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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사적 제235호 경남 통영 충렬사 충렬사 - 통영명정 - 통제영 - 해저터널 - 동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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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사를 통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성웅 이순신’ 그 흔적을 통영시에서 만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왜적의 재침을 저지하기 위해 1604년 조선 삼도수군통제영을 당시 두룡포이자 오늘날 통영에 조성하고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여 1606년 완성된 사당이다.
▲ 충렬사 입구 홍살문
통영 충렬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으로 선조 39년(1606) 완성하고 현종 4년(1663) 충렬사 현판 사액, 숙종7년(1681) 충렬묘비 건립, 숙종 21년(1695) 제70대 최숙 통제사가 충렬서원 개설, 정조 19년(1795) 충무공전서 편찬 발간 및 어제사제문 하사를 하였다. 1919년에 접어들면서 충렬사 영구보존회를 결성하고 1951년 재단법인 통영충렬사 설립을 하였으며, 1966년 통영충렬사 필사품(보물 제440호) 지정하였으며, 1973년 사적 제236호로 지정 및 통영 충렬사는 춘계제향으로 음력 2월 中丁日, 탄신제 양력 4월 28일, 한산대첩기념고유제 양력 8월, 추계제향 음력 8월 中丁日 등을 통영 충렬사에서 제례봉행하며, 기신제 음력11월 19일 날 인근 착량묘에서 한다. |
▲ 홍살문 지나 정문에서 바라 본 전경. 도로 앞 강한루와 오른쪽 동백나무, 왼편 관라시이다.
임진란이 끝난 8년 후인 선조 39년(1606) 왕명에 의해 세워진 충무공의 제향공간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봉행하는 사당을 만들라는 어명이 당시 제7대 통제사였던 이운령(1562-1610)에게 내려졌고, 이운령은 통영시 주산인 망일봉(148M) 용맥 위 터를 잡고 인품에 준하는 성역화 공간을 조성하였다.
▲ 입구에서 만나는 370년 된 동백나무 도지정기념물 제74호
충렬사에 첫 문인 홍살문으로 들어선다. 홍살문은 홍전문 또는 홍문으로도 불리는데 정2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 입구에 세웠다. 매표를 한 후 들어서면 중앙으로 강한루와 오른편으로 오랜 세월 살아 온 듯한 동백나무를 만나는데 도지정기념물 제74호로 수령이 400년 이상 된 고목으로 봄이 시작되자 붉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동백나무는 나무 둘레 약 1.5m 이며, 수령은 370년, 수고는 약 8m 이다. |
충렬사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니 가지 위 직박구리 한 마리 날아들어 봄을 만끽하고 있다.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뜬 장군의 눈망울을 닮은 듯 동백꽃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수형을 자랑하며 강한루로 향하는 길목을 수놓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네그루의 동백꽃이 있었다. 전하지만 오늘날 입구 매표소 뒤편으로 두 그루가 있을 뿐이지만 흔한 동백꽃과는 사뭇 다른 기품이 있다,
▲ 강한루 |
강한루 아래를 거쳐 강한루에 올라본다. 헌종6년(1840) 제17대 이승권 통제사가 건립한 것으로 정면에는 강한루 이면에는 영모문이라 현판을 내걸었다. 강한루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강한은 중국의 호북성의 성도 무한에 있는 지명이다. 강한은 무한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과 지류인 한수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에서 강, 한수에서 한, 이 두자를 취하여 강한이라 부르고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이다. 이 강한의 대안에는 이백의 시에 등장하는 황학루와 향주의 서로와 비견되는 동호가 있다. 또 고대 주나라 때 이곳 강한변에서 소호가 적의 항복을 받아 나아의 우환을 씻었다는 고사가 있다.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사인 강위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의 고사에 연관지어 강한후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옛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각 위에 올라 이충무공의 큰 덕을 되새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누각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복원 되었다.’
▲ 충렬묘비 입구 정문에서 오른편 첫번쨰가 충렬묘비이다.
충렬묘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충렬사 강한루를 지나 만나면 공간 입구 외삼문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데 외삼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충렬묘비, 제11대 통제사 이언성 사적비, 덕수이씨 후손 통제사 공적비이며, 왼편으로 제70대 통제사 최숙 사적비, 제7대 통제사 이운룡 기적비, 제5대 통제사 유형 기적비이다.
▲ 인근 통제영에 비하여 비석이 전부 보호각으로 조성하였다. |
충렬묘비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충렬묘비는 바깥쪽 삼문 동서 6동의 비각 중 동쪽 첫째 기각에 모셔져 있다. 이 비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1614년(광해군 6) 에 백사 이항복이 왕명으로 지은 것이다. 비문의 끝 부분에는 우암 송시열이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비석의 위쪽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명이라고 쓴 전서체의 글씨는 문곡 김수항이 쓴 것이다. 그리고 비석은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1681년(숙종 7)에 머릿돌과 거북 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조선조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지켜낸 민족 영웅이었던 만큼,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 역시 당대의 유명인들이었다. 비문은 주로 임진왜란 당시 이 충무공의 무훈과 충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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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묘비는 이충무공이 순국한지 16년 후인 광헤6년(1614)에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비문을 비었고, 그로부터 67년 후 숙종7년(1681)에 우암 송시열이 그간의 경위를 지문 말미에 첨언하고 글씨를 썼다. 비머리에 통제사 충무이공 퉁렬묘비라는 전서를 감수항이 썼고 제60대 민섬통제사가 이수와 귀부를 갖추어 비를 세웠다. 비문은 이 충무공의 위훈과 충절을 기리는 억으로 왕명에 의한 공식기록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충렬묘비와 중문 사이에 매화 한그루가 봄을 맞이하여 활짝 피어 있었다. |
▲ 서재 현종11년(1670년) 건립 사당 서쪽에 위치하며, 제례에 사용되는 재물을 다루는 과방으로 사용. 현재 거북선 모형을 전시 |
▲ 동재 현종 11년(1670) 건립 사당 동쪽에 위치하며, 제례를 앞둔 제관 이 모여서 의복을 갈아 입는 곳으로 사용 |
▲ 서재에서 바라 본 동재 서재와 동재가 있는 공간은 중문을 열고 들어선다. 중문은 곧장 사당으로 향하는 내삼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 서재 담장 너머 피어나 있는 매화
외삼문과 비각을 거쳐 서재와 동재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장군의 영정을 만나는 지향공간으로 들어서는 문이 내삼문으로 삼문 중에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 삼문형식으로 솟을 삼문 양쪽 초석에 해태를 조각해 놓았으며, 8개 지붕 버팀돌기둥을 팔각으로 만들었다. 삼문 중심에서 오른쪽 진입하는 협문은 낮게 만들어 들어서는 이들에게 몸을 맞추도록 하였으며 다양한 장식을 하였다. |
▲ 중문 앞 노거수 전경 |
▲ 중문 담장 아래 핀 매화 |
▲ 정당 좌우 은행나무 |
▲ 내삼문 선조36년(1606) 세운 내삼문은 본전 건물인 제향영역으로 들어서는 제일 안쪽 삼문이다. |
내삼문을 거쳐 들어서면 정당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제향을 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횽이 선조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 팔괘는 음양의 조화와 만물이 화생하는 역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명되어 관급이 끊어지고, 경술국치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 제향을 하는 정당 건물 선조39년(1606) 건립된 사당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사당 용마루에는 팔괘와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혈을 출입문인 내삼문은 용마루에는 달을 상징하는 반달형 혈자를 조형하였다. |
정당에 관한 안내 글에는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 주련은 명나라 진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육일보천지공(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하신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고 안내하고 있다. |
▲ 이충무공의 충렬사팔사품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관 |
▲ 령(영)패 |
▲ 수조도병풍 |
▲ 충무공 전서 |
통영 충렬사팔사품( 보물 제440호)를 만나기 위해서는 강한루에서 왼편으로 진입하면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박물관 내 전시를 하고 있다. 통영 충렬사팔시품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팔자품은 중국 명나라의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 온 8종류의 물품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인이 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빛나는 전공을 보고하자, 감동한 신종이 충무공에게 지휘관을 상징하는 8종류의 물품을 특별히 보내 주었다. 팔사품은 임금이 내린 8종류의 물품이란 뜻으로, 통제영에 보관되어 오다, 1895년에 충렬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사품은 도독인 1개, 호두령패 2개, 귀도 2자루, 참도 2자루, 독전기 2폭, 홍소령기 2폭, 남소령기 2폭, 곡나팔 2개로 모두 8종류 15개이다.’
▲ 어제사제문은 정조19년(1795) 정조대왕이 충무공 전서를 편찬 발간하고 충렬사에 1질을 봉안케 하며 지어 내린 치제문으로 제사에 대한 세세한 지시사항과 공의 우국충절 및 훈공을 절절히 적어 놓았다. 기판은 치제문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절도사 이태영이 쓰고 판각해 놓은 것이다.
전시관 입구에 있는 사제문에 관한 안내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사제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주는 것이다. 정조 19년(1785) 11월에 충무공 전서를 펴내면서 충렬사에 1질을 봉안하게 하고, 통제사 이득제(제147대)에게 명하여 명조 팔사품도 함께 장소를 알맞게 진열하고 술과 고기를 위패앞에 모신 다음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로 잔을 올리고 제사하라 하신 정조 임금님의 하사 제문이다’ 전시관은 1981년 만든 건물이다.
▲ 전시관에서 바라 본 강한루
통영 충렬사에 관한 경내 안내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선조의 명에 따라 제7대 이운룡이 1606년에 세운 것으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1663년에 현종은 홍살문을 다시 세우게하고. 충렬사의 이름을 내려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1695년에는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경충재를 세워 서당을 열고 충무공 전신을 계승하는 인재를 키웠고, 1719년에 제92대 통제사 김중기는 승무당을 짓고 3명의 장교를 주재시켜, 충무공의 제사와 충렬사의 관리를 담당케 하였다. 1795년에는 정도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여 여기에 보관케 하였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895년에 통제영이 폐지되자 고장의 유지들이 충렬사보존회를 결성하여 충무공의 제사를 모시며 충렬사를 관리하고 있다.’ |
충렬사는 나라의 위기에 몸을 던져 희생하거나 공훈을 세운 분들의 뜻을 기리는 제향공간으로 현재 14개소 충렬사가 있으며, 그 중에서 충남 아산 이충무공묘(사적 제112호), 경남 남해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이락사. 사적 제232호), 경남 남해 남해대교 아래 죽음 사후 첫 가묘를 쓴 곳으로 알려진 노량 충렬사(사적 제233호), 경남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등 4곳이다.
충렬사는 홍살문을 시작으로 정문(삼문형태)을 거쳐 오르면 좌측 안내소와 우측 사무실 그리고 동백나무 2 그루가 있다. 강한루를 지나 오르면 경충재(충렬서원)와 숭무당이 있으며, 외삼문을 따라 비석이 독특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중문을 거쳐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제향공간인 정당에 들어선다. 공간 내 이동은 동입서출의 원칙을 따른다. 東入西出 즉,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온다는 의미이며, 중간 문은 신성한 문이다. |
▲ 홍살문 건너편에 위치한 백석(1912~1995) 시비가 서 있다. |
통영명정 경상남도 기념물 제273호
통영 명정은 충렬사 정문 앞 신호등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우물 2기와 수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샘을 일정, 아래 샘을 월정이라 부르며, 두 우물을 명정이라고 하는데, 일정은 충렬사에서 사용하고, 월정은 민가에서 사용했다 전한다. |
통영 여행의 첫 출발은 통영 충렬사에서 출발을 한다 하여도 좋을 만큼 통영 여행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충렬사에서 통제영, 서피랑까지 약 400m지점에 위치하며, 통제영에서 동피랑벽화마을 입구까지 약 300m 이다. 통영 여행에서 주차 문제가 심각한 만큼 여유가 좀 더 있는 충렬사에서 주차를 하고 서피랑을 거쳐 통제영을 둘러 본 후 동피랑과 강구안을 거쳐 택시를 이용하여 차를 회수하러 이동하면 된다. |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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