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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트레킹 - 여주여행 4편 신록사에서 보물을 만나다.

허영꺼멍 2015. 12. 3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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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 신록사 문화재 여행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26일

 

 

명성황후생가-세종대왕릉-효릉왕릉-하리& 창리 & 영월루-신륵사-고달사지-파사성 & 마애불-포츠골미륵좌불-도곡리석불좌상

 

▲ 신륵사 묵어

▲ 원효장군 전승비

이른 시간 주차장에 도착한다. 간밤 눈이 내렸지만 햇살에 녹아 버린 절집은 평화롭기만 하다. 신륵사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시선을 끄는 탑비가 하나 있어 살펴보니 원호장군 전승비이다.

 

조선중기 당시 무신이던 원효장군(1533-1592)은 관직을 물러나 고향에 머물던 선조 25(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패주하던 관병과 민병 약 300여명을 모아 신륵사 일대에서 강을 건너던 왜병을 물리쳤다 한다. 이후 여주목사 겸 경시 강원 양도방어사로 명 받고 떠나 금화에서 전사하였다 한다.

 

봉미산(鳳尾山) 신륵사로 들어선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비석군과 정자 1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신륵사 답사가 시작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신륵사를 만나는 특별한 여행길이다. 세심정 약수물 한잔에 목축이고 구룡루를 지나 절집을 본격적으로 끼웃 꺼려 본다.

▲ 매표소 알 일주문을 시작으로 신륵사 탐방이 시작된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1) 원효대사(元曉. 617-686)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여강나루를 막 지날 즈음 흰옷을 입은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연못을 가르켜 이곳 구룡지는 신성한 가람이들어설 자리라 현몽한다. 원효는 다음날 기억을 더듬어 남한강 주변을 살펴보니 남한강이 큰 연못을 감싸듯 돌아가는 곳에 현몽을 하였던 그 연못이 있는게 아닌가. 원효는 즉시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되지 않아 7일간 기도를 하니 연못에 살던 아홉용이 그제서야 하늘로 승천하였고. 이후 일사천리로 절을 창건할 수 있었다 전하나 문헌자료가 없는 구전일 뿐이다.

 

 

▲ 은행나무 벼락맞은 가지에서 관세음보살이 합장한 모습을 닮아있다.

 

육백년 이상을 살아 온 은행나무 두 그루가 쌍수들고 맞이하는 듯 하늘 향해 가지를 부지런하게 뻗어 있다. 신륵사 은행나무가 조금은 특별하다. 수고 22m로 나무둘레가 각각 3.1m, 2.7m로 보호수이지만 천둥번개치던날 나무 굵은 가지 하나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 벼락 맞은 나무가 관세음보살님이 합장하고 있는 듯 모습을 하고 있다.

 

▲ 봉송각에 모셔진 불상

명부전과 봉송각 그리고 아쉽게도 공사 중인 조사당 뒤편으로 부도가 이어져 있다.

 

특히 입구에서 만나는 봉송각은 신륵사를 찾은 신도와 탐방객이 석탑 앞에 모인 동전과 시주한 돈으로 작게 만든 으로 사후세계 편안하길 바라는 사십구재 등 고인의 영혼이 극락세계에서 환생하길 바라며 비는 공간이다.

 

 

조사당 왼편 언덕에 자리잡은 2기의 부도탑

 

▲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로 산길이 열린다. 보제존자(나옹선사) 석종부도로 향하는 길로 석종(보물 제228), 석종비(보물 제229), 석등(보물 제231)로 향하는 돌계단을 딛고 오를 수 있다. 명부전에서 곧장 만나는 부도 2기가 있는데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와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이다.

 

▲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5호)

▲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자료 제134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는 둥근 원구형부도로 정확하게 누구의 부도탑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220cm, 공 모양 탑신 60cm이며, 연꽃잎 장식과 함께 보편적인 부도형태를 하고 있지만 다양한 조각표현이 눈길을 끄는 부도이다.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우형문화재 제195)는 통일신라시대 유행하던 팔각원당형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말~조선초 부도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225cm 로 조사당 뒤 북쪽 구릉지역에 있던 것을 1966년 옮겨와 놓았다. 옮길 당시 사리함은 확인되었지만 이름은 알 수 없다.

 

 

보제존자 그 흔적을 찾아나서다.

 

▲ 석종을 중심으로 입구에는 석종비, 앞에는 석등을 놓았다.

조사당 뒤 언덕을 오른다. 계단 끝자락에서 만나는 석종(보물 제228), 석종비(보물 제229), 석등(보물 제231)자 형태로 입구에 석종비를 세우고 석종 앞에 석등을 놓고 있다.

 

석등과 석종비에는 독특한 문양을 새겨놓고 있지만 석종은 아주 간결하게 사방으로 오르는 계단만 열어 놓고 있다.

 

 

보제존자(나옹화상)석종비(보물 제229호)

 

▲ 깔끔하리 만큼 정교하게 새겨놓은 조각

 

나옹화상(1320-1376)이 머물며 고려 우왕2(1376) 다시 짓고 중창 낙성식을 하는데 너무 많은 신도가 명성을 듣고 몰려들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다.

 

이때 나옹을 시기한 유학자들이 탄핵하여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영원사(瑩原寺)로 이주하라는 왕명을 내리게 되었고, 왕명을 받든 나옹화상은 먼 길을 떠나려 하였으나 오늘날 110km 거리에 위치한 여주 신륵사에 부근에 이르러 병을 얻었고 신륵사에서 입적(入寂)하게 되니 그때가 나이 57세였다.

 

밀양으로 가는 길을 회암사를 출발하여 구리까지 이동 후 남한강 뱃길로 내려서다 신륵사에 급히 내린 것으로 보인다.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우왕은 묵은 이색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오늘날 조제존자사리석종비이다.

 

 

나옹화상이 밀양 영원사로 향하다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를 조성하였다는 부도비이다. 보통 거북문양을 하고 그 위에 석비를 올리는 것과 달리 매우 간결해 보이면서도 목조건축처럼 비를 세우고 깔끔하게 기왓골을 올렸다. 보제존자석종비의 전체 높이는 2.12m이며, 비신 높이 1,21m, 너비 0.61m이다.

 

▲ 석종비 새긴 내용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을 북쪽 언덕에 종 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신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과 서예가인 한수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 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도 같은 형식이다.’

 

 

신륵사보제존자(나옹화상)석종(보물 제228)

 

▲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신록사 뒤편 남한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한 신륵사보제존자석종은 나옹(혜근 惠勤. 1320-1376)스님 입멸 3년이 지난해인 1379년에 세운 고려후기 석종형의 부도이다.

 

부도는 종모양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 불꽃문양을 한 보주를 올렸으며,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통도사나 금산사 사리탑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다. 석종은 높이 160cm, 지름 110cm이며, 보제존자석종으로 향하는 양 옆에 계단을 조성하였지만 통도사 금강계단과는 달리 주변에 특별한 장식이 없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이 이곳에 세워진 경위는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머물 당시 왕명에 의하여 밀양으로 떠나던 중 신륵사에 들렀고 1376년 입적하게 되니 고려 우왕 5(1379)에 제자들에 의해 사리탑을 조성하였다. 나옹화상 혜근의 사리탑은 이곳 신륵사 외에도 주지로 머물던 회암사, 나옹화상 제자가 세운 원주 영전사 등으로 원주 영전사터에 있던 것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종은 신륵사에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2(18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다.

 

부도의 기단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 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었으며 맨 꼭대기에는 보주를 조각하였다. 종 모양의 부도는 통도사, 금산사 용연사, 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형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종 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부도 뒷면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1879)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231)

 

▲ 석등에 화려한 문양이 돋보인다.

 

 

보제존자 석종을 밝히는 고려말기 대표적인 팔각형의 석등이다. 나옹선사의 묘탑 앞에 조성한 석등으로 국내에서 희귀한 경우에 해당된다.

 

화사석의 높이는 67cm, 전체높이는 193cm이다. 석등 화사석 화창 주변으로 당초무늬처럼 얽혀 있는데 이를 하늘로 오르기 전 땅 위에 앉아있는 용의 형상인 반룡문이라 하며, 화창 위에는 정교하게 새겨진 비천상이 있다.

 

▲ 장교한 비천상 모습

▲ 비천상과 반룡문

▲ 석등에서 보기 힘든 비천상과 용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 석등 상대석 조각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 있다.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고 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우러져 있고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주석에는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동()자형의 안상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다.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는데, 반룡문을 새긴 원형기둥과 화창, 비천, 창방, 평방 등을 가득 조각하였다. 팔각형인 지붕돌의 추녀 끝은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위에는 복발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 5(1379)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신륵사 조사당

 

아쉽게도 조사당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20131227~20160113일까지 신륵사 조사당 보수정비공사 진행중이라 누군가 내 놓은 틈 사을 통해 먼 거리에서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신륵사 내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 말 기울어가는 불교를 이끈 지공, 나옹, 무학 등 세분의 화상을 모신 곳이다. 조사당은 정면 1, 측면 2칸의 독특한 건물구조에 정면 1칸을 6짝의 띠살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정면을 제외하고는 삼면은 벽으로 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건물 내에는 19세기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에 나옹화상을, 좌우에 지공대사와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나옹화상 영정 앞에는 가사장삼을 걸치고 앉아 있는 나옹화상 조각상을 배치해 놓았다. 또한 조사당 앞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또는 나옹화상 제가였던 무학대사가 심었다 하는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높이 약 5m, 나무둘레 1.3m 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 조사당

 

 

▲ 조사당 앞 향나무

 

신륵사 조사당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라 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이 절이 크게 번창한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이 이 절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절도 크게 위축되었으나 예종 1(1469)에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 심씨의 능인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이 되어 성종 3(1472)부터 대규모로 다시 지어졌으며 조사당은 이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의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이 지공, 좌우에 무학과 나옹의 영정이 있다.

 

정면 1, 측면 2칸 규모로 정대석 기단에 더듬은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재료인 공포를 사용한 다포계 건물이다. 지붕가구는 오향으로 구성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가로재가 정()자형으로 놓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도록 한 특수한 구조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뒷벽 쪽으로 불단을 설치하여 무학, 지공, 나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신륵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이지만 공포의 형태와 제작 수법이 특이하고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외곽을 가지고 있는 조선 초기의 중요한 건축이다.’

 

신륵사 극락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다포계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1440년 중수를 통해 극락보전으로 명명하였으며, 성종 4(1473)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한다. 극락보전은 정조 1(1797) 건축을 시작하여 3년 후인 1800년에 완공하였다 전하며, 극락보전 내 대들보에는 나옹화상이 남겼다는 천추만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추만세(千秋萬歲))’ , 천만년의 세월을 누린다는 중국 한나라 당시 말로 오래 살기는 바라는 의미이며, 극락보전에 있는 글은 나옹화상의 글이라 전한다. 특히 보는 위치에 따라 글이 달리 보이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 극락보전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1) 당시 원효가 창건하였다 하나 구전에 불과하다.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충숙왕 15(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양주 회암사(檜岩寺)를 창건 후 고려 우왕8(1382) 이색과 나옹의 제자가 만든 대장경을 봉안, 조선시대 사찰 탄압으로 위축되었다가 조선 예종2(1469)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 조선 성종 3(1472) 확장 및 다음해인 1473년 보은사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전소된 후 1671, 1792, 1853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주존불인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보물 제1791)은 고려시대유형하던 불상배치 방식으로 좌상을 하고 있는 반면 두 분의 협시불은 서 있는 입상을 취하고 있다. 신륵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선시대 1610년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방문당일 예불을 드리고 있어 내부를 담지는 못했다.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극락보전 앞 높이 약 3m의 석탑이다. 백색대리석을 가공하여 올린 석탑으로 정확한 층수를 알 수 없어 다층석탑으로 부른다. 탑은 고려시대 성행하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 및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제1808)과 유사하여 성종3(1472)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고 중창을 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보물 제225호 다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특이하게도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3m에 이른다. 이 탑은 기단에서 몸돌에 이루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층 기단의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중대석의 각 면에는 파도 문양이, 모서리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 기단 각 면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 몸돌에는 각 층 마다 모서리 기둥(우주)이 새겨져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하다. 지붕돌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보인다. 팔층 지붕돌 위에 작은 탑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 모두 고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성종 3(1472)에 여러 건물이 다시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도 같은 시기에 전립된 것으로 보인다.’

 

▲ 상면 운룡문

▲ 기단부 연꽃문양과 하층 벽면 파도문양

 

탑은 현재 이층계단 위 팔층만 남아 있으며, 탑에는 정교하고 신비스런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기단석 용과 구름 조각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낸다. 탑은 기단부 윗면에 연꽃잎을, 상층 벽면에는 운룡문을, 하측벽면에는 파도문을 새겼다.

 

구룡루(九龍樓)

 

▲ 전설이 담겨 있는 구룡루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그리고 구룡루가 일직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경내에서 바라보면 봉미산신륵사 현판이 내걸려 있으며, 들어서는 입구에서 바라보면 구룡루 현판이 내걸려 있다. 신륵사 창건이 구룡이 머물던 연지를 메우고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반영된 구룡루로 보인다. 구룡루에서 극락보전으로 바라보면 오른편에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향나무 두 그루가 양쪽을 자리하고 구룡루 앞으로 보호각이 있는 탑비와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 말 유학자 이색 비문

 

▲ 이색비문

전탑 뒤 작은 비각을 눈여져 볼 만하다. 고려 말 유학자 묵은 이색의 비문으로 여생의 남은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며 지냈다 한다.

 

이색은 불교배척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인물이지만 왕명으로 나옹의 행적을 살펴 비문을 짓는 과정에서 비범함에 감탄하며 존경하였다 한다.

 

이색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입조하기를 청했지만 거절하였고 결국 이성계는 왕명을 거부하는 이색을 헤치려 하자 이색은 여강 나루 아래 제비여울 근처에 배를 띄워 내려오지 않자 배로 독주를 가져갔고 죽어 배에서 내렸다 한다.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6호) 외부로 돌출된 방위석

 

신륵사 강가 동산 위 자리한 국내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탑이 절 경내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절 밖 강가에 세운 특별한 탑으로 기단은 화강암으로 쌓고 탑신부는 벽돌로 구성하였다. 전탑은 높이 9.4m, 7층규모이며. 신륵사에 벽돌로 만든 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하였다. 벽돌로 된 탑에서 확인되는 당초무늬는 이곳에서는 수리 과정에서 원형을 잃어버려 배열조합이 훼손된 상태라 한다.

 

 

탑은 조선 영조 2(1726)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절 밖에 자리한 탑을 두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탑이 강가에 자리한 것은 남한강을 따라 다니던 황포돛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추정하고 있으며, 경북 안동에서 만나는 다양한 모습의 전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기단부로 추정되는 구역은 석탑의 형태를 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전탑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하부에는 사방을 가리키는 방향표시를 새겨놓고 있다.

 

▲ 전탑 흔적이 있지만 배열이 불규칙적이다.

▲ 전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돌처럼 찍어낸 문양이 뒤썩여

혼란을 주고 있다.

신륵사다층전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인주문과 당초문을 조각하였으나 배치가 안정하지 못하며,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에 면토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게,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1726)에 고쳐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보호각

 

 

 

 

일종의 비문으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고려 말 묵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각을 조성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오늘날 액자틀처럼 석조기둥을 세웠다.

 

신륵사 대장각기비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묵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 관제학인 이승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인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비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강월헌으로 내려서다.

 

▲ 모전석탑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

지명에 관한 설로 고려 우왕 당시 마암(馬岩) 바위 부근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에게 헤를 끼치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천마를 다스렸다는 설화도 전해지며, 또 다른 설로 건넛마을 용마(龍馬)가 나타나 피해를 주며 날뛰자 인당대사가 나서 고삐를 잡으니 천마가 순해졌고 신력의 신()과 제압의 뜻인 륵()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 불렀다 전하며, 한때 신륵사 동대 위 벽돌로 쌓은 전탑이 있어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성종3(1472) 대규모 중창과 함께 성종4(1473) 보은사(報恩寺)로 개칭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신륵사로 되돌아 왔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신륵사는 폐허로 변하였고 이후 현종 12(1671) 이조판서 김수항과 이조참판 민정중, 호조판서 정치화 등에 의해 재건을 시작하였다.

 

 

강월헌 주변으로는 겨울 상고대가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곳이므로 눈이 많이 내리거나 매서운 찬바람이 기성을 부릴 때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굳이 먼 산을 힘들게 오르지 않아도, 강바람이 세상을 꽁꽁 얼려 만들어 낸다.

 

 

신륵사는 겨울이 최고다. 나옹화상 당호를 따 강월헌으로 불리는 정자에 올라보면 남한강과 더불어 찬바람이 매달려 만들어 내는 상고대는 한 폭의 산수화가 그려진다. 주변 풍광과 함께 신륵사에서 고승 나옹화상(懶翁 1320-1376)과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나옹화상은 오늘날 신륵사의 정교한 조각작품을 남겨놓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모전석탑을 내려서면 강월헌과 그 앞에 많이 훼손되어 안타까운 석탑 1기를 만날 수 있다. 남한강 암반 위 정자 하나 사뿐 올려져 있는데 바로 강월헌이다. 그 옆으로 신륵사3층석탑 1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나옹화상을 다비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월헌은 나옹화상 다비 장소로 생전의 당호인 강월헌을 따서 부르며, 오늘날 강월헌은 1972년 홍수로 소실 후 1974년 다시 세웠다.

 

신륵사하면 나옹화상(懶翁和尙)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문화재가 나옹화상과 연관되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신륵사 불교문화재로는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 신륵사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 대장각기비(보물 제230),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231),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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