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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기 국가 관장하는 3대 선원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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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생가-세종대왕릉-효릉왕릉-하리& 창리 & 영월루-신륵사-고달사지-파사성 & 마애불-포츠골미륵좌불-도곡리석불좌상 |
왕실비호를 받았던 만큼 고달사는 약 4만평의 절집을 자랑하였고 전성기에는 인근 30리가 절의 소유였다고 하니 당시 불교문화 중흥과 함께 엄청난 위세도 떨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일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달사가 나오지만 1799년 범우고에는 폐사지로 나오니 조선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 해 본다.
▲ 고달사지 발굴을 통해 초석들이 드러나 있는 모습
넓은 사지 여러 절집 전각이 자리했을 주춧돌의 흔적을 딛고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왜 이 엄청난 고달사지가 이토록 철저하게 사라져야 했는지 안타까움이 밀려오며, 그래도 남아 있는 불교유적을 통해 안도의 한숨을 내 쉬기도 하는 곳이다.
▲ 고달사지 입구 오랜세월을 살아온 고목나무 한그루가 일주문 역활을 자청하고 있다.
고달사지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고달사지 데크길을 따라 고달사지 석조 2기를 시작으로 고달사지 석조대좌-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를 만난 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북 귀부 1기를 만나면서 발굴지역 문화재 탐방을 끝낸다. 고달사지 위쪽에는 최근 만든 고달사가 있으며, 차량이 고달사 경내까지 진입된다. 고달사에서 길을 따라 조금 내려서면 고달사지 원종대사탑으로 다시 산길을 올라서면서 원종대사 탑 그리고 고달사지 승탑을 만나고 내려서면 된다. 고달사지를 찾은 대부분 탐방객이 눈에 보이는 지역만 둘러보고 내려서는데 반드시 만나야 할 것이 승탑과 원종대사탑이다.
고달사지 2기의 석조
고달사지 건물지 발굴과정에서 수습된 석조로 가로 321cm, 세로 149cm, 높이 98cm의 긴 사각형구조이다. 하나의 돌을 파내고 고루 다듬은 후 바닥 중앙에 지름 7.5cm의 배수구를 만들어 놓았다. 특히 수조 모서리 부분에 연꽃잎을 조각하여 미적 감각을 더해주고 있다.
▲ 초입에서 만나는 석조. 옮겨와 있다.
고달사지에 도착하면 느티나무 한그루가 반겨주며 사지로 향하는 탐방로를 안내하고 있다. 탐방로 하단을 시작으로 걷다보면 많이 훼손된 석조 1기와 온전한 석조 1기 등 2기의 석조를 만나게 된다. 여주 고달사지석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달사지 석조는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가-4 건물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살짝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으며, 상면으로 약 2cm 정도의 귀접이를 해주어 장식적인 기교가 돋보이고 있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 에서도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달사지 석조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 시기도 빠른 편에 속하여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제8호)
▲ 사각의 석조대좌 주변으로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조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관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사각대좌의 수작이다. 이 대좌는 정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 상대는 양련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는 4연이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애로 안상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성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가솜씨로 조화시킨 고려 초기 역작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
▲ 석조대좌 보다 한단 높은 구역에서 만나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
귀부와 이수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국내 가장 큰 규모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남 강진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호)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며, 수염은 옆으로 향하고 금방이라도 성큼 나아갈 듯 낮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종대사(김도광 869-958)는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달사 심희대사 제자로 입문 후 당나라 유학을 거쳐 귀국 후 삼창사와 경주사천왕사를 거쳐 고달사로 돌아와 대가람을 일으킨 후 광종은 왕사로 모시며 중진대사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입적 후 시호를 원종으로, 탑 이름을 혜진이라 하였다.
▲ 용의 문양이 입체적인 원종대사 비 이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초의 선사 원종대사 천유의 비이다. 원종대사 천유는 고려 광종대에 국사의 대우를 받은 승려로서 원종대사 사후에 광종이 명을 내리어 도봉원, 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으로 삼았다. 비문은 정간을 치고 글자를 새겼으며 42형에 1행 70자 내외의 구성을 가진 대형비이다. 내용은 원종대사의 탄생과 출가, 당나라 유학과정, 귀국 후 국사로 책봉되어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비문에는 찬유가 혜묵산에 머물자 선승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고달사를 중심으로 중흥을 드날린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등 고려초 불교계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다.
원종대사탑비 중 비신은 1915년 무너져 여덞 조각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입체적 조각의 귀부와 이수만이 고달사지 현지에 남아있다. 여주시는 문화재청과 경기도 예산 지원을 받아 2010년부터 원종대사탑비 비신 복제 및 탑비 복원공사를 추친하여 2014년 8월에 준공, 웅장하고 화려한 고려 불교미술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지 거북 귀부
▲ 알려지지 않은 거북 귀부
대한불교 조계종 고달사의 창건은 신라 제35대 경덕왕 23년(764) 오늘날 여주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자락 아늑한 분지에 창건하였으며, 광종 1년(950) 원감국사가 중건하고, 원종 1년(1260) 상당 규모의 절로 확장 및 역대 임금의 비호아래 부흥하였지만 이후 어떤 이유로 고달사지가 폐사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오늘날 옛 고달사터는 사적 제382호로 지정 관리되며, 석조물을 만든 석공의 이름이 고달이라는 설이 있다. 고달이란 석공이 돌을 쪼아 조각할 때 가족을 미처 돌보지 못하였는데 가족이 그만 굶어 죽는 일이 벌어졌고 뒤늣게 그 사실을 안 고달은 불교에 귀의하여 큰스님이 되었고 사찰을 고달사라 불렀다 한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구역에서 벗어나 산길을 따라 오르면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이 자리잡고 있다. 위치상으로는 원종대사탑비와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고려시대 탑으로 3단 기단위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부 연꽃잎 바닥돌과 위로 올라가면서 구름무늬와 거북, 4마리의 용이 구름과 어우러져 있다. 탑신부 4면에는 문비를 만들고 사천왕입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탑은 원종대사(869-958)의 부도탑으로 비문에 의해 고려 경종 2년(977)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종대사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광종 때까지 활동한 원종대사의 부도인데,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 2.5m이다. 이 부도는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과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높여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이 있는데 몸통 사이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 새겨 넣었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각 면에는 자물쇠 문양과 사천왕상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끝에는 꽃무늬가 크게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 위에 작은 보기와 보주가 놓여 있다.’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부도의 주인은 신라 말 원감대사(圓鑑大師)로 추정 할 뿐이며, 우수한 조각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탑은 보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탑보다 시대가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뻬어난 균형미를 자랑하는 고달사지부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 광종 이후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터만 남아 몇몇 유물을 전하고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고달사지 부도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시대의 부도 양식을 보여준다. 이 부도늬 하대석에는 팔각의 각 면에 안상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에는 거북 용 구름이 조각되어 있는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웅장하여 이 부도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대석에는 연촉이 표현되어 있다. 그 위에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마다 자물쇠 문양과 사천왕상, 영창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졌으며 추녀 끝에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복발과 보개가 올려져 있다. 이 고달사지 부도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같은 절터에 남아 있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977년 건립추정)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측면에서 바라 본 고달사지
고달사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달사지는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현재 우두산) 동쪽 경사면 넓은 대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은사본말사지에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9세기 중엽에 조그만 암자에서 출발하여, 원감대사 현옥, 진경대사 심회, 원종대사 찬유가 주석하며 사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12~13세기에는 다원, 다축의 배치가 완성되면서 법당, 불전, 영당, 승당 영역을 중심으로 큰 사역을 형성하였다. 설법과 수행에 정진하는 법당 및 승당 영역 마당에는 쌍사자석등이 위치해 있고, 예불공간이면서 불교 의례가 이루어지는 불전 영역에서는 탑지가 발굴되었다. 14~17세기에는 서쪽 외곽으로 전각이 들어섰으며, 1799년에 씌여진 범우고에는 고달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역 내에는 화려하면서 장중한 기둥을 지닌 많은 석조물들이 조성되어 고려시대 대표적인 선종사원으로서 높은 위상과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요문화재인 신라시대 대 가람의 흔적으로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 외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현재 경북궁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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