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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경주 유채밭에서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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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연꽃단지 - 첨성대 - 계림 - 석빙고 |
▲ 연꽃단지 주변 유채밭 전경
유채꽃이 한창이다. 예전에 비하여 규모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연꽃이 피어나기 전 잠깐의 공백을 샛노란 유채향으로 탐방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경주시 유채단지는 첨성대 일원과 분황사 앞 황룡사지 일원이다. 경주를 방문한다면 이 두 구간을 하나의 동선으로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며 봄을 만끽 할 수 있다. 여행코스는 경주 교동마을 최씨 고택을 시작으로 계림을 거쳐 석빙고를 둘러본 후 내려서서 안압지, 황룡사지, 분황사로 진행하면 된다. ▲ 안압지 방향으로 바라 본 전경 첨성대 일원 유채밭은 경주동부사적지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월성지구 벚꽃이 만개하면 유채꽃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하다 벚꽃이 봄바람에 떨어져 떠나가면 허전한 봄의 공백을 메운다. 연지와 유채밭 그리고 자전거를 타며 봄바람을 가르는 연인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풋풋하다. 첨성대 앞 화단에는 새하얀 수선화가 만개하였으며, 늙은 고목 두 그루는 무더운 여름 그늘을 만들어 주기위해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 첨성대 방향 전경 교동을 시작하여 경주 월성지구를 함께 둘러보려 한다면 교동주차장(경북 경주시 교동 69)을 이용하면 된다. 잠시 유채밭을 들렀다 갈 생각이라면 연꽃단지 앞 4번국도 주변(경북 경주시 인왕동 475-3)에 주차를 하면 된다. 여유를 가지고 안압지까지 여행을 한다면 대릉원(경북 경주시 황남동 198-4)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첨성대를 만나다. ▲ 첨성대 출입구. 사다리를 창문턱에 걸어 놓고 올라갔다. 첨성대는 높이 9.16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한 변이 1m 인 정사각형 문을 달고 사용된 돌은 17단으로 262개로 12단까지 흙과 돌을 채웠다. 19단~20단, 25단, 26단에는 한문 우물정자형의 장대석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돌출시켜 판석을 설치하고, 네모난 창틀에 사다리를 이용하여 오르내린 흔적이 있다. 창은 남쪽으로 북두칠성을 향하고 "첨성"이란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첨성대로 알려진 이유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첨성대와 선덕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선덕여황 시절 돌을 다듬어 대를 쌓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그 속이 트여 사람이 왕래하며 천문을 관측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아 첨성대를 두고 왕릉을 지키는 망루,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재단, 상징적 예술품, 탑. 등으로 논란에 휩싸여있다. 첨성대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창문이 하나며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점, 위쪽이 열려 있고 낮은 지대에 있다는 점 등이다. 계림으로 향하다. 첨성대 앞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동부사적지대라 한다. 사적 제161호로 신라의 여러 사적이 나눈 구역으로 동서는 안압지에서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까지가 동부사적지대이다. ▲ 계림 내 숲길 전경
계림에 도착하니 연초록 세상이 펼쳐진다. 사적 제19호 계림은 닭이 울었다하여 계림으로 불리는데 본래 신라의 신성림이였지만 알지가 태어났다하여 그 후로 계림으로 부르며, 지금은 100년이 넘는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고목과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가 있다.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자리한 숲으로 김씨 시조로 알려진 김알지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적 제19호 경주계림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계림과 관련하여 탈해왕 4년(60) 호공이 서쪽마을을 지나는데 시림이 온통 광명으로 가득 차 숲에 드리워지고 구름 속에서 황금으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밝은 빛을 내며, 나무에는 흰 닭 한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니 왕은 시림으로 달려가 궤를 열어보았다. 궤 속에는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알지라고 부르며, 시림, 구림으로 불리던 숲을 계림으로 불렀다. 그 후 궁으로 데려와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훗날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라 13대 왕으로 오른 미추왕이 알지에서 나온 김씨의 후손으로 최초 김씨가 왕이 되었다. 신라시대 냉장고 '석빙고'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로 오늘날의 냉장고 역할을 하였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승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이라는 글을 볼 때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 만에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적고 있는데 현재 석빙고는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서 옮겨 온 것이다. ▲ 경주 석빙고 입구 전경.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신라시대 냉장고 석빙고로 옛 성터에 자리한 석빙고는 총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로 조선시대에 만든 전천후 냉장고로 궁중의 음식물을 보관한 곳으로 추정된다. 석빙고는 현재위치에서 100m되는 지점에서 옮겨온 것으로 1738년 만든 후 174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는 경사면을 이용하여 진입하도록 한 후 바닥 중앙에 배수구를 만들고 외부로 배출하며 5개의 호예를 틀어 올려 천장을 만들고 3곳에 환기구를 설치해 놓고 있다. 월성을 재건하다. ▲ 월성지구 . 현재 유적발굴 조사를 하고 있다. 옛 성벽 월성으로 들어선다. 비록 옛 궁궐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석빙고와 함께 옛 성벽을 따라 여행할 수 있는데 성벽을 따라 자라는 소나무의 모습이 아름다운 길을 틔어 주는 곳이다. 사적 제16호 월성은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본래 이곳에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옮긴 후 부터 역대 왕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한다. ▲ 월성 그리고 중앙에 옮겨온 석빙고 월성을 따라 계림으로 향하는 길은 성벽을 쌓은 돌과 굵게 자란 소나무의 조화가 아름다운 숲길을 열고 있어 여름철 햇살을 피해 많은 탐방객이 이용하는 길이다. 성벽이라 하여 전체 돌을 쌓아 올린 형식이 아니라 능선을 활용하여 상부에 석성을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 옛 신라 경주 상상 그래픽 경주 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연계여행지 안내 http://blog.daum.net/okgolf/5465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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