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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문화동벅수 - 충렬사 - 서피랑 - 통제영 - 동피랑 -착량묘 - 해저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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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동 벅수를 만나다. |
통영 문화동 벅수를 만난다. 주차장에서 세병관으로 들어서는 도로변 외롭게 서 있는 통영 문화동 벅수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스쳐가기 쉽지만 이곳 문화동 벅수는 다른 장승과는 달리 독특한 장승이다. 1968년 11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통영 문화동 벅수는 조각 하나 하나 섬세한 손길과 채색을 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또렷하게 남아 있다.
▲ 통영 문화동 돌벅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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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벅수(장승)는 나무나 돌의 상부에 신장상이나 귀면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 신장명이나 이정을 새긴다. 벅수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해안지방에 널리 분포되고 있다. 이 돌벅수는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한 비보장승으로서,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광무10년(1906) 세병관 입구인 이곳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벅수 뒷면에 광무 10년 병오 8월생 동락동립이란 문구가 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주술적 민속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동장승 중 유일한 채색장승으로 U자형으로 벌린 입과 입 밖으로 솟아난 두 개의 송곳니가 요물스런 귀신을 막아내는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벅수의 높이는 198cm이고 둘레는 160cm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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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벅수 옆에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비석에는 본래 벅수가 도로 아래쪽 25m 지점에 있던 것을 세워진지 77년만인 1983년 1월 25일 도시계획에 의하여 도로가 확장되면서 오늘날 위치로 옮겨 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통영에는 이곳과 함께 인근 산남마을의 작고 관모를 쓴 벅수가 있다.
장승 또는 벅수의 제작에 관하여 시대적으로 짐작할 뿐 정확한 조성경위를 알기 어렵지만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세병관 입구 문화동벅수는 뒤편에 제작시기가 ‘광무 십년 병오 팔월○일 동락동 입’으로 1906년 벅수계를 조직하면서 만든 것으로 보여 지며, 혼자 있는 장승을 독장승 또는 독벅수라 하는데 처음부터 혼자였는지 알 수 없지만 1기가 확인됨에 따라 독벅수로 보여 진다. 화동 벅수는 매년 춘추로 차일(遮日)을 치고 오후에 한 시간 정도 동네 노인들이 간단한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풍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
국보 제305호 통영 세병관 |
일본의 야욕으로 인하여 조선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선조 25년(1592) 임진년 1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이라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정유년에 2차 침입을 하여 정유재란이라 부르지만 보통 임진왜란을 정유재란이 끝나던 선조 31년(1598) 까지이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8시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 병선 700여척은 일본 오우라항을 출발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전투 부산진에서 첨사 정발과 동래부 송상현이 죽음으로 패하면서 상주까지 단숨에 진격하게 된다. 일본은 계속하여 조선으로 상륙하였고 조정에는 패전소식만 전해지자 선조는 개성으로 또다시 평양으로 의주로 서행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 경상 우수사 원균(1540~1597),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가 지휘를 맏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경상좌수사 박홍의 함대는 잃어버리고 진영만 존재할 정도가 되면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주측이 되는 함대가 꾸려졌고 선조 26년(1593) 8월 평양과 한성 수복 이후 일본군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과 함께 교육지책으로 삼도를 관장하는 통합 직함을 이순신에게 내리게 되는데 바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이다.
▲ 통영 세병관 전경
사적 제402호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이며, 국보 제 305호 통영 세병관이 정비를 마치고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조선 태종 당시 경상우수영을 설치했던 통영시에 선조 26년(1593)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 한 후 후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은 한산도에 있던 수군통제영을 육지 두룡포(통영)로 옮겨 올 계획을 세운다.
선조 36년(1603)을 시작으로 선조38년(1605) 세병관을 비롯하여 백화당, 정해정이 완공되었고 인조 24년(1646)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규묘를 확장하였고, 고종 9년(1872) 제94대 통제사 채동건이 고쳐 지으며, 통제영은 약 292년간 우리나라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수군을 지휘하였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1995년 수군통제영 복원을 추진하면서 사적 제402호로 지정, 2000년~2013년 세병관을 보수하면서 사라졌던 주변 운주당과 백화당, 중영청, 병고 등을 복원 후 2013년 유로 개관을 하였다. 통제영의 역사는 1604년에 설치되어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를 끝으로 1895년에 폐영되었다. |
▲ 들어서는 첫 문 '망일루'
망일루 광해군 3년(1611) 제10대 우치적 통제사가 만든 종루로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45년(1769) 제128대 통제사 이국현이 다시 세워 세병문으로 불렀다. 그 후 훼철된 것을 2000년 10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 건물로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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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 본 망일루 |
▲ 수항루
수항루는 숙종 3년(1677) 57대 통제사 윤천뢰에 누각을 짓고 봄가을 왜군의 항복 의식을 거행하며 군사의 사기를 돋우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훼손된 것을 1986년 이전 복원하였다. |
▲ 세병관으로 오르는 계단 위 자리한 외삼문
정문 망일루 밑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산성창과 오른편으로 좌청 그리고 망일루와 좌청 그 중간 앞으로 수항루와 언덕 위 두룡포기사비가 자리하며, 망일루에서 올려다 보면 가파른 계단 위 외삼문을 지나면 세병관으로 오를 수 있다. 세병관 왼쪽 외문으로 나서면 잉번청과 백화당, 12공방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문을 나서면 비석군과 병고, 운주당, 경무당, 내아를 거쳐 주전소와 후원이 위치하고 있다. |
▲ 국보 제305호 세병관
세병관은 중국 시성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의 마지막 부분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칼에 묻은 피를 씻어내어 앞으로는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다.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가 필요없는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오늘날 세병관(洗兵館) 현판은 136대 통제사 서유대(1779-1781)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세병관은 글씨는 동국진체풍으로 가로 6m, 세로 2m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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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민흘림 기둥에 이익공 양식으로 지어진 팔작지붕을 한 목조건물로 정면 9칸, 측면 5칸 규모를 자랑하며, 전남 여수 국보 제304호 진남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세병관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3호로 지정된 후 2002년 10월 14일 국보로 승격되면서 명칭은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으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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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은 여수의 진남관과 흡사한 구조로 기둥만 세우고 사방을 터놓고 중앙에 단을 설치하여 전패(궐패)를 안치하고 고종 32년(1895) 통제영이 폐지되는 그 순간까지 292년 세월을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자리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1987년 수항루를 복원하고 사라진 주당 (運籌堂), 경무당(景武堂), 내아(內衙), 병고(兵庫), 백화당(百和堂). 12공방(十二工房), 중영(中營), 중영내 건물을 대대적으로 복원공사를 최근 마쳤다. |
▲ 측면에서 바라 본 세병관
임진왜란으로 삼남의 수군을 통합 지휘하는 지휘관이 필요하여 초대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이순신 장군이 부임되었지만 수군은 마땅한 본영이 없이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대응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부임한 제6대 이경준 통제사는 세병관을 세우고 출전하는 수군은 출사의식을 궐패 앞에서 거행하면서 승전을 다짐하고 전투에 임하면서 조선수군 삼도수군통제영은 비로소 그 역할을 담당했다. |
▲ 세병관 오른편에 위치한 석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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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은 숙종 27년(1701) 제77대 류성추 동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여 오방기를 들고 있다.
석인의 역활이 액막이 용으로만 가공된 것이기 보다 지금처럼 오방기를 세워 둘 목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
▲ 기삽석통 세병관 왼편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 제142대 류진항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새병관 뜰 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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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영 주변에 있던 비석을 모아 놓은 공간으로 약 58개의 비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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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내 세운 비석 두룡포기사비에 의하면 이경준은 평안절도사, 황해절도사, 충청병사를 역임했으며, 6대 통제사 시절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지금의 통영시로 옮겼고 선조 37년(1604) 7월 14일 통제영의 객사인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에 공포를 익공식 및 다포식을 함께 사용한 세병관을 지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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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룡포기사비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오면서 전략적 요충지가 되면서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으로 비석군에서 떨어져 유일하게 비각에 보호되고 있다. 두룡포 기사비는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이며, 1625년 19대 통제사 구인후가 통제영 영문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 옮겨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두룡포기사비 비문 두룡포에 진영을 설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선조때 통제사 이경준이 처음으로 세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 진영을 설치하여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잊지 않고 그 덕을 생각하여 돌에 그의 업적을 새겨 전하고저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통제사 구공에게 하소연하였다. 구공은 일찍이 공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공에게 신임을 받고 또한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그 기록을 빛내고자 나에게 비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는 지라, 나는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 할 수가 없어서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원 옛날 정승을 지냈던 증(增)의 아들이며 한산 목은공의 후손이다. 가문이 흥성하여 세상에 전해진 덕의 무성함이 나라의 역사에 올려져 있고 묘비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이 비문에서는 대략을 줄이려고 한다. 공의 형제는 다섯 분인데 함께 나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첫째는 경홍이요, 둘째는 참판 경함이니 쌓은 덕과 높은 명망이 당대 제일이며, 셋째는 곧 공으로 경심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좌랑을 지낸 경류인데 임진란에 죽어 나라일을 뜻대로 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재수를 헤어라지 못하겠으며, 다섯째는 현제 소윤인 경황인데 비록 과거를 거친 관직에 나가지는 아니했지만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여러번 내직과 외직으로 옮겨 다니며 벼슬을 하여 기름을 드러내고 있다. 공은 비록 무예로써 몸을 일으켰으나 경서와 사기에 두루 통하였고 시와 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온화한 용모에서는 옛 선비나 장수의 기풍이 있어, 평안절도사를 두 번 지냈고 황해절도사를 두 번 지냈으며 충청병사를 한 번 지냈다. 병사와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공경하였고 그를 신명과 같이 위엄있게 느꼈다. 그가 다스리는 지경은 늘 평안하고 무사하였으며, 그의 어짐과 위엄과 일을 처리해 나가는 솜씨는 다른 사람들 보다 월등히 뛰어났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거듭 나라의 요새지를 맡겨 두 번이나 통제사를 삼았다. 통제사란 직책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지키는 것으로 병권을 맡은 귀한 자리이고 무거운 소임이어서 당대의 으뜸이 아니면 능히 맡지 못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통제사를 두게 된 것은 또한 오래되지 않았다. 임진란 때 이순신이 바다 위에서 적은 병사로 큰 적을 무찔러 적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켜 큰 공을 세웠으므로 조정은 관직으로서 그에게 상 중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중요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병사들을 통솔하여 나라를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그에게 내려 주었다. 통제영은 처음에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중간에 고성으로 옮겼으나 배를 숨기는 데는 편했어도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 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사람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이 통제사가 되어 미처 개연히 마땅한 땅을 측정하여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서,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앝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적들이 감히 이 곳을 지나가지 못하였으므로 난이 끝나 바다가 잔잔해진 것이 수십년이 넘었다. 옛날 조적이 초성에 진영을 옮기니 후조가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유익이 면구에 진영을 옴기니 북로가 지리의 험난함을 살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비록 천연의 요새라 할 지라도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국방의 요충이 되는 것은 예나 이제나 같은 것이다. 두룡포가 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으로 몇 천만년 동안 몇 천 백의 사람들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을 빌어서야 이루어 졌다. 하늘이 이 요새를 설치하고서 때를 기다리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이 앞서 적을 파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킨 때를 맞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유독 공의 행적만이 거의 허물어져 전하여 지는 것이 없는가? 어찌 현명한 자손이 능히 집안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아! 두룡의 험한 땅이 공을 만나 국방의 요새지가 되었고, 공의 공적과 덕이 또한 구공을 만나서 비속에 새져 전하게 되었으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본디 중신의 친척으로 이 진영을 맡게 되니, 그 공명과 사적은 공이 현재 통제사로 있고 또 이러한 일들을 주관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통훈대부 창원대도부사 박흥미 지음 어모장군 행 훈 ooo 씀 고종 갑진년에 본군 사람 이학재, 이승재가 바닷가로부터 세병관 광장으로 옮겨 세웠음 |
▲ 망일루에 올라 바라 본 모습
삼도수군 통제사로 초대 이순신(1593.8~1597.2.26. 구속), 2대 원균(1597.2~1597.7.16. 전사), 3대 이순신(1597.8~1598.11.19.전사), 4대 이시언(1599.1~1601.5 사임) 그리고 제208대 홍남주(1894.12~1896.5)를 마지막으로 고종 32년(1895) 7월 통제영은 폐영되면서 300년이 넘는 역사가 침묵하게 된다.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에 오른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겨 간다. 전라남도 여수에 위치한 전라좌수사가 머물던 곳이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운영되던 곳이 전술적인 이유로 1593년 7월 15일 통영 앞바다에 위치한 한산도로 진을 옮기게 되는데 그 이유를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 是以昨日進干閑山島 以爲遮按海路之計耳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라며 한산도 두억리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옮겨 간다. 오늘날 한산도 제승당 일원을 선조 26년(1593년 7월)에서 선조 30년(1597년 2월)까지 통제영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초대 통제영 직함을 내려놓고 투옥되게 된다. 한산도 진영은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패배로 인하여 불타버리고 폐허가 된다.
▲ 방문 당일 공연이 있었다.
우리나라 바다를 지킨 11대 통제사로 초대 이순신, 2대 원균, 3대 이순신, 4대 이시언, 5대 류형, 6대 이경준, 7대 이운룡, 8대 이기빈, 9대 이경준, 10대 우치적, 11대 성우길 중에 이순신과 이경준은 재임된 것을 알 수 있다.
전라좌수사(1479-1895 존속)로 있는 여수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격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전라좌수사가 머물던 여수는 초대 통제영이 되었고 진을 한산도로 옮겨가지만 통제영의 기능은 한산도와 더불어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산도가 초대 통제영으로 보는 시각과 여수시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시각이 서로 부딪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초대 통제영은 통제권을 하사받은 전라좌수사 직함을 받은 여수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나아가 싸운곳은 한산도로 보여진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년전인 선조 24년(1591)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전라좌수영 직책으로 부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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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되어 한산도에 수군통제영 본영을 설치하고 전란에 임했다. 그 후 제6대 통제사로 부임한 이경준은 통제영 본영을 한산도에서 두룡포로 옮기면서 많은 건물을 신축하고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닦는다는 의미로 세병관을 만들고 입구에 창을 거둔다는 의미로 지과문을 달았다. 지금은 국보 제305호로 승격되고 한산대첩 축제를 개최 세병관에서 서막식과 조선 수병 사열행사를 한다.
통영에 있는 두룡포기사비(경남유형문화재 제112호)에서 한산도 통제영에 관한 글을 새겨 놓았다.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다. 한쪽으로 치우쳐있고 멀어서 고성으로 옮겼지만 배를 숨기는데는 편하였지만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데는 불편하였다. 새로 부임한 통제사들은 불편함을 감수 할 뿐 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다. 통제사로 부임하여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마땅한 땅을 찾게 되었고 즉시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서쪽으로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어도 두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비문에 의하면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여 작전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한산도에 전라좌수영 본영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며, 이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영에 통제영을 조성하였다는 대목이다.
두룡포기사비에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다는 것과 한산도에 있던 진영을 두룡포(통영)로 옮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제도 오아포 통제영과 고성현 춘원포 통제영은 거론되지 않았다. 왜 일까라는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두룡포로 옮겨오기 전 통제영은 고성 춘원포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당연히 한산도가 아니라 춘원포에서 옮겨왔다고 해야 할 대목이다.
전라좌수영에 머물며 전선에서 싸우던 이순신 장군에게 조정에서 초대 통제사 직함을 내리게 된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은 폐허로 변하자 여러곳을 떠돌았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를 거쳐 고성현 춘원포를 거치는 등 제자리를 잡지 못하자 선조 34년(1601) 제찰사 이덕형의 장계로 선조 37년(1604)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게 고성현 두룡포에 통제영 조성이 내려진다. 그후 숙종 4년(1678) 윤천뢰 통제사 당시 성곽을 축조하는 등 갑오개혁(1894.7~1896.2)으로 폐지되는 순간까지 통영에서 통제영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강점기를 통해 건물들과 성곽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삼도수군 통제영은 2010년부터 진행한 복원을 통해 집무실 운주당, 접견실 백화당, 업무실 잉번청, 12공방, 관아 32동, 부속건물 14동 등 2013년 정식 개관하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복원을 통해 옛스러움이 사라지고 드라마 세트장 같은 분위기로 전략해 버린 듯 하여 실망감이 앞선다. 또한 입장료와 함께 입구에 주차장이 있지만 주말이면 주변 상가를 찾는 차량의 주차로 실제 통제영을 찾은 관람객은 주차를 하지 못하는 낭패도 겪는다. 밀리는 차량으로 진입을 못하여 유도 관계자에게 주차를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보자 차량이 밀려 주차를 못한다며 진입을 막았다. 어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돌아 온 답은 뒤 차량이 밀리고 있으니 차를 빼라는 것 뿐. 결국 돌고 돌다 충렬사에 주차하고 걸어서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통영시는 입장객을 위한 최소한의 주차공간을 확보하여야 한다. 통제영을 찾앗는데 통제영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혹시나 싶어 통제영에서 만난 방문객은 단체 학생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주차공간이 부족한 것인가. |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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