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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을 찾아나서다 제2편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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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강진녹차밭-무의사-강진영랑생가-강진 사의재-강진 전라병영성(사적 제397호), 강진 금곡사,-강진 백련사 |
강진군 여행하며 출출할때 추천 '설성식당'
▲ 3인분 상차림으로 가격은 24,000원이다.(1인당 8,000원) 생각보다 반찬의 양은 적은편이지만 맛은 깔끔하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니 문이 열리면서 한상 가득 차려진 밥상이 들어온다. 한상 가득이라 하지만 사실 큰 밥상은 아니었고 음식이 푸짐하지 않아 수저를 들기 전 조금은 실망하였으나 음식을 맛본 후 다시 밥을 바라보았다. 삭힌 홍어와 굴비 그리고 연탄불에서 구워 낸 불고기와 젓갈까지 모처럼 전라도 음식 한상을 차려 받은 기분이었다. 가격은 2인은 2만원이며, 3인부터 1인당 8천원이었다.
강진 전라병영성(사적 제397호)
처음부터 여행 일정에 강진 전라병영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강진 맛집을 검색하였고 그렇게 찾은 곳이 전라병영성 주변이었고 밥을 먹고 잠시 들러 보기로 하였다. ▲ 전라 병영성
전라병영성은 지금 발굴 작업 중이었다. 질퍽해진 땅과 공사로 인하여 잠시 성루에 올라 조망을 하기로 하였다. 한눈에 동서남북 사방에 펼쳐져 있는 성문이 조망되는 평지형으로 규모가 제법 넓었다. 병영성은 1999년 발굴을 시작으로 2003년까지 5차례 조사 및 1999년~ 2003년 남문, 동문, 서문 옹성 및 성벽을 복원하였다.
▲ 성벽 보수된 모습
전라병영성의 성곽 전체 길이는 1,060m 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이다. 1997년 사적 지정 당시 성곽 내 육군 지휘부 시절의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었으며, 성곽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강진군의 지속적인 복원 정비사업으로 성문화 성벽의 복원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현재, 여장 복원공사 및 성 내부 주요시설 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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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금곡사에서 석탑을 마주하다
▲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기암석
▲ 김삿갓 시비
금곡사 입구에서 김삿갓 시비를 만난다. ‘쌍암병기의분쟁(雙巖並起疑紛爭) 일수중류해분심(一水中流解忿心) 즉, 양편에 바위 우뚝 솟아 서로 다투는 줄 알았더니 물줄기 한 가닥으로 흐르는 걸 보니 근심 사라지네’라 글을 남겼다.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 본 입구 전경 ▲ 금곡사 대웅보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금곡사 건물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절 앞마당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3층석탑은 세존 진신사리 32과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밝혀져 오랜 역사와 함께 부처님의 자비로움도 느낄 수 있다. 금곡사의 풍경은 강진을 대표하는 절경 중 하나로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봄날에 벚꽃이 만발하여 더욱 빛이 난다. 금곡사 뒷산에는 500년 된 야생 녹차밭이 펼쳐져 있어 다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맑고 차가운 자연수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제829호)
▲ 대웅전 앞에 자리한 금곡사 삽층석탑(보물 제829호)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제829호)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금곡사 경내 중심법당인 대웅전 앞에 서 있다. 삼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곡사 삼층석탑은 전체 높이 5m가 넘는 비교적 큰 탑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고수하면서도 기단부 구성이나 옥계석 일부에서 백제계 석탑의 특징도 보인다. 이 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단층 기단이며,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의 높이를 2층 탑신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하여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갖추고 있다. 두툼한 옥개석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옥개석 밑에는 6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특히 1층 탑신 사면에 작은 방형감실이 마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각 감실마다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1988년 석탑 해체 복원 공사 중 3층 탑신 상면의 사리공에서 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었다.’ |
백련사에서 겨울 동백을 만나다
▲ 겨울 동백이 땅 위에서 또한번 피고 있다.
이후 희종7년(1211) 원묘국사(圖妙國師. 1163~1245) 요세(了世)에 의해 크게 중창, 고종3(1216)에 건물 80여칸을 짓고 낙성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전한다.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폐사가 될 위기에 처했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사찰은 세종8년(1426) 천태종의 영수이자 선종(禪宗)의 최고 등급인 도대선사(都大禪師)로 불리던 승려 행호(行秊)에 의하여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도움을 통해 1430년~1436년 중수 불사가 있었고, 광해군 13년(1621)~인조 5년(1627)을 거치면서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영조 36년(1760) 2월 화재로 소실된 후 1762년 대법당을 중건하였다.
▲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산책로
일전에 동백꽃이 보고 싶어 무작정 친구와 함께 낯선 백련사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그해 삼월 말경 지천에 피고 떨구어진 동백꽃을 보고 돌아온 후 봄이면 동백숲이 떠오르곤 하였다. 봄이 아닌 겨울 베롱나무 앙칼진 색감도, 능선길 진달래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동백숲 붉은 꽃송이도 없는 백련사 겨울은 어떠할까.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른다. 좌, 우 동백나무 숲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이 일대 약 5만㎡ 면적이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의 상록 교목으로 온대 지방을 대표하는 수종이며,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구분되며, 백련사 동백꽃은 대부분 이른 봄에 피어 춘백에 해당한다.’ 백련사 초입에서 동백숲길을 따라 해월루는 0.4km, 다산초당은 0.9km, 다산수련원까지 1.7km 구간이다.
▲ 백련사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입구 백일홍
진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 332~414)가 루산산의 호계 동림사에 머물 당시 절에 벽련을 많이 심었다 하며, 백련을 많이 심어 백련사(白蓮寺)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신라시대에 정토왕생과 관음신앙을 실천하던 여러 결사 중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 도량으로 중국 동진 때의 고승 혜원이 동심사에서 염불왕생 결사를 하고 백련사로 부른 후 오늘날까지 천년고찰의 품위를 지켜오며 열반경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효령대군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8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고려시대 8분의 국사(원묘, 정명, 원환, 진정, 원조, 원혜, 진감, 목암)와 조선시대 소요, 해운, 취여, 화악, 설봉, 송파, 정암, 연파대사를 배출한 곳이다. 고려시대 8국사와 조선시대 8대사가 머물던 곳으로 3월 말이면 백련사 주변 5.2km 구간에 약 7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며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다.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 151호이며, 8월 중순 백련사 만경루 앞 백일홍은 붉은 자태를 뽐내며 장관을 이룬다.
백련사 대웅보전(전남유형문화재 제136호)
▲ 백련사 대웅보전 전경
백련사 대웅보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이다. 1702년 중건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원교 이광사(1705-1777)가 1763년 완도앞 신지도 귀향살이중에 들러 쓴 현판을 내걸고 있다. 대웅보전 수미단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그리고 석가후불화인 영산회도 후불탱화가 내걸려 있다. 또한 대웅보전 내부에는 벽화 묘법연화경이 그려져 있으며, 대웅보전은 1972년 4월 대웅보전을 중건, 2011년 대웅보전 중수 하였다. 불상은 1760년 화재 당시 화마 속에서 구해 낸 것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중앙에 본존불인 여래상과 좌우에 보살상을 봉안하는데, 백련사의 경우에는 보살상 없아 여래삼존상만 봉안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호)
경내를 둘러보면 2기의 탑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보호각 내 자리한 사적비가 보물 제1396호인 백련사사적비이다. 사적비는 높이 4.47m 이며, 용머리의 귀부는 고려시대 만들었으며, 숙종 7년(1681)에 비신과 이수가 만들어 졌는데 그 이유는 아마 중간에 비석에 훼손되어 새로 만들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 사적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1681(숙종 7년)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찬하고, 남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동생인 낭원군 이건(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형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옆면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이수와 비신은 유실되었고 귀부만 남아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 걸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의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이수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 셈이며, 1기의 비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만경루 내부 작품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 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 고려시대 혜일선사
사찰에 있는 부도는 응진전 앞 1기, 만경루 뒤 선방 앞 1기, 절 입구 축대 위 1기, 절 서쪽 동백 숲에 4기 등으로 총 7기가 있지만 일부 부도의 주인은 알 수 없고 선방 앞에 있는 춘파당 부도와 동백 숲에 있는 대웅보전 중수기를 기록한 스님으로 1804년 세우고 원묘국사중진탑으로 불리는 월인당부도 뿐인데 춘파당은 누군지 알 수 없다. ▲ 사찰에서 바라 본 가우도 불교유적으로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호), 백련사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 백련사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 강진백련사원구형부도(시도유형문화재 제223호)가 있다.
▲ 백련사를 내려서면서
2015년 12월 현재 만덕산 백련사에 심상치 않은 분이 첩거 중이다. 손 전 고문이 머물고 있는 강진 백련사 토굴로 큰 인물이 배출되는 이곳 만덕산을 이유 있는 셀프 유배이자 첩거로 보인다. |
스쳐가는 길 가우도를 만나다
▲ 가우도로 건너는 출렁다리
강진여행 중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가우도를 잇는 출렁다리를 가보라 하였다. 마침 도로변을 따라 이동하다 만난 가우도 출렁다리를 한번 거닐어 본다. 가우도란 소의 멍에를 닮아서 불러지는 지명이라 하며, 가우도 탐방로는 약 2.4km 구간이다. 가우도를 잇는 교량으로 저두~가우도 구간은 438m 사장교 방식이며, 반대편 망호~가우도 구간은 716m 현수교이다.
강진명소 제8호 가우도는 향기 나는 섬이라 하였다. 또한 가우도가 소의 멍에를 닮았다하여 교량을 지탱하는 구조물의 디자인이 쇠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면서 계속 출렁다리를 찾아야 했다. 알고 보니 전혀 흔들리지 않는 다리를 두고 출렁다리였고 섬에는 서너 채 집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까막섬과 마도진성
▲ 전망대에서 바라 본 까막섬 전경
까막섬은 상록수림이 모여 자라 멀리서 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하여 까막섬으로 부른다는 이야기와 까마귀가 많이 살아 까막섬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까막섬은 큰 까막섬과 작은 까막섬 등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섬에는 후박나무와 돈나무 등 약 100여종의 열대성 상록수종이 자라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까막섬이 움직인다? 이 무슨 기묘한 이야기란 일인가. 물런 실제 기록은 아니다. 까막섬에 관한 전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까막섬은 원래 적도 부근 남태평양에 있엇는데 강진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남태평양에서 강진까지 온 이유는 육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기나긴 여정 끝에 마량에 닿을 무렵이었다. 바닷가에서 까막섬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 업은 여인이 발 없는 섬도 걸어 다니는데 내 아들은 두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구나! 라고 땅이 꺼지도록 탄식하였다. 여인에게는 걷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섬은 이 말을 듣더니 이동을 멈추고 지금 그 자리에 머물기로 하였다. 신기한 것은 섬이 멈추자 곧 여인의 아들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까막섬은 육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왔지만 여인의 아들에게 걷는 능력을 주고 자신은 눈앞에 육지를 두고 멈추어버린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정진해온 자신의 꿈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륵한 일일까. 하지만 그로 인해 까막섬은 육지의 끝자락이 되지 않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준 위대한 작은 섬으로 남았다. 까막섬을 바라보며 잘했구나 잘했어 하고 말을 건네어 보라. 다리나 발이 아픈 사람이라면 까막섬이 낫게 해줄 것이다.’
▲ 마도진성
까막섬 전망대 도로 건너 마도진성을 만날 수 있다. 마도진성(마량마도진성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597년 8월 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순항하는 모습을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 마도진성은 말머리라 불리는 마량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여지도ㅓ에 둘레가 890척이며, 높이가 12척으로 해상 방어 병참기지였다. 이곳은 전라도 내륙인 강진, 장흥, 해남, 영암으로 이어지는 해상요충지로서, 정유재란 중 이순신의 부대와 명나라 전린의 부대가 연합 작전을 전개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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