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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트레킹 - 경주 특별한 만남 제3편 경주 소금강산 굴불사지

허영꺼멍 2015. 12. 1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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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특별한 만남 '사면석불'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14일

 

 

경주 남산 칠불암 - 경주 남산 옥룡암 탑곡-경주 소금강산 굴불사지- 경주 남산 삼불사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 제121

 

▲ 서쪽과 남쪽 방향으로 본 사방불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보물 제121)을 만나기 위해 잠시 도로를 벗어난다. 소금강산 자락 백률사로 향하는 초입에서 만나는 사면석불로 경주에서 만나는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국보 312)에 이어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면석불 또는 사방불(四方佛)로 불러지며, 동으로 약사여래좌상, 서쪽은 아미타여래삼존불, 남쪽은 석가모니불삼존입상, 북쪽은 관세음보살 입상이다.

 

▲ 동쪽 약사불 손에 올려져 있는 약합

얼마나 많은 불자신도가 찾아왔을까? 경주에서 만나는 석불 중 가장 많은 기도객이 찾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입구부터 향냄새가 진동을 한다.

 

굴불사지(掘佛寺址)에 관해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를 방문할 당시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땅을 파 보니 큰 바위가 나와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만든 후 굴불사(掘佛寺)라 불렀다 하니 기록을 통해 사방불의 조성은 통일신라 초기 경덕왕(김헌영(金憲英). 재임기간 742-765) 시절로 추정된다.

 

굴불사 기록에 나오는 백률사는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굴불사지에서 만나는 석조사면불상은 아쉽게도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경주에서 만나는 야외 석불과는 달리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보호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닥에 촘촘한 기둥을 열렸던 주춧돌이 남아 있다. 석불을 중심으로 정면 3, 측면 3칸 네모반듯한 고려시대 건물터로 굴불사가 아닌, 굴석사(堀石寺)가 새겨진 고려시대 금고(金鼓, 쇠북)가 확인되었다.

 

▲ 북쪽 방향 측면 전경

 

하나의 바위에 동쪽(약사여래불) 서쪽(아미타여래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새겨놓은 사방불로 서쪽 아미타여래불은 암벽에 몸체를 새기고 제비원처럼 얼굴 부분(불두)을 따로 올려놓고 다른 돌로 조각한 협시불을 두어 삼존불 형식을 띠며, 동쪽 약사여래불은 앉은 자세로 약합을 올려놓은 모습이며, 북쪽 미륵불은 보살상과 관음보살을 두고, 남쪽은 본래 삼존불 형태였지만 일본인이 오른쪽 보살을 떼어가면서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의 머리를 함께 떼어 가버렸다.

 

 

서쪽에서 만난 아미타여래삼존불

 

서쪽이자 재단 정면으로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삼존불이 세워져 있다. 아미타여래불은 신체를 서쪽면 바위에 고부조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렸으며, 협시불로 좌우 한분씩 각각 따로 만들어 세웠다. 아미타삼존불을 본존불로 협시불은 얼굴을 분실해 버린 대세지보살과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서 있다.

 

 

아미타삼존불 본존불로 높이 3.9m로 발견당시 목이 떨어져 수습해 놓은 흔적이 남아 있다. 본존불의 오른손은 훼손되어 떨어져 나간 상태이며, 왼손은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미타삼존불 관세음보살로 높이 1.95m이며, 발견당시 떨어졌던 보관을 다시 수습해 놓았다. 불상은 발에 힘을 주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 옆에 있는 목이 아예 분실된 아미타삼존불 대세지보살로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서 있다.

 

북쪽에서 만나는 보살입상

 

▲ 북쪽 전경으로 서 있는 불상 옆으로 얇게 표현된 관음보살이 있다.

 

북면에는 도드라진 보살입상 한분과 그 옆으로 얕은 선으로 11() 6()의 관음보살입상을 새겨 놓았다. 11() 6()의 관음보살입상은 얼굴 11개와 6개의 팔을 가진 관음보살입상이다. 얕게 그려진 탓에 관음보살입상의 모습은 희미하여 파악하기 어렵다.

 

동쪽면에서 만나는 약사여래불

 

▲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약사여래불

 

금방 약사여래불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동쪽 바위면을 돋을새김 방식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다. 양발을 무릎위에 올린 결가부좌 형태의 좌상으로 손을 가지런하게 모은 후 왼손에 약합(藥盒)으로 추정되는 둥근 물건을 올려놓고 있는 듯 보이나 오른손이 훼손되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며, 사면석불 중 유일하게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

 

 

남쪽에서 만나는 가슴아픈 흔적

 

▲ 세분의 불상 중에서 한분이 사라졌다.

 

남쪽면에는 본래 미륵삼존불을 새긴 듯하다. 현재는 제일 바깥 왼쪽에 있던 일본인에 의해 보살상은 분리 후 옮겨갔으며, 중앙에 있던 보살상을 떼어내다 얼굴부분이 훼손되자 포기한 듯 보이며 현재는 오른쪽 한분과 얼굴없는 한분 등 2분이 새겨져 있으며, 둥근 연꽃대좌 형태를 띤 발과 발을 받치는 부분을 따라 만들어 끼워 넣었다.

 

여행을 마치며

 

 

굴불사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당시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주지승에게 땅을 파보라고 하니 그 속에 바위가 있어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로 불렀다 전하지만 사찰의 역사는 알 수 없고 1985년 발굴 당시 동사(東寺)’라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중반 굴석사(掘石寺)로 불렀다고 한다. 숙종 7(1681) 중창을 하였지만 18세기 전후 사찰은 폐사되고 지금의 사방불이 새겨진 사면석불(보물 제121)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백률사가 어떤 절이었기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를 방문하였을까? 통일신라 당시 소금강산(280m) 자락 백률사는 불교성지이자 이차돈이 순교했던 성스러운 곳으로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 중 하나인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금동약사여래불은 1930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는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 경주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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