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
이른 여름 매미소리를 피해 숲길을 거쳐 오늘은 좀 먼 쌍계사 불일폭포를 잇는 여행을 준비하였다. 주차를 한 후 일주문을 거쳐 금강문 그리고 천왕문을 연이어 통과하는 전형적인 사찰구조로 천왕문을 거쳐 9층석탑과 뒤편 팔영루를 통과 후 대공탑비와 대웅전을 잠시 둘러보고 곧장 청학루 옆으로 난 탐방길을 따라 환학대, 마족대, 불일야영장 그리고 마지막 불일폭포로 향하는 약 2.5km 코스를 선택했다.
▲ 쌍계사 입구 야생녹차밭 전경
▲ 십리벚꽃길을 옆으로 흐르는 쌍계계곡
주차장을 출발 쌍계사~환학대~마족대~야영장~불일암~불일폭포~국사암 순으로 왕복 6km 코스로 야영장과 불일암, 국사암에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
▲ 매표 후 쌍계사로 진입
쌍계사의 역사는 성덕왕 21년(722)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스님의 정상(머리)을 모시고 오면서 옥천사로 출발하여 문성왕 2년 (840)년 진감선사에 의하여 대가람을 이루고 인근 경남 고성에 옥천사가 있어 두 개의 이름이라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과 두 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쌍계사라 불렀다는 설, 정강왕이 진감선사를 앙모하여 쌍계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는 진감국사의 범패로 알려져 있다.
▲ 쌍계사 일주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진감국사(眞鑒國師:774∼850)는 범패(불교음악), 차(茶)종자를 한반도에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시대 인물로 선종발전에 대들보로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는 혜소선사로 시호(諡號)가 진감(眞鑑)이며, 성씨는 최 씨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쌍계사 진감선사부도비에 따르면 본관이 황룡사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
▲ 쌍계사 금강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31세에 출가 후 당나라에서 창주(滄州)에 있던 신감대사 제자가 된 후 810년 당나라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종남산에서 참선과 수행 830년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주석하면서 쌍계사와 인연을 맺고 화엄종 포교방식을 탈피하고 범패를 통해 선사상을 확대하면서 쌍계사는 대가람으로 알려진다. 비문에 의하면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르는 곡조와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모든 천상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하였다"며 범패를 배우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사찰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파격적인 포교방식이 성공한 셈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쌍계사 천왕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쌍계사에는 또 하나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850년 선사나이 76세인 불교로 출가한지 41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 만에 입적하며 887년(진성여왕 1)진감선사대공탑비가 당대 최고 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에 의하여 탑비를 진감국사 일대기로 메워지면서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전설이 생겨난다.
▲ 팔영루 / 문화재자료 제74호
통일신라 840년에 진감선사가 세웠고. 조선시대 1641년과 1978년에 보수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발상지로서, 훌륭한 음악과 많은 명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불교음악인 범패의 창시자인 진감선사가 여기서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덞음률로 된 범패의 어산을 작곡하였다 하여 팔영루라 부른다.
범패 즉 음성공양을 두고 말하는 말로서 소리 내어 하는 공양으로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범서(梵書)를 찬탄하는 불교의 모든 음악을 통칭하고 있다. 진감국사가 범패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9년(760)범패가 이미 존재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월명사 도솔가 조}에 두 개의 해가 떠서 왕이 해결책을 물으니 범패승을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부르면 괜찮을 것"이란 구절로 보아 범패는 이미 진감국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범패는 어려운 형식이었거나 신라풍이라는 향풍(鄕風:)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도 범패가 있는데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고 흘러들어가 고풍(古風)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국사가 가져와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풍(唐風)으로 분류되면서 범패 보급의 시발점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제500호
쌍계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사찰을 벽암대사가 인조 10년(1632) 다시 고쳐 세운 석가모니를 모신 중심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과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다.
칠존불을 모신 대웅전 불상은 아마타불을 제외하고는 조성시기 및 재료, 양식 등 동일하다. 삼세탱불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을 한 문수 보현 등 8대 보살,재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 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 용녀와 용왕 그리고 2금강과 사천왕을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의 불상은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부처는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조각솜씨가 우수하며 둥근 얼굴형에 경직되거나 온화한 미소를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고 자세하게 살펴보면 약간의 미소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세탱불은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화엄사처럼 거대한 석등은 아닐지라도 석등1기가 눈에 들어온다. 흡사 호롱불을 켜고 불경을 연구한 것처럼 호롱불 등잔을 닮은 석등은 모진 세월을 대변하듯 중간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편 기단부에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서 마애불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대부분 암벽을 이용하거나 쪼아서 옮겨 놓는데 이곳 마애불은 화려한 모습은 없고 근엄한 표정으로 다소 여성스러운 풍을 풍기고 있다. 마애불을 조각할 때 부처를 음각하거나 양각 또는 선을 따라 깊게 홈을 파서 윤곽을 잡는 것과는 달리 아예 작은 바위에다 네모 반듯한 암실을 만들고 그 안에서 바깥표면과 일치하도록 돋음 양각을 해 놓았다.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부처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일주문에 내걸린 삼신산의 삼신할미가 아닐까? 예로부터 단군시절 이 지리산 일대를 관장하는천황할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천황할미를 이곳 쌍계사 이전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조성된 것은 아닐까 싶은 의혹이 드는 것은 마애불을 통해서 부처가 아닌 다른 영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는 탓일 것이다. 마애불은 입체감이 뛰어나고 큰 귀와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손은 서로 맞잡고 소매 속으로 넣고 정좌를 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실 바로 윗 단은 나무아미타불이라 기록되어져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총 1.35m 높이로 안정감 있는 자세로 정좌하고 앉아 있다.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 국보 제47호
통일신라 후기 승려였던 진감선사(774∼850) 탑비로 애장왕 5년(804) 당나라에 유학 후 불교음악인 범패를 국내에 가장 먼저 들여와 대중화 시킨 분이다. 탑은 용머리 형상을 한 거북받침돌 위 비석 몸돌을 올리고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그림을 조각한 머릿돌을 올려놓은 통일신라 후기 양식으로 정면 중앙에 “해동고진감선사비” 비명이 있다. 비문과 글은 최치원이 짓고 쓴 것이라 전한다.
쌍계사와 인연을 맺은 진감국사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엮어낸 쌍계사 철감선사비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서려져 있다. 평소 부도탑과 부도비를 만들지 말 것을 권장하던 진감국사는 정작 자신은 죽어 부도비를 남긴 것이다. 이율배반적 행위라 볼 수 있지만 평소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칭송하면서 기리기 위하여 진감국사의 뜻을 어긴 것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생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살아생전 업적을 추하게 볼 수 있지만 정작 최치원의 뜻은 달랐다.
진감선사비문은 2500여자로 최치원은 그의 생전 뜻을 어기며 비문을 직접 작성하고 새기는데 " 이름은 멀리해도 이름이 남는 명성은 기념할 만한 것으로 불법은 문자를 떠난 것이지만 문자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밝힐 수 없다" 며 비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비문은 전체 높이 3.63m, 비신 높이 2.02m, 비신 폭 1m으로 통일신라시대 작 품이며, 임진왜란과 전쟁을 통해 대부분 파손되었는데 쌍계사 진감선사비는 파손되지 않고 모든 형태가 보존되어져 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부도비가 대웅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유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웅전 앞에 부도비가 있는 예는 전무하다는 점을 볼 때 부처가 모셔진 대웅전을 향하지 못하고 측면으로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쌍계사 석등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양식을 반영하고 8각형으로 뻗어 올라가며 위 부분에
연꽃잎으로 장식해 놓고 있다.
▲ 육조영당으로 향하는 길로 신도 외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쌍계사에서 또 하나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 육조영당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꾼 생활을 하다 금강경 소리를 듣고 홍인대사 문하에서 가사를 전해 받고 훗날 황실로 초대되어 조서를 지내면서 석가모니로 부터 33대 육조 혜능대사로 알려진다.
쌍계사에서 육조 혜능대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쌍계사 창건과 관련한 이야기로 대비(大悲) 및 삼법(三法) 두 화상이 육조 혜능의 머리를 당나라 홍주 개원사에서 역사 장정만에게 돈 2,000냥을 주고 매수하여 조계사의 육조인 육조탑에서 존중 혜능의 두골을 훔치게 하여 가져와 옥천사를 만들었다는 설과 혜능대사가 육조 혜능을 평소 흠모하여 찾아갔을 때 이미 고인이 되어 머리만 모셔와 돌로 만든 석감에 넣어 안치하였다하는 설이 있지만 사람의 머리를 가져온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의 불전에 있는 석탑은 1800년대 7층 석탑을 옮겨와 석감위에 올려놓았으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계사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웅전은 조선 중엽의 전형적 목조건물로 건축미에서 단연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게 하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 아미타불, 좌측 약사여래불을 모시며, 관음, 세지, 문수, 보현 등 4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 불일폭포로 가는 길목에서 내려다 본 전경
산길로 접어든다. 약간의 경사길이 산 허리춤을 따라 약간의 언덕을 만들며 길을 터어 놓는다. 쌍계사를 출발하여 국사암과 불일폭포 갈림길에서 불일폭포는 2km 더 진행하여야 한다. 돌아오는 길목에 잠시 국사암에 들러 보기로 하고 불일폭포로 접어든다.
▲ 환학대
환학대에 도착한다. 쌍계사로부터 약 1.2km 지점으로 절반을 왔다. 신라시대 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속세를 떠나 청학동을 찾아 다닐 때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또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이곳 환학대에서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 마족대 가는 길
평지를 걷듯 약간의 오르막은 계곡을 건너는 징금다리를 통과하거나 햇볕이 드는 주연부식생대를 통과한다. 하늘에 잠시 먹구름이 드리우니 숲속은 온통 어둠이 찾아온 듯 습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무성한 숲은 하늘을 가리고 햇볕이 없는 여름 산길을 계곡을 따라 열어 놓는다.
▲ 마족대
마족대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도와주기 위하여 원군으로 온 이여송 장군이 말을 타고 지리산으로 오를 때 생긴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계곡 바로 옆 암반지역이다.
▲ 야영장 입구를 지키고 있는 목장승
▲ 불일폭포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길
▲ 지눌이 수도하였다 전하는 불일암 이정표
▲ 불일암 법당에 모셔진 부처
▲ 불일암 담장에서 바라 본 숲속 풍경
▲ 불일암을 내려 선 후 숲 사이로 보이는 불일폭포
▲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불일폭포 전경
불일암을 지나 내리막 계단길 끝자락에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폭포로 알려진 장쾌한 모습의 폭포를 만났다. 불일폭포 안내판을 옮겨보면 이 폭포아래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높이가 60m로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폭포이다. 고려 희종(재위 1204~1211)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폭포 근처에서 수도하였는데 입적하신 후 회종은 시호를 불일보조라 내렸다. 그 시호를 따서 불일폭포라 하였으며,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불렀다.
다시 내려선다
힘겹게 올라온 그 길을 재촉하면서
▲ 폭포에서 내려서는 길 주변은 이끼가 자라고 있을 만큼 습하고 미끄럽다.
▲ 국사암으로 향하는 솔숲길
▲ 국사암에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로 약 12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국사암 입구 산길
▲ 다시 쌍계사를 거쳐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 쌍계사 옆 담장을 따라 흘러가는 쌍계계곡
쌍계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전각이 팔상전(捌相殿)이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세분화 하여 그린 팔상도와 영산회상도를 모시는 전각으로 팔상전 또는 영산전이라 부른다. 범패가 노래를 통해 불법을 전하였다면 팔상도는 그림 속 부처님의 일대기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는 목적에 있으며, 보통 팔상전에 모셔진 부처는 작고 경배대상은 팔상도와 영산회상도이다. 팔상도는 부처의 일생을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나눈다. 팔상전으로 대표적인 사찰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며,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개심사, 송광사, 해인사 및 쌍계사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길이 410m. 폭273m의 17세기 중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석가불을 중심 상단에 모시고 사보살, 사천왕, 육제자, 사분신불, 타방불, 팔부중이 좌, 우 2열로 채우고 조선 숙종 7년(1681)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하지 않은 탱화적 기법을 통해 사바세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팔상전팔상탱은 1.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향하는장면 2.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산하는 모습 3. 태자가 성문 밖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모습 4. 출가하는 모습 5. 설산에서 신선과 수행하는 모습 6. 수행 중에 겪는 고통 7. 녹야원에서최초로 설법하는 모습 8. 쌍림수 아래에서죽음에 이르는 모습 등이 있다.
▲ 쌍계사 일주문 측면
▲ 쌍계사로 들어서는 길은 일주문을 시작으로 이어지며, 옆으로 또다른 길이 있다.
매화꽃 향기를 따라 길을 거닐다 보면 쌍계사 입구에 나무장승 및 큰 바위가 자리 잡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쓴 글씨라는 전설을 간직한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란 글귀가 있고 더 오르면 다포집형태로 삼신산 쌍계사 및 선종 대가람이란 현액이 걸린 일주문이 있다.
해강 김규진이 쓴 글로 알려진 일주문은 큰 기둥과 작은 기둥이 머리가 큰 다포집을 겨우 떠받치고 그 위로 계단을 오르면 맞배집 형태의 금강문-천왕문-팔영루-대웅전으로 능선 비탈을 이용, 일직선상에 놓여있지만 진입로는 약간측면을 돌아가도록 만들어 두었다. 이어지는 건물 중 팔영루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율로 범패를 만들면서 팔영루라 불렀다 전하지만 중국 위나라 조자건이 고기 노는 모양을 보고 범패를 익혀 어산(魚山)이라 부른 것을 보아 팔영루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팔영루는 보편적으로 사찰이"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루"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범패를 가리키는 교육장으로 활용되어 왔다.
▲ 쌍계계곡
고운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로 당대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부산 해운대 동백섬 바다기슭에 최치원 선생이 새긴 "해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바로 해운(海雲)이 고운 최치원 선생의 또 하나 자이다. 최치원은 점점 쇠퇴하는 신라왕실에 실망하면서 벼슬을 내 놓고 전국을 유람하며 은거생활을 하면서 말년을 해인사에서 보낸 후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이 없고 떠돌다가 객사하였다는 설과 자살하였다는 설이 난무할 뿐이다.
사찰로 접어들며 최치원 선생의 입산시를 읽어보자. 僧乎莫道 靑山好/山好何事 更出山/試看後日 吾 跡/一入靑山 更不還 스님들이시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산이 좋을진댄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십니까. 시험 삼아 저의 뒷날 자취를 보시겠습니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저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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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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