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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해] 경주에서 울산-동해안 등대여행

허영꺼멍 2015. 1. 23. 09:06

 

 

경주에서 울산 - 동해안 등대여행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전촌항-감포항-연동항-구룡포항-호미곶-대보항을 잇는 52km 동해안을 달려 가 본다. 전촌항에서 만나는 방파제타일벽화, 감포항 송대말등대, 연동항 치미등대를 만나고 포항시 경계로 넘어서면 구룡포항과 구룡포근대역사관 일제강점기 형성된 적산가옥을 만난 후 호미곶을 거쳐 오늘의 마지막 여행코스 대보항 방파제 트릭아트까지 이어진다.

 

 

여행은 가급적 좁고 느린 해안길이나 해안 마을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큰 도로를 피하는 만큼 돌아가야 하는 시간적 손실을 감수하는 대신 동해바다의 속살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면서 여행하는 즐거움은 몇 배로 되돌아온다.

 

 

타일벽화가 아름다운 전촌항

 

 ▲ 전촌항 입구 말 조각상

 

전촌항에 들어선다. 천리마를 연상하게 하는 말 한 마리 허공에 조각되어 있다. 옛날 포니 차량에 부착되었던 말 디자인이 갑자기 머리를 스쳐간다. 전촌항은 항구내 넉넉한 주차공간을 자랑한다. 방파제가 항구를 감싸 안고 테트라포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 릴대에 청갯지렁이 미끼로 일명 구멍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제법 큰 놀래미를 낚아 올리는 곳으로 200412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어촌관광단지 조성지구로 선정된 전촌항은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 전촌항 방파제 끝자락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 전촌항에서 만나는 타일벽화 전경.

 

 

 

2013년 전촌항 동방파제를 따라 타일벽화가 생겨났다. 길이 146m, 3.3m 규모의 타일벽화에는 용과 말 그리고 문화재를 이형모자이크 타일을 이용하여 그려 놓았다. 전촌항 뒤편 마을 산에서 보면 큰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며,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훈련 후 말을 주둔한 곳이라 하여 거마장(居馬場)으로 불렀다 한다. 전촌항은 이견대에서 약 7km 지점이며, 전촌항으로부터 감포항은 2km, 송대말 등대는 3.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등대가 아름다운 감포항

 

감은사지에서 감포항까지 약 10km 거리로 10, 읍천항까지 9.6km 거리로 15분이면 도착한다. 일출을 보기 위해 경주 동해안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문무대왕릉에서 일출을 만난다. 경주여행을 하는 외지인이 횟감을 찾아, 바다를 찾아 비릿한 감포항을 찾았지만 지금은 읍천항 주상절리로 인하여 감포항은 동해남부 중심 어항이지만 점점 밀려 퇴색되는 듯 보인다.

 

▲ 방파제에서 바라 본 감포항 전경

 

감포항은 19951229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감은사지와 가까워 감은포로 부르다 음이 축약되면서 감포가 되었다 한다. 감포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번창했던 곳으로 항구 끝자락 언덕에 감은사지 석탑을 모델로 만든 새로운 송대말등대와 구 등대가 있다. 감포항에는 참참참이라는 대표적인 수산물로 유명하다. 3참으로 불리는 참참참은 참전복과 참가자미, 참복어이다.

 

 

 

감포 송대말(松臺末)등대

 

감은사지 삼층석탑 등대가 동해바다를 지키고 있다.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송대말 등대는 1955년 밤바다를 지켜오다 2001년 새로운 등대에게 자리를 건네주고 지금은 쉬고 있다. 1920년 개항이후 1955년 감포 축항이 생겨나면서 북단에 무인 송대말 등대를 세운 후 1964년 대형등명기를 설치하면서 등대지기가 머무는 유인등대로 바뀌었다. 그 후 200112월 감은사지 삼층석탑 모형을 한 새로운 등대가 남방파제에 건립되었다.

 

▲ 등대에서 바라 본 감포항 등대, 송대말 등대

 

등대는 300년 된 소나무에 둘러싸여 절경을 자랑한다. 송대말 등대는 지명은 이 일대가 일제강점기 당시 절리주변에 시멘트로 인공어장을 만들어 해산물을 보관해 두었다가 먹던 곳으로 오다공원으로 부르며 조선총독부 고관과 일본인 유지들이 들락거렸던 곳으로 조선총독부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감포 송대끝이라 부르며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오늘날까지 송대말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 구 등탑을 대신하는 새로운 등탑으로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모델로 하였다.

 

▲ 구 등탑

▲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모아두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시설 흔적

 

▲ 바다에 떠 있는 등표

▲ 유인등대 숙사

▲ 등대입구 솔숲

 

▲ 등대 아래 해안은 동해바다 물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등대마다 고유의 불빛 신호가 있다. 경주에서 동해안 자락을 따라 오르는 길목에서 만나는 송대말등대(34)이며, 호미곳등대(12), 후포등대(10), 죽변등대(20)이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선은 밤이면 등대의 불빛을 따라 향해하는데 붉은등은 왼쪽, 녹색등은 오른쪽으로 진입하라는 신호이다. 송대말 등대 앞에 검정몸통에 노란 옷을 입은 등대가 보인다. 정식이름은 관암등표로 실시간 해양관측시스템이 설치된 등표이며, 송대말 등대의 정식 명칭은 송대말항로표지관리소이다. 구 등대는 촛대처럼 깔끔한 몸매를 자랑한다. 백색등탑과 녹색 소나무 그리고 뒤편으로 보이는 경주 기왓지붕과 감은사지 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새로운 등대가 서 있다.

 

 

연동항 치미(鴟尾)등대

 

감포 깍지길 의 제2코스 지점 감포읍 오류4리에서 만나는 작은 포구 연동항은 본래 이 일대에서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이 해방 직전까지 있던 곳이라 하여 염동(鹽洞)으로 부르다 연동으로 고쳐 불린다. 현재 7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이곳은 반농반어촌 마을로 최근 체험마을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 정자에서 바라 본 방파제 전경

 

연동항 주변 연동마을은 적바위가 있다. 바위가 붉지는 않지만 황토색을 뿌려 놓은 듯 한 바위로 태지바위, 장군바위, 마당바위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신라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이 지극정성 기도를 올렸던 곳이라 하며, 이곳에서 연동항 및 경주 감포댐을 조망할 수 있다.

 

오류4항을 연동항이라 한다. 조용한 연동항에 201311월 새로운 조형등대가 방파제 끝자락에 들어섰는데 이미지는 경주 문화재 중 황룡사 치미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하였으며 밤이면 멋진 야경을 자랑한다.

 

치미등대로 향하는 방파제 길에서 규모가 소형급에 속하는 3컷의 트릭아트 그림을 만날 수 있다.

 

▲ 방파제 길에 그려진 트릭아트

▲ 트릭아트 벼랑위 나무계단

▲ 트릭아트 죠스

 

▲ 연화정

▲ 아라나비

▲ 치미등대

 

연동항에서는 연화정에 올라 항구와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연동항에는 특별한 요트체험과 해양레포츠 기구인 아라나비가 연화정 좌,우 해변을 따라 연결되어 있으며, 연화정 앞 공간은 주차장이다. 로프를 타고 600m 활강하는 아라나비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찌릿함을 체험할 수 있다.

 

▲ 무리에서 떨어진 가마우지.

연동항에서 가마우지가 날개에 낚시줄이 걸려 날지 못하고 사람이 다가가면 물로 겨우 이동하여 피하고 있었다. 붙잡아야 줄을 풀어 줄 것인데 아쉽게도 몇차례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구룡포(九龍浦)항

 

전국 대게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해안 최대어항 구룡포를 찾는다. 구룡 즉,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구룡포(九龍浦)로 불리는 곳. 신라 진흥왕 당시 장기 현감이 용주리를 막 지나갈 때 천둥과 함께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구룡이라 불렀다 한다. 바다에서 무슨 아홉 마리나 되는 용이 승천을 하였을까? 현대적 과학으로 보면 용오름 현상을 목격한 것으로 보인다.

 

▲ 구룡포항 앞 대게거리

 

구룡포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항구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동해안 앞바다는 엄청난 수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울산 장생포와 함께 이곳에서도 1947년까지 고래잡이가 성행하였고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인 I.W.C에 가입하면서 동해안 고래잡이는 중단되었지만 이미 수많은 고래를 일본에 의해 포획, 거의 멸종이 되었던 시기였다. 구룡포 전성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인 1920년에는 일본어선 900여척과 조선어선 100여척이 모여 들었다한다.

 

 

 

▲ 햇살에 말라가는 과메기

 

구룡포항은 고래잡이 중단이후 1990년 접어들면서 동해안에서 건져 올린 청어(관목어.貫目魚)로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호미곶 인근 까꾸리게 해안에 파도가 심하게 몰려오면 청어가 바위까지 밀려와 까꾸리로 긁을 만큼 많았다 한다. 조선시대 나라에 진상했던 청어과메기는 이후 청어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꽁치가 청어를 대신하고 있으며, 꽁치도 대부분 북태평양에서 잡은 원양산으로 부산 감천항에서 공급을 하고 있다.

 

 

구룡포근대역사거리.적산가옥

 

▲ 근대화역사거리 입구 전경

 

적산가옥을 만난다. 일본인이 살다 해방과 함께 도망치듯 빠져 나가며 남겨진 재산을 적산(敵産)이라 한다. 원수 적 낳을 산 즉, 원수가 남긴 재산이란 의미로 보면 된다. 산업화 속에서 용케 일본인이 살던 가옥들이 무너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제가 고래잡이를 하면서 크게 번창시킨 항구가 침체기를 겪는 과정에 개발이 지연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장보전이 된 듯하다.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입구 계단 좌우에 돌기둥이 비좁을 만큼 서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한문 이름 뒷면이 시멘트로 처리되어 있어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 공원입구 계단과 돌기둥돌은 1944년도 일본인들이 새겼으며 돌기둥은 왼쪽 61개 오른쪽 59개 등 모두 120개가 있다.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어버리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 세웠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앞뒤를 돌려 세운 돌기둥에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하시모토 젠기치 살림집이자 근대역사관 전시관이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에 관한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에서 이주해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해방 후 개인주택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포항시가 매입.수리하여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100여 년 전 모습들이 잘 남아 있으며 당시 생활모습을 다양한 전시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 의장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 적산가옥거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구룡포는 일제강점가인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권역의 어업을 관할하면서 일본인들의 유입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현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위치한 거리에는 병원과 백화상점, 요리점, 여관 등이 늘어서고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지역상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일본가옥들은 각종 개발과정에서 철거되고 오랜 세월 동안 훼손되면서 과거 우리 민족에게 아팠던 역사의 산 증거물이 사라져 가는 실정을 맞았다. 이에 포항시는 지역 내 가옥을 보수.정비하여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 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를 조성했다. 20113월부터 시작된 정비사업을 통해 457m 거리에 있는 27동의 건물을 보수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201212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도심활성화 사업의 우수 사례로 선정됐다.’

 

▲ 골목에서 만난 추억상회

▲ 공원에 위치한 용왕당

▲ 재현된 일제강점기 당시 우체통

 

추억의 과자를 파는 추억상회 그리고 구룡포 제당이 공원에 있는데 이를 용왕당이라 한다. 용왕당에는 용신할매가 아니라 사해용왕인 남신을 모시고 있으며, 본래 건물이 있던 곳은 일본 신사 지역으로 1956년 신사를 조성하였지만 2008년 철거하고 새롭게 만든 건물이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 거리에서 재현해 놓은 1900년대 당시 모형 우체통

 

▲ 구룡포 공원 내 마을 이주를 주도했던 도가야 야사브로 송덕비가 시멘트로 가려져 있다.

 

구룡포항이 성업 중이던 일제강점기 당시 구룡포 앞 언덕자락을 따라 천여 명의 일본인이 이주해왔고 마을을 이루었는데 오늘날 구룡포 일본가옥거리이다. 구룡포로 이주한 일본인 도가와 와사브로는 구룡포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이주 10여년이 지난 1933년 약 330여 채의 일본집이 형성되었다 한다. 오늘날 일본인가옥거리를 대표하는 홍보전시관이 1938년 구룡포어업조합장을 지낸 하시모토 젠기차의 2층 주택이다. 가옥 뒤편으로 구룡포공원이 있으며, 이곳 이주를 주도했던 도가야 야사브로 송덕비가 있으며, 송덕비는 해방과 함께 내용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 구룡포 구룡조각상

 

공원 앞에는 201471일 완공한 구룡포 상징하는 청동(브른즈), 화강석으로 만든 용 아홉 마리의 조각 작품이 동해바다를 향해 서 있다.   구룡포 적산가옥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배경지로 나왔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았고 최근 구룡포근대화역사거리를 조성하면서 구룡포를 찾은 탐방객이 둘러보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470m 거리에 약 80여 채의 적산가옥 중 28채를 보수하여 당시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 과메기 문화거리 아라광장

 

항구에는 과메기 문화거리 아라광장이 조성되어 오가는 탐방객을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곳 구룡포항은 예로부터 과메기를 만든 원조지역임을 홍보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

 

삼정리 주상절리를 만난다. 포항에는 이곳 삼정리 외에도 내륙 달전리에도 주상절리가 이미 확인되었다. 구룡포항을 출발하여 해안 마을길을 빠져 나가면 삼정리주상절리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에 무슨 절리가 있나 싶어 내려가 보니 해안가를 따라 작은 벌집구조를 하거나 용암이 식어 형체를 이룬 모습을 만날 수 있었지만 절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고 벌집구조도 정확하지 않았다.

 

 

호미곶 등대

 

▲ 호미곶 전경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이 영양인 사람이 예언이 유명하여 선조 때 동서분당을 미리 예언하는가 하면 1592년 임진왜란을 명종 말기에 예언해서 유명한 풍수지리학자 남사고의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 한반도를 두고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백두산이 코에 해당하고 호미곶이 있는 곳을 꼬리에 해당한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지금도 장기반도 끝자락을 호랑이 꼬리로 부르며 동외곶(冬外串장기곶(長寅串) 즉 오늘날의 호미곶이다. 호랑이 꼬리부분에 관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정기를 막기 위해 호랑이를 힘없고 어리석은 토끼로 비유하여 불렀다.

 

 

 

▲ 새천년타워에서 바라 본 전경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잔재에 관한 정기회복 운동이 벌어지면서 1982년 경북도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후 지역명에 따라 대보등대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2001년 장기곶으로 불리던 곳을 호미곶으로 복원하면서 호미곶 등대 또는 대보등대로 부르고 있다.

 

▲ 호미곶 등대

 

호미곶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는 등대이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등대는 인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로 광무5(190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청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 연안으로 행해 중 호미곶 근처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되고 전원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일본은 해운시설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19023월 착공하여 190312월에 준공하여 오늘날 등대로 자리 잡게 되면서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 등대 앞 호랑이 상

 

호미곶은 일출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육당 최남선은 조선 10경 중 하나로 손꼽았을 정도로 일출을 자랑하는 이곳에는 고려 초기 박인량이 쓴 설화집 수인전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의 동해 바닷가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부부였는데 신라 아달라왕 4년에 연오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역을 따로 나갔다가 바위에 올라섰는데 그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일본의 어느 섬으로 가게 되었다. 연오랑이 없어진걸. 뒤늦게 알게 된 세오녀는 바다를 찾아가 남편을 그리워하는데 남편은 일본의 작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보통사람이 아니라며 그곳의 왕으로 추대 되었다.

 

 

어느 날 세오녀는 남편이 벗어둔 신발이 올려진 바위를 보고 그곳에 올라서자 세오녀도 갑자기 바위에 실려 떠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정작 사라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없어져 버렸고 놀란 왕은 일관을 불러 점을 쳐보니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고 말하자 왕이 급히 사신을 보냈고 사신은 연오랑과 세오녀를 만나 자초지경을 이야기 하니 이들은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는 갈 수 없지만 세오녀가 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을 내주면서 돌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다시 해와 달의 정기를 되찾을 것이라 하였다. 사신은 비단을 들고 와 제사를 지내니 정말 해와 달이 밝아졌는데 당시 제사를 지낸 곳이 영일현으로 지금의 영일만으로 간절곶 해맞이 광장에 두 부부의 조각상을 두고 있다.

 

▲ 상생의 손

 

해맞이공원에는 두 개의 손 모양이 있다. 상생의 손으로 불리는 두 개의 손은 오른손이 바다에 있고, 왼손은 육지에 있으며, 각각 오른손 높이가 8.5m 이며, 왼손이 약간 낮은 5.5m로 바다와 육지의 시선처리를 위해 높이를 제각기 하고 있다. 또한 왼손 앞에는 20세기 마지막 불씨와 호미곶에서 채화된 새천년 불씨,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갖고 온 불씨로서 영원한 불이 타고 있다.

 

▲ 등대박물관

 

 

▲ 전망대 주변 갈매기

 

 

 

호미곶 등대 앞 해안가 일대에 수많은 갈매기가 모여 풍경을 연출한다. 과자를 주며 갈매기를 유혹하려는 사람들과 먹이를 보고 순식간에 나타나 낚아채 가는 모습, 동시에 너무 많은 갈매기가 몰려들어 무서워하면서도 즐거워한다. 갈매기가 동시에 바위에서 비상하여 허공을 가르는 모습도 뻬놓을 수 없는 환상적인 그림을 연출한다.

 

 

대보항 트릭아트 방파제

 

▲ 대보항 전경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에서 만나는 어항으로 197112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대보항은 동명으로 불리다 태부로 개명 그리고 대부로 개칭된 항구로 호미곶과 이어져 있는 항구이다. 항구를 지키는 대보항 등대는 2002227일 착공하여 20021230일 준공된 등대이다.

 

 

 

 

호미곶 상생의 손을 대보항에서 만난다. 대보항 트릭아트 벽화길에서 만나는 평면의 그림을 입체적으로 그려놓아 등대로 향하는 탐방객을 즐겁게 하고 있다. 트릭아트는 대보항 방파제로 가는 바닥을 따라 세계최장 160m에 그려진 작품이며, 방파제에는 총 3개의 아트 그림이 있다.

 

 

 

전촌항 경북 경주시 감포읍 전촌리 1240. 경주 방파제타일벽화

감포항 경북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 589-2 경주 송대말등대

연동항 경북 경주시 오류리 130. 경주 치미등대 적바위

구룡포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477-1 적산거리, 구룡포근대역사관

호미곶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2

대보항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 61-24 방파제트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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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