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삼층석탑 특별한 만남'
천년고도 신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문무왕’ 그리고 문무왕 사후 만들어진 ‘감은사’와 그 흔적만 휭하니 남아 있는 ‘감은사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 본다. 감은사지(感恩寺址)는 사적 제31호이며, 유일한 흔적 동서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이다.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서탑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366호, 동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는 보물 제1359이며, 서삼층석탑 사리엄 장엄구에서 있던 금동 사리기는 보물 제366-1호, 금동 사리외함은 보물 제366-2호로 지정될 만큼 신라사 역사에 있어 중요한 곳임은 틀림없는 곳이다. |
▲ 감은사지 석탑으로 정면에서 왼편이 서탑이며, 오른편이 동탑이다. 사적 제31호이자 국보급 2기의 동. 서 삼층석탑 그리고 1959년과 1997년 양쪽 탑에서 수습된 각각의 보물급 사리엄장엄구 2기를 통해 감은사지는 그 어떤 석탑보다 천년고도 신라의 수많은 사연을 숨겨놓은 신비스러운 공간이 아닐까 싶다. |
▲ 금당으로 올라서는 나무데크길
감은사는 처음부터 아들이 부왕을 위해 조성한 사찰이 아니였다. 문무왕 생전에 진국사(鎭國寺)라는 절을 짓기 시작하였지만 사찰이 완성되기 전 유명을 달리하자 들인 신문왕이 왕이 된 2년 후(682) 사찰이 완성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으며, 금당에서 동해바다가 있는 동쪽으로 구멍을 뚫어 해용이 된 문무왕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
▲ 정면에서 바라 본 감은사지삼층석탑 감원사지 내 노거수
신문왕이 사찰을 완성하고 금당아래 용혈(龍穴)을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불경소리를 듣고 싶으면 늘 해류를 따라 찾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감은사지 앞에 용담이 있다. 감은사터에서 금당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살펴보면 용이 된 문무왕이 찾아올 수 있도록 절 밑바닥에 금당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장대석이 늘려져 있지만 금당의 목적은 분명 다른 사찰에서 찾기 힘든 정교함이 있다. 법당의 섬돌 아래를 해가 뜨는 동쪽방향으로 굴을 만들고 장대석을 올려 빈 공간으로 물이 흘러들어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고 수중릉에서 이곳까지 왕래를 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라는 것이다. |
▲ 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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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서탑
1959년 12월31일 1,300년 만에 처음으로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주악상과 신장상이 새겨진 상자 속에서 부처 사리함으로 추정하는 사리기사를 발견했다. |
표면에는 사천왕상을 정교하게 새긴 놓았으며, 1996년 동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사리공을 발견하였는데 두 탑에 모셔진 사리기에는 서탑에는 봉황, 동탑에는 용이 새겨져 있고 사리는 서탑에서 1과, 동탑에서 54과가 나왔다. 석탑에서 확인되는 다른 부분은 불교에서 윤회설에 입각하여 해탈의 의미로 삼는 태극문양이 있다는 점으로 다른 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문양을 하고 있다.
1959년 감은사지 서삼층석탑에서 "청동제사리기(보물 제366호)"가 발견된 후 1996년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동탑과 서탑에서 각각 발견된 두 개의 사리탑은 어떤 의미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는 부처의 사리함을 두 개로 나누어 탑에 봉안한 전례가 없다는 점으로 볼 때 부처와 버금가는 인물로 당시 문무왕 밖에 없다는 것으로 감은사지는 문무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신문왕이 만든 사찰로 두 개의 큰 불탑 속에 나란히 안치하여 위엄을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
▲ 동탑 |
사찰의 흔적은 공허한 터만을 남겨 둔 채 겨우 두기의 석탑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지만 석탑의 규모는 결코 화려하거나 섬세하지 않은 반면 웅장하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기백을 담고 있다. 시샘이라도 하듯 두 탑이 닮아 있다. |
▲ 금당 뒷편에서 바라 본 감은사지 삼층석탑 |
문무왕은 신라 제30대(재위 661~681)왕으로 태종 무열왕(604~661)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누이였던 문명왕후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 김법민(金法敏)이며, 676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왕이다. 문무왕은 56세(681)이던 7월 1일 유명을 달리하며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석탑 두 기는 신라 문무왕2년(682) 사찰을 완성 했을 당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4m로 신라시대 석탑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를 여러 개의 석재를 조합하나 조립한 형식이다. |
▲ 감은사지 금당터 추정 석재 |
▲ 금당터 입구에 있는 석등으로 추정되는 석재 |
유물 중 장대석이 눈길을 끈다. 학자들은 태극문양을 추분점(하현)으로 보며, 양쪽을 동지점(그믐)과 하지점(보름)으로 경주의 동지고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경주에 살던 신라인은 당시 만월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고 있다. 어떤 학자는 감원사지 태극문양이 태극기의 원조로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설보다도 388년이나 빠른 조각이라고 한다. |
삼국사기‘문무왕’조편에는 이러한 내용도 있다. ‘群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군신이유언장동해구대석상)’ 즉, 사후 동해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장사지내라는 내용이다. 또한 불교식으로 화장 후 바다에 뿌려라 는 유언은 문무왕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은 통일하여 평화를 누리겠지만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걱정되어 사후 해룡이 되어 바다를 넘나드는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마음 이였는지 모를 일이다. |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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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에서 바라 본 문무대왕릉 전경 |
경주 문화유산의 끝자락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도착하면 망망대해 동해바다 해안가에 작은 바위섬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을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라 한다. 사적 제158호 문무왕의 릉이 경주시에서 흔하게 만나는 대형급 고분이 아닌가에 관한 이야기로는 불교 방식으로 죽음 사후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언에 따른 국내 첫 수중릉 무덤인 것으로 대왕암은 둘레가 200m 정도의 암초 안쪽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 정도의 큰 돌이 남북으로 걸쳐있어 그곳에 화장한 유골을 안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
개인적 생각으로 수중대왕릉에 접근해 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당시 장례는 4세기 경우 토광묘를 비롯하여 소형 석곽묘에서 적석목곽분(땅을 고른 후 돌을 깔고 나무곽을 세워놓고 그 속에 다시 나무관을 넣는)으로 변화를 하며 6세기는 적석목곽분을 대체하는 횡열식 석실(합장이 가능한 일명 부부묘/황남대총)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왜 문무왕은 최초로 화장을 택했을까?
문무대왕릉을 두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대왕암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에 좌우가 열십자로 갈라지고 중앙에는 거북등 모양의 큰 돌이 올려놓았으며, 대왕암의 웅덩이 수심은1.5m로 안쪽을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지만 그러면 당시 문무왕의 대단한 인물로 바위에 문무대왕수증릉이란 어떤 표기마저 해 놓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
문무왕은 자신이 죽고 열흘 뒤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한다. 화장터는 고문외정(고문의 바깥뜰)인데 당시의 고문와정은 알길이 없고 단지 1970년 형체식별조차 어려운 탑과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탑 이름을 능지탑으로 부르며, 일반적인 탑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 고문와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
▲ 이견대 |
죽어서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수중에 유골을 안치하니 곧 수중대왕릉(문무대왕릉)이다.
문 무 왕 : 나는 죽어서 용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의스님 : 아무리 용이 영물이라 하나 축생인데, 대왕 같은 분이 짐승으로 태어나서야 되겠습니까.. 문 무 왕 : 아닙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면 여한이 없으리이다.
왕이 죽음에 일러 죽어 용이 되길 유언하니 이를 받들어 화장 한 후 수중릉에 안치하였는데 1년 후인 682년 오월 초하루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위에 떠서 옮겨 다녀 진상을 살펴 신문왕에게 고하니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며, 김유신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어 두 분이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킬 보물을 줄 것이라 말하니 즉시 임금이 5월 7일 이견대로 행차하니 만파식전을 얻었다 한다. |
개인적 견해
문무왕(626~681)은 죽음이 가까워지던 시기 진국사(鎭國寺)를 짓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평소 문무왕은 사후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라 는 말을 하였고, 56세(681) 나이로 7월 1일 유명을 달리한다. 신하들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신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도 왕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린 전례가 없는 일이였지만 문무왕은 사후 불교식 죽음을 준비하였다. 나라를 호령하던 영웅도 죽어 한 줌의 흙이 되는 것이 당연하니 애써 재물을 들여 힘들게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을 따라 화장할 것을 유언하였기에 불교식으로 장례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장작을 쌓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교 장례식인 다비식(茶毘式)이 진행되었고 사리 수습 및 뼛가루를 모아 동해바다에 뿌리며 장사를 지냈을 것이다. 왕의 신분으로 불교식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문무왕(재위661~681)에서 혜공왕(재위765~780) 시기를 두고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전성기로 알려져 있다. 삼국대업과 함께 불교도 크게 융성하였고 그로인하여 원효, 의상, 원측 등 고승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했던 문무왕의 파격적인 불교식 죽음은 이후에도 신라왕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문무왕의 화장 장례식은 이후 34대 효성왕, 37대 선덕왕, 38대 원성왕 그리고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까지 이어졌다.
불교식 장례를 치룬 신문왕(?-692)은 부친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부친이던 문무왕이 초석을 다져놓은 진국사(鎭國寺)를 서둘러 마무리 한다. 그리고 당시 1가람 1탑 형식을 과감하게 떨쳐내고 1가람 2탑 형식의 쌍탑을 나란히 세우고 각각의 탑 속에 사리함을 모시게 된다. 삼국의 대업을 이룬 대왕의 사리를 모시면서 목탑이 아닌, 튼튼한 석탑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규모도 신분에 어울리도록 큰 탑을 세우고 서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동탑에는 문무왕의 사리를 모셨을 것이다. 이후 1가람 1탑의 목탑에서 1가람 2탑 석탑형식을 갖춘 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신라땅 곳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 해 본다. |
문무왕은 사후 무덤을 만들지 말라 유언을 하였다면 현재 무덤이 존재할 수 없다. 동해바다 바위에 올라 뼛가루를 뿌린 곳을 훗날 대왕암으로 부를 수 있지만 대왕암 무덤 즉, 수중릉은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마지막 떠나보낸 곳으로 기념적인 공간은 충분하다. 만약 수중릉이 맞는다면 문무왕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위에 열거한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역사를 연구하거나 연구하고픈 생각도 없다. 단지 문무대왕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박물관에서 만난 서탑 사리장엄구(보물 제366호)와 동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59)가 머리를 스쳐갔기 때문이다. 탑속에서 확인된 사리장엄구와 금동사리외함(보물 제366-2호)을 처음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만약 하나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면 그건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는 부처의 사리함이지만 또 하나의 건너편 탑에서 사리함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 부처와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으로 추정, 당시 문무왕일 가능성에 집중을 하다 보니 쌍탑에 관한 억척까지 진도가 나간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인터넷에 떠도는 설과 다르다하여 짱돌은 던지지 말길 바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여행하면서 느낀 생각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학자들도 좀 더 폭넓은 생각으로 다가서기 해 본다면 나보다 더 넓은 곳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
경주의 대표적인 황룡사, 사천왕사, 감은사는 오늘날 어떤 이유로 역사 속에서 흔적을 찾아야 할 만큼 철저하게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중에서 감은사를 지키던 석탑이 오늘날까지 거의 훼손이 없이 폐사된 절터를 지키고 있다. 감은사지 석탑은 백제의 목탑양식과 신라의 모전석탑 양식이 결합된 웅장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며, 뒤편으로 절터의 흔적과 당나무로 알려진 느티나무가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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