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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트레킹 - 여주여행 6편 파사성에서 만나는 마애불 그리고 석불

허영꺼멍 2016. 1. 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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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파사성에서 만난 마애불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26일

 

 

명성황후생가-세종대왕릉-효릉왕릉-하리& 창리 & 영월루-신륵사-고달사지-파사성&마애불-포츠골미륵좌불-도곡리석불좌상

 

파사성으로 오르다.

 

▲ 파사성으로 오르는 등산로

 

네비로 파사성을 입력하니 곧장 남문으로 오르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 후 산길을 따라 오르니 온통 활엽수길이며, 초입에는 밤나무 밭이 이어졌다. 그리고 임도를 따라 오르니 복원중인 산성과 남문지에 도착한다. 어떤 모습으로 성문이 존재하였는지 알 수 없어 복원을 미루고 있으며, 남문으로부터 정상으로 오르는 성벽을 따라 계단식으로 길을 터놓았으며, 성벽 가는 길에서 무너진 산성에 뿌리 내리고 자란 듯 한 소나무가 복원을 하는 과정에 보호되어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 파사성에 남문지를 따라 오르면 여주보가 조망된다.

 

파사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파사성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성이다.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쌓았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최근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의 유구(옛날 건축의 구조와 양식의 자취)가 발견되어 축성 시기가 삼국시대로 밝혀졌다. 이후 195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 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하였다고 전한다.

 

▲ 남문지에서 바라 본 여주보

 

파사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 상류와 아류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우리나라 성곽 역사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고려 말의 이색 선생과 조선 중기의 유성룡 선생이 파아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시로 남길 정도로 전망이 아름답다. 성벽의 길이는 936m,이고 최대 높이는 6.5m이며 붕괴된 부분도 있지만 거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벽은 크기와 두께가 다른 돌을 이용하고 석재의 자른 면을 밖으로 오도록 쌓아 올려 표면이 비교적 장연하다.

 

▲ 남문에서 성벽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바라 본

마애불이 있는 암벽

파사성은 사적 제251호이다. 해발 230m 지점에 쌓은 고대산성으로 지형을 따라 포곡식으로 성벽을 쌓고 2008년 성벽 보수 공사 당시 노후한 성벽을 가급적 허물지 않고 그 위에 계단형식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성벽을 딛고 파사성 정상에 도착하면 여장이 있으며, 마애불로 향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마애여래불은 정상으로부터 340m 아래지점 능선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곳 마애불은 대한불교 조계종 파사성 수호사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파사성 정상 서북쪽 옆 산 정상 바로 밑에 암벽을 깎아 만든 큰 수직면에 선각되어 있는 높이 5.5m의 마애 여래 입상이다. 규모가 대단히 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알맞으며, 이중의 두광을 갖추고 어깨가 각이 져 신체가 당당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난 우견판단식 옷을 입고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서 있다.

 

▲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사각형의 얼굴에 큰 눈, , , 어깨까지 늘어진 귀, 낮은 민머리 위로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가 각이 진 채 가슴 앞에 두었으며 왼손은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옷은 왼쪽 어깨부터 큰 곡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내의인 군의가 주름지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선각 표현은 이천 영월암 마애 여래 입상 보물 제822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중 두광을 갖춘 넓적한 얼굴, 각이 진 팔꿈치, 옷주름, 선각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영월암 마애 여래 입상과도 유사한 점이 많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상 주변에서 기와 조각이 수습되는 등으로 보아 이곳에 파사성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동문지

 

성 내부에는 동문 터와 남문터, 수구지. 우물터, 각종 건물터 가 남아 있다. 특히, 남문 터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팔각 주춧돌이 있고, 남문터 안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으며 지름이 5m나 되는 저수지 모양의 우물터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 성벽을 따라 이동하며 내려선다.

 

남문을 시작으로 정상에 오른 후 잠시 마애불을 만나고 정상에 다시 오른다. 그리고 반대편 산길을 따라 내려서면 동문지를 거쳐 다시 남문지 입구에 도착하며, 올라왔던 주차장으로 내려서면 된다. 파사성 한 바퀴 돌아 내려서는 것이다.

 

 

파사성을 오르는 길은 주차장으로부터 정상까지 약 860m 오르는 산길과 수호사에서 올라오는 약 800m 산길이 있어 어느 지점을 택하여도 정상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파싱골을 따라 오르는 입구(네비:경기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650) 파사성 주차장에 주차하고 오른 후 남문지-포루-정상-동문지-남문지-주차장 순으로 내려서면 된다.

 

포츠골미륵좌불

▲ 포츠골 미륵좌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

 

 

70번 지방도로에서 포초골 미륵좌불 이정표를 만난다. 보척골 안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한 대성사 내 주차장(네비입력:경기 여주시 금사면 외평리 458-2)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 절집으로 오르니 현대식 절집 중앙에 보호각과 함께 포초골 미륵좌불이 계신다.

 

포초골 미륵좌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이며. 원적산 중턱 대성사에 모셔져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팔각형의 대좌 위에 돌로 만들어진 높이 1.7m의 미륵좌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제직되었는데, 이 좌상은 불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민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를 얹어 놓았다. 보개의 아래쪽은 3단으로 구성되어 그 중 중단에는 꽃부리가 위로 향한 양련이 표현되어 있다.

 

 

둥근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팽팽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어 있는데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목에는 번뇌, ,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둘려져 있다. 옷은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유려한 옷 주름이 흐르고 있다. 가슴에는 내의의 띠 매듭이 묘사되어 있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당당한 어깨와 더불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가부좌를 한 두 발목 사이에는 퇴화된 형식의 부채꼴형 옷 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 보호각에 모셔져 있다.

▲ 좌상에 사각형 보개를 올려쓰고 있다.

 

손 모양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어 마귀를 굴복시키는 순간에 취한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면에 보살상이, 상대석에는 양련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석불좌상은 전형적인 9세기 조각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

 

▲ 여곡 도곡리 석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70번 지방도를 따라 이동하다 궁리삼거리에서 기마실노인회관을 거쳐 마을길 끝자락인 경기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21’ 까지 진행하면 더 이상 도로는 없으며, 그곳에서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을 만나게 되지만 진입로 이정표가 잘 시선을 끌지 못해 길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관광 안내지도에 소개되어 있는 도곡리석불좌상을 찾는데 마을주변을 몇 번이나 돌아야 했는데 이정표가 작아서 미처 확인을 하지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지만 빛바래고 작은 간판을 좀 큰 것으로 교체하여주면 어떨까 싶다.

 

▲ 마을길 끝자락에서 만나는 여주 도곡리석불좌상

 

겨우 찾은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을 만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좌상이지만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데 석불에 딱 맞아 떨어질 만큼의 보호각을 올려놓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석불좌상이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걸까? 주변 공간이 넉넉한데 왜 이처럼 답답하게 보호각을 짓고 가둬 버렸는지, 또한 탐방객이 어찌 확인을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였다.

 

▲ 대좌위에 모셔진 석불좌상

▲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 좌대

 

 

여주도곡리 석불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크기 307, 불상 크기 193이며, 상대석 연꽃문양에 독특하게 불상을 조각해 놓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원적산 자락 밑에 북동쪽을 향하여 팔각대좌 위에 부처가 좌선할 때 취하는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알맞은 신체 비례를 가지고 있다. 석불의 주변이 편평하여 주춧돌과 석재들이 남아 있는 점, 북쪽 20m 지점에 절터가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전각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의 모양을 보면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닳아 없어져 거의 드러나지 않으나 두툼한 코, 팽팽한 두 뺨,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에서 자연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목에는 번뇌, ,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가 뚜렷하고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이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약지와 새끼손가락 2개를 펴고 있는 특이한 모양이다. 옷은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을 걸쳤다.

 

 

왼쪽 어깨 위에서 옷자락을 고리로 고정시켜 삼각형 주름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9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대좌는 불상에 비하여 작은 편으로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각 연잎마다 좌선할 때 손 모양인 선정인을 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중대석에는 불법을 지키는 장수인 신장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불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조각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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