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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트레킹 - 경주에서 영지석불좌상을 만나다.

허영꺼멍 2015. 10. 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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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97-7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 '영지'

 

▲ 옛 영사에 모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석불좌상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리는 탑에는 한 여인의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흔히 석가탑(국보 제21)이라 부르는 불국사 대웅전을 지키는 석탑은 다보탑과 달리 가냘픈 모습의 불탑으로 찬란한 신라불교에 초석이 된 백제 석공의 진정한 노력이 묻어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석가탑 그림자 이야기가 있는 영지

사실상 이곳에서 석가탑은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경주 불국사역을 조금 더 내려선 후 울산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영지 저수지(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61-1)로 향하는 영지로가 나오며, 철길건너 약 500m 정도 들어서면 영지석불좌상(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196-1) 그리고 조금 더 진입하면 영지 저수지에 도착한다. 오늘 여행지는 비록 훼손이 심하여 찾는 이 없는 외진 곳에 자리한 영지석불을 찾아 나선다.

 

무영탑에 관한 많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석가탑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로 석가탑이 하지(夏至) 정오가 되면 탑 그림자가 기단 안에 머물러 탑의 그림자가 땅에서 사라져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무영탑이라 한다. 탑을 만들면서 태양의 이동과 그림자의 방향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는 것이다.

 

▲ 훼손이 심한 영지석불좌상

 

일본 도쿄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불국사의 화염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華嚴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석공은 이름 없는 당()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이며, 불국사 남서쪽 10리 밖 못에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무영탑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오사카 긴타로(大板金太郞.1921)의 경주의 전설(1927) 영지(影池) 부분에 아사녀가 석공의 부인으로 바뀌며,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 다보탑은 유영탑(有影塔)으로, 저수지를 영지(影池), 사찰을 영사(影寺)로 불렀다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후 19337월 현진건(1900~1943.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조선의 작가)은 동아일보에 일제강점기 경주의 전설을 바탕으로 무영탑을 연재, 1941년 장편소설 무영탑이 발간되는데 당나라 석공은 백제 아사달로, 기다리는 부인은 아사녀로 등장한다는 것. 그러면 그동안 익히 알던 구전은 일제시대 각색된 이야기란 말이 아닌가.

 

각색되어 마치 오랜 세월부터 전해져 오는 구전처럼 알려진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국사에 가면 무영탑이 있는데 흔히 석가탑이라 부른다. 이 탑에는 젊은 연인의 애절한 사랑이 전해져 오는데 백제가 신라에게 패전 한 후 신라에서는 불국사 공사에 많은 백제인을 불러 들여 김대성의 지휘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석탑을 만들 석공이 필요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니 백제 부여에 사는 아사달을 데려와 탑을 만들기로 했다. 아사달의 나이 스물 살이었고 아사녀라는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지내던 중에 탑을 세우는 특별한 석공으로 발탁되어 신라로 향하게 되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사달은 아사녀를 두고 갈 수 없어 거절을 하였지만 이미 신라 땅으로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어 끌려가다 시피 신라로 가서 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 불국사 석가탑

진정한 석공은 탑을 만들 때 잡념을 떨쳐야 하는 법이었고 아사달은 아사녀의 그리움을 서둘러 탑을 만들고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탑 만드는 일에 전념을 하였지만 탑이 거의 완성될 무렵 아사달은 많은 공을 들인 탓에 기를 쇠진시켜 결국 쓰러지게 되었고 때마침 지나가던 서라벌의 귀족 딸인 달님이 발견하여 치료를 하면서 그만 석공에게 달님은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곧 아사녀가 사는 부여까지 퍼졌다. "아사달이 꽃 같은 서라벌 처녀 달님과 결혼한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은 아사녀는 그길로 혼자 서라벌로 향하여 겨우 도착하였지만 불국사를 지키던 문지기는 탑이 완성될 때 까지 누구도 들어 갈 수 없다며 가로막자 아사녀는 문지에게 물었다 "그럼 탑이 완성된 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다" 문지기는 탑이 완성되면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그림자가 비치니 거기서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었고 아사녀는 곧장 영지로 달려가서 연못에 그림자가 드리우길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렸다. 아사녀가 영지에서 탑의 그림자가 비취어 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사달과 달님이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들려오자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영지에 탑의 그림자가 비취길 바라던 어느 날 아사녀는 거꾸로 비추어진 석가탑의 모습을 보고 영지에 뛰어들고 죽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서둘러 부여로 향하려 재촉하며 불국사 문을 나서는데 문지기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아사녀가 찾아와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는지가 꽤 되었다며 영지로 찾아가 보라고 귀띔을 하여 달려가니 이미 영지에는 아사녀의 짚신만 나란히 반겨줄 뿐이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면서 영지를 향하는데 갑자기 큰 바위가 솟기 시작하자 아사달은 아사녀를 떠올리면 망치와 정으로 바위에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졌고 석가탑의 그림자는 영지에 비추어지질 않는가 하면 사랑하는 연인이 정답게 영지를 거닐면 헤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그 당시 조각하였다는 아사녀의 모습을 한 부처조각상을 영사의 돌부처라 부르면서 영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통일전 은행나무 가로 숲이 하나 둘 샛노란 색으로 물드는 10월 말 문뜩 생각나는 영지석불좌상을 10여년 만에 다시 찾았다. 눈도 코도 입고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경주에 그 흔한 국보급도 아니고 보물도 아닌 겨우 유형문화재에 지나지 않는 탑을 굳이 시간 내어 왜 찾아가느냐 물어 본다면 나도 왜 일까? 반문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지석불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이다. 석불의 크기나 형식 그리고 대좌를 비롯하여 광배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지만 아쉽게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이 불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불국사 석가탑에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진 영지 곁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사달이 아사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은 몸체와 대좌,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높이는 광배를 포함하여 약 430cm이다. 얼굴은 심하게 닳아서 눈, , 입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어렵다. 옷은 왼쪽 어깨에 걸쳤으며,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었다. 왼손은 결가부좌로 앉은 무릎 위에 놓았으며,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고 무릎 아래로 내려, 향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부처님이 앉은 연화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 세 부분으로 구분되며, 각기 다른 돌로 조각하였다. 비록 신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문화제에 관한 구전은 고대기록서나 구전에 의하여 후대에 알려져야 함이 마땅하다. 일제강점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구전마저 각색하고 슬픈 전설을 만들어 놓은 것을 현진건에 의하여 1938년 장편소설 무영탑이 발간되면서 오늘날 전설로 굳혀져 버렸고 허구인 식민역사관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설처럼 누구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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