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노서리고분에서 대릉원 천마총 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야와 신라시대 조성한 고분군이다. 그 이전에 만든 고인돌보다 많은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분군은 아쉽게도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과 발굴의 미명아래 대부분 일본으로 유출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행되었다.
▲ 봉황대 작은 음악회 무대
고분군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는 경주 대릉원이다. 그러나 공중에서 바라보면 경주는 수 많은 고분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면서 도로가 생겨나고 고분도 그렇게 일제가 매겨놓은 번호 순으로 우리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 독특한 모습의 노동리 봉황대고분
경주 노서리, 노동 고분군은 사적 제38호, 39호로 경주 봉황동 봉황대 앞 일원의 고분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 이 곳 노서동 넓은 평지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10여 기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고분과 더불어 그 규묘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제180호 고분을 비롯하여 1921년 우연히 금관이 출토외어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발굴조사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왼 서봉총, 194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어 신라 고분에 대한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층, 그밖에 은형총, 쌍상총, 마총 등이 있다. 이들 무덤 중 대체로 봉분이 큰 것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작은것은 돌방무덤과 구덩식무덤이다. 1984년 신라고분 정비 보존사업의 일환으로 민가를 철거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경주 대릉원 옆 봉황대 일원 고분은 독특하다. 특히 봉황대 고분은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5세기~6세기로 추정되는 이 고분 중턱에는 고목이 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국에 머물 당시 스쳐가는 길목 무덤에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당시 누구의 무덤인가에 따라 나무의 심는 크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통역을 통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중국 평지에 조성된 무덤에 나무가 심어져 있던 기억은 분명하게 있다. 우리나라도 밀양에서 청도로 가는 길목 어딘가 무덤 중앙에 나무를 심어 놓은 곳을 본 적이 있는데 경주 대릉원의 무덤 역시 나무가 있다.
고의적으로 심었는지 아니면 씨앗이 바람에 날려와 자연 발아를 하였는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당시 무덤을 동네 뒷산 언덕으로 생각하고 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무덤은 나무로 인하여 신비스럽게 보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경주 노서리고분군을 떠나 도로하나 건너면 대릉원으로 향하게 된다. 오늘날 행정구역 편의상 고분마다 저마다 다른 구역으로 엮어 놓았지만 경주 시내 대부분의 고분이 하나의 공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입구에서 매표를하고 대릉원 고분길 배롱나무 꽃길의 환영을 받으며 여행을 시작해 본다.
대릉원 길을 걷다.
▲ 경주 첨성대 앞 도로변에서 본 전경
▲ 대릉원 앞 첨성대 방향에 마차가 대기중이다.
경주 대릉원 일원은 사적 제512호로 내부에는 미추왕릉과 천마총 그리고 여러 대형급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렬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 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과대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 천마총 가는 초입에 담장으로 가려져 있는 미추왕릉 입구
사적 제175호 신라 미추왕릉 안내글을 옮겨보면 "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려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 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높이 12.4m, 지름 56.7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 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폐를 모신 숭해전이 있다. "라고 안내하고 있다.
▲ 미추왕릉 전경
▲ 미추왕릉 진입로에 배롱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 경주 고분중에서 유일하게 담장안에 모셔진 미추왕릉
▲ 천마총 가는 길에서 만나는 배롱나무 숲길은 8월 말 풍경이다.
▲ 천마총 입구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 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김종필 총리가 직접 방문하여 발굴을 독려했다. 당시 하루 인건비로 600원이였지만 발굴에 투입된 인원만 무려 1200명이였다. 발굴 중간단계에 금관을 막 들어 낼 무렵 맑은 하늘에서 뇌성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내려 인부들을 공포로 몰아가면서 김씨문중은 미추왕릉 옆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결국 천마총만 공개하였다
발굴 당시 헤프닝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중 금이 나오면 청화대로 들고 가서 대통령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가 하면, 금관도 일단 박정희 대통령에게 먼저 보여줄 정도라고전하며, 대릉원 현판도 직접 내걸었다. 대릉원 내 고분 중 유일하게 개방된 고분이 1973년 발굴하면서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를 그린 유물이 확인된 천마총과 경주 김씨가 첫 왕이된 미추왕릉은 담장을 쳐 놓고 따로 예우를 하고 있다.
경주 고분을 대표하는 대릉원은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촐 23기의 고분이 모여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사후 대릉에 장사 지냈다 하여 대릉원이라 한다. 대릉원은 1970년 복원을 통해 공원화 사업으로 아름다운 능선 사이로 고분산책로를 조성하고 잔디를 심었다. 주변 길을 따라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옮겨 심는 등 최대한 무덤의 능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조경하였으며, 2000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5곳 가운데 하나로 등록되었다
대릉원을 나와 곧장 길을 따라 첨성대를 거쳐 차량회수를 위하여 도로변으로 향한다. 그 길목에서 만나는 경주 첨성대는 이제 무료입장이며, 주변은 코스모스와 기린초, 금계국이 활짝 피어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별을 관측 ?? 첨성대
▲ 측면에서 바라 본 첨성대
첨성대는 높이 9.16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을 달고 사용된 돌은 17단으로 262개로 12단 까지 흙과 돌로 채우며, 19단-20단, 25단, 26단에는 한문 우물정자형의 장대석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돌출시켜 판석을 설치하고, 네모난 창틀에 사다리를 이용한 흔적이 있다. 창은 남쪽으로 북두칠성을 향하고 "첨성"이란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던 담장이 사라지고 입장료 징수도 폐지되었다.
첨성대로 알려진 이유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첨성대와 선덕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선덕여황 시절 돌을 다듬어 대를 쌓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그 속이 트여 사람이 왕래하며 천문을 관측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않아 첨성대를 두고 왕릉을 지키는 망루,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재단, 상직적 예술품, 탑. 등으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첨성대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창문이 하나며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점, 위쪽이 열려 있고 낮은 지대에 있다는 점 등이다.
▲ 첨성대 옆 공터에는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심어 여행객을 반기고 있다.
▲ 기린초 너머 바라 보이는 첨성대
▲ 도로변에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있다.
▲ 앞다투어 피어나는 금계국
첨성대 여행을 한 후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하기로 했다. 주변에 유명한 순두부집과 떡갈비 등이 있지만 가격대비 맛이 따라오지 않는 점과 여행에서 좀 특별한 음식을 먹어 보자는 생각으로 인근에 있는 경주역 앞 성동시장으로 향한다. 차량 주차를 경주역에 하고 신호등 건너면 경동시장이다.
경주역 앞 "경주 황오동삼층석탑"
경주 역사 앞마당에 서 있는 경주 황오동삼층석탑은 효공왕릉 부근인 동방동 장골사지 옛터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이어질 당시 양식을 한 무너져 있던 탑을 193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탑 주변에는 이 밖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대좌와 불상 1구가 있다.
▲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호 황오동삼층석탑
▲ 함께 옮겨온 불상
1985년 8월5일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등록된 경주황오동삼층석탑은 경주역사 이전 기념으로 사자사 옛터에서 흩어져 있던 탑을 복원한 것으로 경주에서 보기드문 탑 구조를 하고 있다.. 사자사를 지키다 쓰러진 탑은 본래의 자리에서 강제로 경주역사로 이동해 왔음을 감안할 때 서둘러 본래의 위치로 옮겨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성동시장
▲ 성동시장에는 없는것 빼고는 다 있다
▲ 성동시장은 단팥죽, 호박죽을 파는 골목을 비롯하여 먹는 골목집이 잘 형성되어 있다.
▲ 부페식 간이식당 접시에 담긴 음식
▲ 맘데로 골라 먹으라며 계란두루마리를 만들다 올려 놓고는 음식들 전부 아침에 한 것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동시에 사람 서너명 앉으면 더이상 앉을 공간이 없는 음식코너가 성동시장 내 자리잡고 있다. 포장마차에서 긴 쪽의자에 걸터앉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이곳은 가격이 1인당 5천원으로 반찬은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마음데로 골라 먹으면 된다. 밥은 따로 퍼주며, 국은 소고기국과 씨락국이 있다. 골목안에 비슷한 반찬을 차려 놓고 파는 음식집이 서너집 몰려 있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시장에 들러 이곳저곳 들러보다 골목길 끝자락에서 만난 식당에서 조금은 비위생적으로 보이지만 재미삼아 먹어 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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