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림동고인돌.진남관.선소 |
| 벅수여행 | 전라남도 여수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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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로 진입하면서 스쳐가기 쉬운 오림동 암각화를 만난 후 진도대교 방향으로 동선을 잡고 연등동 벅수와 진남관 그리고 거북선과 관련이 있는 선소를 우선 만나보기로 하였다.
여수시를 방문하는 여행객도 연등동 벅수나 오림동 암각화는 거의 찾지 않을 만큼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연등동 벅수와 선소에서 만나는 벅수 그리고 진남관 까지 다양한 모습의 벅수를 만나는 여행길이기도 하다. |
오림동 고인돌 암각화
▲ 오림동 암각화를 옮겨 놓은 선사유적공원
암각화는 선사시대 주술적 의미와 기원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전 세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 암각화는 경상남북도 지역과 전라남도 지역에서 국한되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포항 인비리, 칠포리를 시작으로 거의 유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어 우리나라에 이동한 민족에 관한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
▲ 오림동 암각화가 보호각에 쌓여 있다. |
암각화의 종류는 그림과 바위에 구멍을 파는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곳에는 꼭 하나의 그림형식이 확인되어 재단석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전북 고창 고인돌의 경우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여수시 역시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 그림이 그려진 고인돌은 오림동고인돌이 유일하다. 오림동 고인돌은 본래부터 지금의 장소에 있던 것이 아니라 호암산과 마래산 협곡에 자리한 오림정 마을 앞에 있던 것을 진남체육관을 조성하면서 체육관 입구로 옮겨졌고, 다시 선사유적공원으로 옮겨와 훼손을 막기 위해 아크릴로 가려 놓았다. ▲ 뒷편에서 바라 본 옮겨 온 고인돌 |
오림동 암각화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암각화란 자연속에 노출된 바위나 동굴벽에 여러 가지 동물상이나 기하학적 상징문양을 그리거나 새겨놓은 그림으로 암각화. 암화.암벽각화. 암벽화라고도 한다. 5호 고인돌에 새겨진 암각화는 전남지방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고인돌 덮개돌 남쪽 측면에 새겨진 암각화는 면의 중심부에 집중 배치하고 있고, 그 중심은 돌칼이다. 이 돌칼은 내부무시적 화법을 구사하여 칼집을 표현하고 있다. 석검 좌측에 새겨진 인물상은 무언가를 받치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오림동 암각화의 제작기법은 쪼아파기를 기본으로 그어파기를 하였으며, 일부에 갈아서 면을 고르게 한 것이 있다. 이러한 제작기법은 선사시대의 암각들의 보편적인 기법이다.’
▲ 고인돌에 새겨진 그림을 아크릴판에 옮겨 놓았다.
오림동 5호로 명명된 고인돌 덮개돌에는 남. 여가 큰 검(석검)을 향해 빌고 있는 모습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분이 어려운 그림을 바위면 중앙 큰 검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큰 검은 내부 투시법을 이용하여 칼집을 그려 놓은 점이 매우 특이하다. 또한 고인돌에서 사람을 그린 예가 오림동이 유일하며, 대부분 고인돌에서 나타나는 작고 큰 홈 또는 홈과 홈을 연결하는 방식은 전혀 없다는 점이 경상도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 선사시대 움막 |
선사유적 공원에서 만나는 오림동 5호 고인돌을 다시 만나니 반갑다.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진남체육관 입구에서 한때 만났고 그때는 그림도 선명하였는데 세월을 달리하여 찾아가 보니 또다시 옮겨져 이번에는 화장동 선사유적공원에서 겨우 석검의 윤곽만 희미하게 남아 보이는 고인돌을 만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떠도는 신세가 된 고인돌이 있는 곳은 선사시대를 재현한 곳이지만 이 또한 너무 휭한다. 말이 국내 최대 선사공원이지 낡은 움집 몇채가 전부였다.
1990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오림동 5호 고인돌 외 여수 화장동 화산 고인돌군과 여수 월하동 고인돌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와요지 2기가 함께 옮겨와 있다.
오림동 고인돌은 독특한 그림이 있다는 점과 간돌칼, 민무늬토기가 확인되는 등 국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안삼암 암석의 고인돌이다. |
여수 오림동 지석묘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세계 거석문화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주로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여수 오림동에 위치한 고인돌은 10여기가 무리지어 있었으며, 1988년 발굴조사 되었다. 형태는 받침돌이 있는 바둑판식으로 땅 속에 돌로 쌓아 만든 무덤방이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2~4m로 다양하며, 두께가 1~2m로 웅장한 고인돌이다. 이 가운데 5호 고인돌의 덮개돌 측면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새겨진 그림이 발견되었다. 그림에는 간돌검 1점이 중앙에 새겨져 있고, 이를 향해 있는 2명의 인물상, 이외의 여러 물상들이 있다. 특히 인물상은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과 두 손을 가운데로 모아 합장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발견된 이 바위그림(암각화)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미의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당시 장례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고인돌들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간돌검, 간화살촉 등의 석기류, 그리고 각종 구슬과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고인돌은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등동 벅수 |
진남관을 찾기 전에 잠시 연등동 산허리춤을 따라 오른다. 이곳 여수시에 독특한 석장승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석장승이 낮은 위치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면 이곳 연등동 벅수는 국내에서 만나는 석장승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을 지키고 있지 않나 싶을 만큼 높은 곳으로 최근에 보호각을 만들어 놓았다. |
▲ 화정려와 남정중 벅수 |
연등동 벅수(민속자료 제224호)는 옛 전라좌수영성의 서문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장승으로 동편 벅수는 하늘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진 남정중, 서편 벅수는 땅을 관장하는 신인 화정려를 각각 새겨놓은 마을 벅수로 잡귀와 유행병을 막고 하늘과 땅을 평정하여 화마와 수마로부터 보호를 받고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서편 벅수는 땅을 관장하는 신인 화정려 |
연등동 벅수는 제작시기가 뚜렷한 벅수로 서편 여자벅수 뒤편에 무신4월28일오시립(戊申四月二十八日午時立)이란 명문을 통해 정조 12년(1788)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 석장승은 길이 174cm, 머리길이 85cm, 둘레 145cm로 북두형 관모를 쓰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장승은 길이 166cm, 머리길이 86cm, 둘레 130cm이다.
▲ 동편 벅수는 하늘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진 남정중 |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벅수 중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매우 큰 코로 일반적 석장승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남장승에 비해 여장승의 코는 많이 훼손되어 있다.
▲ 우뚝한 날카로운 콧등을 보이고 있다. |
여기서 살펴볼 것은 우리나라 석장승의 보편적 이름과는 달리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 등으로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쓴 역사조에는 화정과 남정은 관직명이며, 중과 려는 좋은 사람으로 화정려는 남쪽바다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이라는 데에서 유래하여 일제강점기 이후 연등동이 된 곳이다.
여수 진남관에서 봄 향기를 느끼다. |
▲ 주차장에서 진남관으로 오르는 망해루를 지나 통제문 앞 전경
진남관 주차장이 만원이다. 30여분 대기하다 겨우 주차를 한 후 망해루를 시작으로 통제문을 거쳐 진남관에 오른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되었고 전라좌수영 본영이 여수로 거북선을 처음 출정시킨 곳이자, 선조 26년(1593) 8월~선조 34년(1601) 3월까지 삼도수군 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한 곳이다.
▲ 여수시내 방향으로 바라 본 망해루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
▲ 진남관 전경
진남관(국보 제304호)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했던 객사 건물이다. 정면 15칸, 측면 5칸, 면적 240평에 팔작지붕을 하고 전 공간을 개방해 놓고 있지만 본래 건물은 왕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례 참배를 하며, 나라의 경사시 하례를 올리고 슬픔이 생기면 봉도식을 치룬 곳으로 벽체가 있었지만 없어지고 개방되었다. 선조 32년(1599) 건축하여 선조 42년(1609)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제면이 다시 중건한 건물로 창호가 없고 68개 민흘림두리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국내 지방관아 건물로는 최대 규모이다.
▲ 돌산공원에서 바라 본 진남관 전경 |
진남관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선조 32년) 통제사 이시언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6(숙종 42년) 화재로 불탄 것을 1718년(숙종 44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이순신 전사 120년이 되는 해를 기려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여수 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의 중건기는 1953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글씨는 중건 당시에 이제면이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곳곳에 서려 있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진남관 앞에 있는 2개의 돌기둥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수군들의 밤 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에는 4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전한다.’
▲ 매화가 활짝 피어 봄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2월 말부터 백매가 활짝 피어 있었다. 본래 이곳에 매화가 많아 매영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최근 건물의 상태가 위험하여 2018년까지 전면 해체 보수작업 중으로 건물 내 마루에 잠시 머물렀다 갈 수 없어 아쉽다. 무려 300여 년 만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보수작업이다. 진남관 앞으로 임란 당시 설치해 운영했던 오관오포(五官五捕)가 바람에 펄럭인다. 담장에서 내려다보면 가까운 거리에 이순신 광장과 장군도 그리고 돌산대교가 조망된다. |
진남관이 위치한 터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제임 당시 본영을 삼았던 곳으로 임진왜란 후 선조32년(1599) 삼도통제사 이시언이 객사를 만들서 소실과 중건을 거쳐 1910년부터 여수공립보통학교,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교실로 사용되다 1981년 보수를 끝내고 개방되었다. |
여수 시내를 내려다보는 정면 출입구 왼편에 서 있는 높이 2m의 여수석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은 거북선을 만들 당시 이순신이 왜적의 염탐을 막기 위해 화강암으로 석인 7구를 만들어 위장 배치할 때 세운 것으로 6구는 사라지고 1구만 남아 있는데 바로 진남관에 있는 석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적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라면 군사처럼 보여야 하는데 석인은 머리에 두건과 같은 관을 올려놓고 팔짱을 낀 모습으로 오히려 무인보다 문신에 가깝다는 것과 군졸모습의 벅수가 선소 일대에 현존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진남관에 있는 석인상은 다른 이유로 추정된다.
여수석인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개였다고 하나 6개는 없어지고, 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전형적인 문인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석인상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하나의 비석으로 당시의 의인전술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조선 중기 돌 신앙으로서의 민속학적 가치와 조각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이량장군방왜축제비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479년(연산군 3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량이 돌산도 북쪽과 장군도 동쪽 사이의 해협에 수중 제방을 쌓아 왜구들의 침입을 막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원래 1643년(인조 21년) 그의 5세손 이배원이 글을 짓고 6세손 이필이 글씨를 써 장군도에 세웠으나, 비석이 훼손되자 1710년(숙종 36년) 8세손 이삼이 좌수영성 서문 밖(충무동)에 다시 세웠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이량 장군의 행적 및 수중성 축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비문은 왜구들의 침략과 수중성의 전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전라좌수영비문군에는 3열로 상단 왼쪽부터 무명비, 이공희갑 영세불망비, 수사 최공완 무휼군졸청덕비, 무명비, 수사 변공국간 선정비 이며, 중간 왼편부터 행군수 조공동훈 영세불망비, 수사 유공관로 청덕선정비, 절도사 조공문현 청덕선정비, 수사 이공봉상선정비이며, 앞줄에는 왼쪽부터 이장군 함천군휘량 방왜축제비, 함은군 이공삼 거은불망비, 대정서변입비, 수사 이공도빈 무휼선정비, 무명비 순이다. |
진남관의 조선 수군 이였던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1953년 보물 324호에서 2001년 국보 제304로 지정되었다. 총 240여 평에 정면 15칸, 측면 5칸 단일 목조 건물에 둘레 2.4m 기둥 68개가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75칸의 보기 드문 건물 구조를 한 객사로 조선 역대 왕의 궐패를 모셨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정례참배를 하는 등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다.
거북선을 만든 선소 유적지 |
▲ 선소 유적지 입구 선소공원에 2기의 벅수가 자리하고 있다.
선소마을의 석장승과 유사한 방식으로 만든 석장승이 경남 통영시에 있는 벅수로 한결같이 키가 작다는 것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군이 염탐을 하기 위해 접근하면 사람으로 착각 할 정도로 병사와 유사하며 얼굴만 조각해 놓은 점 등이 일반 석장승과 전혀 다르다. |
▲ 해안가에서 지키고 있는 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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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여수 지역에서는 돌로 만든 장승을 벅수라고 한다. 선소마을 입구에 한 쌍, 맞은편 망마산 기장골에 한 쌍, 굴강에 한 쌍 해서 선소 주변에는 벅수 세 쌍이 남아 있다. 120cm 남짓한 키에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나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마을 입구의 벅수 한 쌍 중 문관석 형상을 한 왼쪽 벅수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두드러진 코 위로 굵은 코주름이 새겨져 있으며 다문 입술 밑으로는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오른쪽 벅수는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드나 가슴에 화정려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다. 나머지 벅수들은, 굴강의 왼쪽 벅수가 전면을 얼굴 형태로 다음은 것이 확인되고 오른쪽 벅수는 투구 같은 것을 쓰고 있어 무인석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형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
▲ 입구에서 바라 본 전경. 굴강이 정면에 보인다.
주차장 입구 공원에서 벅수 2기를 만난 후 해안 길을 따라 들어서면 겨울철새 흰죽지와 쇠오리, 갈매기, 청둥오리가 무리를 짓거나 어우러져 굴강 주변에 모여 있다. 특히 기러기목에 속하는 흰죽지 무리가 압도적으로 선소 앞 해변이 매년 겨울이 되면 철새가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길의 끝자락에서 굴강을 만나게 되고 굴강을 지나면서 옛 대장간, 군기고, 세검정을 만난다. 그리고 해안에 계선주가 있으며, 굴강 입구에 2기의 벅수가 있다. 굴강에서 건조된 거북선의 도면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모형은 알 수 없지만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 유득공이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거북선 그림을 통해 추정을 할 뿐이다.
진남관과 함께 잠시 들러 가는 곳으로 선소 유적지이다. 사적 제392호 인 선소는 전선 제조와 보수를 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한다. 선소지역은 여수 본영인 선소를 위시하여,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 세 곳으로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임진왜란 수군 기지로 당시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과 판옥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선소 전경. 굴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건물이 있으며, 왼편으로 벅수가 위치해 있다. |
▲ 선소 굴강 옆에 위치한 2기의 벅수
▲ 복원한 세검정 |
세검정과 수군기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세검정은 집무 및 지휘소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검정 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의 간격으로 보아 정면의 크기는 작아도 7칸에 길이 15.8m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옆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86년에 맞배지붕의 앞면은 7칸, 옆면은 1칸의 규모로 세검정을 복원하였다. 군기고(수군기)는 세검정과 같이 선소의 1차 발굴 조사 뒤에 복원한 건물이다. 발굴 조사 결과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 벽체를 토담으로 튼튼하게 쌓았는데, 건물 터 앞에서 쇠로 된 화살촉, 배 못들이 나온 것에서 군사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되고 있다. 복원한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서향이다.’
▲ 거북선이나 전함을 묶었다 하는 계선주
계선주는 선박을 매어 두는 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높이 1.4m 돌기둥이 서 있으며, 거북선과 판옥선을 매어 둔 곳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선소를 지키던 해안 벅수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592년 석암으로 만든 계선주로 정확한 사용에 관하여 거북선을 매어 두었다는 설과 일종의 석장승(벅수)으로 멀리서 보면 배를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였다는 주장과 선소입구에 있는 낮은 키의 석장승(벅수)으로 6개가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
▲ 선소 그리고 선소 왼편으로 벅수 2기가 자리하고 뒷편으로 세검정이 보인다. |
선소관련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충무공 이순신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군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막만의 최북단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입구에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역할을 하고 뒤로는 망마산을 등지고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원래 명칭은 순천부 선소이다. 거북선은 이곳과 함께 인근의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좌수영 산하 순천부 수군 기지였던 것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주변의 마을은 예로부터 선소마을로 불리었고 고려 시대부터 배를 만든 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일종의 항만 시설인 굴강이 남아 있으나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으며,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하였다.’ |
▲ 선소 굴강 위로 오랜세월 자라고 있는 고목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 독특한 모습의 벅수
▲ 굴강 석축 모습
국가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선소는 천연적 요새지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이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이 뛰어난 나대용 장군에게 특별한 배를 제작할 것을 지시하자 나대용은 이순신과 함께 거북선을 구상하고 1592년 3월 27일 시전동 앞 바다에서 첫 시험 항해를 성공리 마쳐 마침내 거북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최근 선소지역은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복원공사를 하였는데 전선을 수리 보관하던 타원형으로 만든 굴강, 무기를 제작하거나 전선에 필요한 금속을 만들던 풀뭇간, 수군이 칼을 갈았다는 세검정지, 초석을 메어두었던 계선주,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고, 일반인 통행을 금지하는 표석으로 돌벅수 6기가 있다. |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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