수대

 

급수대 주상절리는 등산로에서 위로 올려다보아도 까마득한 높이로 응회암에서 주상절리가 형성된 독특한 절리로 응회암이 용결 냉각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주상절리이다. 급수대는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손이 없어 무열왕(29대 왕)6대 손인 김주원을 38대 왕으로 추대하였지만 경주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여 건너 올 수 없자 대신들이 하늘의 뜻이라며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주원은 김경신이 왕으로 추대되자 주왕산에 피신하여 자신의 성을 만들고 지냈는데 당시 산 위에는 물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그 바위가 급수대이다.

 

 ▲ 학소대  ▲ 급수대  ▲ 시루봉

 

 

 

 ▲ 시루봉

 

엄지손가락 하나 치켜든 모습을 한 바위기둥 하나가 계곡에서 우뚝 솟아 있다. 바위를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데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다하여 시루봉이라 부르며, 측면에서 보면 사람 옆모습을 하고 있다. 시루봉에 전해지는 전설로는 옛날 추운 겨울 도사가 바위 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시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과 함께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 전하고 있다.

 

▲ 학소대

 

시루봉 건너편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거대한 절벽으로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로 불리는 바위이다. 어느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죽게 되자 홀로 남은 청학이 날마다 구슬피 울며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며, 지금 학은 간데없고 보금자리 터만 절벽 위에 남아 청학과 백학을 기다린다고 전하고 있다.

 

▲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석문을 통과하듯 나아가면 제1폭포라 부르는 용추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만남 제1 "용추폭포"

용추폭포는 용꼬리에 해당된다하여 불리는 지명으로 낙숫물이 만든 원형의 깊은 구멍인 구혈과 주변을 따라 바위를 깎아 휘감는 폭호가 잘 발달되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 용추폭포 하단부 전경

 

▲ 용추폭포

 

 

시루봉과 학소대를 지나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석문이 열리듯 길을 터고 그 속살에 용추폭포가 자리 잡고 있다. 용추폭포는 총 3단으로 주왕산으로 들어서는 첫 폭포이기도 하다. 계곡에서 흘러든 물줄기와 위에서 쏟아지는 낙수지점에 구혈과 폭호가 가장 두드러지게 확인되는 곳으로 용결응회암 특성을 볼 수 있다.

 

 

 

주왕산은 화산재에 의해 형성된 회류 응회암으로 침식에 약하여 풍화차이에 따라 다양한 비경을 자아내고 있다. 7천여만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생대 백악기후기 지질로 봉화 청량산과 달리 지질이 약해 낙석이 심하고 바위가 단단하지 않아 물의 흐름에 다양한 모습으로 홈을 파 계곡을 이루는데 제1폭포라 말하는 용추폭포는 주상절리와 회류 경계면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 낙수물이 원기둥 홈을 파 놓았다.

 

 ▲▲ 제1 용추폭포와 어우러진 주변 암반

 

▲ 용추폭포로 진입하는 석문 

 

 ▲ 용추폭포 상단부분 전경

 

 ▲ 용추폭포 상단 부분 계단식 폭포 전경

 

 

용추폭포를 떠나 다시 탐방로를 따라 걷는다. 다음으로 만나는 폭포는 절구폭포와 용연폭포 그리고 주왕암과 주암굴을 따라 여행을 한다.

 

계속 2편 주왕굴 가는 길편이 이어 집니다.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daum.net/okg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