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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을 찾아나서다 제1편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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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강진녹차밭-무의사-강진영랑생가-강진 사의재 |
강진 월남사지 ▲ 옛 부흥이 떠난 그 자리에 초라한 월남사 불심은 변함이 없으리라.
현재 월남사지에는 백제계 양식의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지 주변으로 외곽 담장의 흔적이 보이며, 주변 민가에 사찰의 탑재나 건물 기단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곳곳에 남아 있어 광대했던 월남사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여겨 볼 것은 월남사지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출산 남쪽 전경의 평온한 아름다움이다. 우아한 자태의 삼층석탑에 전해오는 석공과 그의 아내와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에 발길이 머물고, 월남사지 특유의 여운이 깃든 고요한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만의 매력이다.’
강진 월남사지삼층석탑(보물 제298호)
▲ 사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는 강진 월남사지삼층석탑의 위엄
월남사지 삼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삼층석탑은 월남사 법당이 있던 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있다. 이 탑이 있는 곳이 백제의 옛 땅이었으므로 이 석탑은 백제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 지붕돌이 목탑의 경우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하다. 이 탑은 백제의 대표적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규모나 양식적인 면에서 비교할 만큼 한국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주변 민가에서 또 다른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월남사지에는 삼층석탑 외에도 1기의 석탑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혼잣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안내는 돌로 변해 버렸다. 석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어루만졌지만 안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석탑을 만들어야 했지만, 인근에 쓸 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돌로 변한 아내를 옮겨 눈물로 이 석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 동백나무 사이 보호각이 자리잡고 있다.
진각국사의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법명은 해심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서 선학을 닦았고, 송광사 16국사 중 제2조인 고승이다. 비의 몸돌 전면은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후면에는 기록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한편 전면에 떨어져 나간 비석 일부가 1972년에 비 주변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12월 초 진각국사비 주변 동백나무가 땅에서 피어나고 있다.
전면의 비문은 이규보가 지었고, 글씨는 김호인이 썼다. 후면의 비문은 최자가 지었고, 글씨는 탁연이 쌌다. 머릿돌과 몸돌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받침돌은 남아 있다. 특히 거북 받침돌은 역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고려 후기 미술사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강진의 향기 강진다향을 만나다.
▲ 월출산국립공원 야영장 방향 전경
월출산 자락 월남사지에서 무의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녹차밭을 만나게 된다.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 남쪽 기슭에 드럽게 펼쳐진 강진 다원으로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아 녹차 생산지로 적당한 조건을 통해 떫은 맛이 적고 향이 강하다 한다. 강진 녹차밭은 광복 직전까지 국내 최초 녹차 상품으로 알려진 백운옥관차를 생산하던 곳으로 ㈜ 태평양의 계열사인 ㈜장원산업에서 1980년부터 산지를 개간하여 약 10만 평 다원을 조성하였다 한다.
월출산 설록다원의 역사를 통해 다산 정약용 강진 유배시절 차를 마시고 학문의 깊이를 더했던 곳이자 초의선사를 통해 다신전을 집필하였던 곳이다. 현재 강진에서 생산되는 차잎을 통해 우리 자문화 부흥을 위해 1979년 설록차를 탄생시켰으며, 제주와 강진 월출산에서 생산되는 차잎으로 국내 차문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불교 벽화 보고 '무위사(無爲寺)'
대한불교 조계종 월출산 무위사를 찾아 나선다. 천년고찰 관음기도도량 무위사는 월출산 자락 천년고찰 무위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가 관음사를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헌강왕 1년(875) 도선국사가 갈옥사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정종 1년(946) 선각에 의하여 모옥사로 불리다 명종 5년(1550) 태감이 무위사로 부르면서 오늘에 이른다. 무위사는 23동의 당우와 부속암자 35곳을 거느리던 대찰로 알려져 있다.
▲ 예전에 없던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다.
무위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무위사는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무위사의 역사는 선각대사 형미스님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수육사로서 유명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를 행하였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국보 13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극락보전으로, 우리나라 조선 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활의 절제된 아름다움도 놓쳐서는 안 될 만큼 감상 포인트이다. 또한 단정하고 검소한 극락보전의 겉모습과 달리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화려한 건물 내부는 물론,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불교벽화 보고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
▲ 극락보전(국보 제13호)
일주문을 시작으로 보제루를 지나면 비로소 극락보전을 마주한다. 옛 건물과 최신 신축한 건물의 조화가 부자연스럽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내벽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등 불화가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은 무위사의 대표 건물이면서, 조선 시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된 극락보전의 외부 모습은 소박한 듯 단아하지만 대신 내부를 불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불교의 극락세계를 표현하였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쓴 채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우측의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쓴 채 오른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비슷한 시기인 1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불교미술양식이 결합된 수준 높은 작품으로서,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호)은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좌상으로 중심불로 아미타불상, 왼편으로 관음보살상, 오른편으로 지장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고려 후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무위사극락전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뒤편에 그려져 있는 조선시대 작품인 백의관음보살상 벽화이다.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는 파도 위 하연옷을 입고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상이다.
▲ 화려한 색체 기교가 보이지 않는 극락보전
극락보전 내 파랑새 전설과 함께 그려져 있던 29점의 불화 중 28점을 해체하여 따로 보관 전시하고 있다. 극락보전 동쪽벽 중앙에는 삼존불화를 시작하여,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이다. 방문당일 박물관은 입장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극락보전 내 중심불인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 뒤편에 그려져 있는 후불벽화이다. 무위사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로 지정되어 있던 후불벽화는 2009년 09월 02일 국보 제31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무위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띄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탑비와 비슷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보물 제507호)
▲ 귀면상을 닮은 거북머리
무의사 선각대사탑비는 보물 제507호이자 높이 250cm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형미스님(864-917)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명승으로, 무위사에서 주지로 8년간 머무르며 무위사 중창을 주도하였다. 탑비는 거북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거북 받침돌과 운용문이 있는 머릿돌에 표현된 조각 수법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몸돌 앞면에는 형미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글씨를 썼다.’
무위사에서 만날 수 있는 불교유적으로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제507호),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무위사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
영랑생가(김윤식1903-1950)
▲ 영랑생가 입구 전경
김영랑은 8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1934년 4월 문학 3호에 발표한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가 입구에 새겨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 김윤식(1903-1950)은 강진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휘문의숙에 들어갔고 3학년이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 만세운동(강진 4.4운동)을 준비하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감금,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관동대지진이 나던 해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그만두고 귀국하여 1930년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고, 1943년 서울로 옮겨 이승만 정권 당시 공보처 출판국장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부상당하여 47세가 되던 1950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08년 국가에서 금관문학훈장을 추서하였다.
주막 사의재(四宜齋)
▲ 사의재 내 동천정
영랑생가에서 조금 더 진입하면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거처하던 곳을 만난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길에 올라 1801년부터 1804년까지 머물다 도암면 귤동마을로 옮기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 주막 내 기거했던 곳. 사의재 간판이 내걸려 있다.
▲ 사의재 옆 한옥체험관 내 주모 상
오늘날 주막으로 보존하는 곳으로 음식도 판매하며, 2007년 복원한 독특한 우물이 시선을 붙잡는 곳이기도 하다. 주막 동문매반가는 동문에 있는 밥을 파는 곳이란 의미이다. 주막에는 다산 선생이 만든 소박한 정원인 연못이 있으며 이를 동천정(東泉亭)이라 불렀다. |
제2편에서는 강진 전라병영성(사적 제397호), 강진 금곡사, 강진 백련사를 여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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