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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담양 정자기행 1편 식영정 ~ 소쇄원 ~ 충효동왕버들 ~ 개선사지 석등

허영꺼멍 2014. 8. 25. 10:27

 

 

다시 찾은 담양군 여행

 

한동안 소쇄원 입장료와 메타세콰이어 숲길 입장료 징수에 부당함을 주장하며 일부 여행팀이 담양군을 찾지 않기로 하였다가 다시 담양군을 찾아 보았다. 여전하게 여행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담양군 여행을 시작하기 앞서 깊은 생각에 빠져야 했다. 소쇄원 주인은 찾아오는 길손을 위해 대문도 만들지 않았던 그 길목에 입장료 징수를 위한 빗장을 어찌 생각해야 할지를..

 

▲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계곡위로 담장이 올려져 있는 소쇄원

 

국내에는 산청~함양 구간을 잇는 정자여행과 담양외곽에서 시내를 잇는 정자여행이 있다. 특히 담양 정자여행은 낙향한 벼슬아치가 만든 정자가 아니라 우리나라 가사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곳으로 여행코스는 소쇄원 기준 주변 식영정-가사문학관-소쇄원-충효동왕버들-개선사지석등 그리고 시내로 향하면서 이어지는 명옥헌원림-송강정-면앙정-담양시내 탑 그리고 관방제림순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명승 제57호 식영정 일원

 

바람이 겨우 광주호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솔숲에서 뛰쳐나온 녀석은 차갑기만 하고 그러고 보면 식영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달의 그림자가 쉬어 간다는 간판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인근에 위치한 소쇄원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소쇄원이 여성 같은 포근함을 지녔다면 식영정은 남성미를 갖춘 모습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식영정은 송강 정철선생의 작품세계가 묻어나는 곳이자 가사문학의 산실로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정자이다.

 

▲ 가사문학관 옆 식영정 입구 전경

 

식영정 안내글을 옮겨보면 "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의 정자이다. 조선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가 있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명을 "식영정사선"이라 불렀다. 이런 이유로 식영정을 "사선정"이라 달리 부르기도 한다. 정철은 이곳 승경을 무대로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식영정은 197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 지정 되었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 식영정으로 오르는 산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식영정으로 진입하기 전에 도로변의 가로수는 온통 붉은 꽃으로 화사함을 보여 주는데 한결같이 백일홍이다. 자미탄은 한자어로 백일홍을 두고 부르는 말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자미탄을 대신하는 것은 인공으로 조성된 광주호이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솔숲 사이로 광주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을 잉태한 식영정은 오늘도 변함없이 바람에 몸을 맏긴 채 그림자를 피해 달아나려 하고 있다.

 

▲ 식영정 건물 옆 오랜세월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 허세와 권위보다 적당한 크기의 단출한 식영정 전경

 

식영정을 사계를 두고 송강 정철은 로 표현하며 변화무상한 운치를 잘 그려낸다. 식영정의 유례를 살펴보면 "장자에 말하길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오히려 그림자는 빨리 뛰면 빨리 쫒아오고 늦게 뛰면 천천히 쫒아 오기에 다급한 그는 나무 그늘에 숨고 보니 그림자가 없어 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성원은 선생님 석천이 내가 이 외진 두메에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타고 자연 조화와 함께 하며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라며 답변을 하게 된다. 그럼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뜻의 식영이란 간판을 내거는 것이 어떠냐며 되묻자 흔쾌히 승낙하니 그날부터 식영정이란 간판이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 식영정 현판

 

▲ 식영정 뒷뜰 전경

 

▲ 식영정에는 성산별곡 비석이 있다.

 

식영정에는 많은 시가 전해져 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 누정문학의 백미로 불리는 식영정 20영을 통해 임억령의 시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통해 그의 마음 곁으로 조금이라도 다가 설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식영전이다. 식영정을 찾는 사람은 식영정 찬시에 나오는 별뫼와 자미탄에 관하여 무척 궁금해 한다. 어디를 찾아봐도 그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별뫼는 이 지방에서 불리는 식영정 일대를 두고 나오는 말이며, 자미탄은 지금은 인공으로 광주호를 만들면서 사라져 버렸지만 정자 밑에 있는 여울목으로 그 당시 상당한 백일홍 꽃이 여울목을 따라 붉은 꽃을 피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 측면에서 바라 본 식영정 전경

 

식영정이 있는 곳에는 서하당이 함께 있다. 서하당을 세운 김성원은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또 하나의 정면2칸 측면 2칸의 고풍스러운 정자를 짓고 임억령에게 선물을 하게 된다. 임억령은 1526년 문과 과거에 급제 후 금산군수직에 있을 무렵인 1545년 동생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 대윤의 선비를 추방하는데 앞장서는 일을 하게 되자 평소 청렴결백하고 어진 성품의 임억령은 군수직을 내 놓고 선비를 추방하는 동생을 가르치지 못한 죄라며 낙향을 하게 되는 시련을 겪지만 1557년 다시 담양부사로 발탁된다. 임억령은 해남 관동리에서 임우형의 다섯 형제 중 맏아들로 1496년 태어나 모친 슬하에서 자라게 되면 훗날 대문장가 꿈을 펼쳐 나가게 된다. 중종 11년인 1516년 임억령은 21살의 나이에 진사가 되고 1525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금산군수로 내려간다.

 

  ▲ 식영정 비탈에는 서하정이 자리잡고 있다.

1545년 동생 임백령은 당대 세도가인 유형원과 어울리면서 소윤일파에 가담하게 되고 선비를 주창하는 일이 벌어지자 임억령은 동생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가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면서 관직을 내 놓고 낙향을 한다. 당시 세도가인 유형원을 등에 업는다면 큰 벼슬자리는 쉬운 세상이었지만 임억령은 고향에서 은신하게 되지만 1552년 동부승지 병조참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557년 담양부사로 내려와 있다 또다시 부사직을 내 놓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임억령은 73세의 일기로 저서 석천집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 복원된 서하정

 

임억령이 살아생전 어진성격 탓에 정치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주변에서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임억령이 금산군수로 있을 무렵 동생 임백령은 세도가의 힘을 빌려 원종공신의 녹권을 보내오는 일이 발생하자 임억령은 이에 격분하여 녹권을 불태우고 해남으로 내려서게 되었다. 임억령의 청렴결백한 성품을 한 눈에 보는 것 같은 부분이다. 임억령은 정치가 보다 대문장가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 서하정 담장 너머에서 만나는 가사문학관

 

가사의 첫 작품으로 고려 말의 승려 나옹(懶翁)의 서왕가(西往歌)를 들기도 하고, 조선 초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을 들기도 하지만 서왕가는 국문이 없는 당시로 의심할 여지가 다소 있지 않을까 싶지만 우리에게 가사문학이 자리매김하면서부터 국문학사에 새로운 장르를 열 게 된다. 조선 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국문으로 시를 만드는 가사문학 보급이 점차 확대되어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양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 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 초당춘수곡. 사천곡. 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 민농가, 작자 미상의 효자가 등 18편 가사가 담양에서 전승되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로 부른다.

 

200010월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 식영정 옆에 가사문학관을 5년에 걸쳐 자료를 준비하고 개관을 한다. 규모 5,017, 건물 722(한옥형)이며, 지하 1, 지상 2층으로 본관은 총 410평에 가사문학관련 서화 및 유물 11,461여 점, 담양권 가사 18편과 관계 문헌, 가사관련 도서 15,000권이 전시되어 있다가사문학에 관한 자료를 보면 가사는 율문(律文)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 장르로 형식상 4음보(3·4)의 연속체인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율문과 산문의 중간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시조와 가사를 비교하면, 전자가 서정 장르이고 구수(句數)와 행수(行數)의 제한이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교술 장르이고 4음보의 연속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즉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가사문학 중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것으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이 전해지며 인물로는 대표적으로 송강정철이 있다.

 

 

 

정자 중 최고로 불리는 "소쇄원"

 

소쇄원을 여행하려면 제월당에 내걸린 김인후의 소쇄원48영을 따라 소쇄원의 여러 곳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48영은 소쇄원을 두고 아낌없는 찬사를 통해 변화무상한 사계를 잘 표현한 소쇄원 찬시이며, 소쇄원여행을 하려면 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이 건물의 주인인 양산보와 찬시를 남긴 김인후 그리고 정자에 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한 곳이다.

 

▲ 건물은 제일 윗쪽으로 부터 제월다으 광풍각이며, 두 건물 사이 협문을 두어 왕래를 하였다.

 

▲ 소쇄원 입구 전경으로 왼편에 매표소가 자리잡았다. 입장료는 1인 1,000원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정각과 누각을 모두 합치면 885개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남 함양 일원 경호강변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 보면 크고 작은 정자와 소쇄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자들이 영호남에 집중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표를 한 후 들어서는 초입은 대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연산군 9년 양시원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한양 간 후 어린 나이인 15세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고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조선 중종 13년 양산보 나이 겨우 17세에 현량과에 급제 홍문관 대사헌 자리까지 올랐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하여 존경하는 스승 조광조가 귀향길에 오르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벼슬을 내 놓고 함께 낙향하게 된다. 

 

▲ 소쇄원을 거쳐 흐르는 계곡물이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계곡을 따라 흐른다.

 

▲ 대숲이 넉넉하게 형성되어 있다.

 

▲ 광풍각 앞으로 흐르는 계곡

 

▲ 자연이 인간의 주거 공간으로 들어서는 오곡문

 

양지바른 단의 겨울 낮으로 단 잎의 계곡은 아직 얼어 있는데 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구나. 팔베개를 하고 따뜻한 풍경을 맞으니 닭소리가 한낮임을 알리는 구나. -37 

대숲을 가러지르니 어디가 정원이고 어디가 자연인지 분간이 힘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겨우 흙 담장에 기와를 올린 모습이 흡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 자연과 소쇄원은 딱 저 한 마리의 용이 경계를 표시할 뿐이다. 흙 담장은 안으로 오곡문이란 글자를, 뒤쪽은 우암 송시열이 쓴 "소쇄처사양공지려"가 붙어 있고 돌담은 제주도에서 온 일꾼이 음양의 조화를 통해 만들었다 전한다. 

오곡문 앞에서니 참으로 여유있는 모습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연을 배려한 소쇄원도 그러하지만 찾는 이들의 순수하고 진지한 모습들이 묻어나는 부분이다. 담장밖에 적혀있는 소쇄처사양공지려는 이 소쇄원의 문패 일 것이다. 오곡문 주변은 상류로부터 골짜기를 따라 흐른 맑은 계곡물이 돌담마저 양보해 버린 물길을 따라 소쇄원으로 유입된 후 암반 위에서 물은 술 취한 사람의 걸음처럼 갈지자로 다섯 번을 돌고 돌다 작은 폭포 되어 광풍각 앞으로 떨어진다. 오곡문 옆 수구에 원래는 일각문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을 정원으로 끌여 들이면서 3대에 걸쳐 완성한 소쇄원은 손님을 맞기 위한 장소로 계곡아래 광풍각을 두고 위에는 제월당을 ,주변에는 여러 꽃을 심어 즐거움을 나누었다고 한다

 

  ▲ 무너졌던 광풍루 기왓가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홍문관은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을 세조가 홍문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당시 상당수 덕망있는 관원이 등재되어 왕의 자문에 응하거나 조정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통해 신진세력으로 핵심에 서 있던 조광조를 비롯한 따르는 세력은 성리학을 근거로 이상정치 실현을 추구하지만 훈구파로 지목된다. 결국 조광조는 중종반정 공신의 명단 가운데 76명을 선별하여 공로가 인정되지 않아 위혼삭제를 주장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세력으로부터 모함을 받는다.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 글자모양을 만드니 곧 조씨가 왕이 된다는 엄청난 사건은 왕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진세력은 타격을 받게 된다. 조광조가 능주로 귀향길에 오르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함께 낙향하였다.

 

▲ 계곡의 수량만큼 높게 설치된 오곡문

 

대사헌 직을 내 놓은 양산보는 조정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음을 알고 낙향을 결심하고 지금의 소쇄원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지만 결국 유배 길에 오른 스승 조광조는 능주에서 사사 당하게 된다. 조광조의 죽음과 아울러 김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스스로 구차한 목슴을 끊거나 조정에서 사형을 시켰다. 소쇄원에 은신해야 했던 양산보의 답답한 심정을 훗날 정원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낙향을 결심한 양산보가 내려선 곳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로 까지봉과 장원봉이 호위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산골짜기 하류층에 별서정원을 만든다

 

▲ 오곡문에는 자연석을 포개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두개의 돌을 걸친 후 담장을 올렸다.

 

산기슭을 통해 흐르는 계류를 정원 중앙으로 흐르게 하고 주변에는 정자와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정원은 계곡물을 이용한 폭포수가 떨어져 가야금 소리를 내며 가을 단풍은 무희가 되어 한 바탕 춤을 추는 그야말로 대자연 속 별서정원으로 서계곡 앞에는 열린 장소로 광풍각을 만들었다. 광풍각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유일한 담장인 흙담마저 양보해 버린 오곡암을 거쳐 흐른다. 다섯 번 물이 돌아서 흐른다는 오곡암은 평평한 암반위에 물길이 열려져 있다. 물길하나 하나 주인의 섬세한 배려와 위쪽으로 제월당이 자리잡고 항상 문을 열어 놓고 찾아오는 길손을 마다하지 않으며 초야에 묻혀 있는 동안 비록 세파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후학을 지도하며 여생을 조용하게 지냈다고 한다.

 

▲ 계곡에서 바라 본 광풍각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공간이다. 오곡문을 통해 떨어진 물소리로 풍악을 울리고 주변에는 화려하고 색체가 뚜렷한 나무를 심어 바람에 숲이 춤을 추니 어찌 찾아온 손님이 외롭겠는가. 광풍각은 침계문방, 계당으로 불렀다 한다. 비록 낙향하여 은둔하지만 중국의 도잠과 주돈을 흠모하여 시종일관 학문에만 몰두하여 많은 인물로부터 존경받는데 송강 정철의 시는 훗날 소쇄원을 만든 시기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 있다. "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소쇄원을 만들 당시 송강 정철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양산보 나이 34세로 추정 할 수 있는데 이는 송강 정철의 출생이 1526년으로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소쇄원 주인장이 머물던 제월당

 

꽃을 심었다는 매대를 지나면 제월당이 나온다. 한때 이곳에 얼마나 많은 꽃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단을 2중으로 만들고 꽃을 심고 감상하였다. 봄이면 제월당 주변은 매화의 연분홍 춤사위가 벌어지고 여름이면 매미의 자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계곡을 거닐다가 대밭에서 누워 쉬었다가도 가고, 가을이면 샛노란 단풍과 삼나무 붉어지는 잎사귀를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다 겨울이면 모든 것이 조용하여 아쉬운 마음에 동백꽃도 심었나 보다.

 

▲ 제월당 현판마저 자연을 닮아있다.

 

 

양산보가 기거한 내실 마루에 걸터앉고 보니 풍치가 적당한 크기로 눈에 들어온다. 물소리는 간간이 들려올 뿐 문 닫고 들어앉으면 조용하다. 소쇄원의 찬시로 유명한 소쇄원 48영은 그의 사돈인 김인후가 만든 것으로 당시 소쇄원을 떠올려 보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 광풍각 앞으로 흐르는 계곡 와류

 

▲ 계곡 암반석이 와류를 만들고 휘감아 흐르는 공간을 따라 2채의 공간을 열어 놓았다.

 

▲ 계곡에 인접한 광풍각

 

01: 소정빙난/ 자그만한 亭子의 난간에 의지해 소쇄원의 경치가 소쇄정을 이루었구나. 눈 들어보니 바람 상쾌하고 귀 기울이니 영롱하구나. 02: 침계문방/시냇가의 누운 글방에서 창이 밝아 책을 비추니 물 속 바위에 책이 미치네 세상사를 생각하니 사념이 솔개와 물고기처럼 떠돈다. 03: 위암전류 /높직한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 흐르는 물은 바위를 씻어 내리고 하나의 돌이 개울에 가득하네 가운데는 잘 다듬어졌으니 경사진 절벽은 하늘의 작품이로다. 04: 부산오암 /산을 등지고 앉은 거북바위 무거운 청산을 등지고 벽옥같은 시내을 돌아보니, 긴긴 세월, 탈이 없는게 대각이 영주보다 낫구나. 05: 석경반위 / 벼랑을 오르는 돌길 하나의 길이 삼익을 연결시키니 한가롭게 길을 나서는 것이 위험치 않구나. 속세의 자취가 길지 못하니 이끼의 색깔이 여전하구나. 06: 소당어영 /작은 연못에 물고기가 노닐고 네모진 연못은 한 이랑도 되지 못하나 겨우 맑은 물이 모일만 하네. 물고기가 주인의 그림자를 놀려 내니 낚싯대를 드리울 마음이 없구나. 07: 고목통류 / 나무홈통을 사이 흐르는 물 시내는 천천히 흘러 높고 낮은 대나무 아래 못에 이르네. 하늘을 나는 듯 떨어진 물줄기는 물방아를 돌리고 온갖 물고기는 흩어져 노네. 08: 춘운수대/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레방아 쉬지 않고 온종일 흐르는 잔잔한 물의 힘으로 절구가 오를 때마다 공이 저절로 생기네 천손의 베틀 위 비단이 조용히 방아소리를 따르네. 09: 투죽위교 / 통대나무로 만든 높직한 위험한 다리 골짜기에 걸쳐 대나무 숲이 이었으니 마치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위험천만하구나. 못은 본래 아름다운데 다리로 인해 더욱 맑고 그윽하네. 10: 천간풍향 /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 이미 하늘로 사라졌건만 다시 조용한 곳에서 부르는구나. 무정한 바람과 대나무는 매일 저녁 피리를 연주하네. 11: 지대납량 / 연못가에서 더위를 식힘 이곳은 시원한 가을이구나. 바람은 대나무 주위를 맴돌고 연못의 물은 돌 위를 나뉘어 흐른다. 12: 매대요월 / 梅臺에 올라 달맞이 숲이 끊기니 대는 그대로 넓어 기울어진 달이 떠오를 때 더욱 좋아라. 엷은 구름도 흩어지고 차가운 밤만이 얼음에 비친다. 13: 광석와월 /너럭바위에 누워 달을 보면서 푸른 하늘의 달을 보며 누우니 돌이 대자리가 되는구나. 길다란 숲에 흩어지는 맑은 그림자 깊은 밤 잠못 이루네. 14: 원규투류 /담장 밑을 통해 흐르는 물 한걸음 한걸음 물을 보며 걷자니 한걸음에 시 한수 생각이 깊어지고. 물의 참 근원이 어디인지 모르고 담장 통해 아래로 흐르는 물만 바라보네. 15: 행음곡류 / 살구나무 그늘아래 굽이치는 물 조금만 흘러가면 지척엔 연못인데 분명히 오곡으로 흐르네. 그 옛날 본 천상의 뜻을 오늘날 살구나무 주위에서 찾아보세. 16: 가산초수 /석가산의 풀과 나무들 산을 위한 경비와 인력이 필요 없으니 만들어진 산의 모습은 거짓이로다. 형세에 따라 숲을 이루니 역시 산야 그대로 이네. 17: 송석천성 /하늘이 만든 소나무와 돌 조각난 돌이 굴러와 언덕을 이루니 결국 뿌리를 내려 작은 소나무가 되었네. 온갖 꽃이 널려 비록 작지만 파란 하늘을 이루었네. 18: 편석창소 /바윗돌에 덮힌 푸른 이끼 돌은 오래되어 안개구름이 촉촉하니 푸른 이끼가 꽃이 되었네. 자연히 언덕과 골짜기가 바탕을 이루니 번화를 향한 뜻이 없구나. 19: 탑암정좌 /평상바위에 조용히 앉아 벼랑에 오래 앉아 있으니 계곡의 바람에 깨끗하게 씻기운다. 무릎이 상하는 것은 두렵지 않으니 세상구경하는 늙은이에겐 더없이 좋구나. 20: 옥추횡금 /맑은 물에서 거문고를 비켜앉고 거문고 튕기기가 쉽지는 않아 세상천지에 알아 듣는 이 없네. 한곡조가 깊고 맑은 물에 메아리치니 마음도 즐겁고 듣기도 좋네. 21: 보류전배 /흐르는 물길 따라 술잔을 돌림 돌 위에 나란히 둘러 앉으니 푸성귀 나물만으로 충분하네 돌고 도는 물이 절로 오가는데 띄운 술잔만 한가롭게 주고 받네. 22: 상암대기/평상바위에서 바둑두며 바위는 넓고 평평하고 대나무 숲이 절반이네 손님이 찾아와 바둑을 한판 두니 우박이 공중에서 흩어지네. 23: 수계산보/ 긴 섬돌을 거닐며 티끌 많은 속세를 벗어나 잡념을 버리고 계단를 산보하며 한가로이 시 한수를 읊으니 걷고 읊을수록 세상 정을 잊어가네.24: 의수괴석 /홰나무가 바위에 기대어 졸며 스스로 홰나무 옆의 돌을 쓸어내고 아무도 없을 때 홀로 앉아 졸다 깨어 일어서니, 개미에게 물릴까봐 두렵다. 25: 조담방욕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못이 맑아 깊은 곳까지 보이는데 미역감고 나도 여전히 파랗구나. 인간세상은 믿지 못하네 뜨거운 바위를 맨발로 걸어가도 먼지가 묻지 않네. 26: 단교쌍송 /가로지른 다릿가의 두 소나무 콸콸 흐르는 물, 다리 주위 두그루 소나무 남전에도 일이 있으니, 이곳처럼 조용한 곳은 없구나. 27: 산애송국 : 낭떠러지에 흩어져 자라는 소나무와 국화 북쪽의 고개는 층층이 푸르고 동쪽의 울타리는 점점이 노랗네. 녹색의 벼랑에는 갖가지 나무가 있으니 늦가을의 풍상에도 여전하구나. 28: 석부고매 : 돌받침 위에 외롭게 핀 매화 기절을 논하고 싶거든 돌뿌리에 낀 매화를 보아야 하는니 맑고 잔잔한 물까지 함께 했으니 성긴 그림자가 황혼에 지는구나. 29: 협로수황/좁은 길가에 밋밋한 대나무들 눈 속의 줄기는 찌를 듯이 곧고 구름 속의 마들가리는 바람에 휘늘어지는구나, 속대 솟고 껍질 벗으니 새줄기가 푸른 띠를 풀고 나온다. 30: 병석죽근/바위틈에 흩으져 뻗은 대뿌리 서리맞은 뿌리는 속세를 싫어 하나 돌 위로 수시로 들어내는구나, 몇해가 지나면 아이가 자라듯 곧은 마음 늙을수록 꿋꿋하구나. 31: 절애소금/벼랑에 깃들인 새 펄럭펄럭 벼랑을 나는 새 때로는 물에서도 노는구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마시고 쪼으면서 어느덧 백구는 서로 잊었어라. 32: 총균모조/저물어 대밭에 날아드는 새 돌 위의 몇 그루 대나무 상비의 눈물자국 여전한데, 산새는 한을 모르는 듯 황혼녁이면 돌아오는구나. 33: 학저면압/산골 물가에서 졸고있는 오리 하늘이 유인에게 그윽하게 준 것은 맑고 서늘한 한줄기 샘물인데, 아래로 흐를 수록 넓어지는데 오리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34: 격단창포/세찬 여울가에 창포 듣자하니 여울가의 풀은 아홉 가지 향을 가질 수 있다 하니, 나는 물줄기 햇빛을 뿜으니 한 색이 더위와 시원함을 꿰는구나. 35: 사첨사계/처마 곁에 핀 사계화 정녕 꽃 중에서 성스러운 것은 언제나 맑고 화창한데, 기운 처마는 더욱 좋으니 매화와 대나무는 또 이를 서로 알더라. 36: 도오춘효/복사꽃 핀 산언덕의 봄날 새벽 복숭아 언덕에 봄이 오니 안개로부터 붉은색이 퍼지는구나. 마치 작은 동굴안에 들어온 듯 이는 정녕 무릉계곡인 것 같구나. 37: 동대하음/오동나무대에 드리운 여름 그늘 벼랑에 늙은 나뭇가지가 드리워지니 비와 이슬을 맞으며 맑은 그늘에서 자랐네. 태평성세를 오래 누리니 남쪽바람이 지금도 불어오네. 38: 오음사폭/오동나무 그늘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 나무를 보호하는 푸른잎 그늘에도 어제 저녁 내린 비로 풍성한 시냇물이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폭호가 되어 쏟아지니 하얀 봉황이 춤을 추는 것 같구나. 39: 유정영객/버드나무 개울가에서 손님을 맞음 손님이 찾아와 대나무를 두드려서 여러 번 소리에 낮잠에서 깨어나 관을 쓰고 맞으려 가니, 벌써 말을 메고 물가에 서 있네. 40: 격간부거/개울 건너 핀 연꽃 깨끗하게 심어진 비범한 꽃 한가로운 자테가 멀리서도 보이는구나. 향긋한 바람이 골짜기에 이르러 방안에 스며드니 난향보다 짙구나. 41: 산지순아/못에 흩어진 순채 싹 장한이 강동으로 간 후에 풍류를 아는 자 누구인가. 모름지기 농어 회는 아니라 해도 어름 실날같아 맛볼만한 것을. 42: 친간자미/산골 골짜기에 핀 배롱나무 세상의 태평스러운 꽃들이 열흘가는 향이 없는데 어찌 개울가의 저 꽃은 백일 동안이나 붉게 아름다운가. 43: 적우파초/빗방울이 떨어지는 파초잎 은빛화살처럼 떨어지는 비에 파초잎이 출렁출렁 춤추네 고향에서 듣던 것과 비할까 안타까와 오히려 고요를 깨뜨리는구나. 44: 영학단풍/골짜기에 비치이는 단풍 가을이 찾아와 바위골짜깆는 차가운데 단풍잎은 이른 서리에 놀랐네. 고요하게 노을빛이 흔들리는 속에 초목의 떨어진 잎사귀가 거울에 비친 듯. 45: 평원포설/평원에 깔려있는 눈 어느새 산구름이 어두워지고 창문을 여니 눈이 만발하구나 온누리에 깔린 눈이 멀리까지도 희니 부귀가 한가로운 내집까지 다가왔구나. 46: 대설홍치/눈에 덮인 붉은 치자 육각 모양의 꽃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숲에 향이 꽉 찼다고 하는구나. 붉은 열매가 푸른잎을 사귀니 눈서리에서도 맑고 곱구나. 47: 양단동오/陽壇의 겨울 낮맞이 단 앞의 계곡은 아직 얼어 있는데 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구나. 팔 베개를 하고 따뜻한 풍경을 맞으니 닭소리가 한낮임을 알리는구나. 48: 장원제영/긴 담에 써 붙인 소쇄원 제영 긴 담이 가로질러 백척이니 거기엔 하나하나 새로운 시, 마치 병풍을 둘러막은 듯 한데 비바람이 물아 쳐도 든든할 지어다.

 

▲ 소쇄원 대나무 숲

 

사람들은 양산보를 두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선비로서의 기상을 잃지 않았다하여 "처사공"이라 부르거나 소쇄원의 주인이다 하여 "소쇄웅"으로 불렀다고 한다. 양산보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살아생전 얼마나 이 소쇄원을 아끼며 가꾸어 왔는지를 엿 볼 수 있다. "절대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도 소쇄원은 유언에 따라 관리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지금의 모습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이후 다소 축소된 소쇄원의 모습이다. 소쇄원48영으로 알려진 김인후는 당대 문장가이자 성리학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양산보 보다 7년 어리지만 소쇄원에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양산보와는 사돈지간이다. 초입부터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대나무가 늘어서 있다.

 

 

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영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39영을 보면 손님이 소쇄원으로 찾아오는 장면이다. 대문이 없는 소쇄원에 도착한 손님은 어찌 주인장에게 왔노라고 고했을까? 시에서는 말한다. 대나무를 두들겨서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대나무를 두들려렸다는 것을 시적 표현으로 해석을 해야 할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반영을 해야 할지 막연하지만 그래도 소쇄원은 문패도 있고 담장도 있고 초인종 역할을 하는 대나무를 잘라놓고 손님이 오면 둔탁하게 두들겨 잠을 깨웠나 보다.

 

▲ 광풍각으로 향하는 나무다리

 

대문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데 어쩌면 이곳 주인은 입구 대나무를 통해 스스로가 발을 엮어 "저것이 대문이로다"며 문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대나무 숲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소쇄원의 유일한 자연과의 경계인 담장을 지나 위쪽 삼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 까지 자리 잡고 있다. 입구는 소쇄원의 찬시로 알려진 소쇄원 38경 중 37경으로 양단동오의 시제를 따 붙혀진 이름이다. 또한 상당한 종류의 꽃과 나무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울까에 창포도 심어 운치를 더했나 보다. 지금이야 수량이 부족하여서 계곡물이 졸졸 소리를 내지만 당시에는 큰 계류를 형성하고 거침없이 쏟아 낸 것으로 보인다. 내려서면서 오곡문에서부터 따라 흘러온 물소리는 계속하여 퉁퉁..귓전을 따라 때로는 음침한 탕녀의 웃음으로 때로는 촉촉한 여인의 입술을 열어 불러주는 노랫가락을 닮았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기꺼이 공간을 내 주었던 옛 인심이 오늘날은 입장료라는 명분으로 가로막고 있다. 어떤 명분으로 없는 출입구를 가로막고 담양군은 입장료를 징수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담양군 입장료 문제는 여기뿐만 아니다. 담양하면 떠오르는 옛 고속도로 옆 메타쉐콰이어 가로수 도로 일부구간을 입장료를 받는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도 명성에 비하여 입장료 징수가 없고, 경주시는 첨성대를 비롯 담장을 개방하고 오히려 무료입장으로 하는 관광정책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담양시 여행정책에 많은 여행자가 불쾌함을 노출하고 있다. 입장료 금액은 단돈 천원이지만 소쇄원이 대문을 내걸지 않았던 그 소박한 주인장의 마음과 정반대로 가는 입장료와 도로변 가로수에 입장료를 매겨 버린 담양시는 언제적부터 스쳐가고픈 불쾌한 여행지로 변해 버린 것은 사실이다.

 

 

 

천연기념물 제539호 "충효동 왕버들 군"

 

소쇄원에서 다시 가사문학관으로 이동하여 이번에는 광주호를 끼고 광주 방향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충효동왕버들과 개선사지 석등을 만날 수 있어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 왕버들 군

 

광주댐 하류에 위치한 충효동 도로변에 버드나무과 낙엽고목인 왕버들 3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첫 번째 것은 높이 9m, 둘레 6.25m, 수관(水冠) 너비 동서 11.5m, 남북 18.9m이고, 두 번째 것은 높이 10m, 둘레 5.95m, 수관 너비 사방 14m이며, 세 번째 것은 높이 12m, 둘레 6.3m, 수관 너비 동서 16.6m, 남북27m이다.
 

▲ 엄청난 크기의 왕버들이 아직도 푸른가지를 펼쳐 그늘을 이룬다는 사실이 놀랍다.

 

충효동 왕버들은 일송, 일매, 오류라 하여 본래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나무가 있었지만 지금은 왕버들 3나무가 오랜 세월을 이기고 여름이면 푸른 녹음을 자랑하며 400년을 성암마을 입구를 지키면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매화나무는 고사되고, 왕버들 1그루와 소나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잘려버렸다. 

 

▲ 도로변으로 2그루의 왕버들 모습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 이 왕버들 세 그루의 높이는 10미터 안팍이고, 둘레는 8미터쯤이며 나이는 약 430년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 마을에는 일송일매오류라 하여 소나무 한그루, 매화나무 한그루, 왕버들 다섯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왕버 세 그루만 남아 있다. 이 왕버들은 충효마을의 상징이자 비보림으로 "김덕령 나무"라고 불리는 등 나무와 관련된 유래나 이야기가 잘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 한그루의 왕버들 전경

 

왕버들 바로 앞에 있는 장려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1557-1596) 및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김덕령 부인 흥양이씨,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김덕령의 형 김덕홍(1558-1592), 효성이 지극했던 김덕령의 아루 김덕보(1571-1627)를 기리는 비를 모셔둔 곳으로, 정조 13년(1789) 높이 220cm, 기단 폭 110cm 비를 세우고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조선국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기록하고 비각은 1792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올렸다. 김덕령 일가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한 이유는 바로 김덕령 형제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생가와 문중 사당이 마을에 있다.

 

▲ 왕버들 앞 장려비

 

김덕령(자: 경수, 시호: 충장공)은 선조 원년(1568) 12월 29일 광주 석저촌(충효동)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87년 우계 성혼의 문하생으로 수하하다 선조 25년(158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룡과 함께 의병을 모아 고경명과 합류하여 전주까지 진군을 하였지만 형 덕룡은 고향에 계신 부모가 걱정되어 고향으로 내려가 노모를 공양하도록 하였지만 형은 안타깝게 의병장 조헌과 합류하여 금산전투를 치루지만 장렬하게 전사하고, 노모마저 이듬해 돌아가시자 아우에게 집안을 맡기고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천거로 형조좌량에 오른 후 선조 26년 1593) 11월 광주에 격문을 돌리고 담양에서 의병을 모우기 시작하고 1594년 1월 장군은 선전관으로 임명되고 익호장군으로 호를 하사받았다.
 
김덕령은 의병들과 함께 권율 휘하에서 진해, 고성으로 침략하는 왜군을 방어하고, 이순신과 수육연합전을 펼치는가 하면 의병 곽재우와 함께 정암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전공을 세우고 선조는 충용군이란 군호를 하사받지만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에 모함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다 9얼 15일 29세 나이로 옥사하였다.
 
그 후 현종 2년(1661) 옥사한지 65년 후 억울함이 밝혀져 복권되고, 현종 9년(1668) 병조참의에 추종되고, 숙종 4년(1678) 벽진서원에 배향, 정조 12년(1778) 충장공 시호와 함께 장군이 태어난 마을을 충효리로 바꾸었다. 후손들은 1975년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무등산에 충장사를 세우고 추모하고 있으며, 충효동 입구에 형과 아내, 동생 등을 기리는 충효동 정려비가 있다. 또한 충장사에는 충장공의 영정과 교지, 은륜비, 은륜해설비와 유물로 관곽,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묘와 묘비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는 많은 충신을 잃었다. 선조의 나약함이 신하를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생겨나면서 의병장 곽재우 역시 끝내 은신을 하고, 이순신 역시 죽기위해 바다로 출정했다. 김덕령 역시 나라를 위한 공은 사라지고 불신에 의하여 처참하게 죽었다. 왜적의 손에 죽어야 하는 장군이 나라에서 불러들여 옥고를 통해 나라의 충신을 하나씩 죽이면서 토사구팽 한 것이다.

 

▲ 두 그루의 왕버들

개선사지 석등을 만나려면 식영정 반대편에 자리한 산길을 따라야 한다. 식영정을 지나 광주 방향으로 조금 더 따르다 광주호 호반 안쪽으로 진입하는 길의 끝자락 부분에 위치한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석등의 제작기원이 표기되어져 있다. 지금이야 광주호가 차지하고 있지만 이 일대는 많은 사찰이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111호 "담양 개선사지석등"

 

개선사지 석등은 보물 제111호로 충효동 왕버들을 떠나 광주방향으로 조금 향하다 첫 오른쪽 작은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서면 사찰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지만 개선사지 석등 1기만이 남아 옛 불심의 불씨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 개선사지 석등

 

석등은 발견당시 간주석까지 묻혀있던 것을 지대석과 하대석, 산주석 일부를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여 복원한 높이 3.5m의 석등이다. 석등 기둥에 새겨진 조등기는 각기 두줄로 글을 새겨 놓았다. 글은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에 관한 기록이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사찰 승려가 석등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토지의 위치등이 기록되어져 있으며, 연호가 융기3년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학자들은 대순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석등의 조각이 정교하지만 상륜부는 훼손이 심하다.

 

담양개선사지석등 안내글을 옮겨보면 "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 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부가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높이 3.5m로 8각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창을 뚫었으며 각 창의 양편에 해서로 136자의 명문을 적어 놓았다. 1행에서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명문에 쓰인 용기 3년이란 891년(통일신라 진성여왕 3년)에 해당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의 규모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등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景文大王主 2.文懿皇后主大郞主願石燈 3.炷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 4.繼月光前國子監卿沙干金 5.中庸途上油糧業租三百碩 6.僧靈(判 ?) 建立石燈 7.龍紀三年辛亥十月日僧入雲京租 8.一百碩烏乎比所里公書俊休二人 9.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沓四結 五畦 10.東令行土北同 奧沓十結 八 東令行土西北同 上南池宅土西川 畦 上南池宅土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그리고 큰 공주님께서는 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함통9년(경문왕 7년, 868) 무자해 음력2월저녁에 달빛을 잇고자 전임 국자감경인 사간 김중용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 로 3백석을 날라오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건립하였다.(혹은 건립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용기 3년(실은 대순(大順)2년, 진성여왕 5년, 891) 신해년 10월 어느날 승려 입운은 서울에서 보내준 조 (혹은 서울에 보내야할조) 1백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대업에 있는 물가 에 있는 논 4결(주 : 논은 5배미인데, 동쪽은영행의 토지이고 북쪽도 마찬가지이다. 남쪽은 지택의 토지 이고 서쪽은 개울이다.)과 물가로부터 멀리있는 논 10결(주 : 논은8배미인데, 동쪽은 영행의토지이고 서쪽과 북쪽도 같다. 남쪽은 지택의 토지이다.)을 영구히 샀다.

 

 

 

제1편 담양 정자기행은 가사문학산실에 주차를 한 후 식영정을 시작으로 가사문학관을 둘러 본 후 차량으로 다시 소새원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주차하고 소쇄원을 관람 후 다시 가사문학관으로 진행하여 가사문학관 앞 삼거리에서 광주 방향으로 진행하면 입구에 충효동 왕버들과 조금더 진행하면 개선사지 석등을 만날 수 있다. 개선사지 석등은 문학관 앞에서 이정표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없으므로 가사문학관 삼거리를 떠나 충효동을 본 후 첫 오른쪽 산길을 잇는 좁은 길로 진행하면 도로 끝자락 다달아 도로변 아래에 있다.

제2편 정자여행은 계속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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